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이탈리아, 마피아, 하이제킹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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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전조……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미처 돌아가고 있으며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스멀스멀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세간에 떠도는 잡소문 따위가 아니라, 플레이어 전문가라는 이들이 유력 매체에 나와서 주장하는 공신력 있는 이야기였다.
- ……이 게임의 최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배드 엔딩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끝날지도 모르죠. 요 몇 년 사이에 벌어진 빅 이벤트가 대체 몇 개였습니까? 이거,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흐름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 TV 방송 화면, 한 명의 MC를 사이에 두고 대여섯 명의 유명한 플레이어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 저도 닥터 도너의 말에 공감합니다. 4차 웨이브 이후로 지금까지 대재앙이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 더 빈번해질 겁니다. 제 생각에는 모든 국가와 길드가 초당적인 협력을 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이 게임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느니 하는,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는 제쳐두고 일단은 살아남아야죠.
- 예, 그러기 위해서는 위그드라실이나 라퓨타 매우 강력한 오브젝트를 한두 명이 독과점할 게 아니라 국제 플레이어 사회에 공유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게임처럼 변한 이래 다양한 재앙들이 도래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하루가 멀다고 연달아 터졌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 나도 아지 다하카가 너무 일찍 등장했을 때는 다소 당혹스러웠지…….'
이현욱은 지금, 다크 엘프의 ‘폴리모프’ 마법을 통해 라틴계 남성으로 얼굴로 위장한 채, 위그드라실 공항에 앉아 있었다.
정면, 출국장에 설치된 대형 TV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망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그러게 말입니다. 아이고, 이제는 진짜 종말이 오는 건가 싶네요.”
현재 방영 중인 미국의 뉴스 방송은 근래 벌어진 빅 이벤트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세계적인 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 대다수에 이현욱이 출현했다.
그럴 것이, 열에 일곱 정도는 이현욱이 해결한 사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빅 이벤트가 연달아 터지는 건 어느 정도 나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언젠가 닥칠 재앙이었는데, 이전의 재앙들을 너무 잘 막았기에 앞당겨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올 미래의 재앙들 역시 내가 막아내면 된다.’
그건 회귀한 순간부터 품었던 목표였으며, 이제는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온 결승점이었다.
그때, 공항 방송이 흘러나왔다.
- 이탈리아 로마행 10시 30분 AC1443편 항공기를 이용하시는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로마 인근 지역인 움부리아 주 남부에 초대형 몬스터가 출현하여 주민 대피 경보 2단계 발령된 상황이오니, 여행 중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방송에, 근처의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그거래요. 그 갑옷 입은 거인들이요.”
"아, 티탄 척후병인가, 그것들이요?”
"네, 맞아요. 그거 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나오는 걸까요? 어제도 프랑스에서 그것들 상대하다가 A등급 플레이어가 셋이나 죽었다네요.”
이처럼 현재로서 가장 큰 이슈는 단연 <티타노마키아>였다.
대한민국의 랭킹 1위, 중력 마법사 이성윤을 필두로 한 ‘가디언’의 멤버들이 티타노마키아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 남몰래 노력했겠지만,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 각지, 특히나 유럽 지역에서 거인 형태의 몬스터들이 출현하여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헤집는 장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이렇게 흉흉한 와중에 또 다른 비보가 전 세계에 전해졌다.
- 베를린 침식 지역 ‘그린 헬’에서 대규모 몬스터 무리 포착…… EU게이트조사국 “블랙 오크 왕국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지닌 ‘국가체제형’ 몬스터 집단으로 추정 중 (1보)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다크 엘프 왕국이 노골적으로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전역을 비상사태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말하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심지어 ‘그린 헬’에도 일명 ‘티탄 게이트’가 발생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출현한 티탄 척후병들이 다크 엘프들과 접촉하는 게 포착되었다는 첩보를, 어젯밤, 이교준 팀장이 전해왔다.
그 정보를 토대로 티탄과 다크 엘프, 그 두 세력이 결탁을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티탄, 그놈들은 숭배 받는 걸 좋아해서 지성이 있는 몬스터 혹은 일부 플레이어 세력이 떠 받들어서 이용하곤 했다.’
어쨌든, 그 둘을 중매한 건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빌런 세력일 터…….
‘그 자식들이 무슨 속셈인지 대강 알겠다.’
지금까지 놈들의 계략을 이현욱이 죄다 격파한바, 이번에는 절대로 막을 수 없는 막강한 군세를 차곡차곡 모으려는 것이었다.
‘그린 헬, 그 끔찍한 땅이라면 안전하게 군세를 키울 수 있을 테니…….'
무려 티탄 군단과 다크 엘프 군단의 동맹을 바탕으로, 악마 숭배자나 레드 플레이어들이 합세한 ‘반(反) 인류 전선’을 형성한다면…… 단 한 명의 플레이어의 활약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그야말로 대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블랙 오크 국왕 스토녹스가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일주일 전, 중국 정부 측에서 상하이 블랙 오크 왕국을 공습했었다.
앞서서, 놈들이 대한민국을 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보고 약소해졌으니, 중국 정부 측에서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상하이 수복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스토녹스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게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아마도, 놈도 저 전선에 합류하려고 이동했을 거다. 그런 막강한 전력을, 빌런 측에서 내려버려둘 리가 없으니…….'
이처럼 불길한 소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유럽이 초토화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 —블루스카이 항공에서 탑승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블루스카이, 이현욱이 타야 하는 비행기의 항공사였다.
- ……10시 30분 출발하는 AC1443편 이탈리아 로마행 항공기를 이용하시는 승객 여러분께서는 4번 탑승구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로비 의자, 뒤로 2칸쯤 떨어진 곳에 흑인 남성 둘이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이현욱을 쳐다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쟤들…… 정말 딴짓 안 하고 잘 따라주겠죠? 그래도 몬스터라고 생각하니까, 좀 거슬리긴 하네요.”
이현욱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경 쓴 라틴계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김세희였는데, 역시나 다크 엘프의 폴리모프 마법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옆자리, 역시나 라틴계 소년의 모습을 한 박준모가 하품하며 제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제가 지난 며칠 동안 차근차근 설득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들로서도 이런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목적의식이 분명한 애들이니까요.”
이현욱은 지난 사흘간 다크 엘프의 2왕자 클라이페우스 그리세오와 긴 대화를 나눈 결과 합일된 목적의식을 도출할 수 있었다.
'지금 다크 엘프 왕국을 차지하고 있는. 대장군 세력을 처단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다크 엘프 왕국은 오히려 이현욱을 위해서 싸워줄 막강한 군대가 되어 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놈들은 장대한 계획을 완전히 망치는 거다.’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가 바로, 다크 엘프 왕국을 탈환하는 계획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그곳에, 다크 엘프 왕국으로 은밀하게 침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다.’
베를린 침식 지역인 ‘그린 헬’은 그 무시무시한 별명답게 온갖 식인 식물들로 뒤덮인 열대우림이었는데, 그곳을 뚫고 들어가는 건, 아마존을 걸어서 횡단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다크 엘프 왕국의 정체가 세간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
‘그리고…… 숲의 정령술사의 권능 아래 있는 식인 식물들이 경보기 역할까지 해서, 은밀한 침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2왕자의 말에 따르면, 이탈리아 로마에 다크 엘프 왕국으로 직통하는 포탈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명 ‘투입구’라고 불리는 곳으로, 그런 장소를 세계 곳곳에 마련하여 인류 사회 전방위로의 침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즉, 다수 스파이를 심고 있었다는 뜻이었는데, 이는 이현욱도 몰랐던 일이었다.
'하긴, 이 정도의 폴리모프 마법이라면, 들키지 않는 게 당연할 테니.......'
전생에도 다크 엘프가 폴리모프 마법이 능하다는 걸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현욱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위조 여권을 출국 심사관에게 내밀었다.
그의 현재 신분은 34세의 이탈리아 국적의 남성, 마르코 제르마노였다.
"음…… 마르코 제르마노 씨, 고향으로 가시는군요.”
"네, 맞습니다.”
출국 심사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위조 여권을 이리저리 훑었다.
"그럼, 편안한 여행길 되시길 바랍니다.”
텅一
이처럼 어렵지 않게 출국 도장을 받아낼 수 있을 만큼, 완벽한 변장이었다.
이어서 보안 검색대 앞에 섰는데, 그곳에는 무장한 공항 경비대가 잔뜩 서 있었다.
- 플레이어 (LV:43)
- 플레이어 (LV:49)
아무래도 몸 자체가 무기인 플레이어를 검문해야 하는바, 공항 소속 직원들의 레벨도 상당한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자, 승객 여러분의 아이템은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저희가 안전하게 보관해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맡기실 아이템에 ‘구속 사슬’이 잘 채워졌는지 확인하도록 할 테니, 모든 아이템을 검색대 위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현욱은 철검 하나를 검색대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의 주 무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은 웬 보라색 사슬로 칭칭 동여매진 상태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3등급 능력 구속 사슬(특수)
- 효과 : 마나를 부여할 시 1개의 아이템을 ‘봉인’합니다. (해제를 위해서는 ‘전용 열쇠’가 필요합니다.)
그건 설명대로 아이템의 효과를 봉인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이걸 강제로 끊어 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안전한 비행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한다고 해서 몸 자체가 무기인 플레이어를 무력화하는 건 아니었으니, 플레이어 전용 항공기는 여러모로 승객 한 명의 난동만으로도 추락할지도 모르는 가장 위험한 운송수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순간, 앞쪽에서 웬 소란이 들려왔다.
"아니, 씨발— 이게 말이 되냐고요!”
웬 여자가 공항 직원에게 꽥一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주변에 선 승객들도 어딘가 날이 선 목소리로 항의 중이었다.
“……하, 지금 뭐라고요? 아니, 탑승 직전에 이렇게 통보하는 게 어디 있어요!”
꽤 직책이 있어 보이는 항공사 직원은 거듭해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 이런 건 미리미리 말해줘야지, 이 비행기 취소하고 다른 비행기를 예약하든가 할 거 아니에요? 우리도 다 바쁜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대우해요?”
그쪽으로 귀를 기울여서 얼핏 들어보니까, 항공기에 예상 밖의 손님을 태우게 되었다는 것 같았는데…… 그 손님이 ‘레드 플레이어’라는 게 문제였다.
"진짜 미치겠네…… 도대체 어떤 항공사가 승객들이 타는 여객기로 죄수를 후송한다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짓이에요? 이거 진짜로 국제 토픽감이에요! 저 내리자마자 언론사에 제보할 거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저런 격렬한 거부 반응이 당연했다.
아무리 제압된 상태일지라도, 몸 자체가 살인 병기인 레드 플레이어와 함께 수만 피트의 하늘에 체류하는 건…… 그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을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승객 모두가 다른 항공기를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전부 플레이어인바, 항의는 하더라도 두려움에 대한 면역이 상당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에요?”
이현욱을 이어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김세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우리가 타는 비행기에 레드 플레이어를 태우게 된 모양이네요.”
“……앵, 그래도 되는 거예요?”
김세희 역시 절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당연히 그러면 안 되겠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죠. 아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잠시 후, 이현욱 일행에게도 항공사 직원이 다가와서 사정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저희 항공기가 죄수 호송을 맡게 됐습니다. 그래서, 푯값의 50%를 환급해드릴 예정이고 원하신다면 다른 항공편을 예약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괜찮습니다.”
"그리고…… 안전상의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려 8명의 고레벨 플레이어 호송관이 함께 탑승할 예정입니다.”
***
잠시 후, 일행이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았을 때, 뒤쪽 이코노미 클래스 쪽이 시끄러워졌다.
"하……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나가 죽어라, 이 범죄자 새끼들아!”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바라보니, 완전무장한 플레이어들의 호송을 받는 레드 플레이어가 3명 등장했는데, 전부 머리를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현욱이 인사이트 렌즈로 살피니, 앞선 두 남자는 각각 43레벨과 24레벨로 그다지 높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뭐야, 저 여자는…….'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작은 체구의 여자가 문제였다.
절그럭一 절그럭一
그 여자는 유독 많은 구속구를 착용한 채, 맨 끝자리에 앉더니만 곧장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플레이어 (LV:81)
무려 81레벨…….
그 양쪽에 앉은 죄수 호송관 4명은 고작해야 41~59레벨이었다.
물론, 온갖 조처를 했으니 죄수가 탈출할 일은 사실상 없겠지만…….
‘저 여자, 누군지 알 것 같다.’
언뜻 보인 그 여자의 얼굴…… 이현욱의 눈에 꽤 익었다.
‘일명 레이비즈(rabies), 우리말로 하면 광견…….'
그 별명답게 전사 계열 중에서도 광전사 특성인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정부 소속의 특수 요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 기관 유력 인사들의 비밀 회동자리에서 그들을 싹 다 학살한 뒤 자취를 감추는 충격적인 일을 벌였는데……. 향후 수사 결과에 따르면 그녀가 이탈리아의 플레이어 마피아 조직 ‘노우보 오르디네(Nuovo Ordine)’가 심어둔 스파이로 밝혀진다.
지금 상황을 보건대, 아무래도 최근에 차드 공화국에서 붙잡혀서 이탈리아로 호송되는 중인 듯했다.
‘그런데 내 기억대로라면 저 여자는 저 여자는 다시 자유를 찾고 수많은 테러를 벌이게 된다.’
그것도 심지어…… 비행기를 하이제킹해서 탈출한다.
'하— 설마 그게 이 시기였나? 젠장, 이런 재수 없는 우연이 있나…….'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이현욱일지라도 그런 사사로운 사건까지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비행기가 갑자기 죄수를 호송하게 됐는지도 알 법하군…….'
그녀를 호송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정부가 보내기로 한 전용기가 마피아 조직의 공작에 의해서 출발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식으로 계속 지연되자, 결국 민간 항공기를 이용해서 이탈리아로 호송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이탈리아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마피아 세력이 가장 강성할 때다.’
여타의 나라들이 그렇듯, 정부의 공권력이 점차 약화하는 가운데, 길드라는 허울을 입은 마피아 조직이 세를 키웠다.
‘그나저나 이러면 영 귀찮아지는데…….'
이현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탈리아까지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위그드라실의 힘을 빌려서 초장거리 포탈인 ‘와이트 홀’을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하늘에 떡하니 열어버리면 누군가의 눈에 띌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구태여 이렇게 위장 신분으로, 하늘길을 타고 가려는 것이었다.
'이러면, 신분이 들어날 가능성이 크잖아…….'
이내, 기내 방송과 함께 이륙이 시작되었고, 안절벨트 등이 떴다.
이현욱은 눈을 감고, 이코노미 클래스 쪽으로 감각을 뻗었다.
그리고 호송관 중 한 명의 마나 메신저를 해킹하여, 그곳의 소리를 엿들었다.
- 어이, 미친년, 자나?
이건 뒷좌석에 앉아 있는 8명의 호송관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 큭큭一 탈출할 생각에 그 작은 가슴이 벌렁거려서 잠이 올 리가 없을 텐데?
- 마빈, 입 닥치지 않으면 이 구속구를 푸는 순간, 너부터 죽인다.
이 날카로운 음성은 레이비즈였다.
- 그 구속구가 풀릴 것 같나? ......으흐흐一 그렇게 너무 노려보지 마, 그렇게 보면…… 정말로 안 풀어주고 싶어지잖아?
그 대목에서 이현욱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정말로 안 풀어주고 싶다는 건…… 풀어줄 예정이라는 뜻이잖아.’
그게 무슨 맥락에서 나오는 대화인지는 뻔했다.
저 호송관들조차 마피아의 검은돈을 먹고 매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피아의 공작을 피하고자 급하게 민간 항공기를 얻어 탄 게 아니라, 탈출 과정에서 인질까지 확보하려고 일부러 여기에 탄 거다.’
- 어이, 그런데 그거 아나?
- ……귀찮게 하지 좀 말지, 이 씹새끼야.
- 아니, 좀 들어 봐. 저기 화물칸에 우리가 널 위한 선물을 멋진 준비해뒀단 말이야. 응? 우리 귀여운 쌍년을 위한 고깔모자인데, 무슨 말인지 알지?
- 설마…….
- 그래, 네가 정부의 돼지들을 깡그리 죽였을 때 썼던…… 큼, 퀴네에, 그거 이탈리아 탈출 도중에 바보 같이 떨어뜨리고 갔잖아?
퀴네에, 그리스 신화 속 하데스의 투구로 알려진 전설 등급의 투구.......
그걸 쓰면 투명 상태가 되는데, 지속효과가 무려 15분에 달한다.
- ……너, 그걸 어떻게 가져온 거냐?
- 그걸 내가 가져왔겠냐? 너희 보스가 그쪽 조직장한테 돈 좀 거나하게 먹였겠지, 뭐.
이 대목에서 이현욱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비행기를 예매하길 잘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