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서해안에 상륙한 블랙 오크 군단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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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무너진 빌딩들 사이로, 수백에 달하는 블랙 오크들이 군집해 있었다.
이 땅을 침략한 블랙 오크의 군단 중 정예에 해당하는 별동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무기를 움켜쥐고 도열해 있을 뿐, 아직 그 어떤 행동을 개시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사방에 강철로 만들어진 철판들이 내리박혀대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성미가 급한 전투 종족일지라도 상황을 유심히 지켜본 뒤에 움직이는 게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현욱이 묠니르를 들어 올리고 하늘이 번뜩이는 순간, 몇몇 블랙 오크는 깨달았다.
방금, 사방에 내리박혔던 철판은 자신들을 가두는 거대한 강철 우리이며,
이대로 있다가는 또 한 번 이현욱에 의해서 몰살을 당할 것이란 걸…….
그어어어——!
보스 몬스터, 전사장 수막트의 고함을 시작으로 블랙 오크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이내 십여 개의 투창이 정확하게 이현욱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현욱이 더 빨랐다. 그는 철판을 들어 올려서 자신의 몸 주변을 둘러버렸다.
텅—텅—텅—텅—
그러는 동시에 묠니르를 들어 올린 채 ‘염화의 폭풍’을 유도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염화의 폭풍’이 시작됩니다!
하늘 위로 붉은색의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구름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아——!
일종의 플라스마 덩어리로서, 화염 다발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
'이건…… 파에톤이 썼던 그 광역 스킬이다.’
이현욱은 제주도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열기를 떠올렸다. 이 스킬이 그 1~5단계 중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터뜨린다면, 웬만해서는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
‘이렇게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는 훨씬 치명적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디에블—스토녹스의 꼭두각시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놈의 주변에 서 있던 블랙 오크 수십 마리가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입안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같은 게 피어나서, 디에블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직후, 디에블이 양손을 하늘을 내뻗었고—
웅——!
이번에도 대규모 방어막인 검은 돔이 피어나며 블랙 오크 군단을 뒤덮었다.
‘역시나…….'
이현욱은 그걸 예상하였고 즉시 미리 하늘에 띄워둔 모글레이 3개를 동시에 낙하시켰다.
저고도에서 떨어지는 것만큼의 위력은 없겠지만, 아직 ‘쇼크웨이브’가 남아있었다.
쩡——! 쩡——! 쩡——!
충돌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강력한 충격파가 검은 돔의 상층부를 껍질 벗기듯 날려버렸다.
‘지금이다!’
그 순간, 하늘에서 모여들었던 붉은 화염 다발들이 회오리치며 내리꽂힌다.
콰—아—아—아—아——!
블랙 오크의 대열의 한 가운데를 정확히, 믹서의 칼날처럼 파고 들어가 헤집는다.
콰—아—아—아—아——!
그 광범위한 일격에 수백 마리의 블랙 오크가 동시에 입을 쩍 벌리는 게 보였다.
고통에 찬 표정들…… 아마도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폭풍, 요란한 소리가 온 세상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 블랙 오크 정예 전사를 처치하여 공적 포인트를 얻습니다. (+13)
- 블랙 오크 정예 전사를 처치하여 공적 포인트를 얻습니다. (+12)
- 블랙 오크 정예 전사를 처치하여 공적 포인트를 얻습니다. (+11)
그저 공적 포인트가 들어오는 시스템 메시지만이 이 스킬을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일대의 아스팔트가 끈적하게 녹고 열풍을 따라서 비상하여 검은 나선형을 그렸으며,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온갖 석재 파편들이 치솟으며 빌딩만 한 모래폭풍이 용솟음했다.
콰—과—과—과—과——!
병화 폭풍, 파에톤이 썼던 것보단 범위가 작지만, 열기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이현욱 역시 견디긴 힘든 열기를 느끼며,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약 30초 뒤, 염화 폭풍이 멎으며, 열기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강서윤과 한태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거 파에톤이 썼던 그 기술 아니에요?”
"너 …… 제주도에 대체 뭘 주워온 거냐?”
그 둘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차례차례 물었다.
이어서 오경표가 뒤따라 등장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미친, 나도 정신을 못 차리겠군…… 이걸로 끝난 건가?”
그러나 강서윤이 고개를 내저으며 활시위에 화살을 내걸었다.
“쯧, 안타깝게도 보스 몬스터는 두 놈 모두, 아주 멀쩡하니까, 긴장 풀지 마요.”
"응? 아니, 저 미친 열기 속에서도 멀쩡하다니, 그게 진짭니까?”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제 눈에는 보이네요. 저기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요.”
그녀는 사수 계열 플레이어 중 최상위 수준인 만큼,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염화 폭풍이 완전히 가시고 파괴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폼페이 유적의 참극을 재현한 듯, 고통스러운 몸부림의 화석들이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강서윤의 말처럼 두 개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으으——”
고통보다는 분노가 느껴지는 신음…… 수막트와 디에블, 두 보스 몬스터에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다수의 블랙 오크의 생명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몸에 방어막을 둘러버린 듯했다.
"젠장, 지긋지긋하군…… 또 무슨 수를 썼길래 저렇게 멀쩡한 거야?”
오경표가 창대를 고쳐 잡으며 이를 갈아댔다.
"자, 보스 몬스터니까 우리도 긴장하—”
그 순간, 수막트가 전투 도끼를 들어 올리더니 바닥을 내리쳤다.
콰—과—과—과——!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린 아스팔트 도로가 파도처럼 치솟으며 달려든다.
“—내가 막습니다!”
오경표가 앞으로 나아가며, 창을 있는 힘껏 내질렀다.
훙——!
그의 창끝에서 날카로운 풍압이 일어나며 아스팔트 파도의 중심을 찔렀다.
그러자 마치 마취총이라도 맞은 듯, 파도의 전진속도가 확연하게 느려졌다.
하지만—
쾅! 쾅! 쾅! 쾅!
수막트가 연달아 도끼질을 계속해대자, 지반이 액상화되며 장마철 강물처럼 몰아친다.
"어, 미안하지만 저건 좀……."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이 사방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순간, 놈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현욱, 놈이 당신을 노리니까 조심해—!”
강서윤이 소리치며 바닥을 구르는 동시에, 수막트를 향해 화살 쏘아 보냈다.
쉬—쉬—쉬—쉬——
하지만 수막트는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4발의 화살을 쳐내버린 뒤, 이현욱을 향해 도끼를 들어 올렸다. 이현욱은 몸 주변에 띄워 놓았던 철판들을 날카롭게 변형한 뒤 쏘아 보냈다.
"그아아아—한낱 인간 주제에—감히—찢어—버리겠다—!”
놈은 마치 야구 배트 휘두르듯, 그것들을 모조리 쳐내며 포탄처럼 날아들었다.
‘젠장, 이건 좀 위험하다.’
이현욱은 꺼내 들면서도 직감했다. 저 2m짜리 도끼의 사정거리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때, 이현욱의 바로 옆으로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저리 비켜 있어!”
한태산, 그가 이현욱 옆으로 날아들었다.
이현욱 역시 미련 없이 물러서며,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건 양보하죠.”
그러자 한태산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랄, 양보는 무슨, 네놈 머리통 깨질 뻔한 거다!”
제주도 파에톤 레이드 때는 한태산의 예상이 모조리 틀렸다는 걸 증명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이 맞았다. 142레벨의 전사 계열 보스 몬스터와 뒤엉키는 건 미친 짓이었다.
‘나는 잠깐만 뒤엉켜도 구겨져 버릴 거다.’
아무리 일반적인 전사 계열 플레이어보다 힘이 세졌다고 한들, 저건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는 한태산 말고는 저 괴물과 대거리할 수 있는 플레어는 없을 것이었다.
직후, 한태산과 수막트, 두 인영이 허공 포물선 상에서 엉켰다.
그가 대각선으로 날아드는 도끼날을 피해내고 놈의 복부를 프론트 킥으로 걷어찼다.
뻐—억——!
적중, 일순간 소닉붐이 일어나며 수막트의 몸이 수직으로 날아가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큭—"
그런데 바닥에 착지하는 한태산이 비틀거렸다. 그의 발목이 직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뒤틀린 발목을 손을 대지도 않고 맞춘 뒤 바닥에 대고 발목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저 자식…… 오랜만에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놈이군……."
"한태산 씨, 웬만하면 관절 기술을 써서 상대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현욱은 수막트와 뒤엉킬 힘은 없었다만, 근접 격투에 관한 지식은 충분했다.
흔히 말하길, 인간이 고릴라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 있다면 초크(Choke)라고 한다. 그건 지금 같은 경우에도 해당했다. 물론 그조차도 성공할 확률은 극악이겠지만…….
"나도 그런 것쯤은 알아 인마, 근데 너 혹시 또 뭐 숨겨둔 거라도 있냐?”
그건 비아냥이라기보다는 그런 게 있다면 빨리 꺼내라고,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저번에 제주도에서도 재수 없게 뭔 개 같은 거 막 꺼내서, 응? 이번에는 없어?”
"......."
"뭐 없으면 나대지 말고 있어라,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긴 있었다만, 아직 꺼낼 게 아니었다.
그때, 수막트가 몸을 일으켰고 모두가 긴장했다.
"전부, 정신 바짝 차려요.”
저 괴물은 제자리에서 바닥을 박차는 것만으로 단숨에 수백 미터를 좁힌다.
쿵— 쿵— 쿵— 쿵—
그런데 놈이 있는 곳으로부터 웬 심장 박동 같은 게, 지진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의 몸이 팽창하는 게 언뜻 봐도 느껴졌는데, 온몸에서 핏줄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씨발, 안 그래도 개 같이 딱딱하던데, 한 번 더 강화해?”
한태산이 그답지 않게 열은 푸념을 내뱉었다.
방금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 놈의 전력을 파악했고, 웬만해서는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저건 보스 몬스터이기에, 앞으로 추가 ‘페이즈’가 있을 터…….
"저런 놈하고는 싸움이 아니라 레이드를 해야 하는 거, 아시겠죠?"
“……나도 아니까, 잔소리하지 좀 마라, 안 그래도 짜증 난다.”
그런 면에서 한태산 조차도 수막트를 1대1로 붙잡아두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에 보스 몬스터라는 건 혼자서 잡으라고 설계된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한태산이 탱킹을 하고, 다른 이들이 공격하면 어떻게든 공략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이 자리에 있는 보스 몬스터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괜히 ‘전쟁 이벤트’가 아니다.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는 사이에 디에블—꼭두각시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현욱은 그놈을 향해, 은근슬쩍 허공에 띄워두었던 모글레이를 추락시켰다.
하지만 놈이 손을 휘젓는 순간, 발아래 그림자로부터 거대한 검은 손들이 피어났다.
쩡! 쩡! 쩡!
그리고 날아드는 모글레이를 밀어내듯 쳐냈다.
그 무거운 걸 저리 쉽게 쳐내다니, 역시 보스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다.
그리고 이어서 목에 달리 염주를 잡아 뜯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삼키는 순간—
"크아아아—!”
놈의 입안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오고, 온몸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주의! 해당 지역에 고대의 부두술이 시작됩니다!
‘역시나 저걸 사용하는군?’
부두술, 그건 쉽게 말해서 언데드를 일으키는 강령술이었다. 네크로맨서의 그것과 필적하는 죽음의 마법…… 물론, 그런 게 기본 스킬인 네크로맨서와 달리, 엄청난 대가를 필요로 했다.
가령—
크어어어…….
디에블, 꼭두각시지만 여전히 보스 몬스터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놈이, 몸서리친다.
이어서 두 눈에서까지 붉은빛이 발하더니, 순식간에 파스스— 잿더미가 되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잿더미 안에서부터 웬 그림자가 일렁이며 몸을 서서히 일으킨다.
- 악령 구도자 (LV. ???)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주변의 시체를 구울로 만드는 스킬이다.’
고대 신을 믿는 광신도 주술사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쓰곤 했던 기술이다.
그런데, 보스 몬스터 등급이 주술사라면 그 규모가 차원이 다를 것이었다.
이내, 화석처럼 굳어 있던 블랙 오크들의 시체가 몸을 뒤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쩍—쩍—쩍—쩍—
수막트를 경계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던 이들도, 그 현상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썅, 저건 또 뭐야!”
오경표가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곳에서 언뜻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풀풀 풍겼기 때문이다.
끄에에에——!
"저건…… 구울이잖아!”
구울(Ghoul), 상위 언데드 종으로, 좀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뭐? 저 수백 마리가 한 번에 구울이 된다니, 그게 말이 돼?”
"그러니까 보스 몬스터겠죠. 미치겠네, 진짜……."
그리고 어떤 존재가 구울로 변모하는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최고의 전사 몬스터인 블랙 오크라면…… 정말로 까다로운 적수다.
끄에에에——!
고막을 찢는 듯한 괴성들이, 일제히 울려 퍼지며 기괴한 공명을 자아냈다.
그것들이 검게 타버린 몸뚱이를 움직이며,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광견병이 걸린 들개 떼처럼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끄에에— 끄에에—
- 블랙 오크 구울 (LV. 85)
한 마리에 무려 85레벨…… 그런 게 적어도 사백여 마리다.
저건, 웬만해서는 막을 수 없는 공세였다.
“……후퇴해야 해요!”
그걸 직감한 강서윤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등 뒤로 반투명한 여우 꼬리를 피워내며 화살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퍼—버—버—버——!
그녀의 화살이 내리박힌 곳에서 백색의 여우 불이 흘러나오며 회오리를 자아냈다.
이어서 안양듀오가 서로에게 중첩 버프를 걸며, 사수—강준성이 총을 난사했다.
타—다—다—다—다——!
그 광역 공격의 연속에 구울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것들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더라도,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다.
끄에에— 끄에에—
……오로지 살육과 식욕에 지배되는 죽음의 군단의 진격을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한태산— 지금 당장 피해야 해!”
그녀의 말에, 당장이라도 수막트에게 달려들 것 같은 한태산이, 토 달지 않고 돌아섰다.
"오늘 진짜 기분 개 같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욱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현욱은 유독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너 이 새끼…… 또 뭐 있지?”
***
같은 시각,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주전장이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가면서 보스 몬스터 두 마리가 전부 빠진바 전투의 양상은 플레이어 측이 크게 유리했다.
"그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젠 어떡합니까?”
온갖 폭음이 오고 가는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악다구니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눈앞의 전투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맺혀 있는 듯했다.
"이현욱…… 어떻게 매번 이렇게 미끼를 물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요.”
그는 중국 <반고>길드 소속의 위쥔이라는 플레이어로, 이번 전투에 지원 참여했다.
하지만 그건 위장 신분이고, 사실은 중국 공안부의 사조직 ‘암성’ 소속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르신께서도 이번 작전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예상하셨잖아?”
그의 옆, 큰 쇠뇌를 짊어진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 역시 암성의 비밀 요원 중 한 명으로, 이들은 이번 전쟁에서 이현욱을 암살하기 위해 투입된 빌런의 암수 중 한 팀이었다.
"아, 어르신께서 블랙 오크 국왕과 좌담하신 뒤로 이번 작전에 큰 투자를 하셨다고 했죠?”
"그래, 나도 몇 가지를 전해 들었는데, 이현욱이 그걸 전부 막아 낼 가능성은 솔직히 없다.”
이현욱의 활약상을 뻔히 지켜봤으면서도,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이는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다면, 품기 어려운 자신감이었다.
"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혹시 그 신의 약인가, 음료인가 그거 말씀입니까?”
"신의 음료, 넥타르, 어르신이 그 물건을 건네신 건 사실이지만, 몇 가지가 더 있다.”
쾅—!
그들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며, 어디에선가 날아드는 마법 투사체를 손쉽게 피해냈다.
"저기, 쟤들 보이나?”
먼발치, 반쯤 뭉그러진 도심지의 2차선 도로 위로 백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들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오룡거(五龍車)라고 불리는 비공정이 떠 있었다.
세인트 돔의 ‘와이트 트리 가드’ 다음으로 유명한 신성 군대 ‘ROK AMT 신성기사단’이었다.
"저것들이 죄다 여기에 있는 이상 그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응할 힘이 없을 거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고대 신의 어둠 계열의 주술인 부두술, 그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중국의 플레이어들은 상하이 수복 전쟁 때 경험한바, 그 주술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설사 스틸레인일지라도 그걸 막아낼 능력까지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 신성력이 인첸트 된 무기만으로는 감당해낼 수 없을 거다.”
그들은 사일런스 마법을 건 채, 한가롭게 전장을 산책하며 킬킬 웃었다.
"그래서 결국은, 언데드에게 뜯어 먹히는 최후를 맞이할 거다.”
"오…… 그것참 괜찮은 결말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아,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미국의 핏불 형제도 대기 중이잖나?”
***
끄에에— 끄에에—
블랙 오크 구울 떼거리가 온몸의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팔다리를 뒤흔들며 도로를 질주한다.
"젠장, 더럽게 빠르잖아!”
초인에 가까운 플레이어, 그것도 랭커일지라도 구울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육체적 한계 따위는 무시하고, 육체를 파괴하며 내달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들을 쳐내며, 힘겹게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때, 서울역 광장 곳곳에 흩어져서 엄폐 중이던 AMT 병사들이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젠장, 쓸데없이 쏘지 말고 전부 빨리 후퇴해요!”
강서윤이 온 힘을 다해 달리면서도 마나 메신저를 꺼내어 AMT 측에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저들도 결국 언데드 파도에 휩쓸리고 말 터였다.
그리고 랭커가 아닌 이상, 85레벨짜리 구울의 습격은 견딜 수 없는 재난이었다.
‘그래도 흩어지면, 몇몇은 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아니, 대기해!”
그렇게 외친 건 이현욱이었다.
- 칙— 방법이, 있는 건가?
이에 마나 메신저 너머에서 김강석 대령이 물어왔다.
"예! 지금 당장, 화력 지원을 준비해주십시오!”
그러나 이현욱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강철 무기를 퍼부으며 견제했지만, 말 그대로 견제뿐이었다.
강력한 신성력이 없는 한, 저것들을 리타이어 시킬 방법은 현재로서 없었다.
물론, 서울역 광장의 AMT 부대에 신성 계열 플레이어가 있겠지만…….
"안 돼요! 저건 단순한 화력으로는 못 잡아요! 엄청난 신성력이 필요하다고요!”
강서윤의 의문 섞인 외침에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있어요.”
“……뭐?”
그는 고개를 들어서 라퓨타를 올려다보았다.
“—여상민, 지금이다!”
- 예! 준비되었습니다!
그 순간, 라퓨타의 하단 부가 열리며 옅은 빛이 번뜩였다.
그건, 서울 어디든지 단숨에 텔레포트할 수 있는 <광역 강하 장치>였다. 즉, 라퓨타에 대기 중이던 누군가가,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내 그 빛줄기가, 그들의 바로 앞, 한강대로 위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수십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절그럭— 절그럭—
하늘에서 현현한 것은, 회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었다.
그 중심에서 덩치 큰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바이저를 들어 올렸다.
"스틸레인, 오랜만입니다.”
피터 클라크, 와이트 트리 가드의 단장이었다.
"피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이현욱의 말에 그가 대검을 뽑아 들고는 바이저를 내렸다.
"지난번에는 신세만 졌지만, 이번에는 저희가 어떤 존재인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런데 그 빛줄기에서 걸어 나온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절그럭— 절그럭—
35명의 와이트 트리 가드 뒤로, 거대한 갑옷들이 줄지어서 도열했다.
그건…… 리빙 아머였다.
- 리빙 아머의 ‘마스터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43/43)
정확히는 성녀 에밀리아 뮐러의 축복으로 인첸트 된, 신성한 갑주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역시나 신성력을 가득 품은 청동 파수꾼, 탈로스가 있었다.
「(˘▾˘) 아아—왠지, 마음이 경건해진 것 같습니다…….」
왜—애—애—앵——!
신성한 4개의 전기톱이 울부짖었다.
이로써, 언젠가 충돌하게 될 네크로맨서의 죽음의 군단,
그에 대응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신성력을 품은 강철 군단,
그 프로토타입이 첫 실전을 치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