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176화 (176/221)

176화.  < 폭로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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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은 빌런이 얼마나 영악하게 세상을 장악해나갔는지를,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휘둘렀는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함부로 놈들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었다.

지금 죽은 이 남자, 윌리엄 케인처럼 전 세계 권력층에 빌런들의 입김이 미치고 있었다.

즉, 함부로 들쑤셨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고 이현욱 자신이 막다른 길에 몰릴 수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빌런을 직접 건드리기보다는 꾸준히 힘과 세력을 키워나가는 일에 열중했다.

물론, 빌런과의 충돌은 시시때때로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크게 승리하여 격차를 좁혀왔다.

그렇게 온갖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 결과…….

'……이제는 빌런과 정면승부가 가능하다.’

그의 명성이 최고점에 이르고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바로 지금이, 폭로의 적기였다.

“……저는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비밀 단체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의 첫 마디에 주변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의뭉스러움이 번져나갔다.

“어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응? 싸워 오다니, 대체 누구랑?”

그럴 것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갑자기 비밀 단체라니, 뜬금없는 전개가 아니던가?

이 말도 안 되는 음모를 전 세계에 설득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말들이 필요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주저리주저리 모든 걸 쏟아낼 수는 없었고, 그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이 남자, 제가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을,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들은 알아채셨을 겁니다.”

이현욱이 한쪽에 너부러져 있는 윌리엄 케인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는 후두부가 터져 있었는데, 이현욱은 그곳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죽인 것처럼 연출 되어서 해명하는데 적잖은 힘이 들 거다.’

그런데 그때, 브라이언 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잠재 주문’으로 죽었네요. 제 눈에는 저자의 사인이 보입니다.”

그는 A등급의 분석가 플레이어이기에 그러한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이는 예상 밖의 지원으로, 이현욱이 해야 했을 설명을 덜어준 셈이었다.

"예, 맞습니다. 그건 암흑 계열의 금지된 주문이죠.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려 EPU 지도부였던 자가 어떤 세력의 끄나풀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는 마치 MC라도 된 양 이현욱의 폭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반박이나 트집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호응에 가까웠는데 서포트하는 느낌이었다.

‘브라이언 틸, 티타노마키아 이후 유럽재건위원회에 있다가 그림자 남작에게 암살된다.’

이 남자도 빌런들에게 제거되었던 고위 인사 명단이 있었던 것을, 이현욱은 기억했다.

그리고 그는 ‘대회전’ 이후로 오메가팀의 리더라는 직책치고는 이현욱을 크게 견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현욱이 압도적인 전력임을 강조하며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남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기회주의적인 한편 현실적인 인물인 듯하다.’

즉, 지금은 이현욱을 믿고 있으며 또, 이현욱에게 붙을 생각처럼 보였다.

'좋아, 잘 됐다.’

이현욱은 브라이언 틸과 눈을 마주치며 끄덕인 뒤, 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이는 EPU뿐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 곳곳에 그 조직의 스파이가 잠입해 있습니다. 즉, 그 조직은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며 세상을 천천히 잠식해나갔던 겁니다.”

그 발언은 상당히 파격적인지라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자행한 악행을, 사실 여러분 모두가 계속 목격해왔습니다. …… 오키타 카이토, 악마 숭배자, 그림자 남작, 기백준, 핏불 형제, 강화도의 네크로맨서 등 여전히 세상은 그들이 왜 갑자기 테러 행위를 벌였는지 밝히지 못하고 그저 미스터리라고 여기고 있죠."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악당들이 이름이 줄지어서 등장하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이현욱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전부, 제가 말하는 그 비밀 단체 소속입니다.”

그 대목을 듣는 모든 이들이 무언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간 벌어졌던 원인 불명의 테러 행위들이 처음으로 하나의 얼개로 엮이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이현욱의 첫 마디에 의아함을 표현했던 이들 조차 묘한 충격에 사로잡힌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저에게 내리꽂힌 헬파이어가 그 모든 사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방금 일어난 ‘헬파이어 사태’의 원인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그 비밀 결사 단체의 존재를 아는 당신을, 그들이 암살하려고 한 거군요.”

"예, 그리고 얼마 전, 한국의 드래곤 미궁 공략 직후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당신의 일행이 미궁 밖으로 나왔을 때 대규모 빙결 마법이 작렬했죠. 하, 끔찍한 이야기군요. 그런데 그들은 대체 누구고, 왜 그런 일을 벌이는 겁니까?”

이번에도 MC처럼 질문을 던진 브라이언 틸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그런 자세한 것까지 증언할 필요는 없다.’

이현욱이 빌런에 관해서 아는 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폭로 내용 중 단 하나라도 근거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여론은 너무나 쉽게 돌아선다.

그건 오히려 놈들에게 정치적인 틈을 내주는 셈이 될 테고, 빌런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정치, 언론, 경제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이현욱을 거짓 선동가로 몰아갈 것이었다.

‘즉, 아직은 세상의 관심을 유지하고 믿음을 끌어올리면서 서서히 빌런을 갉아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로를 통해 추구해야 할 이득은 무엇일까?

'그건, 지금 당면한 빅 이벤트의 성공적인 해결이다. 그걸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하다.’

아직 <티타노마키아>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게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 빅 이벤트에 빌런 역시 사활을 걸고 많은 자원을 투입할 테니 말이다.

‘아무리 내가 동분서주한다고 해도, 이대로는 완벽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건 티탄들, 다크 엘프 군단, 블랙 오크 군단, 빌런 세력의 연합체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유럽 곳곳에서 굴기할 터, 이쪽도 상당한 병력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다크 엘프 왕국에 침투할 때, 시선과 시간을 끌어주어야 할 전선이 필요하다.’

이현욱은 생각을 마친 뒤, 브라이언 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티타노마키아>와 다크 엘프 군단의 준동 뒤에 바로 그 단체가 있습니다.”

그 말에 지금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브라이언 틸의 눈썹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 정체불명의 '악의 조직’이 벌이는 음모가 일개 테러 조직 수준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협하는 대재앙을 일으킨 주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세상이 모르고 있던 게 말이 될까?

“……에이, 저건 좀 말도 안 된다.”

"참나, 그래도 어떻게 몬스터와 결탁해?”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니 어쩌면 대다수였다.

그러나 이현욱이 이 역시 예상하고, 그다음 카드를 준비해두었다.

"제가, 그 증거를 확보해뒀습니다.”

이현욱의 대답과 동시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쿵一 쿵一 쿵一 쿵一

이는 이제는 워낙 익숙해진 이 느낌…… 거인의 발걸음이었다. 그쪽으로 서치라이트들이 돌아갔고, 다중 마법 방어막 너머의 어둠 속에서 빛을 반사하는 금속 몸뚱이가 보였다.

"틸 씨, 캠프를 둘러싼 마법 방어막 좀 잠깐 열어주시겠습니까?”

이현욱의 말에 브라이언 틸이 멍한 표정으로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경계 팀장, 지금 마법 방어막 해제해주세요.”

그렇게 마법 방어막이 벗겨지자, 오리할콘 거인 탈로스가 몇 걸음 만에 가까이 다가왔다.

「마스터, 도망간 뒤 숲에 숨어 있던 나쁜 놈을 체포해 왔습니다!」

그 녀석이 무릎을 굽히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는데, 그 순간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헉! 저, 저 뾰족한 귀…… 그 몬스터 맞지?”

"저 생김새…… 분명 다크 엘프다!”

그래, 분명 다크 엘프라고 알려진 몬스터가 탈로스의 손에 잡혀 있었다.

“큭! 놔, 놔라一 날 풀어줘!”

그놈은 마치 사람 손에 붙잡힌 메뚜기처럼 탈로스의 손아귀 안에서 발버둥 쳤다.

"이 다크 엘프가 헬파이어 마법 스크롤을 시동하고 도주한 장본인입니다.”

이현욱은 남몰래 놈의 옷 안에 ‘플라이 아이’를 심어두어서 위치추적을 했으며,

그 과정을 또 다른 ‘플라이 아이’로 녹화하여 완벽한 증거까지 확보해둔 상태였다.

이현욱이 손짓하자, 탈로스의 얼굴에 웬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그 내용은, 한 남자가 스틸레인의 숙소 근처에서 마법 스크롤을 사용한 뒤, 급히 오메가팀의 캠프를 빠져나가서 근처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주머니가 폭발하며 부상一탈로스에게 잡히는 장면까지였다. 그런데 탈로스에게 잡힌 뒤, 다크 엘프의 모습이 되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저게!”

"허, 저거 진짜야?”

이처럼 처음에는 놀라던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젠장, 그러면 우리가 다크 엘프한테 농락당하고 있던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안에 배신자가 숨어 있다는 거잖아!”

이내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기만당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현욱은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갔고, 이내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이제, 마지막 파트로 들어간다.’

그가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손짓의 무게를 알기에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그의 손이 천천히 오므려지더니, 검지가 되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 순간에도, 아무 죄가 없는 민간인들이 티탄들에게 잡아 먹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침식지역 ‘그린 헬’에서 다크 엘프 군단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말에, 주변에 플레이어들이 근심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이 순간, 우리의 세계를 침공한 몬스터들이 뭉쳐서 우리를 멸종시키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진짜로 게임이라면, 일명 ‘배드엔딩’이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적지 않은 플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까지 이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흔히 최악의 위기라고 불리는 ‘웨이브’조차 국지적인 위협에 그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 사태는 방관했다가는 유럽 전역, 아니 세계 전역이 정복될 판이었다.

“이 순간, 심지어 인간의 탈을 쓴 악이 집단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이현욱의 말이 이어질수록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점차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플레이어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귀족 신분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만큼 명예와 책임보다는 개인의 잇속과 생존을 챙기는 플레이어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으로서 ‘인류’라는 근본적인 소속감을 품고 있었다.

즉, 어떤 자극과 동기가 있다면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을 것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봤다. 그리고 나도 그런 부류 중 한 명이었고…….'

전생, 자기 잇속만 챙길 것 같은 플레이어들이 멸망 위기 앞에서 빌런에 맞섰다.

그들은 처참하게 패배했고, 다시 일어나서 맞섰으나 더 크게 패배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학살이 거듭되는 동안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성장했던 게 바로 이현욱 자신이었다.

‘꽤 비장한 역사지만, 이번 생에는 그러한 시행착오가 거듭되지 않는다.’

이현욱은 품속에서 웬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그건 수정 구슬처럼 보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고독의 방(특수)

- 효과 : 알 수 없음

그건, 얼마 전에 제2 왕자가 갇혀 있었던 ‘포켓 스페이스’였다.

이현욱은 그걸 허공으로 띄우면서, 마나를 부여했다.

후우우우…….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더니, 무언가 쏟아져 나오며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웬 기계음이 나지막이 울러 펴졌다.

그러나 밤하늘의 짙은 어둠 속에 파묻혀 그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이내 서치라이트 몇 개가 고개를 들어 올려 밤하늘을 밝히자一

“저건…… 강철 함대다!”

그제야. 수십 대의 비공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현욱이 ‘월드 브릿지’를 통해서 탈로스를 소환할 때, 저 강철 함대도 함께 왔다.

그러나 저 거대한 물체들과 계속 함께 다닐 수는 없기에 포켓 스페이스를 활용했다.

즉, 지금 이 순간, 이현욱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전력이 드레스덴의 하늘에 등장했다.

"一여러분, 저에게는 군대가 있습니다.”

이현욱이 다시 입을 열자, 강철 함대로 향했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내려왔다.

"그리고 여러분은…… 훨씬 더 강한 군대입니다.”

이현욱의 양손을 펼치며 주변에 모여 있던 모든 플레이어를 가리켰다.

"이 순간 적들이 단결하고 있다면, 우리도 단결해야만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옳소!’ 하는 외침이 쏟아졌고, 이현욱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모여서, 전진해서, 싸워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백열등이 켜진 듯, 웬 백색 빛이 밤을 반쯤 밀어냈다.

그 압도적인 광채에 모두의 시선이 몰리면서, 이현욱의 연설은 중도에 끊겼다.

“어?”

강철 함대 위에…… 와이트 홀, 세계수의 시그니처 스킬인 광역 포탈이 열렸다.

고一오一오一오一오一

그곳에서 한 줄기 빛이 쏘아져 이현욱의 등 뒤에 내리꽂혔고, 그 빛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던 위그드라실의 두 은자 ‘성녀’ 에밀리아 뮐러와 ‘세계수의 관리자’ 도널드 해리스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이현욱의 등 뒤, 좌우에 나란히 섰다.

"이제는 정말로 숨어 있을 필요가 없어졌네요. 오히려 당당하게 싸워야겠어요.”

"큼, 자네가 무슨 해괴망측한 일을 벌이더라도, 내 지원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이현욱은 그들과 눈을 마주친 뒤, 다시금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만약, 제게 이 전쟁을,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을 이끌 힘을 주신다면……."

스틸레인, 그가 전 세계에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이 게임의 끝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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