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재앙 예언, 사냥 준비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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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대한민국에 드래곤이…… 그것도 성체 드래곤이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이현욱이었다.
세계수의 관리자가 그에게만 귀띔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그만이 그 재앙을 대비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 [속보] 경기 남부 곳곳에 ‘균열’ 발생 후 비석 형태의 정체불명의 오브젝트 등장
-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재앙의 예고? 국민 불안감 고조
예언으로부터 9일이 지났을 무렵, 그 징조가 하나둘씩 세상에 나타났다.
수원 일대에 일시적인 차원의 문 ‘균열’이 발생하더니 웬 거대한 비석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게 앙그라 마이뉴 군단과 아지 다하카의 등장 예고라는 것을, 이현욱은 직감했다.
“……이겁니까?”
"예, 맞습니다.”
이현욱 역시 그 장소로 직접 찾아갔다.
한 주택가의 공터에 9.9m짜리 검은색의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츠츠츠츠——
그 면에 새겨진 검붉은 기호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꿈틀거린다.
츠츠츠츠——
그리고 그 비석 안에서 아주 작게 기묘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다가와서 손을 얹어 보라는 유혹처럼 느껴졌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 강도가 아주 옅어서 이현욱 정도 되는 플레이어라면 쉽게 떨쳐낼 수 있었다.
"이 비석들이 이 근방 5km 주변에 다수 발생한 거로 파악됩니다.”
이교준 팀장이 그렇게 말했고, 이현욱이 그 비석에 손을 올리자…….
웅——
- 주의! 앙그라 마이뉴의 ‘전언(傳言)’에 접촉하셨습니다.
일순간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눈앞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어서 영사기가 작동하며 빛이 렌즈를 통과해 나오듯, 시야가 천천히 확보되었다.
화르르르——
가장 먼저 보인 건 웬 붉은 일렁임이었다.
'불?’
그래,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수원이다.’
마치 화산 폭발 현장에 와 있는 것처럼 사방이 마그마로 뒤덮여 있었다.
이현욱은 고개를 들어 올렸고, 수원역 위에서 날고 있는 그것을 목격했다.
온 세상을 뒤덮은, 한 쌍의 암막…… 그건 날개였다.
‘큭!’
거대한 붉은 눈동자, 세로로 찢어진 동공, 그 너머에 존재하는 강대한 격…….
‘……블랙 드래곤이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은 중압감이 든다.
「짐이 곧 너희를 찾아가리라........」
그건 소리나 언어가 아니었으나, 그 의미가 머릿속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지는 기분이었다.
쿵—
이어서 수원역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며, 영상이 막을 내렸다.
- (!) 당신은 앙그라 마이뉴의 '경고’를 접했습니다.
* 해당 지역에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게 도널드 해리가 봤다는 그 잿더미로 변한 도심의 모습인가?
"음? 다 보셨습니까?”
"예……."
"저도 봤는데, 참 엿 같더라고요.”
빅 이벤트는 웬만해서는 그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일종의 경고였다.
전생, 아지 다하카가 등장하기 전에 이현욱은 해외에 있었기에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의 등장도 이렇게 대대적인 예고장이 날아왔다는 걸 듣긴 들었었다.
"이건…… 일종의 오프닝 같은 거라고 봐야겠죠?”
이교준 팀장의 말에 이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게임에서 큰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에 컷신(cutscene)이 삽입되는 것과 같다.
"이 팀장님, 이런 게 경기도 남부 곳곳에 십여 개가 생성되었다고 했죠?”
“예 맞습니다. 무슨 마케팅 하듯, 여기저기에 뿌려댄 것 같네요.”
일단 경기도 남부라면 전생과 똑같이 수원에 등장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곧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지겠군요?”
"하—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 통제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 드래곤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 이번에도 한국이 재앙의 무대? 무려 블랙 드래곤 출연 예고에 공포가 확산
- 세계 최초의 성체 드래곤 등장 예정, 한반도 다시 한번 격전의 무대가 되나?
- EU 길드 연합, 한 개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일 것, 연합 작전 필요성 강조
드래곤…… 끔찍한 재앙인 동시에 가장 값진 보물의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국민은 공포에 떨었지만, 각국의 정상급 플레이어들은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의 부산물은 단 하나만 손에 넣더라도 최고의 장비로 만들 수 있으니…….'
다음 날, 금속 흡수를 하고 있던 이현욱은 우성문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국내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됐군요.”
이현욱은 외부의 힘을 빌려오는 걸 반대했고 우성문도 그 의견에 따랐다.
하지만 이 나라의 의견은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 길드협력지원청 측에서 강력하게 주장했고, 결국 VIP께서도 승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론도 드래곤의 등장이라면 당연히 드래곤 슬레이어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기울었고요.
생각해 보면 우성문 실장이 이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건이 최악이라는 말은 했어도, 자신이 도울 수 없다는 말은 하지는 않았다.
정부의 여러 핵심 인사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기용하는 걸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우성문이었으나, 무소불위는 아니었다.
'그리고 슬슬 우 실장의 막강한 권력도 견제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는 정부 소속 최고의 플레이어로서, 이 나라의 핸들로서 꽤 오랜 시간 군림했다.
그동안 그에 반하는 세력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모든 권력이 결국은 그를 필요로 했다.
그의 굳은 신념과 그가 쌓아온 노하우란, 쉽사리 내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카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성문이 죽은 뒤, 이 나라에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리면서 빌런의 장악이 시작됐었지…….'
그때 온갖 거대 길드를 뒤에 엎은 정치인들이 난립하며 혼란을 자아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나라와 우성문이 모두 멀쩡했기에 그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원흉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뿌리를 뻗어 나가고 있을 터…….
전생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닌 위험들이겠지만, 여전히 발목 잡는 문제이긴 했다.
“……못 막겠죠,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 땅에 오는 거 말입니다.”
이현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여기에서 너무 강하게 나갔다가는…… 솔직히 제 처지가 난감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성문은 이현욱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조롱을 받고 있었다. 이게 별거 아닌 헛소문에 불과하지만, 끌이 더 우스워졌다가는 정치권 내에서 영향력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야생의 세계에서도 ‘알파 메일’의 권위가 사라지는 순간, 무리 내에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즉, 이번에도 외부의 지원을 견제하고 이현욱 원맨쇼로 가겠다고 주장하기는 영 어려웠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이현욱은 의외로 너무나 쉽게 수긍했다. 별다른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경쟁자가 생기는 건 귀찮지만…… 어차피 누가 오든, 나보다 잘 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 블랙 드래곤은, 이미 한 번 잡아본 사냥감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오히려 확실하게 증명해서, 귀찮은 것들을 떨쳐낸다.’
이현욱에 대한 세간의 경쟁의식, 라퓨타와 신단수를 노리는 이리 떼들…….
그들에게, 제대로 된 경고를 한 번 더 날려줄 순간이 온 것이었다.
얼마 후, 에드워드 우즈 측에서 공식적으로 드래곤 레이드 참여를 선언했다.
- 에드워드 우즈의 <슬레이어즈> 한국 정부 요청으로 드래곤 공략 작전 선두에 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세력이, 에드워드 우즈의 라인에 붙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이번 이벤트에 드래곤 슬레이어 이상으로 견고한 라인은 없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이현욱에게 반하는 이들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 코도 코시로의 <에이엔>길드도 <슬레이어즈>를 돕는다.
- 청화 길드를 필두로 韓 거대 길드들도 <슬레이어즈> 버스 탑승 시작?
- 스틸레인 따돌리기, 그는 왜 국내외 길드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나?
혼자서 모든 걸 독식해나가며 몸집을 불리는 신예 플레이어…….
그런 존재는, 플레이어 세계에서는 영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날, 에드워즈 우즈가 영국 뉴스에 출연하여 이현욱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 ……스틸레인, 그가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을 리가 없겠죠. 저희는 이미 한국의 여러 길드와 협력을 맺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제 드래곤 사냥 경험이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란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우리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스틸레인의 협력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제가 이끄는 작전의 좋은 무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건 자신의 지휘 아래 들어오라고, 대놓고 견제를 날린 것이었다.
이에 이현욱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았고, 그건 거절의 의사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국내외 세력들이 비판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 이번 드래곤 레이드 연합은 사실상 反스틸레인 연합? 공략 경쟁 시작되나?
하루아침에 거물이 된 이현욱, 그를 꺾고자 하는 이들…….
어쩌다 보니 그 두 세력 간의 승부가 시작되었다.
***
찰칵! 찰칵! 찰칵! 찰칵!
한 무리가 인천국제공항의 입국장에 등장했다.
그들을 향해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드래곤 슬레이어다!”
"와 진짜 잘생겼네……."
포마드 스타일로 잘 정리된 금발, 깔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바로 <슬레이어즈> 길드의 마스터, 에드워드 우즈였다.
"와 저거 드래곤 아성체 부산물로 만든 그 무기 맞지?”
"그런데 무기 상자를 드래곤 가죽으로 만드는 건 낭비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는 붉은색의 긴 가죽 케이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던데?”
“맞아, 저 안에 든 창이 엄청난 열기를 내뿜어서 그걸 막아야 한다며?”
"아, 그 드래곤의 뼈와 이빨로 만든 창 말하는 거지?”
이어서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우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단언컨대, 드래곤은 그 무엇보다 위험한 몬스터입니다. 제가 런던에서 드래곤을 잡은 뒤, 또 다른 드래곤이 나타나면 이구아나 처럼 키우겠다고 했었죠. 참 바보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리자 모두가 침묵했다.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끔찍한 전쟁이죠.”
찰칵— 찰칵—
"우리는, 반드시, 연대해야만 합니다.”
그건 다분히 이현욱을 겨냥한 말이었다.
"인류의 강함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서서 나갈 때 증명됐습니다.”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지휘 아래에 들어오라는 메시지였다.
".......부디, 힘을 가진 이들이 이 재난에 진지하게 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욱이라는 인물을 독단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선한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에드워즈 우즈의 말이었기에, 그 파급력이 컸다.
한편, 그 장면을 TV로 보고 있던 이현욱은 저도 모르게 냉소를 머금었다.
"이러면…… 고상하고 긍지 높은 신사의 자존심 좀 긁어야겠는데?”
***
잠시 후, 슬레이어즈의 공략 팀은 청화 길드가 제공한 한 호텔의 스위트룸에 모였다.
그 일행 중에서는 13살밖에 안 된 아직 앳된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우와—”
그러나 플레이어의 능력은 언제나 그렇듯 액면으로 평가해서는 안 됐다.
이 꼬마는A등급의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인 에릭 라모스였다.
“우와— 대박이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저 멀리 보이는 공중 도시, 라퓨타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했다.
"이 도시가 몇 번이고 무너질 뻔했다는 거잖아요? 4차 웨이브에, 아바돈 소환에, 블랙 오크 침공에…… 그걸 다 막아내다니, 스틸레인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긴 한가 보네요!”
경쟁 상대인 이현욱을 칭찬하는 말에도, 슬레이어즈 길드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솔직히, 스틸레인이 보여준 활약상은 하나 같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내뱉은 다음 말은 몇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마— 이번에도 스틸레인이, 진짜로 혼자서 드래곤 잡아내는 거 아니에요?”
결국,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소년의 뒤통수를 쳤다.
"악! 아만다, 갑자기 뭐예요!”
아만다 앤더슨, 그녀는 슬레이어즈 길드의 메인 탱커였다.
"이 꼬맹이 녀석, 분위기 깨는 말도 적당히 해!”
"그냥, 혹시나 해서 말한 거예요……."
"아무리 스틸레인 팬이었어도, 분위기를 좀 봐!”
"아니, 진짜로 그냥 혹시나 해서……."
그러자 아만다 앤더슨은 ‘혹시나’라는 건 없다는 듯 거듭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스틸레인은 이번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혼자서 성공 못 해!”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시작했다.
“그 잘난 스틸레인이 지금까지 잡은 것들은 전부 어느 정도 공략법이 있었던 것들이야.”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현욱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몬스터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이미 공략법이 알려져 있던 것이라고, 그래서 이현욱은 ‘미지의 벽’에 부딪히지 않은 거라고 했다.
"어…… 미지의 벽? 그건 또 뭐예요?”
"원래 모든 공략법은 미지의 벽을 뚫어서 얻는 거란다.”
"아! 그러니까, 시행착오…… 같은 거예요?”
"그래, 누군가가 첫 번째 시도를 해서 그 팁을 나눠주는 거야.”
쉽게 말해서, 처음 등장하는 몬스터는 공략하기 어려운 ‘벽’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슬레이어즈 길드는 지금까지 드래곤 공략 방법을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즉, 아직 팁을 나누지 않은 바 다른 이들에게는 ‘미지의 벽’을 넘을 방법이 없었다.
"너 혹시, 드래곤을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게 뭔지 알아?”
그 질문에 에릭 라모스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 그녀가 집게손가락으로 두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윽! 갑자기 뭐, 뭐예요?”
"그건 바로…… 눈을 내리까는 거야.”
"……네? 눈을 깔아요?”
“그래! 아니면 바로 죽는 거야, 명심해!”
그러자 옆에 앉아서 핸드폰을 하던 덩치 큰 중년 남자, 스티페 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드래곤 피어, 그건 웬만한 존재는 감당 못 해.”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에릭 라모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는 드래곤이 내뿜는 근원적인 공포감을 뜻했다.
격이 다른 존재들은,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그 존재와 마주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의 늪에 빠지게 된다.”
"네? 하지만 보스 같은 용감한 사람들은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않잖아요?”
"아니, 그건 감정으로서의 공포가 아니라…… 어떤 법칙으로서의 공포다.”
그걸 견뎌낼 수 있는 플레이어는 사실상 없다. 최강이라도 불리는 이들도 그 존재 앞에서는 얼어붙고 만다. 그리고 모든 능력치가 대폭 감소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 모두 피어에 걸리는 순간…… 그냥, 일반적으로 사냥당할 수밖에 없어.”
스티페 마린, 그의 말은 묵직했다. 그 역시 런던 드래곤 사태의 공략 멤버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보스가 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 자리에서 산화했을 거다.”
"나는 다행히도, 정신 방벽을 칠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지……."
이번에는 드래곤 슬레이어, 에드워드 우즈가 직접 나섰다.
그는 자신이 직접 타온 커피와 코코아를 팀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운이 좋게 살아남은 덕에 2차 공략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거란다.”
"아…… 그랬던 거예요?”
"하지만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단다. 놈의 쓰는 전장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웬만해서는 2차원 공간으로 움직인다. 즉, 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드래곤은 3차원 공간을 다룬다. 쉽게 말해서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 단순명료한 차이점은 쉽사리 좁힐 수 없는 전술상의 격차를 만들어냈다.
"그 괴물을 지상으로 떨어뜨리지 못하면, 우리의 전투 방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돼.”
그러니까, 드래곤을 어떻게든 지상으로 끌고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그래서 보스께서 런던에서, 놈의 등에 어떻게든 올라타셨던 거네요!”
에드워드 우즈는 2차 공략 당시, 운이 좋게도 드래곤 아성체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매달리고 버텨서, 드래곤의 날개의 피막을 죄다 찢고 추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솔직히 운이 따랐던 것 같아.”
만일 그 순간, 균형을 잃거나 손에 힘이 빠져서 드래곤의 등에서 떨어졌다면……. 다시 올라탈 기회가 찾아오긴 했을까? 아니, 애초에 첫 번째로 올라탄 것 자체부터 운이 좋았다.
"헉! 그러면 도대체…… 런던 때보다 더 큰 드래곤을 어떻게 떨어뜨려야 하죠?”
이에 에드워즈 우즈는 커피를 후— 불고는 입을 열었다.
"바람, 드래곤의 비행도 결국은 바람을 타고 나는 양력을 이용해. 물론 체내에 존재하는 막대한 양의 비행석을 통하긴 하지만, 날개의 움직임이 봉인된다면 비행 능력이 떨어지겠지?”
"아!"
"그래서 S등급의 바람 통제자 코도 코시로, 내 오랜 친구가 우리를 돕기로 한 거다.”
그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듣자, 에릭 라모스의 얼굴에 묘한 흥분감이 떠올랐다.
지금 여기에 모인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새삼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다음 순서를, 자신이 맡은 순서를 말해주기를 내심 기다렸다.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에드워드 우드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다음…… 놈이 광역 스킬 봉인을 거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네 힘이 필요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에릭 라모스, 그는 마법 해체에 능통한 플레이어였다.
그는 한껏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너만 믿고 있다.”
“헤헤— 고맙습니다.”
"코코아 식기 전에 얼른 마셔.”
이 팀, 어린 남자아이의 시선으로는 보기에는 아주 완벽하게 느껴졌다.
후릅—
"그런데 이 정도면 우리가 그 어마어마한 드래곤을 잡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겠죠?”
그렇게 희망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는데…… 에드워즈 우즈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마지막 순간, 드래곤은 ‘고유 권역’이라는 궁극의 기술을 발동할 거다.”
고유 권역, 고유한 힘을 일대에 퍼뜨려서 환경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 그건 ‘고유’라는 명칭에 따라서 드래곤마다 완전히 다른 속성과 형태를 띠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그건 예측할 수 없어. 싸워보고, 확인한 뒤, 후퇴해서 반격을 준비해야 해.”
“……네? 한 번 도망쳐야 한다는 소리예요?”
“그래, 내 생각에는 드래곤이란 존재는 설계상 1회 차에 공략 가능한 대상이 아닌 거야.”
즉, 무조건 한 번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 패배의 순간을 눈치채고 있다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스틸레인은 앞선 것들은 예측할 수 있어도 그 고유 권역만은 절대로 모를 테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정보는 오로지 에드워즈 우즈의 팀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스틸레인은 완전히 실패할 거다. 지금처럼 고집부리다가는 죽게 되겠지......."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에릭 라모스는 짐짓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에릭, 네가 스틸레인 팬인 건 알겠지만, 혹시 그를 돕다가는 우리 모두 위험해질 거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결국, 드래곤의 가죽, 뼈, 심장 모두 우리의 것이 될 거야.”
그런데 그때 누군가 호텔 방 안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슬레이어즈 길드의 직원이었다.
"보스, TV 좀 보셔야겠습니다.”
"응? 무슨 일인데 그러죠?”
"스틸레인이……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방 여기저기에서 조소가 피어났다.
"설마, 뒤늦게라도 굽히려는 건가…… 이러면 영 재미없는데?”
"하긴 아무리 스틸레인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겠죠."
지난 이틀 간, 에드워드 우즈는 단 몇 마디만으로 한국의 여론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스틸레인이라는 국가적인 영웅을, 위기 상황 속에서 제 잇속만 챙기는 속물로 포장한 것이었다.
이내 TV가 켜지고, 기자들 앞에 서 있는 이현욱의 모습이 나왔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사실은 조금 의아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힘을 합치지 않겠다고 말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꽤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는데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그렇다면, 슬레이즈 연합 쪽에 합류하겠다는 말씀입니까?
- 그게 …… 힘을 합치겠다는 게 꼭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공략의 지휘를 맡는다는 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겠지요.
- 어…… 그렇다면 드래곤 슬레이어보다,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 아, 몇 년 전에 드래곤 아성체를 잡은 경험도 뭐,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 대목에서 슬레이어즈 길드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저는 그것보다 확실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터졌다.
"아니, 저게 무슨 소리야!”
아만다 앤더슨이 꽥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 정보가 뭡니까? 설마 공략 방법입니까?
그러자 이현욱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현욱 씨, 그래서 그게 뭡니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 그건…… 당연하지만,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거 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의 눈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그 너머의 에드워드 우즈를 바라보듯…….
- 슬레이어즈 쪽에서, 제 지휘를 따르겠다면 알려드릴 수도 있겠지만요. 앞서서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건 게임이 아니라 끔찍한 전쟁이라서 연대해야만 합니다. 멋진 말이죠. 그런데…… 무작정 힘을 합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팀을 구성하는 게 맞겠죠.
지금 저 말은, 에드워드 우즈보고 역으로 자신의 아래로 들어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된 방식’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드래곤 레이드를 앞두고 말이다.
"......."
그 말을 듣고 있던 슬레이어즈의 길드원들은 에드워즈 우즈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들이 아는 보스는 의외로, 저런 도발을 너그러이 넘기지 않는 편이었다.
“……스틸레인이, 상황을 냉정하게 볼 줄 모르는군.”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때, 스틸레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가,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대목에서 에드워드 우즈는 냉소를 머금었다.
"쯧— 너무 허술한 언론 플레이를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