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159화 (159/221)

159화.  < 슬럼가, 정령왕의 딸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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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난장판이 된 잡화점 안, 2개의 섬광이 불규칙한 궤적으로 고속 이동하고 있다.

쉬—쉬—쉬—쉬——!

그것의 움직임을 따라 매장 곳곳에서 혈흔이 터져 나오며 천장과 바닥을 적셨다.

“컥!”

"억!”

창고 안, 창문 밖을 힐끔거리던 잭은 저도 모르게 완전히 일어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이거……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잠시 후, 2개의 화살이 손님의 손아귀로 되돌 온 순간, 서 있는 괴한은 한 명도 없었다.

저벅— 저벅—

"……네가 대장이냐?”

그 손님이 왼손을 들어 올리자 염동력인지, 괴한 중 한 명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컥— 너, 넌 누구냐? 바, 방금 그 화살은 설마……."

"이제부터 네가 입을 열 수 있는 건, 내 질문에 대답할 때뿐이야.”

쩌저저저——

"읍—!”

보이지 않았으나, 무언가가 괴한의 입을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그 대목에서 잭은 문고리를 잡았고, 한나가 그의 팔뚝을 잡았다.

"잭, 위험해……."

"아니, 괜찮을 거야.”

저런 무시무시한 짓을 벌이는 사람이 어떻게 괜찮다는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만.......

끼익—

지금은 믿을 수 있는 게 저 정체불명의 손님뿐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는 우선 카운터 쪽에 쓰려져 있는 한스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다, 다행이다……."

아직 호흡이 있었다. 큰 일격을 당해서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은 듯했다.

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서 ‘손님’을 바라보았다.

"저기…… 누, 누구시죠?”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썼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진짜 손님은 아니시잖아요?”

잭은 다른 건 몰라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 남자는 의도적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마치 이 괴한들을 노리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납치되었지, 잭?”

이 남자,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그걸 어떻게……."

"그 친구 이름이, 제인이었나?”

“……예, 마, 맞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잭에게 다가왔다.

"잭......."

등 뒤에서 한나가 옷을 잡아끌었지만, 잭은 오히려 앞으로 나갔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예? 저기, 그런데요…… 당신은 누구죠?”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그런데 남자—이현욱은 잠시 침묵했다.

***

그는 고민했다.

‘여기에서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가장 훌륭한 기습은 적들이 스틸레인이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를 때 발생한다.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를 전부 차단하는 게 옳았다.

물론 직전에 다분히 스틸레인스러운 행동을 반복했으니 눈치챌 수도 있지만,

‘아직은 모르는 것 같군.’

외딴 동네의 농구장에서 마이클 조던이 신분을 숨기고 농구를 하고 있다면, 누가 마이클 조던이 직접 왔으리라고 여기겠는가? 그와 비슷한 스타일을 흉내 내는 고수쯤으로 생각할 터—오늘날, 이현욱의 명성은 세상이 펴졌지만, 모두가 그를 특징을 꿰고 있지는 않았다.

"글쎄……."

그때, 뒤에 서 있던 여자애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혹시…… 제인의 아버지가 보내신 분인가요?”

이현욱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제인은 자기 이야기는 잘 안 했지만, 그래도 같이 살면서 듣긴 들었어요. 엄격한 아버지와의 다툼 때문에 지, 집을 나왔다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꽤 높은 분이라고 했죠.”

"그리고 가끔, 아버지가 자기를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아마도 정령의 딸인 제인이 자신의 처지를 어렴풋이 설명한 듯했다.

‘역시 뻔한 이야기다. 인간 세상으로 나가지 말라는 왕과 기어코 나가버린 공주…….'

여기에서 정령왕의 딸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으면 후에 ‘히든 퀘스트’가 발동된다.

‘그리고 여기 이 녀석이 바로 그 퀘스트의 수행자가 될 예정이다.’

이현욱은 눈앞에 있는 금발의 마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잭 해밀턴, 정령 수호자…….

그렇게 강한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훗날 정령왕과 관련된 시나리오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러니까…… 제인의 아버지가 보내신 분, 맞나요?”

한나의 재차 질문, 이현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만, 자세한건 말해줄 수 없어.”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저들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듯했다.

"여, 역시나 제인은 어디 유명한 길드 마스터의 딸이었던 거겠지?”

"왠지…… 귀티가 나는 게 이 바닥 출신은 아닌 것 같았더라니……."

그렇게 대화를 하더니만, 잭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저희가 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맞아요, 사실은 누가 제인을 잡아갔는지도 모르거든요.”

두 사람이 걱정스레 말했고, 이현욱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필요할 거야. 그 대신……."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던 장발의 괴한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입에는 웬 재갈이 물려 있었는데, 그 재질이 금속이었는지 이빨이 죄다 깨져 있었다.

“……지금은, 네 도움은 조금 많이 필요할 것 같다.”

누가 어디로 잡아갔는지는, 지금부터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현욱의 심문 성공률은 지금까지 100%였다.

***

어둠 속, 널찍한 공간에 원통형의 수조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녹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나신으로 잠들어 있었다.

"......이 여자, 당신들 종족을 닮았군요?”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그 매혹적인 나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니, 애초에 육신이 없는 것들이다. 그저, 우리를 따라서 육신을 조립한 것일 뿐—”

그렇게 말하는 이는 어두운 피부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는데,

긴 은발 사이로 치솟은 뾰족한 귀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하하—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명색에 정령술사니까요.”

그 말에, 다크 엘프가 콧방귀를 뀌었다.

"글쎄, 너희의 정령 조련 기술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영 도움이 안 됐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저 수조도 우리가 제공한 거 아닙니까?”

"너도 잘 알지 않나? 너희의 기술만으로는 저 귀한 노예를 잡지 못했을 터—”

으흐흐— 남자는 음침하게 웃으며, 원통형 수조 안의 소녀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쨌든, 모든 게 완벽합니다. 이 예쁜이를 미끼로 정령왕을 자극하면, 성깔 더러운 그 종족 특성상 해일을 일으켜서 위그드라실을 쓸어버리려고 하겠죠. 으흐흐— 기대됩니다.”

시종일관 날이 선 상태였던 다크엘프도 그 대목에서는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 혼란의 순간에, 우리의 군대가 대규모 포탈을 열고 상륙할 것이다.”

"예, 그때가 바로 절정의 순간이죠! 으흐흐— 기대합니다.”

"그리고…… 위그드라실은, 우리가 차지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위그드라실이라는 도시의 최후가 이미 선하게 비춰지고 있는 듯했다.

***

룻렛 타운(Rootlet Town), 우리말로 하자면 잔뿌리 마을 정도로 해석된다.

자신들이 위그드라실 잔뿌리에나 해당하는 변방이라는 자조적인 의미였다.

그곳의 중심부에 ‘쇼핑센터’라는 간판이 박힌 4층짜리 큼직한 건물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이현욱은 그 앞에 있는 황량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김 팀장, 준비됐어요?”

- 네, 대기 중이에요.

이 목소리는 김세희였다. 그녀와 박준모는 지금, 약 1km 거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현욱과 함께 상업 지구로 온 직후, 이현욱이 무언가를 포착했다며 사라졌지만,

두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디에선가 이현욱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 점을 이현욱이 사과를 하자 김세희는 ‘뭐, 한두 번이에요?’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이현욱은 그들에게 잭과 한나를 맡긴 뒤, 앞으로의 작전을 지시했다.

“저기 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큰 건물, 저기가 목표 지점이에요.”

겉으로 보면 복합쇼핑물처럼 보이지만, 슬럼가에 그런 멀쩡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앞서서 기절했다가 깨어난 상점 주인, 한스가 룻렛 쇼핑센터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저기는 위그드라실 내의 범죄 조직이 모이는 일종의 범죄 허브다.’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도시를 품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공권력이 약한 나라…….

이곳의 운영은 결국 해외 길드에 의해서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공권력의 통제가 없으니, 그 큰손들이 더러운 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다만, 그런 더러운 일을 직접 처리하기보다는 ‘심부름꾼’을 두기 원했고,

자연스럽게 빈민 중 힘을 얻은 이들이 그 더러운 일을 빌어먹고 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인 곳이 바로 저 쇼핑센터…… 일명 <하이브>라는 범죄 허브였다.

그리고 저곳에 제인, 정령왕의 딸이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루, 저 안에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확인 좀 해줄래?”

그 말에 배낭 안, 꽤 묵직한 금속 덩이 하나가 꿈틀거렸다.

「흐—음— 어디 보자…….」

정령왕의 딸도 당연히 물의 정령이다. 그리고 정령은 현상계와 물질계를 오고 갈 수 있다.

즉, 단순히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기에 ‘정령 감옥’이라는 걸 사용해야 한다.

「그래, 느껴진다, 느껴져— 꽤 강력한 녀석인데,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정령 군체 중에서도 침착한 인격체인 마루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는 잔뜩 흥분했다.

「나 이거 뭔지 알아! 이 정도의 비명이면…… ‘본질’을 갉아 먹히고 있는 거야!」

정령 감옥이란 ‘현상계’에 존재하는 정령의 ‘본질’을 구속하는 기이한 마법이었다.

그걸 당하면 정령은 단순히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그 안에 오래 갇히면 정령 군체처럼 미치게 되는 거다.’

「으으으으——!」

마루 녀석,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는지 당장이라도 배낭을 박차고 나올 듯 움찔거렸다.

"마루, 침착해. 그 정령, 우리가 구해줄 거야.”

「후— 그래, 다들 들었지? 좀 침착하고, 기다려 봐! 별것도 아닌 거로 유난이야, 왜?」

마루는 자신은 조급해하지 않았다는 듯, 다른 군체들을 타일렀다.

하지만 녀석의 목소리도 부들부들 떨리는 게 잔뜩 성이 난 듯했다.

‘저 안에 정령술사, 그것도 블랙 엘리멘탈리스트들이 있을 텐데, 걱정이군…….'

정령은 자연의 속성을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흔히 변덕쟁이라고 하지 않던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연의 통제 불능의 성질을 정령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령술사들은 정령과 신뢰를 쌓는 과정은 어린애를 다루기만큼 어렵다고 말한다.

'그걸 인내심 있게 해내지 못하면, 힘으로 누르게 되고 블랙 엘리멘탈리스트가 된다.’

김세희가 하늬와 친해지는데 꽤 긴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정령술사가 아니라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마루가 다시 폭주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루, 이 정령 군체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게 꽤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자, 이거 먹고 내가 부탁할 때까지는 좀 잠자코 있어 줄래?”

이현욱이 내민 건 다름 아닌 1등급의 정령의 돌이었다.

- 오, 진짜로 이 귀한 걸 구해온 거야?

이현욱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김세희와 박준모가 구해 둔 것이었다.

"그래, 빨리 흡수해.”

그걸 가방 안에 넣자 마루가 흡수를 시작했는지 배낭 밖으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이현욱은 금속을 얇게 만들어서 그 빛을 가리는 막을 만든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 입장합니다, 준비해주세요.”

- 예, 그럼 한 번 난리를 피워 볼게요.

이현욱은 자연스럽게 걸어 나가며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후—우—우—우——

약 50m 정도 떨어진 지점, 한 골목에서부터 돌풍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되어서 대충 포장된 도로를 훑으며 하이브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야, 저기 봐,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는데?”

"와, 나 저런 자연 현상은 처음 본다.”

그런데, 그 바람 안에는 이상하게도…….

파지지지——!

시퍼런 전류가 섞여서 살벌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저게 자연 현상이야? 저, 저거 그냥 공격 스킬 아니야?”

하이브의 입구에 서 있던 두 덩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어— 젠장, 이쪽으로 오잖아!”

"야, 쫄지 마! 점점 약해지잖아!”

“……그러게? 진짜 자연 현상인가?”

이현욱은 그러는 사이에 귀게스의 반지로 ‘은신’을 사용, 하이브의 옥상에 안착했다.

그곳에도 다수의 경비가 있었지만, 지상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옥상 문 앞에도 가드가 서 있었다. 다소 과도할 정도의 경비인력이었다.

‘아마도 정령왕의 딸을 납치하고는 경비를 보강한 걸 거다.’

아직 은신 상태지만 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기에, 은밀하게 움직여서 냉각탑 뒤에 숨었다.

"마루, 여기 바닥을 오픈해.”

그의 말에, 마루가 바닥의 콘트리트를 마치 치즈처럼 녹여버렸다.

쿠구구구——

그렇게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겼고, 이현욱은 그 안으로 뛰어내렸다.

턱—

4층, 불이 꺼진 방 안이었다. 퀴퀴한 냄새, 오랫동안 쓰지 않은 곳인 듯했다.

"좋아, 천장 좀 다시 메워 줄래?”

「그래, 나도 그 정도 센스는 있으니까 일일이 말 안 해도 돼.」

이내 천장의 구멍이 좁아지면서 밖에서 들어오던 햇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그 정령의 비명…… 이라는 건 지하에서 울리고 있다는 거지?”

「응, 아직 한참 아래야.」

이런 식으로 5~6층 정도를 더 내려가야 할 듯싶었다.

처음에는 건물 근처 바닥에 구멍을 내서 곧장 지하로 진입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건물 밖의 경비가 너무 삼엄하기도 했거니와, 지면이 너무 두꺼웠다.

즉, 오히려 그편이 더 많은 마나와 소음을 발생시켜서 들킬 우려가 있었다.

이현욱은 눈을 감고 바로 아래층으로 금속 통제력을 뺏어서 움직이는 금속을 감지했다.

'여기, 4층에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아래층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 먼저 스캔을 한 뒤, 사람이 없는 곳에 구멍을 뚫어서 내려가면 됐다.

'그리고 내려가기에 앞서서 CCTV를 먼저 무력화해야 한다.’

으레 CCTV는 천장 부근에 달려 있다. 이현욱은 그걸 감지하여 내부 기판을 망가뜨렸다.

"좋아, 바로 아래에는 CCTV도 사람도 없다.”

쿠구구구——

그 말을 들은 마루가 다시금 바닥에 구멍을 냈고 이현욱이 몸을 던졌다.

"응?"

그런데…… 3층에 사뿐히 착지한 직후, 예기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웬 근육질 흑인 남자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알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역시나 알몸 상태의, 문신한 백인이 서 있었다.

"이 새끼, 뭐야? 갑자기 어디에서 떨어진 거야?”

이게 무슨 망측한 장면인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는 라커룸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 벽 너머에서 다수의 금속이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헬스장 같은 건가?

"야! 너 뭐—”

뻑——!

그 순간,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지며 흑인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그건 큼직한 콘크리트 덩어리였고, 흑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이어서 천장에서 철근이 뽑혀 나와서 뱀처럼 휘며, 백인의 목을 옭아맸다.

“컥!”

우득—

놈이 저항할 새도 없이, 경추 꺾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이현욱이 반응하기에 앞서서, 마루가 곧장 처리해버린 것이었다.

「어때! 내가 이 정도 센스는 있다고 했지?」

"그래, 잘했어.”

「쯧— 칭찬을 영 못하는 스타일이네, 이 인간…….」

이현욱은 라커룸에 그들을 구겨 넣고는, 다시 한 층을 내려갔다. 역시 웬 방 안이었다.

뭐? 3층? 그래, 경비 1팀이 지금 가고 있어.”

문밖에서 소란이 들려오는 걸 보아하니, CCTV 고장을 눈치채고 점검에 나선 듯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잠입을 할 거라고는 아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아래는 누군가 있고, 옆 방이 비었는데 벽 좀 허물어줄래?”

이런 식으로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서, 마침내 1층에 도달했다.

「거의 다 왔다! 바로 아래층이야!」

하지만 이 아래로 무작정 내려갈 수 없었다.

정령왕의 딸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면, 다수의 다크 엘프 정령술사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특히나 숲의 정령술사를 좁은 곳에서 상대하다가는, 순식간에 구속당하고 만다.’

이현욱은 일명 ‘숲의 정령술사’라고 불리는 족속의 전투 방식을 잘 알았다.

그놈들은, 베를린 침식 지역 ‘그린 헬’에 자생하는 씨앗을 주 무기로 삼는다. 그걸 뿌리고 숲의 정령들에게 ‘급속 생장’을 명령하면 씨앗이 순식간에 발화하여 식인 식물이 피어난다.

그중에서도 ‘넝쿨’ 종류는 워낙 질긴 탓에 모글레이 정도가 아니면 절단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무 속성은, 금속 속성으로 상대하기 가장 어렵다.’

그렇기에 정령왕의 딸이 갇힌 정령 감옥, 그 바로 위로 떨어져서 낚아채는 게 해답이었다.

‘오래 끌지 말고 바로 탈출해야 한다.’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넝쿨을 피하기 위해서는 탁 트인 야외를 전장으로 삼아야 했다.

“……그 바로 위로 떨어져야 할 것 같은데, 위치가 정확히 어디야?”

「음...... 여기는 아니야. 벽 두 개 정도는 건너가야 해.」

벽이라, 저 벽 너머에서는 다수의 금속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괜히 복도로 나갔다가는 경보가 울릴 수도 있으니까……."

이현욱은 오른쪽 손목에서 AD-2를 소환해, 그 안에서 ‘블랙 라이노’를 꺼내 들었다.

“이 벽 두 개, 바로 돌파해야겠다.”

「그러면, 이 벽을 부수고 바로 다음 벽 부순 다음에 바닥을 부수면 되지?」

이현욱은 고민 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속전속결로 간다.”

쿠구구구——

곧 눈앞의 벽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으— 갑자기 뭐야!”

이현욱은 먼지를 헤치고 무너진 벽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응?"

어두침침한 방 안, 웬 큼직한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앞에, 두 남자가 마주 본 채 무언가를 교환하고 있었다.

- 플레이어 (LV:57)

- 플레이어 (LV:66)

"꽤 거물들이, 나쁜 거래를 하고 있던 모양인데?”

이곳은 범죄의 온상, 이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건전할 리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컥—”

입구 쪽에 서 있던 덩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으나, 이내 은색 섬광에 목이 꿰뚫렸다.

“젠장—”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이 자리에 있던 범죄자 8명이 몸을 뒤틀며 무기를 뽑았다.

그러나 이현욱이 훨씬 빨랐다. 그는 블랙라이노의 펌프를 당기고 테이블을 향해 격발했다.

콰—앙——!

무방비 상태의 이름 모를 두 거물이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그 주변에 서 있던 놈들이 인첸트 된 총을 꺼내 들었지만…….

"어, 이게—”

격발은커녕, 총이 분해되면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마루, 벽 열어—!”

이 정도 소란이라면 아래에서도 눈치챌 터,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콰—과—과—과—과——!

직후, 천장—벽—바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대여섯 명을 동시에 집어 삼켜버렸다.

이현욱은 블랙라이노의 펌프를 당기며 앞으로 달려나갔고, 다시 벽을 넘었다.

마침내 목표 지점의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바닥이 마치 물처럼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야, 준비해—!」

그 순간 바닥이 가라앉으며, 그의 몸이 중력에 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이이이—

이현욱은 AD-2 안에서 ‘플라이아이’를 3개 꺼내어 ‘나이트 비전’을 활성화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식인 넝쿨에 뒤엉키고 만다!’

나이트 비전으로 확보된 시야 속, 꽤 널찍한 지하 1층, 다수의 인영(人影)이 기겁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무려 삼십여 명, 플레이어와 다크 엘프가 뒤섞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웬 큼직한 원통형의 수조가 보였다. 그 안에, 소녀가 들어있었다.

「저거야, 저게 바로 정령 감옥이야!」

그러나 그 정체불명의 캡슐은 마나 실로 보호되고 있었다. 즉, 접촉할 수 없었다.

이현욱은 그곳을 향해 블랙라이노를 겨누고 ‘괴멸 분사’를 발사했다.

콰—과—과—과—과——!

폭음과 함께 5개의 마법진이 피어나며, 모든 셸을 쏟아냈다.

‘젠장—’

하지만 마나 실드는 깨지지 않았고, 적들이 대응을 시작했다.

"저놈을, 잡아—!”

시이이이——

이현욱의 등 뒤, AD-2의 아공간에서 모글레이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그는 수조를 향해 자신의 몸을 밀면서, 모글레이를 잡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쩌—엉——!

마침내 두껍디두꺼운 마나 실드가 벗겨져 내려갔다.

그 순간, 검은 마법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박혔다.

이 정도 데미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 다크엘프 숲의 정령술사 (LV:67)

저것들은 꽤 큰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놈들이 웬 씨앗을 넓게 흩뿌렸다.

‘젠장, 저거에 뒤엉키면 끝장이다.’

「내가 쳐낸다!」

마루가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파편을 터뜨려서 산탄총처럼 흩뿌렸다.

그 탄막(彈幕)에 날아오던 씨앗들이 휩쓸리며, 멀찍이 튕겨 나가 버렸다.

「어때, 센스 좋지?」

그사이에, 이현욱은 캡슐 안에 있는 제인을 끌어안고는, 하늘로 치솟았다.

"안 돼——!”

누군가의 절규를 뒤로하고, 이현욱은 1층으로 빠져 나온 뒤, 창문으로 몸을 내던졌다.

“후— 이제……."

이현욱은 바닥을 구르고 일어나서, 제인을 안은 채 몸을 허공으로 띄었다.

그리고 왼손을, 건물을 향해 뻗었다.

“……이 더러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린다.”

직후, 마루가 건물의 콘크리트를 벗겨냈고, 이현욱이 그 안의 H빔을 우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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