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위그드라실, 그린 웨이브, 죽음의 드래곤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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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은 모글레이에서 번져 나오는 이질적인 힘에 놀라며, 저도 모르게 힐트(Hilt)를 놓아버렸다.
텅——!
무려 2t의 거검이 중력 방향으로 떨어지며 바닥一위그드라실의 뿌리에 내리박혔다.
'……아니, 2t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무거워졌다는 것을 그는 대번에 감지했다.
‘아직 질량 해방 4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모글레이의 패시브 스킬 중 하나인 ‘질량 해방’은 현재 3단계一2t이었는데, 이현욱은 전생에도 4단계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글레이의 무게가 확연하게 증가한 상태였다.
그는 금속 통제력을 발휘하여 모글레이를 허공으로 띄우며 그 무게를 정밀하게 계산했다.
웅——
정확히 4t, 그러니까 2배가 증가한 수치였다.
“그 큰 검, 뭔가 업그레이드된 거예요?"
옆에 서 있던 에밀리아 뮐러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렇게 물었고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금 니드호그의 라이프 베슬을 깨면서 어떤 조건을 만족한 것 같네요.”
이현욱은 모글레이의 힐트를 움켜쥐고 허공으로 들어 올리면서, 그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모글레이(전설)
- 효과
1) 질량 해방-강화(1~5):봉인된 ‘질량’를 해방하며, 사용자에게 ‘강골(强骨)’을 부여합니다. (현재 3단계)
2) 쇼크웨이브-강화 :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킵니다. 이 파괴력은 1번 질량 해방과 비례합니다.
3) 마나 폭검-강화 : 칼날에 ‘태풍의 힘’이 부여되어서 다음 일격에 ‘돌풍’을 일으킵니다.
4) 스페이스 커터-강화 : 아주 예리한 바람의 칼날이 쏘아지며 넓은 면적을 절단합니다.
5) 드래곤 슬레이어(3):드래곤을 살해하는 힘으로써, 드래곤의 권능을 ‘매우 크게’ 무시합니다. 또한 ‘용력(龍刀) 3단계’가 부여되어 모든 능력이 향상되며(+40%) 최상급 ‘정신 방벽’이 형성됩니다.
6) 배리어 브레이커 : 모든 초대형 몬스터의 ‘배리어’를 상당 부분(50%) 무시합니다.
이처럼 기존의 스킬에 전부 ‘강화’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드래곤 슬레이어’가 3단계로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리어 브레이커’라는 패시브 스킬이 하나 추가되었다.
‘잠깐만, 초대형 몬스터의 배리어를 절반이나 무시한다니…… 이거 생각보다 훨씬 엄청난 옵션이 될 거다.’
지금 이 수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또 다른 빅 이벤트인 <티타노마키아>의 전조가 발생하고 있었다.
즉, 머지않아서 온갖 거인들이 인류의 도시를 차례차례 짓밟아 나가기 시작할 텐데…….
‘그놈들을 상대하게 될 때, 이 배리어 브레이커라는 스킬은 다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거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티탄 슬레이어가 생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뭐야, 어울리지 않게 그 묘하게 웃는 표정…… 그 정도로 좋은 옵션이 붙었나 봐요?”
에밀리아 뮐러의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이밀었고, 이현욱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려 드래곤을 두 번이나 잡으셨으니까 짭짤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나저나 이제는 그 영국의 그 누구였지, 그 느끼한 남자는 DS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영 쪽팔리겠어요. 여기 진짜배기 DS가 탄생했으니까요.”
그녀의 말처럼 에드워드 우즈는 이제 이현욱은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것이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이현욱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역시 이현욱, 내가 목숨을 맡긴 사람답네요. 그리고 앞으로도 내 목숨, 잘 부탁해요.”
"그런 요구하시기 전에 스스로 관리 잘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까처럼 팔이 레고처럼 날아가고 그러면 보험 가입도 안 될 겁니다.”
"아 그거요? 헤헤一 내가 제대로 맞아본 적이 없어서…… 내 방어막이 그렇게 쉽게 뚫릴 줄은 몰랐죠.”
"그렇게 웃어 넘길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나가죠.”
직후, 두 사람은 라이프 베슬이 있던 좁은 공간 ‘정체불명의 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본디 끔찍한 어둠이었던 공동이 어느새 밝은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천장, 위그드라실의 뿌리 틈 사이로 웬 불빛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널드 해리스가 세계수 관리자의 ‘마스터 권한’을 발휘하여 위그드라실 자체의 빛을 끌어오고 있는 듯했다.
그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었고, 저 멀리, 공동 끝자락에 엎어져 있는 니드호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몸뚱이가 어찌나 큰지, 자세하게 살피지 않으면 웬 검은색의 언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치이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놈의 머리 근처에 희뿌연 연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아마도 놈의 입안에 고여 있는 산성 브레스가 흘러나와서 바닥을 녹이며 유독 가스를 자아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놈의 붉은 눈동자가 반쯤 뒤로 넘어간 게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도널드 해리스와 정령왕이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니드호그한테 한 방 먹긴 했는지 이곳저곳에 피를 묻히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 보였다.
"스틸레인, 새삼스럽지만 자네가 또 엄청난 업적을 세웠군. 계속 노파심을 감추지 못했던 나로서는 부끄럽고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놈이라고 다행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수차례, 이현욱의 활약에 놀라움을 느껴온 도널드 해리스지만, 여전히 매 순간 그 감정이 갱신되어 가는 걸 느끼는 중일 터였다.
이러한 반응은 김강석이나 우성문도 보였던 만큼, 이현욱으로서는 퍽 익숙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괴물 자식을 이렇게 빨리 잡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자네에게 투자하기를 잘 했다고 거듭 느끼는 중이야.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믿을만한 사람을 오랜만에 얻어서 뿌듯하고, 앞으로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주고 싶군.”
“하하— 다 해리스 씨가 도와주셔서 해낼 수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니드호그의 사체는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래 뭐, 이번에 나는 장소 제공만 한 셈이니까, 당연히 저 자식은 응당 자네 몫이 아니겠는가?”
이에 에밀리아 뮐러가 이현욱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제 가슴을 툭 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옛날부터 이 사람 장난 아니라고 내가 말했잖아요.”
"그랬던 것 같긴 한데, 내가 인간 불신이 좀 있고 특히나 도박 중독자랑 술주정뱅이 말은 잘 안 믿는 편이라서 말이지……."
그 말에 에밀리아 뮐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하一 진짜…… 가끔은 친구 없는 티를 너무 내셔서 걱정인 거 알아요? 아! 그나저나 어떻게 내 발밑에 저런 게 있다는 걸 말 안 해 줄 수 있는 거죠? 집주인님, 이거 계약 위반이에요.”
세상의 질투와 음모를 피해서 위그드라실이라는 울타리 안에 은거하던 두 은자가 투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의 큰 고민거리를, 이현욱이 전부 깔끔하게 해결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자, 니드호그를 깨운 자들을 아직 잡지 못했으니까,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현욱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도시의 어딘가 다크 엘프 첩자가 아직 남아 있을 테고 또 다른 음모를 꾸미겠지? 이 썩을 것들……."
무려 두 차례나 놈들의 계획을 격퇴해냈으나, 놈들은 여전히 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도할 수 없는 게,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또 한 번 터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도시 전반을 수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두 분이 총력을 기울여주셔야 할 겁니다.”
이현욱이 도널드 해리스와 에밀리아 뮐러를 바라보며 말했고, 이에 피터 클라크가 앞으로 나섰다.
"아, 그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저 블랙 드래곤을 잡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으니…… 그런 일이라도 제가 제대로 처리해보겠습니다.”
<와이트 트리 가드> 자체의 병력은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 예하에 경비 인력이 적지 않았으니 피터 클라크의 지휘하에 위그드라실 전체를 수색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피터, 안 다쳤어요? 아까 좀 거칠게 날아가는 것 같던데, 힐 필요하면 말해요. 나도 좀 세게 맞았는데, 힐 하니까 살만하네요.”
에밀리아 뮐러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물었는데, 정작 피터 클라크의 얼굴에 그림자가 번졌다.
"하…… 에밀리아, 미안합니다. 제가 본분을 다하지 못했네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아까 팔이, 많이 다치신 것 같던데……."
그는 성녀의 수호기사로서, 그녀의 팔이 날아가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지난 몇 년간 암살 위기에 시달렸던 성녀였고, 그녀의 경호에 전력을 기울였던 피터 클라크였다.
그런데 그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점에서 자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에이, 나야 뭐, 머리만 안 날아가면 다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절단 부위가 좀 쑤셔서 요 며칠 꿈꿈 알아야겠지만…… 이거야 좀 취하면 되죠, 뭐.”
그 말에 피터 클라크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다음에는 정말로, 손가락 하나도 안 다치실 겁니다.”
"아, 알았으니까 궁상떨지 마시고, 자자, 일단 지상으로 나가서 이 일을 꾸민 놈들을 잡고 나서 한잔해야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술잔을 흔드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팔이 날아갔을 때는 솔직히 이현욱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웬만한 전사 계열 플레이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상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부상을 겪어 본 적이 없었을 텐데…… 그녀는 생각보다 터프한 편인 듯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네크로맨서와의 전투에서 필수 전력이니까,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주변에 있는 빌런 놈들을 싹 다 찾아서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서울 물청소가 끝나니까 이제는 위그드라실 물청소인가…… 귀찮아 죽겠군.’
그런데 프리드웬을 타고 지상으로 나갔을 때, 구태여 빌런 놈들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게 됐다.
“하一 뭐야, 이거?”
에밀리아 뮐러가 프리드웬의 창밖을 내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 외에 다른 이들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풍경에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프리드웬은 니드호그가 파 놓은 구덩이 밖으로 막 나온 참이었는데…… 그 구멍 주변에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가 완전무장한 채, 구멍 안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저것들, 아무리 봐도 수상하죠?”
에밀리아 뮐러의 물음에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번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사방에 언데드 몬스터가 득실거리는데 무려 드래곤이 들어간 구멍을 견학하려고 하지는 않겠죠.”
"그렇다면 저 새끼들이 이번 일을 만든 개 쓰레기들이라는 게 확실한 거죠? 다 잡아서 족쳐야 하는데, 마침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 중에서는 이현욱이 ‘하이브’의 지하에서 목격했던 빌런, 마리오 리마도 있었다.
'저 자식은 훗날 블랙 도어의 핵심 인력 중 한 명이 된다.’
아마도 현 정령술사협회의 부협회장의 오른팔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이 어색한 만남 속에서, 그놈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아마도 이 구멍을 통해서 나올 존재가 프리드웬이 아니라 니드호그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뒷정리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프리드웬이 멀쩡하게 나왔다는 건 반대로 니드호그는 멀쩡하게 나오지 못하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었으니, 당황을 넘어서 좌절에 가까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현욱은 프리드웬의 램프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니드호그라는 친구를 찾으러 왔나?”
그의 물음에 놈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리더인 마리오 리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에밀리아 뮐러가 이현욱으로 옆으로 다가오며 으흐흐一 하고 어딘가 음습한 미소를 짓더니, 놈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너네 드래곤 좀 쩔더라! 지금 저 안에 눈깔 뒤집고 자지러져 있는데, 구경하러 갈래?”
***
그 뒤로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것이, 그놈들로서는 플로스 루베르와 니드호그를 연달아 깨부순 이현욱에게 감히 맞서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 대신 도주를 택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빌런들과 다크 엘프들을 싹 다 생포하여 또 다른 뿌리 감옥 가둔 뒤, 일행들은 위그드라실 안으로 돌아왔다.
이곳, 위그드라실의 ‘중앙 응접실’은 그 거창한 이름과 달리 평범한 유럽식 가정집의 거실 같은 풍경이었다.
생각해보면, 도널드 해리스가 평소에 손님을 받을 리가 없기에 응접실이 제대로 꾸며져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무려 위그드라실 안인 만큼 그저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처와 피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타닥一 타닥一
그 한쪽 벽에 있는 난롯가에 이현욱, 박준모, 김세희, 정령왕까지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소파에 제인, 잭, 한나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한나가 연신 울상을 지어대다가 결국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이 워낙 고되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의 충격적인 정체까지 알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데 저 녀석들의 대화 내용 중, 왠지 모르게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
이현욱은 저 녀석들과 만난 뒤, 몇 번이고 들려왔던 ‘니콜’이라는 이름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흠, 예언자라니…….'
언뜻 듣기로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그 니콜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자애가 예언했다고, 한나가 거듭해서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잭과 제인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듯했고…….
‘하지만 예언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내 기억대로라면 예언 특성을 가진 플레이어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 녀석들이 이야기하는 ‘예언’은 착각일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빌런 쪽에도.......'
탁—
이현욱은 자세를 고쳐잡고 그를 마주 보았다.
"큼, 아마도 몇 달 전이었던 같소, 딸아이가 인간 세상에 나가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저 녀석을 심하게 나무란 게…… 그래서 저 녀석이 가출했다가 변을 당한 거요.”
"아, 그랬군요.”
"어쨌든, 그때의 나는 인간들은 믿을만한 구석이 없는 족속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까지 그 생각이 바뀌지 않았소. 그런데……."
뭐, 이런 상투적인 대사의 뒷말은 뻔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소. 바로 이현욱, 당신 덕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순간, 손바닥 위에 웬 작은 상자가 하나 생성되었다.
"이건 제 감사의 표현이니 받아주시오.”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정령왕 퀘스트를 일부 달성한 셈이 되면서, 소정의 보상이 지급된 듯했다.
어쨌든, 그 상자 안에는 에메랄드빛의 보석 2개가 들어있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기묘한 각인의 돌 (영웅)
- 효과 : 아이템에 무작위 속성의 힘을 부여합니다.
"이런 귀한 걸……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일종의 ‘오브’였다.
다만, 특정한 속성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무작위’라는 점이 특이했다.
즉, 원하지 않는 옵션이 나올 수도 있는 한편, 쉽게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옵션이 붙을 수 있었다.
‘딱 페일노트 2개에 적용하면 되겠군?’
어떤 옵션이 적용될지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뭐가 나오든 없는 것보다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현욱의 말에 정령왕이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떤 아이템을 하나 얻었는데, 정령왕께서 감정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한 번 볼 수 있겠소?”
이현욱은 AD-2 한 대를 소환, 그 안에서 웬 검은색 수정 구슬을 하나 꺼냈다.
"자, 이 포켓 스페이스입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고독의 방(특수)
- 효과 : 알 수 없음
이건 플로스 루베르를 잡고 얻었던 정체불명의 물건이었다.
무려 다크 엘프의 보스 몬스터가 지니고 있던 만큼, 범상치 않은 것이 분명할 텐데, 혹시나 그 안에 위험한 게 들어있을까 봐 성불리 열지 않은 중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고위 정령은 공간을 다루는 면에서는 최고라도 들었습니다. 혹시, 이 포켓 스페이스를 열지 않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 어려울 건 아니지만, 한 번 자세히 살펴봐야 알 것 같소만……."
정령왕이 그것을 받아들더니, 양손으로 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 주변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 안에는……."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을 이어갔다.
"……흠, 물건이 아니라 어떤 생명체가 갇혀 있는 것 같은데, 사나운 몬스터는 아니고 상당히 지쳐있는 걸 볼 때, 아무래도 감옥인 것 같소.”
감옥이라니, 그 말에 이현욱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다크 엘프 왕국에 관한 한 가지 설정이 떠올랐다.
‘그 녀석들의 정치판도 꽤 복잡했었다.’
원래 다크 엘프 왕국이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다크 엘프 국왕’이라는 보스 몬스터가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빌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빌런 측의 지원으로 ‘다크 엘프 대장군’이라는 보스 몬스터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게 되고, 바로 그때 다크 엘프 왕국의 유럽 정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크 엘프들이 인류에게 적대적인 행보를 보이는 걸 보건대, 아마도 빌런들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서 다크 엘프 왕국의 정치에 깊게 관여를 한 모양이었다.
즉, 이 포켓 플레이스 안에는 인류에게 비적대적인 왕가 쪽 인사들이 사로잡혀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
이현욱은 거대한 방에 서 있었다.
앞서서 도시 청소기를 열고, 정령 군체를 설득해서 계약을 맺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현욱은 그곳에 AD-2를 잔뜩 소환해 놓은 뒤, 검은색 수정 구슬一고독의 방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에 마나를 부여하자…….
후우우우——
그 안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더니, 이내 팔다리가 묶인 다크 엘프들이 튀어나왔다.
총 12명, 전부 얼굴이 핼쑥한 상태였다.
"큭......."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헉一”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이현욱의 눈에는 그들의 정체가 일부분이나마 드러나고 있었다.
- 다크 엘프 호위 기사 (LV:78)
- 다크 엘프 호위 기사 (LV:74)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레벨이 높은 한 다크 엘프가 눈에 띄었다.
- 다크 엘프 왕국 2왕자 클라이페우스 그리세오(LV:109)
이현욱은 앞서서 생포한 다크 엘프 중 몇 명을 고문하여, 어느 정도의 정보를 취합해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2왕자가 왕국 밖 지역으로 파견을 나와서 인간 문명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다크 엘프 왕국 안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부관이었던 플로스 루베르에 의해서 제압당한 뒤 포켓 스페이스 안에 감금당했다고 했지?’
저벅一 저벅一
이현욱은 2왕자에게 다가갔다.
"......."
그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현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단순한 적개심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분석하려는 듯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현욱의 무장 상태를 쭉 확인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주변부를 훑었다. 아마도 퇴로를 찾으려고 하는 듯했다.
"나는 너희를 해칠 생각이 없고, 가둬둘 생각도 없으니까…… 긴장 풀어도 돼.”
이현욱은 2왕자의 결박을 풀어 준 뒤 물을 내밀었는데, 그는 물을 받아 든 뒤 제 부하들에게 먼저 마시게 했다.
“……다크 엘프 왕국의 2왕저, 맞나?”
그 말에 다크 엘프들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표정이 싹 굳었다.
아무래도 그 정보가 이 녀석들에게는 꽤 중대한 기밀 사항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모르는 척 해봤자 소용없을 텐데……."
이에 2왕자가 아닌, 수호기사가 대신 나섰다.
"젠장, 플로스 루베르 그 여자가 우리를 너희 인간들한테 팔아넘긴 건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를 사들인 거냐, 인간!”
이렇게 과격한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난데없이 배신을 당해서 꽤 오랫동안 포켓 스페이스에 갇혀 있다가 나오니까 눈앞에 있는 게 낯선 타 종족이라니, 예민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니, 플로스 루베르는 이곳, 위그드라실을 정복할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돼서 내 손에 죽었다.”
그 말에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2왕자,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들어보겠나? 아, 나는 이현욱…… 인간 사회에서는 스틸레인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이현욱이 정체를 밝히자 다크 엘프들의 얼굴에 이채가 도는 걸 볼 때, 이현욱의 유명세를 알고 있는 듯했다.
“……왕자님, 맞는 것 같습니다.”
"음, 스틸레인…… 그러고 보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묘한 경이와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스틸레인, 블랙 오크 왕국의 파괴자……."
저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었다.
‘저 녀석들로서는 내가 블랙 오크 왕국을 뿌리 뽑아버린 게 신경이 쓰일 거다.’
전혀 다른 종족이지만, 양국 모두 웨이브 이후에 탄생한 몬스터 왕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음…… 블랙 오크 왕국의 파괴자라, 그게 너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인가? 좋아, 재밌군.”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식으로 불릴까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이현욱이 자세를 낮추며, 2왕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너희 왕국을 되찾아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