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슬럼가, 정령왕의 딸 - 3 >
==============================
잭 해밀턴은 싸구려 호텔 방의 창가에서 쇼핑센터 ‘하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곳에…… 제인이 잡혀 있다.’
앞서서 ‘손님’이 ‘괴한’들을 고문하여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고, 잭도 옆에서 들었다.
그녀를 납치해간 이들은 <아마란스>라는 이름의 악명 높은 플레이어 범죄 조직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찾는 최고의 해결사 집단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실력 좋은 베테랑들로 구성되어서, 웬만한 공략 길드 뺨치는 전력을 지녔다.
‘그런 놈들이, 저 안에 바글바글하겠지?’
그때, 한 남자가 곁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키가 작은 남자였다.
"저기, 친구가…… 걱정되시죠?”
위로하려고 말을 건 듯했는데, 어딘가 자신감이 결여된 듯 기어드는 목소리였다.
"아, 네……."
하지만 그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잭은 방금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저기, 또 다른 창문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웬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을 때,
이 남자가 다량의 전류를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회오리바람에 주입하는 걸 보았다.
그건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종의 ‘통제 계열’ 능력으로 보였다.
제인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사람들을 보낸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계획대로 흘러갈 거예요.”
왠지 모르게 단단한 확신에 찬 목소리였고, 잭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안에 있는 범죄 조직 플레이어의 숫자는…… 백 명이 넘을 거예요.”
앞서서 저 정체불명의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지켜보았지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짰고, 아무리 잘난 사람들이 들어갔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혼자서 잠입을 하다니…….'
과연, 그가 제인을 구해낼 수 있을까?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가 그녀가 죽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어…… 그래도 다 잘 될 거예요.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 남자는 기어드는 목소리로도 장담을 거두지 않았고, 잭은 고개를 갸웃했다.
“……좀 이해가 안 가네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죠?”
"이게 딱히, 그,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닐 텐데……."
그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더니, 몇 번 웅얼거리다가 답을 내놓았다.
“……한 번도 실패한 걸 본 적이 없어서요, 저 사람이요.”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자부하듯 말하는 건지…….
잭은 창밖,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큼직한 건물—하이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공격 방식들……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야…….'
잭은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끝내 정답을 찾지 못했다. 제인의 아버지가 보낸 저 세 사람 모두 마스크를 벗지 않는 걸 보면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나 테이트가 중얼거렸다.
"잭, 혹시 니콜의 말이…… 정말 예언이 아닐까?”
니콜, 한나는 그 이상한 아이의 이름을 다시 꺼냈다.
"걔가 말했었잖아. 지금 이 상황…… 제인이 위기에 처하고 누군가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잭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에이, 원래 타로 같은 것도 다 그런 식으로 은유하면 왠지 맞춘 것 같고 그런 거야. 니콜 걔, 딱 봐도 어딘가 다크한 게 점성술 같은 오컬트에 빠져 있을 녀석이잖아. 신경 쓰지 마.”
니콜…… 어딘가 기묘한 아이였지만, 제정신이 아닌 쪽에 가까웠다.
‘그 미친 것 같은 녀석이 예언가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역사상 예언자라고 불릴 만한 플레이어는 단 한 명뿐이었고 지금은 죽었다.
물약 공장에서 고작 3일도 못 버티고 쫓겨난 그 녀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잭, 너보다 내가 들은 게 많잖아. 그게 다가 아니야.”
"걔한테 또 무슨 말을 들었던 거야? 그냥 다 헛소—”
그 순간— 1층 창문이 깨지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어?”
배낭을 멘 누군가가, 누군가를 끌어 안은 채 하늘로 치솟았다.
그건…… 이현욱이었고,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은 제인이었다.
‘설마 정말로 구해낸 거야? 그것도 이렇게 빨리…….'
잭은 입을 쩍 벌린 채 고개를 휘저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김세희였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박준모, 묠니르 꺼내고 후방에서 화력 지원 준비해!”
김세희는 그 말은 남긴 뒤, 4층 아래로 뛰어내렸다.
***
위그드라실, 이 위대한 도시 안에 기생충과 같은 다크 엘프의 별동대가 잠입해 있었다.
‘내가 지하에서 목격한 것만 해도 족히 삼사십 마리였다.’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필연적으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정체를 숨길 필요 없이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서 전술적인 이익 취해야 했다.
‘일단은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려서 잡다한 방해물들을 한 번을 쓸어버린다.’
하이브는 애초에 악의 소굴이니 다소 거친 방법으로 청소를 해도 죄의식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저 안에…… 119레벨의 다크 엘프 보스 몬스터가 한 마리 있었다.’
이현욱은 지하 1층으로 치고 들어갔던 그 찰나의 순간에 놈의 ‘정보’를 목격했다.
그놈은 고작 건물 붕괴 때문에 죽지 않을 터, 큰 전투를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마루가 신이 나서 건물의 콘크리트를 긁어내고 있었다.
「좋아, 다 박살 내 버린다! 이제는 참지 않는다! 우아아아—」
외벽, 콘크리트가 마치 모래성처럼 콰드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비록 도시 청소기에서 나온 직후의 ‘폭주’ 상태일 때보다는 그 화력이 한참 덜 하지만,
A등급의 땅의 정령에게 콘크리트를 긁어내는 일 따위는 찰흙 놀이처럼 손쉬웠다.
이현욱은 그렇게 드러난 철골들을 녹이고, 우그러뜨리고, 뽑아내 버렸다.
단 몇십 초 만에 건물이 위태롭게 들썩거렸고, 건물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을 텐데…… 마루가 문 앞에 콘크리트 파편을 쌓아버렸다.
「으흐흐— 좀 너무했나?」
이현욱은 그때, 건물의 하중이 가장 많이 실리고 있는 기둥 몇 개를 감지해냈다.
‘이걸로 끝이다.’
그리고 그 안의 철골에 ‘금속 융해’를 부여하는 순간—
쿠—구—구—궁——!
건물 전체가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으며 희뿌연 먼지가 하늘 높이 뿜어져 올랐다.
일대의 거주민들이 그 광폭한 굉음을 듣고는 도로변으로 우후죽순 올려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하, 하이브가…… 사라졌잖아?”
룻렛 타운의 중추이자, 악의 소굴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헉—"
그 순간, 이현욱의 품속에 안겨 있던 제인이 눈을 뜨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이봐, 정신이 드…… 아직 들지 않았군.”
그녀는 눈을 뜨고 이현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가 너무나 퀭했다.
"이거, 영 불안한데……."
이에 마루가 다급한 목소리로 경보를 울렸다.
「그래, 맞아! 당장 피해야 해! 그 녀석 폭주를 시작한다!」
폭주, 정령이 이성을 잃고 자신의 한계를 넘는 속성 통제력을 발휘하는 걸 뜻한다.
제인은 정령 감옥에 갇혀 있었던 충격 때문인지 이성을 상실해버린 것이었다.
「이 물의 정령 녀석, 이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휘저어버릴 거야!」
그리고 폭주하는 물의 정령이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이현욱 그 자체였다.
"—큭!”
'미친, 설마 몸속의 수분을 끓게 만드는 건가?’
이 정도로 세밀한 물 속성 통제는 설사 물의 정령왕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폭주한 정령은 자신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하고 한계를 넘어 버린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몇 분…… 폭주를 막아야 한다.’
이현욱은 얼마 전에 정령 군체의 폭주를 멈췄었다. 하지만 그건 여러 가지 조건이 부합한 끝에 이룬 일반적이지 않은 성과였다. 그로서는 지금, 정령왕의 딸을 멈출 힘이 없었다.
‘이 상태로는 나랑 정령왕의 딸, 둘 다 죽는다!’
이현욱은 금속을 생산하여 제인의 사지에 금속 고리를 걸어서, 멀리 밀어 내버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에서 채워진 팔찌— 글레이프니르로 그녀의 몸을 묶어버렸다.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포박 대상의 스킬 및 능력 사용을 막을 수 있는 글레이프니르가 먹힌다면 문제 해결이다.
그러나…….
-해당 대상의 ‘실체’가 감지되지 않아서 ‘글레이프니르’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정령의 실체는 저 육신이 아니라 다른 차원—현상계에 있기에 먹히지 않았다.
“컥—!”
어느새 이현욱의 몸속, 혈관 안, 혈액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피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빨래처럼 쥐어짜지는 것 같은 고통이 들었고, 결국 피를 한 움큼 게워내 버렸다.
이어서 인근의 상하수도관이 펑— 펑— 터지며 다량의 물이 하늘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사장님, 무슨 일이에요!”
김세희의 목소리, 그녀가 바람을 타고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젠장, 가까이 오지 마요!”
"네?”
"무, 물러서라고요!”
이현욱은 강골, 용력, 마나 실드 등으로 이 기이한 공세를 버텨 낼 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속성은 다르지만, A등급 정령인 마루가 최대한 방어를 돕는 중이었다.
반면 김세희 같은 경우는 아무리 정령술사라고 해도 단숨에 터져 죽고 말 거다.
그래도 이현욱은 이 순간을 대비해서, 최후의 방법을 하나 마련해두었다.
"김 팀장! 한나 테이트, 그 여자애를 데려와요, 어서!”
이현욱은 그렇게 외치며 제인을 더 먼 하늘로 밀어냈다.
‘지금은 최대한 멀어지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멀어지면 가할 수 있는 능력의 강도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지상을 굽어보며 발버둥 쳤다.
“으으으—나—나를—왜—”
그 선하기만 했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짙은 분노가 담기기 시작했다.
악감정에서 비롯된 적대감이 아닌, 절망에서 피어난 생존본능이었다.
「어떻게든 해 봐! 저 상태로 몇 분 뒷면 소멸하고 말 거야!」
이현욱은 지금, 자신의 목숨만 지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사장님, 데리고 왔어요!”
그때, 한나가 근처로 도착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제인이 양손을 휘젓자, 사방에서 물보라가 일어나는 걸 목격했다.
"어, 제, 제인…… 너, 어떻게……."
그녀도 몰랐을 제인의 진짜 모습…… 정령왕의 딸의 권능이었다.
그때, 이현욱이 달려들어서 한나의 팔을 붙들었다.
"한나, 네가 제인을 깨워줘야 해! 그녀는 지금 폭주 상태야!”
이현욱의 말에 한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겁 많은 여자애가 지금은 필요하다.
"내가 아까 말했던, 너희의 도움, 그게 지금 필요해!”
"네? 제, 제가 어떻게……."
"방금, 제인이 이성을 잃기 전에 네 이름을 애타게 불렀어!”
“……제, 제 이름을요?”
"지금, 쟤한테는 네가 유일한 의지 대상인 거야!”
이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서 그녀만이 제인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한나 테이트, 그녀는 제인과 유일한 친구가 되면서 정령왕과 관련된 ‘히든 퀘스트’의 트리거를 작동시켰을 터— 훗날 결국 잭 해밀턴이 그 퀘스트를 수행하게 되지만, 지금은 그녀였다.
‘그리고 그 트리거를 누른 상태라면, 제인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이런 ‘파트너쉽’ 종류의 이벤트 사례를 몇 차례 겪었기에, 이현욱은 장담할 수 있었다.
"지금 데리고 올 테니까, 한나를 제외하고 전부 물러서요! 한나, 넌 괜찮을 거야!”
이현욱은 수십 미터 상공으로 띄워 놓았던 제인을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고속 낙하하다가 아스팔트에 내리박히기 직전, 우뚝 멈춰섰다.
"흑—싫지만—다—죽여야만 해—다—”
그녀는 그 어여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콰—과—과—과——!
그리고 사방에서 물기둥이 굽이치며 일행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으나, 김세희가 바람의 장벽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쳐냈다. 그러나 역시나 ‘격’의 차이가 있는지 꽤 버거워 보였다.
"윽! 하늬, 조, 조금만 버텨 봐—!”
하늬도 들리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밀려날 듯했다.
바람과 물이 서로를 짓이기면서 일대가 미세한 물 입자로 가득 차며 호흡이 어려워져다.
"젠장— 한나, 시간이 없어!”
이현욱의 외침에 한나가 주춤거리며 다가가다가, 결심했는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제 겉옷을 벗어서 제인의 나신을 감싸주며 끌어안았다.
"제, 제인…… 나야! 정신 차려, 널 구하러 왔어!”
그 순간, 물기둥이 크게 출렁거렸다. 곧장 반응이 온 것이었다.
"제인, 나야, 한나!”
"네가 납치될 때, 아무것도 못 해서 미안해……."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제 친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 순간, 물기둥들이 그 높이를 낮추더니…….
“어—”
퍽— 하고 바닥으로 쏟아지며 일대가 물바다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 담긴 목소리가 제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나— 내 친구, 네가 날 구해준 거야?”
이현욱을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또 한 번 각혈을 했다.
"하—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뻔했네……."
그는 체력 회복 물약을 꺼내어 들이켰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콰—아—아—아——!
저 멀리 서쪽 하늘, 차드호 부근에서 강력한 빛줄기가 치솟고 있었다.
언뜻 봐도 범상치 않은, 그리고 불길한 징조였기에 모두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 썅, 저건 또 뭐예요?”
물을 뒤집어쓰고 완전히 젖은 김세희가 머리카락을 넘기며 신경질을 냈다.
"아마도, 정령왕이…… 직접 행차하셨네요.”
제 딸의 비명을 듣고는, 물의 정령왕이 정령계에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차드호의 모든 물을 한 대 모아서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 크기가 마탑보다 2배는 높아서 위그드라실 도심에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 정도의 물기둥이라면…… 도시를 갈아버리지 않을까요?”
"뭐, 도널드 해리스, 그 사람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아니나 다를까, 그 건너편에서 푸른빛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세계수의 관리자, 도널드 해리스가 대응에 나선 것이었다.
"와…… 어쨌든 도시가 반쯤은 날아가겠는데요?”
저 두 회오리가 충돌하는 순간, 그 위력에 위그드라실의 뿌리가 들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빌런 측이 계획한 대로, 정령왕과 세계수의 관리자의 전투가 시작된다.
‘두 노인네가 진짜로 감정 싸움을 시작하면, 웬만해서는 막지 못할 거다.’
그러면 위그드라실에 막심한 피해가 발생할 터, 다크 엘프 군단의 침략의 양분이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아니, 저 여자애가 막아야죠.”
이현욱은 제인과 한나, 두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막 깨어난 사람한테 미안한데…… 네 아버지 좀 막아줄래?”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잭과 한나가 숨을 들이쉬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라뇨? 제인, 네 아버지가 오신 거야?”
제인은 서쪽 하늘, 높이 치솟은 물기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빨리 안 가주면 네 아버지가 세계수의 관리자와 한 판 붙을 거다.”
그제야 제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데 그걸 아는 거죠?”
"음? 제인,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 아니야?”
잭이 묻자 제인은 고민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그리고 아버지가 보낸 사람도 아니야.”
애초에 정령왕이 보낼 사람이면, 정령이어야 마땅할 텐데, 이현욱은 인간이었다.
이에 잭이 제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꽥—소리쳤다.
"뭐야! 우리를 속인 거예요? 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자신들을 구해준 건 사실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다면 경계하는 게 마땅했다.
이 무법지대 슬럼에서는 이유 없는 선의는 거의 없는 만큼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나는—”
이현욱이 입을 열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바로 앞에서 무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 씨, 진짜 가지가지 하네......."
콰—가—가—가—가——!
하이브, 그 건물 잔해를 헤집으며, 녹색의 무언가가 하늘로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건 녹색의 넝쿨 다발들이었는…… 하나하나가 이무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꺼웠다.
아마도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 다크 엘프 숲의 정령술사들이 씨앗을 잔뜩 뿌린 듯했다.
‘저건 일명 그린 웨이브라고 불리는, 식물 병기이다.’
그 이름을 증명하려는 듯, 녹색 넝쿨들이 파도처럼 일어나서 주변 건물들을 무너뜨렸다.
“꺄아아아—"
"어서 도, 도망쳐!”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슬럼의 주민들이, 서둘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현욱은 일행 모두에게 금속 허리띠를 두른 뒤, 하늘로 띄워버렸다.
꽈—드—드—드—드——!
그 순간, 그린 웨이브가 일행이 있던 자리를 짓이기고는, 주변의 건물을 잡아먹었다.
단 십여 초 만에 수백 미터 높이로 치솟고, 일대 1~2km 반경을 잠식해버린 것이었다.
"젠장, 이대로면 룻렛 타운 사람들이 다 죽겠어요! 씨발……."
잭이 절규했다.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거친 동네지만, 그의 모든 게 담긴 곳이기도 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죠? 저 사람들, 좀 구해줘야 해요! 차, 착한 사람도 많다고요!”
그 말에, 이현욱은 그의 몸을 당겨서 바로 앞으로 데려왔다.
"잭, 너는 여기에서 신경 끄고, 제인을 차드호 근처로 데리고 간다.”
"네? 그게 무슨......."
"여기는 내가 구할 테니까, 너는 제인이나 챙기란 소리야.”
"어……."
"설마 내가 누군지 말 안 해줬다고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
이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잭의 등 뒤로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저걸 타고 가.”
우우우우——
그곳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날아오고 있었다.
잭이 고개를 돌려서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헉— 저건……."
그건…… 오늘날 가장 유명한 비공정인, 강철함대의 기함 ‘프리드웬’이었다.
"그렇다면 다, 당신은……."
잭은 그제야 자신이 느끼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 남자의 허리춤에서 치솟았던 은빛의 화살들…….
그리고 금속 통제라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권능…….
"스틸레인……."
이현욱이 마스크를 벗었고, 잭의 눈동자가 한층 더 커졌다.
“……지, 진짜잖아?”
숱한 재앙을 막아내며 인류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된 남자가, 이곳에 와 있었다.
이어서 이현욱의 손목에서 AD-2 한 대가 흘러나왔고,
그곳에서 4개의 거검, 모글레이가 소환되어 허공에 늘어섰다.
"자, 어서 가. 네가 갔다 오면 제초 작업이 마무리되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