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대청소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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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
팔달산 중턱 부근을 내려오던 희망 길드원들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대규모 빙결 마법이 내리꽂혔다. 마치 빙하기가 도래한 듯 새하얀 눈 폭풍이 파도처럼 밀려들더니 이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했다.
콰—드—드—드——!
거대한 빙벽이 지면과 하늘에서 동시 형성되었고 뾰족한 고드름이 괴물의 이빨처럼 돋아나며 희망 길드원들을 집어삼켰다. 그들 모두가 동사를 면치 못했으리라고, 지켜보는 이들은.......
하지만…….
"후— 다들 괜찮아요? 부상자 없죠?”
"예! 마법 방어막이 이쁘게 잘 쳐졌네요!”
그들은 멀쩡한 상태로, 빙벽 안쪽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궁에서 나오기 직전, 이현욱이 이 사태를 견지해주었기에 제때 마법 방어막을 시전하여 빙결 폭풍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진짜, 사장님은 가끔 예언자 같습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이걸 알아차리신 건지……."
그리고 이현욱은 빙벽이 불어닥치기 직전에 미리 준비해둔 ‘근거리 텔레포트’로 먼저 빠져나갔다.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그 허 찌르기, 성공적 한 것 같네요.”
빙벽에 난 아주 작은 틈 사이, 하늘 위에 이현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후긴을 통해 ‘도시 청소기’가 든 차량을 감지해낸 뒤 통째로 허공으로 띄워서 확보했다. 적지 않은 경비 병력이 함께 있었으나 놈들이 탄 차를 통째로 구겨버려서 손쉽게 제압해버렸다.
이어서 그들의 리더인 81레벨의 플레이어의 사지를 강철 와이어로 칭칭 휘감아서 구속한 채 허공에 거꾸로 매달아 버린 상태였는데 놈의 중절모를 벗기고 가짜 콧수염까지 뜯어내서 정체를 확인했다.
"아, 이게 누구야?”
그리고 역시나, 이현욱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레너드 가네, 꽤 먼 길 오셨는데, 별다른 재미를 못 보셨군?”
“……뭐? 네가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거지?”
"한때는 프랑스 정보기관 소속이었고 지금은 용병 생활 중인가? 그래, UAE 소재 비밀 용병 단체의 공동 대표였던가, 그랬지?”
그 대목에서 레너드 가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네가 81레벨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고…… 빌런인 것도 알고 있다. 즉, 앞으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없다는 뜻이야.”
이현욱이 아는 건 사실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놈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하나 같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 정보들이었는데, 그걸 저렇게 읊어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너…… 정체가 뭐냐? 어떻게 그 모든 걸 어떻게 아는— 컥!”
이현욱은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은 뒤, 프리드웬을 소환했다.
우우우우——
이내 머리 위로 백색의 비공정이 현현하며,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그때, 귓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일대에 있는 테러리스트들 제압 완료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어떤 위협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계속 경계 작전 중입니다.
이 목소리는 이교준 팀장이었다. 그쪽도 움직이고 있었다.
"예, 저는 바로 라퓨타로 이동할 겁니다.”
이현욱은 이어서 김세희에게 마나 교신을 보냈다.
"김세희 팀장, 지금 바로 라퓨타로 긴급 복귀할 겁니다.”
- 네!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이현욱은 프리드웬의 램프 도어에서 세계수의 갈고리를 끄집어내어 빙벽 쪽으로 던졌고, 희망 길드원들이 그걸 가지고 미궁 입구 안 쪽으로 가서, 검은 천으로 덮어둔 블랙 드래곤의 시체에 연결했다.
- 칙— 사장님, 연결 완료입니다!
‘긴급 복귀—’
웅——!
그렇게, 희망 길드원들은 순식간에 테러 현장에서 탈출했다.
“컥!”
이현욱은 라퓨타에 도착하자마자, 레너드 가네를 바닥에 내던졌다.
“레너드, 앞서 말한 대로 대청소 견적 좀 봐줘야겠는데?”
“……나한테 무언가 알아낼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
이현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말했잖아, 아무리 머리 굴려봤자 소용없다고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더니, 품속에서 웬 병을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더니, 레너드 가네의 머리에 뿌리는 게 아닌가?
치이이이——
그러자 레너드 가네의 머리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 당신에게 걸려 있던 ‘잠재 마법’이 정화됩니다.
"어, 어……."
놈은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물약은 성녀의 ‘정화’ 스킬을 성수에 인첸트한 것으로, 이제는 성녀의 출장 서비스 없이도 잠재 주문 해제가 가능하게 됐다.
"자, 갑자기 뇌가 타서 죽을 일 없으니까, 마음 편히 말해. 그렇지 않으면 몸이 힘들어진다는 건…… 느낌상 대강 눈치챘겠지?”
“……뭘 말하라는 거냐?"
"이 나라의 누가 너한테 이 일을 맡긴 건지, 그걸 말해주면 돼.”
그 말에 레오 가네가 피식 웃었다.
“하— 이봐 스틸레인, 네가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끅끅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 말대로 이 나라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접근을 해왔다. 널 죽여달라고 말이야. 네놈, 온 세상의 미움을 다 받고 있더군?”
"......."
"그런데 우리는 돈과 안전만 확보된다면 애초에 의뢰인이 누군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 서비스의 원칙이고, 우리 서비스가 값비싼 이유다. 다시 한번 말해주는데…… 난 아무것도 모른다.”
즉, 자신도 의뢰인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레드 코브라’가 먹고 사는 이유 중 하나잖아?”
UAE의 유명한 블랙 용병 단체 <레드 코브라>는 플레이어 암살 전문 기관으로, 훗날 ‘현대의 브라더후드’라는 악명을 떨치게 된다. 보수만 적당하다면, 아무리 강력한 플레이어일지라도 마치 레이드 하듯 공략법을 고안해서 완벽하게 청부살인 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현욱의 공략법으로 준비한 게 바로 도시 청소기였다.
"이봐 레너드, 내 말은…… 사실을 말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 말에 레너드 가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나라 법정에서 특정 이름을 네 배후라고 증언하면 돼.”
“하— 거짓 증언이라, 나를 이용해서 네 적을 없애겠다는 건가?”
"흠, 내가 친절하게 말해서 그런가, 대화가 영 길어지는데……."
이현욱은 그를 끌어당기더니, 주먹으로 입을 내리쳤다.
“—컥!”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고, 이현욱은 그의 입을 억지로 벌린 뒤,
쇠 구슬 7개를 차례차례 목구멍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어버렸다.
“꺽— 이, 미친놈, 지금 무슨 짓을……."
그리고…….
“융해—”
"꺼러러러——!’’
이번에는, 믹서가 아니라 용광로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
이현욱은 앞으로 벌어질 사건과 문제들을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신경 쓸 수는 없는 만큼, 우선순위를 선정하고 구태여 처리할 필요가 없는 작은 문제들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남몰래 세력을 키우고 있을 <여명회>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 존재를 알고 있으나,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놈들을 청소할만한 명분과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반(反)우성문 측 정부 관료와 거대 길드들의 만든 사조직…….'
무엇보다 놈들은 원래, 우성문이 암살당한 뒤에야 움직여야 하거늘, 어떤 변수가 생긴 건지 생각보다 이르게 돌발 행동을 벌였다.
‘아마도 내가 빠르게 성장하니까, 위기감을 느낀 걸 거다.’
지금이 아니면 이현욱을 꺾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그건 곧 우성문을 끌어내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니, 급하게 나선 걸까?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나는 그 녀석들의 리스트와 비위를 알고 있다.’
이현욱은 그 조직에 속한 초대 구성원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훗날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장이 되는 황연수가 여명회의 주축일 테고, 그 뒤로 길드협력지원청의 정무직 공무원들, AMT 장군들, 거대 길드의 대표들까지, 이 나라의 썩은 가지들이 죄다 모여 있다.’
그게 대한민국 몰락의 단초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 거대 길드를 뒤에 엎고 권력을 손에 넣는 황연수였지만, 우성문처럼 거대 길드의 고삐를 잡고 통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결국, 혼란 속에서 길드들이 활개를 치며 공권력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군벌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길드 세력들의 난립하며 현대판 무신 정권기가 열리고, 그 시기에 빌런이 이 나라를 통째로 삼킨다.
‘그 시기의 우리나라는 정말…… 디스토피아 국가 같았다.’
그 사태를 정리한 이들이 바로 <즈믄나래>길드의 강서윤과 이성윤으로, 이현욱은 그때, 가디언 정보부 소속으로써 그들을 도왔었다.
‘즉, 나는 놈들이 어떤 식으로 음모를 꾸몄는지 알고 있다.’
현 시점상, 우성문 휘하의 정보부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숨겨 놓은 각종 증거의 위치가 이현욱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이현욱은 고개를 돌려서, 레너드 가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채 컥— 컥— 쇳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레너드, 이제는 증언할 마음 좀 생겼겠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입 무거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엘리트 용병일지라도, 쇳물이 내장을 따라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참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
그 시각, 정상식 사령관은 자신의 집무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나 교신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황연수 처장이었다.
"아니, 황 처장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이현욱이 살수 놈을 데려간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혹시나, 잘못되는 건……."
- 정 장군님, 노파심 좀 절제하고 그냥 입 다물고 계세요.
“……예?”
- 이런 시기에 직접 연락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하— 우 실장 쪽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테니까, 한동안은 잠자코 계십시오. 어차피 그 히트맨은 우리가 누군지 모르니까, 이현욱이 제아무리 심문하더라도 아무것도 못 알아냅니다. 하…… 제가 그 정도 일 처리도 안 했겠습니까? 오히려 그 입,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좀 다무세요. 그리고…… 누가 뭘 묻더라도, 그 입 좀 함부로 놀리지 마시고요.
그 말을 끝으로 황연수와 마나 교신이 끊어져 버렸다,
정상식은 마나 메신저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 씨발— 나이도 어린 새끼가 진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다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김강석을 만났을 때, 자신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때 말실수를 했나? 왜 자꾸 입 조심하라는 거야.”
그때, 어디에선가 범상치 않은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정상식은 한껏 짜증이 오르는 걸 느끼며, 부속실과 연결된 직통 전화기를 들고 소리쳤다.
"야! 이게 무슨 소—”
그때, 전속 부관이,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헉! 사, 사령관님—!”
"뭐야, 무슨 일이야?”
"그게,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인지, 말을 해!”
"어…… 어……."
그런데, 전속 부관은 대답 없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고, 정상식은 뒤늦게 찝찝함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응?”
쾅——!
그 순간, 창문이 통째로 뜯겨 나가버렸다.
콰드드드——!
자세히 살피니, 거대한 금속 손이 창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 저건…….."
그건, 이현욱의 권속인 오리할콘 거인 ‘탈로스’였다.
그 거인의 거대한 오른손이 뜯겨나간 창틀로 비집고 집무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그 손바닥 위에는 한 남자—이현욱이 서 있었다.
"이, 이현욱……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사령관님, 오랜만입니다. 창문은, 실수였습니다.”
그의 등 뒤로, 탈로스의 머리가 반쯤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그냥 열려고 했는데, 힘 조절이…….」
“……제정신 아니지? 가, 감히 AMT 사령부를 공격해?”
바로 그때, 문으로 경비 병력이 달려 들어오며 무기를 들어 올렸지만, 창문 밖에 서 있는 탈로스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멈춰섰다.
"오늘 오전에 일어난 저에 대한 테러 사건, 보셨습니까?”
이현욱이 그렇게 질문하자 강정식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뭐?”
그때, 이현욱이 왼손을 들어 올렸고, 창밖에서부터 무언가 날아들었다. 그건…… 와이어로 칭칭 휘감긴 남자, 레너드 가네였다.
"이 사람이 오늘 테러의 주범입니다. 제가 생포했죠."
"......."
"그런데, 이 자가 사령관님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뭐?”
"그러니까, 자신의 배후에 사령관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강정식은 노발대발하며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뭐? 이 새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야지 이런 식으로 처, 쳐들어와서 위력 행사를 해? 너 요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지? 그렇지?”
그는 말을 쏟아낸 뒤, 씩씩거리며 경비병들에게 소리쳤다.
"야! 강 소령 이 새끼야, 뭐해! 이 자식 당장 체포해!”
그러나 제아무리 사령관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모르는 게 아닌 이상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탈로스가 건물 앞에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하지만 사령관이 노려보자, 경비병들은 하는 수 없이 주춤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이현욱 씨, 다, 당장 투항하십시오!”
- 플레이어 (LV:51)
- 플레이어 (LV:48)
- 플레이어 (LV:37)
- 플레이어 (LV:43)
무려 AMT서울작전사령관 직속인 만큼, 보통내기들이 아니었다.
"……투, 투항하지 않으면 우리한테는 체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순간, 선두가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
“흐압—!”
그러나 이현욱은 그 검 끝을 가볍게 피해낸 뒤, 그의 손목을 붙잡고 유도식 엎어치기 하듯이 들어 올려서 그대로 벽으로 던져버렸다.
쾅—!
벽에 박힌 놈이 쿨럭— 하고 피를 토해냈다.
뒤이어서, 41레벨짜리가 방패로 밀고 들어왔다.
이현욱은 그 방패를 향해 정면으로 프론트 킥을 날렸다.
콰—앙——!
마치 트럭에 부딪힌 듯, 그의 몸이 하늘에 붕 뜨더니, 4m 뒤의 책장에 내리꽂혔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온갖 상패들이 쏟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이현욱의 허리춤에서 무언가 쏘아졌다.
쉭—쉭—
2자루의 페일노트가 나머지 두 사람의 목덜미에서 멈춰섰다.
그 상태로, 마치 드릴처럼 윙— 윙—거리며 고속회전했다.
"—헉!”
"사, 살려주세요!”
결국, 두 사람은 무기를 버리고는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하— 이 답답한 새끼들……."
얼이 나간 강정식을 향해, 이현욱이 돌아섰다. 그리고는……,
뻑!
그대로 주먹을 날렸고, 강정식은 코를 부여잡고 엎어졌다.
"으아아…… 부, 부러졌잖아!”
그래도 꽤 높은 편이었던 그의 코가 완전히 옆으로 누워버렸고, 그는 양손으로 쏟아지는 코피를 받으며 늙은 개처럼 끙끙거렸다.
"이빨은 다시 붙이기 어려우니까, 일단 코만 부러뜨렸습니다.”
그는 코피를 질질 흘리는 강정식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다음은 이빨입니다. 힐을 하더라도 사령관님께서 빠진 이빨을 하나하나 주워서 다시 붙이셔야 하죠. 지금보다 훨씬 모양이 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디를 잘라야 할지는 같이 논의해보죠.”
강정식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이현욱을 노려보았다.
"너, 너 이 자식, 무슨 그, 근거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그러나 강정식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며 강하게 나왔는데, 자신이 테러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이유는 하등 하나도 없어! 뭐 즈, 증언? 저 새끼 딱 봐도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데, 그 증언 믿을 수 있겠어?”
이에 이현욱이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연희동 산 지하의 패닉 룸, 거기에 증거가 있겠죠.”
그 말에, 강정식의 표정이 차갑게 식고 말았다.
"네, 네가 거길 어떻게…… 알고 있지?”
그곳은 플레이어계 여러 유력 인사들의 비밀 모임 장소로서, 정부 무기고처럼 물리적인 문이 없기에 오직 포탈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박, 마약, 성 상납 등 온갖 불법적인 유흥이 벌어졌으며, 또한, 흔히 비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들이 금고에 잔뜩 쌓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즉, 그곳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면…….
“……거길 드나드는 멤버끼리는 뭐,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신다면서요? 그게 열리는 순간, 옷 벗는 거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훗날, 그곳의 정체가 밝혀지며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진다.
사실, 연희동 패닉 룸의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멤버들이 서로 권력을 가지겠다고 등을 돌렸을 때부터는, 서로 먼저 당겨야만 하는 방아쇠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상에서는, 영원한 비밀처럼 여겨질 터— 강정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그걸, 대체 누가 자네한테 말해준 거지?”
이에 이현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사령관님과 연결지어서, 누가 그런 비밀스러운 걸 제보했는가, 그겁니다.”
"……뭐?”
"하하— 사령관님,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이현욱은 정상식에게 고개를 디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꼬리 자르기 당하신 겁니다. 이 자식을 조금 고문하니까 바로 사령관님 이름을 불더라고요. 그리고 연희동 패닉 룸에서 사령관 님과 작당을 모의했고, 거기에 증거가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그, 그런 적 없어!”
이현욱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그렇겠죠. 저도 의심스러워서 다시 고문했습니다.”
이현욱이 왼손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레너드 가네의 몸이 수직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는 퉁퉁 불어 튼 눈을 끔벅였다.
“—큭! 쿨럭!”
"자, 사실대로 말해.”
그의 말에, 레너드 가네가 약속된 대사를 내뱉었다.
"예…… 황 처장과 처음 거래할 때, 한 가지를 야, 약조했습니다. 만에 하나 사로잡히면…… 정 장군을 팔라고…… 쿨럭! 쿨럭!”
그 말에 정상식의 눈이 커지고 양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애초에 사령관님은 이용당하신 겁니다.”
정상식의 말문이 막혔고, 이현욱이 의자를 두 개 끌고 왔다.
"자, 앉으시죠.”
강정식은 머뭇거리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어딘가 초탈한 듯한 표정이 되었는데, 그의 증오심이 이현욱이 아닌 다른 먼 곳으로 옮겨간 듯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나한테 찾아와서 이 말을 해주는 이유가 있겠지?"
이현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쇠 구슬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의 표면에서 일부분이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다.
"이제부터 사령관님은, 몸통에서 버려진 꼬리가 아니라…… 가라앉는 타이타닉에서 떨어져나온 비상용 구명보트가 되는 겁니다."
그 순간, 원본의 쇠 구슬이 우그러지더니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