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팔달산, 드래곤 미궁의 비밀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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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동구의 한 게이트 발생 현장, AMT 병력이 차단선을 설치하고 있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수원의 드래곤 공략 사건 때문에 한국 사회 전체가 섯다운 됐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전국 각지에서 게이트는 지속해서 발생했고 공략도 이루어졌다.
"음, 트롤 게이트이고, 내부 지형은…… 하필이면 열대우림인 것 같네요.”
제3항마여단 본부에서 파견 나온 ‘게이트 분석관’들이 게이트를 조사 중이었다.
그들은 게이트에 손을 얹으면 어느 정도의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분출로부터 8시간이 지났으니까, 앞으로 1시간 정도 안에 3차 분출이 일어나겠고요.”
이번에는 무려 트롤 게이트로 웬만한 AMT 공략팀일지라도 버거울 수준이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말하는 ‘민간 외주’ 즉 민간 길드에게 공략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거 꽤 빡센데? 그래도 서은하 대위의 공략 팀이라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겠지?”
"뭐, 요즘 AMT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략팀이라 지원도 빵빵하니까, 잘 해내겠죠.”
한편, 서은하는 한 기갑수색차량 앞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 ……현 시각 전국 게이트 발생 현황 안내입니다. 서울 강동구에서 트롤 게이트가 발생하여 공략을 앞두고 있어서, 반경 3km 내에 통행 제한이 발효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전시 유성구에서 게이트 발생 신고가 들어왔는데, 아직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
이 방송 <24시 비상 채널 : 더 쉘터>는 전국 각지에 발생하는 게이트를 속보로 전해주고 대피 안내를 해주는 방송으로, AMT 내에서는 오로지 이 채널만을 틀어놓아야만 했다.
한편, 속보가 없는 시간대에는 플레이어 이슈를 다루는 시사 토크 채널로 바뀌었는데, 근래의 이슈는 싹 다 스틸레인에 관한것들이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스틸레인, 이현욱이 <플레이어즈>선정 올해 활약한 플레이어 1위로 뽑혔다면서요?
- 솔직히 그럴만하죠. 어휴, 의심 또 의심, 하지만 결국 항상 전부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 하하— 그런 분이 우리나라 플레이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단 말이죠.
- 그런데 세계 각지의 유명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이현욱을 비판하고 있다고 합니다.
- 그거 비판이 아니라 비난 아닙니까? 아니, 시샘이죠. 왜 그렇게까지 미워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국영 방송인지라, 국내 플레이어에게 호의적인 스텐스를 취하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이현욱……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성장했구나…….'
서은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쪽 하늘, 수원으로 갔던 라퓨타가 다시금 서울로 복귀하고 있었다. 꽤 높은 고도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그 거대한 것의 모습이 퍽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성장해도, 저런 걸 전용기처럼 끌고 다니는 건……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이현욱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녀는 괜스레 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4차 웨이브부터 시작해서, 그간 이 나라를 위협했던 수많은 사건을 그가 해결했다.
그 거국적인 일과 비교하면, 서은하의 활약은 지엽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역에 발생하는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가치 있는 임무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 역시도 누군가의 생명과 누군가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묘한 박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라가 망할 위기들이 거듭되고 있지만, 자신은 그저 지켜만 볼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보며 꿈꿨던 영웅적인 플레이어…… 그와는 거리가 좀 있는 모습이다.
"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야? 후— 이제 나도 공략중대장이잖아.”
그녀는 대검과 방패를 등에 둘러맨 뒤,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집결지로 향했다.
그곳에 그녀의 팀이 무장을 마친 채 모여 있었다.
“1소대장, 준비 다 됐나?”
그녀의 질문에 1소대장, 중위 계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1소대, 2소대 전 병력 공략 준비 마쳤습니다.”
그렇게 26명의 항마여단 ‘공략중대’는 완전무장한 채 보라색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공략중대장님, 아직 대기 하시랍니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고, 서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헉— 헉— 상부에서 작전 취소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전 병력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은하를 쳐다보았다.
"중대장님, 저기 보시죠.”
민간 길드 <청화> 길드의 공략 팀이 접근금지선을 넘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인근에 대기 중이던 서브 공략 팀이었다.
"뭐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서은하가 통신 담당관에게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이거 무슨 상황이야? 공략권은 우리한테 있는데, 쟤들이 왜 여기로 오는 거야?”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청화 길드 쪽 팀장이 대답했다.
"이봐요, 황당한 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거 그쪽에서 요청한 거니까 생색내지 마시죠."
그 말에 서은하는 통신 담당관을 바라보았고,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게…… 저도 방금 급하게 연락받아서 말입니다. 공략권, 청화 쪽에 넘겼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부에서 서은하의 팀이 게이트 진입하는 걸 막으려는 듯했다.
"아무튼, 더 꼼지락 되다간 2차 분출 시작될 것 같은데, 지금 바로 들어가도 되죠?”
"으흐흐…… 이거 웬 떡이냐? 트롤 게이트 정도면 보상이 꽤 짭짤하겠지?”
얄밉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청화의 공략팀이 게이트 쪽으로 몰려갔다.
서은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작전을 인계하고, 작전 막사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광역마법통제관에서 작전과장으로 승진한 문태호 소령이 앉아 있었다.
"—과장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어제부터 작전을 짜고, 몇 차례 브리핑한 뒤,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그들이었다.
그런데 작전투입 직전에 갑자기 막아서다니, 성질이 안 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잔뜩 열이 난 표정의 서은하를 올려보며, 문태호 소령이 난색을 보였다.
"나도 자네랑 같이 작전 짜고 있었는데, 난들 알겠나? 방금 윗선에서 명령이야.”
"하…… 그래서, 이유가 뭐죠? 대대장님께서 지시하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윗선에서 내려온 긴급 지시라는 게 대대장님 말씀이었다.”
그는 정말 모르겠는지 연달아서 고개를 내저으며, 서은하의 질문을 봉쇄했다.
"서 대위,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일단 부대로 복귀해. 근데 이렇게 멋대로 오라 가라 하는 걸 보면 상당한 거물급 인사인 것 같은데, 뭐 잘못한 거 없지?”
서은하는 씩씩거리며 천막 밖으로 나갔고, 입구에 서 있던 강익준 중사가 뒤따랐다.
"이야— 대대장님보다 윗선의 소환을 받다니, 그 거물이 누굽니까? 설마, 서 장군님?”
"아니, 아버지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분이 아니야. 하, 뭔지 올라도 기분 잡치네……."
안 그래도 심란했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혹시, 중대장님을 이쁘게 본 어느 장성께서 더 높은 자리를 추천하려는 거 아닐까요?”
"됐어,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이제는 솔직히…… 계속 AMT에 남아서 뭐 하나 싶다.”
요즘 들어 회의감이 들었다. 그녀가 몸담아 온 AMT가 고작해야 지역 보안관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거대한 위협을 해결하는 건 언제나 민간 길드의 플레이어가 아니었던가?
'……과연 계속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까?’
그렇게 그들은 김이 빠진 채 남산으로 돌아왔고, 서은하는 대대장실로 직행했다.
“—충성! 대대장님, 이게 도대체……."
그리고 대대장, 김강석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 이현욱?"
확실히, 거물 중의 거물이 그녀를 찾아 왔다.
***
이현욱과 서은하는 빈 회의실로 가서 단둘이 대화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팀을…… 통째로 이관할 수 있다니, 그게......."
이현욱은 서은하의 힘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기획한 공략 팀에서 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녀가 지휘하는 중대급 공략팀 전체를 함께 옮겨줄 수 있다는 파격적인 말도 덧붙였다. 그것도 이곳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 제안에 응해주신다면, 서 대위님의 팀은 형식상은 대통령 직속 공략 팀이 될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의 우성문 실장 직속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면밀하게 따지면 이현욱 직속이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거, 대대장님이 승인하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물어본 직후, 그게 영 상황 분간 못 한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애당초 이제는 이현욱이 원한다면 김강석이 거절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김강석 역시 이현욱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바, 반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예, 대대장님께서도 제 의견을 듣고 필요성을 이해하셨습니다.”
물론, 이현욱이 막무가내로 제 의견을 밀어붙일 스타일이 아니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서은하는 지금 이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런데 왜 하필 나를……나보다 훨씬 잘난 성기사를 찾을 수 있잖아?”
"......."
"그, 세인트 돔 쪽과 커넥션도 있고, 그쪽에서도 지난번에 지원 왔었고……."
멀리 세인트 돔까지 가지 않아도, 이 나라에서도 서은하보다 잘난 성기사는 널렸다.
그녀가 AMT 내에서는 손에 꼽아도, 이제 겨우 국내 랭킹 하위권에 진입했을 뿐이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면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지난번 악마 숭배자 추적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현욱이 혼자서 해내지 않았던가?
"뭐, 잘난 성기사는 많아도…… 믿을 수 있는 성기사는 없으니까요.”
"저는 4차 웨이브 때, 서 대위님이 저한테 주셨던 팔찌 덕에 제가 살아있는 거죠.”
그리고 사실, 전생에서도 서은하 덕분에 여러 차례 목숨을 건졌었다.
그가 여기까지 오는데 서은하의 지분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즉, 서은하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현욱은 그녀를 믿을 수 있었다.
"아, 신성 보호막이 담긴 팔찌…… 그랬었지......."
서은하는 그때가 기억나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그걸 기억하고 말해준다는 게 이상하게도 뿌듯했다.
‘진짜 거물이 되긴 됐구나…… 이런 한 마디 한 마디가 감개무량하다니, 참나…….'
서은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래, 뭐, 나쁘지 않은 제안 같긴 한데……."
솔직히 이현욱의 제시한 파격적인 조건보다는 그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면이 끌렸다.
정확히는 스틸레인의 영웅적인 행보…… 그 뒤를 따르는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다.
“……어, 근데,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데?"
그러고 보니 아직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듣지도 않은 상황이거늘, 마음이 기울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좀, 기밀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인가 봐?”
"음…… 지금 저와 함께 가시면 말씀드리죠.”
이현욱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은하도 주춤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어…… 가다니, 어딜 가?”
이현욱은 왼손을 들어서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새롭게 조성될 서 대위님의 공략 팀의 본부는, 조금 높은 곳에 마련될 겁니다.”
***
- [속보] 슬레이어즈 길드, 팔달산 ‘드래곤 미궁’ 공략 시작 (1보)
에드워드 우즈의 연설을 시작으로 슬레어즈 길드가 미궁 공략을 시작했다.
그 시각, 이현욱은 서은하와 함께 라퓨타에 도착했다.
그녀는 지상에서 올려다만 보았던 라퓨타에 밟을 내딛자, 두 눈의 휘둥그레졌다.
“와— 여기,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게 큰데? 어! 그런데 저 드워프들은 뭐야?”
상부 그레이 드워프이 오고 가며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몬스터가 아니라 NPC 개념의 조력자들이에요.”
"아…… 그, 그래?”
"서 대위님의 팀의 장비는 앞으로 저들이 만들어줄 겁니다.”
이현욱의 선보인 마법공학 장비의 위력을 잘 알기에, 그녀는 묘하게 설렘을 느꼈다.
플레이어로서, 성능 좋은 장비 아이템에 대한 열망을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하지만 AMT 내에서는 아무리 대우를 잘 받는다고 해도 그 질적 한계가 명확했다.
그녀는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라퓨타 곳곳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오더 타워에 도착했다.
이현욱은 그제야,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을 축약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첫째, 블랙 드래곤 공략 직후, 팔달산에 ‘드래곤 레어 폐허’라는 미궁이 생겼다.
둘째, 그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셋째, 그 조건은 오직 ‘기사’ 계열 플레이어만이 만족할 수 있고, 성기사도 기사 계열이다.
마지막 조건을 말한 뒤, 이현욱이 웬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이걸 쥐면, 그 특별한 조건을 내가 갖게 된다는 거지?”
"네, 오직 기사 계열 플레이어만 쥘 수 있는 겁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낡은 검의 자루를 쥐는 순간—
우우우우——
검게 녹슨 검신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 (!)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전직 퀘스트]
- 우연의 기회, 특별한 만남, 절대적인 힘…….
당신은 정체불명이 검 한자루를 손에 넣었습니다.
사실, 이 검에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건 바로…… ‘드래곤 나이트’의 권능입니다.
당신이 이 힘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길 끝에서 당신은 최고의 친구를 만나 게 될 겁니다.
*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어? 그, 퀘스트가 하나 떴는데…… 전직 퀘스트라니, 이게 뭐야?”
서은하는 눈을 끔뻑거리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재확인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드래곤 나이트? 잠깐만, 내가 용기사 같은 게 되는 거야?”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을 성기사로 성장해온 만큼, 특성이 바뀐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스킬이 싹 바뀌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익힌 전투 방식이 무의미해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바탕으로 두고 몇 가지 스킬이 재구성되는 걸 겁니다.”
그녀의 걱정을 알아차린 이현욱이 덧붙였고, 서은하가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퀘스트를 수락하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는 건지…… 너는 알고 있는 거지?”
이현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녀가 맡게 될 역할이 막중하기에 사전에 상세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했다.
"서 대위님, 혹시, 그…… 애 키워보셨습니까?”
그 말에 서은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 이게 미혼 여성에게는 대쯤 묻기에는 좀 그런 질문이었나?’
이현욱은 그 질문이 영 이상했다는 걸 깨닫고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 동생이라던가 조카라던가 하다못해 개나 고양이라도……."
그렇게 말하다가, 이 여자가 그런 쪽으로는 외려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건, 다 꼴 보기 싫다고 했던 것 같은데…….'
행동거지가 칠칠찮은 아랫사람들을 갈굴 때, 애새끼 같다고 하곤 했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비혼주의자인 데다가, 개나 고양이도 싫어하고, 카페도 노키즈존을 찾아다녔다.
‘생각해보면 개인주의에다가 은근히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면이 있었지.......'
그건 드래곤 나이트라는 특성을 가지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알—헤츨링—아성체—성체— 단계를 거치는 드래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일 정도로.......
'하지만 무려 드래곤을 맡길 만큼, 내가 믿을 수 있는 기사 계열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권속 형태의 드래곤은 주인의 특성을 따른다.
즉, 서은하가 드래곤의 주인이 된다면, 그 드래곤은…….
'……신성력 속성의 화이트 드래곤이 된다.’
그건 이현욱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밀어 붙어야만 했다.
"큼— 그게, 직접 어린 생명체…… 같은 걸, 키워 나가야 할 수도 있어서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조금 난감한데,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안 돼?”
이현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 대위님께서…… 그, 새끼 드래곤을 키워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서은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두 눈만 천천히 커졌다.
"뭐? 나 파충류를 조금…… 아니, 많이 싫어하는데……."
예상한 반응이다. 이현욱은 뭐가 됐든 일단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마다하시진 않겠죠?"
서은하는 이 검을 대뜸 잡은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
***
에드워드 우즈의 슬레이어 길드가 미궁 공략에 돌입한 지 14시간이 지났다.
- [단독] 슬레이어드 길드, 빈손으로 팔달산 미궁 퇴장…… 공략 실패인가?
그런 기사가 난지 몇 분 만에 에드워드 우즈가 기자회견을 열었고, TV 속보로 중계됐다.
- ……우리가 빈손으로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예! 그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찰칵— 찰칵—
-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공략에 성공했고, 중대한 분기점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고, 어딘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힘겹게 미궁을 돌파했더니, 마지막 관문 앞에서 막혀 버렸으니 짜증 날 법한데,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그리고 그의 발언에서 분기점이라면, 드래곤 나이트를 찾는 ‘힌트’를 뜻하는 것이었다.
'……좌표, 레벨, 특성 등이 떠올랐을 거다.’
이현욱이 예상하기로는 서울—86—성기사라는 세 가지 단서를 줬을 거다.
그리고 그건…… 정말 안타깝게도 서은하를 뜻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로서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 이 미궁을 공략하는 건 결국 우리가 될 것이라고, 세계 시민 여러분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나올 보물은…… 역사상 가장 진귀한 것이 될 겁니다.
그게 뭐냐는 질문이 들어왔지만, 에드워드 우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싱긋 웃어 보인 뒤, 말을 이어갔다.
- 다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플레이어를 찾기 위해서, 이 나라 전체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분께, 그리고 도움을 준 모든 분께, 슬레이즈 길드가 막대한 보상을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무래도 공개적으로 그 ‘자격자’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그 3가지 단서를 뿌려서 찾는 게 훨씬 빠를 테니…….'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 그리고 스틸레인…….
“아…… 안 돼……."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이현욱은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 제가 경고한 대로, 우리가 먼저 저 이 미궁을 클리어할 겁니다.
그러자 스포트라이트가 벼락 치듯 쏟아졌다.
- 어,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DS, 스틸레인과 무슨 대화가 오고 갔던 겁니까?
- 저기, 잠시만요! 한 마디만 더…….
그러나 그는 대답 없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기자회견장을 퇴장했다.
아무래도, 이현욱과의 대립 구도를 저버리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여기서 미궁을 먼저 공략한다면, 지난 수모를 어느 정도 만회할 거라고 판단한 거다.’
즉, 조금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과감하게 한 번 이현욱의 이름을 질러본 것일 터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스틸레인이 자신들을 역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테고.......
“하……."
절대 원치 않건만, 언젠가부터 달걀들이 제멋대로 날아들어서 박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