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위그드라실, 그린 웨이브, 죽음의 드래곤 - 3 >
===============================================
죽음의 드래곤, 니드호그가 위그드라실의 그늘에서 날개를 펼치기 약 30분 전…….
이현욱 일행은 차드호 부근에 도착하여 웬 거대한 결계를 마주하고 있었다.
차드호의 서쪽 부둣가를 통째로 덮어버린 반투명한 물의 돔, 이현욱은 그곳에 손을 넣었다.
촤아아아——
물이 돔의 표면을 따라서 아래에서부터 위로 거칠게 흐르면서 손을 강하게 밀어냈다.
“……이거, 해리스 아저씨가 친 걸까요? 그리고 저 안에 정령왕도 있겠죠?”
박준모의 말처럼, 도널드 해리스가 결계를 쳐서 정령왕의 존재를 숨긴 듯했다.
"아씨, 뭔가 불안한데 설마, 둘 중에 한쪽이 죽어서 그 회오리가 잦아든 건 아니려나......."
김세희의 걱정에 이현욱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정령왕과 세계수의 관리자, 한쪽이 그렇게 쉽게 질 수가 없어요.”
누군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면, 지금 같은 냉전 관계가 지속하지 않았을 거다.
어쨌든, 저 안에서 그 두 거물이 대면하고 있는 듯했는데, 분위기는 좋을 리는 없었다.
잠시 후, 물의 결계의 표면에 작은 문이 열렸고, 일행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촤아아아——
“一윽, 여기다 다 물이에요!”
웬걸, 사방이 물바다였는데, 차드호가 범람하여 재방 밖까지 물이 넘실거렸다.
그 한쪽에서 솟아나 있는 위그드라실의 뿌리에 걸터앉은 도널드 해리스가 보였다.
그는 어딘가를 곁눈질했는데, 차드호 가장자리에 물로 만들어진 탑이 하나 보였다.
그 위 두 개의 인영이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정령왕 부녀인 듯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 프리드웬이 착륙해 있었고, 램프 도어에 잭과 한나가 걸터앉아 있었다.
둘 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지난 한나절 동안 벌어진 일들이 여전히 황당할 것이었다.
"언뜻 듣기로는 자네가 저 여자아이를 구해냈다던데…… 그게 진짜인가?”
"예, 다크 엘프들이 정령왕을 이용할 목적으로 딸을 납치했더군요.”
그 말에, 도널드 해리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잡았다.
"하, 미치겠군, 그것들이 벌써 이 도시에 들어왔다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원……."
자체적인 첩보망을 운영하여 다크 엘프 군단의 침략까지 예견했던 도널드 해리스였다. 하지만 모든 방면에서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을 수는 없었는지 허를 찔린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안방에서 당할 뻔했으니, 고심이 깊어질 거다.’
이현욱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크게 한 번 당했을 터…… 그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이현욱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오묘하게 누그러졌다. 이제는 확연한 신뢰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현욱의 활약은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기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걸 또 어떻게 눈치채고 이렇게 막은 건가?”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놈들을 우연히 목격했죠.”
우연,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도널드 해리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다시 캐물을 시간은 없었는데, 정령왕과 제인이 타고 있는 물의 탑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재수 없는 마나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오는군.”
“……해리스 씨, 아직 정령왕과 이야기하시진 않았죠?”
이현욱이 말한 이야기는, 정령왕에게 위그드라실의 방어를 맡기는 것이었다.
"큼, 일단은 서로 적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지, 뭐 그런 이야기는 아직……."
그로서는 정령왕에게 직접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영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해리스 씨, 그렇다면 제가 대신 정령왕과 이야기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나도 바라던 바야. 저놈이랑 말 섞는 건 아직은 좀 내키지 않는군."
이현욱이 앞으로 나아갔고, 물의 탑이 완전히 사라지며 정령왕이 제 발로 걸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백금색이라고 해야 할까, 찬란한 빛이 흐르는 장발이었다.
언뜻 봐도 인간과 다른 ‘격’이 흘러넘치는 미남자, 정령왕이 이현욱의 앞에 우뚝 섰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는데,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먼저 제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말했고 이어서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내 딸을 구해주어서 고맙소. 그리고 이 은혜는 내가 반드시 갚고 싶소만……."
그래, 이 정도의 은혜라면 응당한 보상을 내어주는 게 게임의 이치였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민 없이 곧장 원하는 바를 꺼내 들 생각이었다.
"아시겠지만 이번 일의 원흉은 엘프라는 종족입니다. 그놈들은, 이곳을 제대로 칠 준비를 하고 있죠. 이 신목 생태계 전체를 집어삼킬 생각일 테고…… 정령계도 포함될 겁니다.”
이현욱의 말을 듣는 정령왕의 눈에 얼핏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땅을 위협하고 자신을 능멸한 놈들이 다시 온다. 즉 지금은 딱히 협상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그리고 그 싸움,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기쁘겠소.”
이처럼 딱히 부탁할 것도 없이, 어쩌면 빌런들 덕분에 정령왕과의 동맹이 절로 이루어졌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겁니다. 그런데 그저 방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적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고 놈들은 한두 번의 공세만으로 포기하지 않고, 점점 악독하게 몰아칠 겁니다.”
이현욱은 고개를 돌려서 도널드 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건…… 우리가 놈들의 본진을 먼저 칠 겁니다.”
"음…… 다크 엘프들의 본진이라면, 북쪽 대륙에 있는 거대한 숲 말이오?”
그 말에 이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예, 그 지역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대홍수’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이현욱의 말에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쏴아아一 하는 파도 소리만이 울렸다.
그 침묵을 깬 건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고 있던 도널드 해리스였다.
"음, 대홍一 뭐? 그게 무슨 말인가?”
S등급의 정령술사인 자신도 모르는 정령에 관한 정보가 나왔으니 의아할 수밖에.......
반면, 그게 무엇인지 아는 정령왕과 제인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홍수, 물의 정령이 쓸 수 있는 최고이자 최악의 기술을 빌려주십시오.”
대홍수(Flood), 말 그대로 엄청난 양의 물을 이용하는 대재앙 급의 기술로, 물의 정령왕이 다수의 물의 정령을 이끌고 힘을 합쳐야지만 일으킬 수 있는 물의 정령술의 궁극이었다.
‘그 한 번에 인류 연합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전쟁은 패배했다.’
전생, 블랙 엘리멘탈리스트들이 차드호의 정령계를 점령한 뒤, 그 기술을 강제로 사용하게 했었다. 그 목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구축된 인류 연합군의 저지선 전반이었다. 지중해에서 비롯된 그 산맥 같은 파도를, 이현욱은 예루살렘 전장에서 탈출하며 목격하였다.
'……인페르노가 플로스 루베르의 그린 웨이브를 불태우며, 승리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끝없이 재생하는 녹색의 파도를 잠재운 인페르노의 불길은, 진짜 파도에 단숨에 삼켜졌다.
그 일격에 인류 연합군의 전력 대다수가 수장되었으며, 인류의 마지막 저지선이 돌파된다.
‘이번에는, 그 엄청난 재앙을, 놈들에게 역으로 선사해주는 거다.’
그런데 이현욱이 ‘대홍수’를 언급한 뒤로 정령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흠…… 그것의 존재를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의문이오만……."
공통의 적을 두게 되었지만, 아직은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가진 비장의 무기를 언급해버리니, 껄끄러운 기분이겠지…….'
이럴 때, 그럴듯한 변명거리로서 가장 적합한 건 역시나 초월급 오브젝트, 라퓨타였다.
어떤 비열한 수로 뒷조사를 한 게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어필한다.
“라퓨타, 노움의 유산을 제가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다양한 정보통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적대자가 아니며 강력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동시에 은유하는 것이다.
“음一 노움이라, 과연 성가시고도 영악한 족속이었는데, 그런 힘까지 있을 줄이야……."
이 이름값 있는 몬스터들의 설정이 어떻게 뒤엉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먹혔다.
"하지만…… 그걸 사용할 만한 여건이…… 지금은 좀 어렵다고 말씀드려야겠소."
그러나 정령왕은 대번에 난색을 표현했다. 이는 거절이 아니라 정말로 어떤 큰 문제가 있는 듯했는데…… 이현욱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혹시, 정령왕께서…… 마나 운용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이현욱의 물음에 정령왕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앞선 ‘대홍수’에 관한 정보가 그저 국가 군사 기밀 유출 정도였다면,
이 ‘마나 운용 문제’란 건 국가 원수의 건강상 심각한 문제와 준했다.
“……설마 그런 정보도 그 라퓨타에서 얻는 것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도 제가 도울 수 있을 겁니다.”
토끼전, 그 우화 속 용왕처럼 정령왕은 어떤 불치병을 않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그 병환을 낫게 하는 영약을 찾는 게 ‘정령왕 퀘스트’의 핵심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설사 신목을 통째로 달여먹어도 해결하기 힘들 것이오.”
그 말에 도널드 해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지, 지금 뭘 달여먹는다는 거야?”
"흠, 이건 그냥 농담이었소만……."
"젠장, 농담이라도 누구 앞에서 지금一”
이현욱이 도널드 해리스의 말을 끊고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자자, 그렇다면 ‘드래곤 하트’라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제인으로, 헉一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아버지의 소매를 붙들었다.
"헉! 아버지, 드래곤 하트라면…… 아버지의 코어에……."
제인이 놀라며 저도 모르게 말하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현욱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령왕이 앓은 병을 낫게 할 묘약, 그 재료 중 하나가 바로 드래곤 하트다.’
신목은 실로 강력한 마나를 품고 있지만, 그것이 생산하는 마나의 적용 대상은 환경이었다. 일대, 드넓은 지역에 ‘축복’을 내려서 마나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대부분의 마나를 소모한다.
그와 반대로 드래곤 하트는, 단 하나의 육신에 강력한 마나를 부여하는 일종의 ‘엔진’이다.
"정말로, 그대가 드래곤 하트를 제공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럴 수밖에요. 제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니까요.”
정령왕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제인은 제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버지, 부디……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 돼요.”
그러고 보니 정령왕의 딸이 인간 세계로 나도는 이유 중 하나도 제 아버지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었다. 이 역시 정확한 건 아니었다면 어느 정도 맞는 듯했다.
그리고 정령왕에게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소. 내게 그 위대한 마나의 원천을 제공해준다면, 내 큰 파도를 일으키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도널드 해리스가 성큼성큼, 다소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젠장一 이야기가 잘 되어가던 중에 미안하네만, 큰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그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는, 이곳을 뒤덮고 있던 결계를 해제해버렸다.
"내가 이 난리 통에 신경을 쓰는 사이에, 또 다른 도둑이 집에 들어올 줄은 몰랐어!”
그가 이렇게 성을 내며 동쪽, 위그드라실의 도심을 노려보았다.
“……예? 뭘 도난당한 겁니까?”
이현욱의 물음에 도널드 해리스는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감지했는데…… 곧, 드래곤이 뿌리 감옥을 뛰쳐나올 걸세……."
그 순간, 도심 한 편에서 폭음이 울리며 높은 빌딩 하나가 양분되며 흩어졌다.
콰—드—드—드一一!
모두가 그 장대한 광경에 앞에 입을 쩍 벌리고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피막의 날개가, 위그드라실의 이파리가 발하는 빛을 가로막고, 그림자를 드리웠다.
“헉一"
"저, 저건........"
검은 비늘로 뒤덮은 익숙함 생김새,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앞서 사냥한 ‘아지 다하카’보다 한층 더 격이 높은 존재……. 이름하여 ‘니드호그’가 위그드라실을 굽어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좌절을 품을 만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세계수의 관리자와 정령왕 조차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마저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격’을 품은 존재였다.
"젠장, 완전히 망했군……."
그런 좌절 속에서 단 한 사람, 이현욱만이 회심의 미소를 품었다.
"정령왕이시여, 이렇게 되면……."
그가 정령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드래곤 하트를, 산지에서 조달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현욱은 그 즉시 다량의 무기를 꺼내 들고는, 사방에 에두른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내 니드호그가 그가 지닌 ‘드래곤 슬레이어’의 힘을 감지 한 듯, 이곳을 노려보았다.
"자, 제가 신호하면, 두 분은 놈의 날개를 묶어주세요. 그것만 확실하게 부탁합니다.”
이현욱은 마나 메신저를 통해서 저 아래에 있는 정령왕과 도널드 해리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김 팀장님은 성녀와 접촉하는 대로 저한테 마나 교신해주시고요."
- 그런데 스틸레인,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단 말이지…….
이 목소리는 도널드 해리스로, 그답지 않게 의기를 상실한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 내가 이 녀석이랑 힘을 합쳐도, 고작해야 삼십여 초 정도 묶는 게 전부일 텐데…… 그렇게 해서 놈을 잡더라도, 패이즈2가 되면서 일대가 ‘고유 권역’이 되면 답이 없지 않겠나?
그 도널드 해리스가 약한 소리라니, 세상 사람들은 쉬이 상상조차 못 할 모습이었다만, 애초에 그가 위그드라실을 벗어나서 강화도까지 직접 왔던 이유가 바로 저놈, 니드호그였다.
- ……내가 저 자식을 같이 공략하자고 했던 건, 저 자식이 뿌리 감옥에 있는 한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저렇게 제멋대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되면 상대할 수 없어. 그래서 놈이 힘을 키워서 뿌리 감옥을 헤집고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했던 건데, 망했군.
이렇게 뿌리 감옥에서 풀려나서 완전히 힘을 회복한 니드호그라면, 압도적인 강자였다.
- 죽음의 조정자 니드호그 (LV:227)
……227레벨, 199레벨의 아지 다하카보다 무려 28레벨이나 높았다.
하지만 이현욱 역시 아지 다하카를 상대할 때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3개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다.’
첫째로, 드래곤 슬레이어 ‘업적’을 달성한 이현욱은 본인의 육신이,
둘째로, 타 차원에서 등장하여, 아지 다하카를 잡고 ‘2단계’가 된 모글레이가,
셋째로, 드래곤 미궁의 히든 스테이지에서 얻은 ‘발뭉’까지 있으니…….
'이 세 가지라면 웬만한 드래곤은 그 기세를 느끼고 꼬리를 말지도 모른다.’
드래곤, 그 절대적인 종족의 드높은 콧대는 그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현욱의 몸에 덕지덕지 발린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효과는 드래곤의 권능을 '무력화’ 할 수 있다.
먼 훗날의 에드워드 우즈가 말하기를, 드래곤 슬레이어를 어느 정도 쌓고 드래곤과 마주하면 ‘협상 이벤트’ 혹은 ‘복종 이벤트’도 발생하여 드래곤을 ‘권속화’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니드호그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협상을 해오기보다는 정면돌파를 할 거다.’
그리고 이현욱은, 놈이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노릴 생각이었다.
「네 놈, 불경하도다——!」
족히 2km는 떨어져 있음에도 니드호그의 목소리는 귓속을 파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어찌하여 미천한 인간 주제에 어찌하여 주제넘은 힘을 품고 있단 말인가?」
그 목소리에 위그드라실 도심에 있는 일반인들이 개미처럼 죽어 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온몸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덕지덕지 붙었기 때문이다.
「이 불경한 인간 소굴을一전부一죽음으로一정화하리라——!」
그 순간, 놈의 입이 쩍 벌어지며 목구멍에서부터 검은 빛줄기가 번뜩였다.
콰—아—아—아—아——!
검은 불기둥 같은 브레스, 그 목표는 위그드라실 도심의 중심부였다.
콰—드—드—드—드——!
단 한 번의 브레스에, 건물 십여 동이 무너지면서 수백 미터의 면적이 녹아버렸다.
'……저런 피해는 안타깝지만 막을 수 없다.’
피격지점에서 범상치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서 도시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죽음의 힘을 품은 블랙 드래곤, 그것의 브레스는 ‘산성’ 속성인 동시에 ‘죽음’ 속성이었다.
이내 그 연기를 피하지 못한 이들의 비명이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비명은 어딘가 음습한 괴성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으니…….
우어어어——
이현욱은 후긴을 날려서 도심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곳곳에서 언데드가 창궐 중이었다.
덜그럭一 덜그럭一
그리고 그중에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오크나 트롤 같은 몬스터도 뒤섞여 있었다.
이 인근에서 발생한 게이트를 공략한 뒤, 도심 안에서 해체되고 있던 사체인 듯했다.
「내가 정화한 땅에서 나의 종들이 일어났으니, 그들이 너희의 안락한 공간을 약탈하리라一」
훙——
단 한 번의 날갯짓에 수백 미터가 좁혀지며, 그 거체가 빠르게 크고 선명해진다.
흡사 철로에 서서 거대한 기관차를 마주하는 것만 같은, 압도적인 위압감…….
하지만 이현욱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놈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지금 내가 중복해서 적용받는 드래곤 슬레이어는 총 3개다.’
2+1+1이 무조건 4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2는 넘을 것이었다.
쩌—억——
지척으로 다가온 놈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그 검은 목구멍이 이현욱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집중만 한다면…… 피할 수 있다.’
이현욱은 눈을 감고, 후긴을 통한 감각 상승을 최대폭을 활용하여 곡예비행을 펼쳤다.
그 거대한 앞발과 이빨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놈의 목덜미를 향해 거검을 휘둘렀다.
웅—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열쇠가 드래곤의 권능이라는 자물쇠를 풀듯, 짙은 배리어가 무시된다.
그리하여…….
콰드드드——!
거검의 끄트머리가 비단처럼 매끈한 비늘을 헤집으며, 그 아름다운 육체에 긴 상흔을 그렸다.
「크아아—! 가, 감히— 짐의 옥체에——」
놈이 몸을 뒤틀며 온갖 마법을 이리저리 난사하기 시작했고, 이현욱의 주변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현현하며 회전, 그곳에서 구분할수 없는 온갖 마법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퍼—버—버—버—벙——!
"큭!"
마치 폭죽 연달아 터지는 밤하늘을 비행하는 작은 새처럼, 이현욱은 정신없이 몸을 뒤틀었다.
‘역시나 이 압도적인 화력은 어떻게든 억제해야만 한다.’
그는 마법 난사를 피해낸 뒤, 아직 완성되지 않는 마법진 하나를 모글레이로 내리쳤다.
그러자 마법진이 흐물거리기 시작하더니, 마법의 전개가 취소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역시, 무력화된다!’
이처럼 드래곤 슬레이어의 힘은 드래곤의 권능 자체를 ‘무력화’함에 있다.
이현욱은 ‘발뭉’을 조종해서, 일대에 피어나는 마법진을 줄줄이 꿰어버렸다.
그러자 니드호그가 시전 성공하는 마법의 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한낱 인간이 드래곤의 고귀한 마법에 손을 대다니, 무엄하도다—!」
이현욱은 허공으로 치솟으며 니드호그보다 먼 하늘로 올라갔고, 모글레이를 집어던졌다.
그 목표는 바로 니드호그의 날개一비행 몬스터를 잡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었다.
「어디서, 감히——!」
니드호그는 모글레이의 추적을 피하고자 수직으로 하강하며 몸을 거꾸로 뒤집었다.
이어서 날개를 접고는 모글레이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요격을 위한 마법을 시전했다.
'……오로지 날개를 방어하기 위한 불안정한 자세다.’
그리고 놈은 오로지 ‘드래곤 슬레이어’ 만을 경계하고 있었다. 즉, 틈이 분명했다.
"一지금입니다!”
그 순간一 하늘에서 두 줄기의 회오리바람이 생성되며, 니드호그를 내리쳤다. S등급의 바람 통제자 코도 코시로가 했던 것처럼, 바람으로 드래곤을 지상으로 추락시키는 것이었다.
콰一아一아一아一아一一!
「큭一 이 정도로 짐의 옥체를 땅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더냐?」
하지만 그 회오리바람의 힘은 코도 코시로만 못했고, 니드호그는 아지 다하카보다 강했다.
"그래서, 하나 더 준비했다.”
그 순간, 위그드라실 도심의 지반이 들썩거리더니, 곳곳에 무너지며 물이 터져 나왔다. 정령왕의 힘, 그가 지하수를 통째로 끄집어 올려서 물기둥을 쏘아 올려서 놈의 날개를 묶었다.
콰一앙——!
그리하여 드래곤 공략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하는, 지상으로 끌어내리기가 성공했다.
- 됐다! 스틸레인, 고작해야 삼십여 초야! 어서 놈의 숨통을 끊어!
그런데…….
「크하하하一 그래, 이 몸을 추락시킨 건 칭찬하겠다! 그래서 나를 죽일 수 있겠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니드호그는 땅에 처박힌 상태인데도, 너무나 태연하기만 했다.
「이리 오거라, 위대한 피로 몸을 적신 한낱 인간이여一 이 옥체를 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끌어들이려는 듯한, 의도를 알 수 없는 도발을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추락한 상태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경계하지 않다니?
'그 이유는, 저 죽음을 관장하는 드래곤은 절대로 죽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 스틸레인, 뭘 하고 있나? 지금이 유일한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지 않나?
귀속으로 도널드 해리스의 애가 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이현욱은 이 절호의 기회를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그의 귓속으로 김세희의 목소리가, 진짜 기회의 신호가 들렸다.
- 칙一 사장님, 성녀님과 같이 가고 있습니다!
이현욱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 돌려서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응?」
그 장면에 니드호그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 외로 영민한 녀석이었구나, 이제라도 도주를 선택하다니一 으하하一!」
"그래, 열심히 도망칠 테니까, 어디 한 번 잡아 봐.”
이현욱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프리드웬의 램프 도어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김세희와 박준모가, 그리고 에밀리아 뮐러와 피터 클라크가 타 있었다.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정화해야 한다고요? 그게 진짜예요?”
에밀리아 뮐러가 가까이 다가오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리치(Lich)란, 죽음을 다루는 마법사를 뜻한다. 그리고 그 족속의 특별한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생명력을 담아 놓은 그릇인 ‘라이프 베슬’을 파괴해야지만 죽는다는 것이었다.
"예, 맞아요.”
“……리치가 어딨어요?”
"저기 있네요.”
이현욱이 가리킨 건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니드호그였다.
그러고 보니 그 존재는 강력한 죽음을 풍기고 있긴 했다.
"아…… 그러면 라이프 베슬은요?”
"지금 찾으러 가는 겁니다. 자, 마루一 슬슬 구멍을 닫을 준비를 해!”
「그래, 대기 중이야!」
"지금 당장 놈이 튀어나온 지면의 구멍으로, 뿌리 감옥 안으로 갑니다!”
프리드웬이 지면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니드호그가 헐레벌떡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