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전쟁 종결자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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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아덴만과 홍해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 지부티에 도착했다.
그곳의 세관을 통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컨테이너선의 원래 소유주인 은도즈 연맹에서 미리 손을 써뒤서 사실상 프리 패스였다.
하지만 문제는 선박을 기다리고 있는 은도즈 연맹의 ‘운송책’들을 속이는 일이었다.
“선장, 허튼짓하면 어떻게 될지 기억하고 있겠지?”
이현욱의 말에 배 밖으로 나가려던 선장이 멈춰 섰다.
"어차피 이 꼴이 난 이상, 저쪽에 다시 붙어도 죽는데 무슨…… 이제 이일도 손 뗄 거요.”
그는 인도의 밀수업자로서, 유라시아 암시장에서는 꽤 이름 좀 날리던 인물이었는데,
약 2년 전부터 은도즈 연맹에 붙어서 전쟁 물자 수송을 전담해오고 있었다.
"이 중요한 일을 제대로 망쳐버렸으니 그 자식들이 날 살려줄 리가 없잖소? 돈이 좋아서 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지만, 돈을 벌려면 목숨이 있어야 하니까 바보짓은 안 할 거요.”
“그래, 잘 생각하긴 했는데, 친구들 얼굴 보면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럴 때는 이 좆 같은 개목걸이를 만지면서 당신의 말을 똑똑히 되새기죠. 아멘—”
그는 자신의 목에 달린 ‘구속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누구요? 얼굴도 계속 가리고 있고…… 그 불가사의한 힘은……."
"왜? 배신하기 전에는 알고 싶나 봐? 네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만 기억해.”
잠시 후, 부둣가로 운송책들이 나타났고 선장이 그들과 접선했다.
이현욱은 후긴을 통해서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 이봐, 목걸이 장만했네? 그런데 무슨 디자인이 그렇게 투박해? 꼭 죄수 같잖아?
- 하하하…… 이게 또, 첸나이에서는 유행하는 개목걸이 스타일인데, 뭘 모르는군?
한 남자의 물음에 선장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둘러댄다.
- 음…… 자네 배에 몇 달 사이에 못 보던 얼굴이 많아졌는데?
- 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애들도 말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신병들 좀 뽑았지, 뭐.
그렇게, 선장이 잘 둘러대자 운송책 쪽에서는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한편 HPA 조직원들은 블랙 팩토리의 선원으로 위장한 채, 인형 병기들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트럭에 인형 병기를 옮겨 싣는 작업 내내 수송책들과 가까이 붙어 있어야만 했다.
"이봐, 너!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에서 왔나?”
"아니, 이 신입이라는 친구들, 왜 이렇게 무뚝뚝해?”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정체가 들통나는 수가 있기에, 웬만해서는 침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 3시간 뒤, 인형 병기 꽉 채운 15대의 트럭 행렬이 지부티 항을 떠났다.
"—그럼 수고하라고, 싹수없는 뱃놈들아!”
이현욱과 HPA 조직원들은 항구에 남아서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해상 수송과 육로 수송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므로, 저 행렬에 낄 방법이 없었다.
“……자, 우리도 따라갈 준비를 하죠.”
그렇기에 미리 준비해둔 몇 대의 차량으로 수송 행렬을 앞질러 가 있을 예정이었다.
***
해가 넘어가며 아프리카의 초원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시각…….
"너, 너희는…… 누구냐?”
에티오피아 아마르 산맥 산간 도로, 수송책 리더가 흙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현욱과 HPA가 산간 도로를 타고 우회하여 트럭 행렬을 앞지른 뒤, 기습한 것이었다.
그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15대의 트럭과 인형 병기 전체를 온전히 확보했다.
"누구긴, 딱 보면 모르겠냐? 너희의 악행을 끝내러 온 사람들이다.”
HPA 팀장, 알베르토 피를로가 수송책 리더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HPA는 ‘인도주의’를 표방하지만, 불살주의(不殺主意)는 아니었다.
"큭, 서, 설마…… 바, 반란군 놈들이냐?”
그는 거기까지 들은 뒤, 단검으로 놈의 목덜미를 그어버렸다.
촥—!
“팀장님, 전 트럭 점거했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뜬다.”
그는 명령을 내린 뒤 이 산간 도로에 벌어진 풍경을 한차례 살폈다.
사방에 늘어진 건 적들의 시체뿐…… 조금의 실수도 없었던 완벽한 기습 작전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소피와 함께 서 있는 한 남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로, 저 남자의 계획대로 됐잖아?”
알베르토는 이 작전을 반대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인형술사의 전력 확장을 억제하는 게 중요하거늘, 그걸 욕심내서 적진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서 대놓고 훔치겠다니…….
그런데 정말로 그게 됐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성공했다.
다만, 이렇게 일이 잘 풀려갈수록 한 가지 의문은 짙어져 간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
앞서 듣기로는 리빙 아머를 조종하여 블랙 팩토리를 탈환한 것도 저 남자라고 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보여준 전투는 그런 조종 능력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장면만 본다면, 전사 계열이라고 봐야 한다.’
기습이 시작된 직후, 그는 그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가서 검으로 5명을 베었다.
‘그것도 단 몇 초 만에…….'
그 직후 마법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그을리지 않았다.
‘저 남자는 탱커, 아니, 부르져(Bruiser)다. 그것도 A등급 이상의 부르져야.’
거기에다가 리빙 아머 조종 능력까지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의 특성이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인지 모르겠지만,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해.’
알베르토는 저 남자의 실력을 인정하는 한편, 경계심을 억누르지 않았다.
저런 실력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제 발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
즉, 저자가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끝까지 신분을 밝히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다.’
이렇게 정세가 안 좋은 나라에는, 한 몫 챙길 요령으로 장사치들이 꼬이는 법이다.
그는 심복 둘에게 저 남자를 예의주시하라고 명령해두었다.
직후, 핸들을 잡은 주인이 바뀐 트럭 행렬은 방향을 틀어서 전혀 다른 도로로 진입했다.
이 길도 똑같이 CAR로 가는 길이지만, 은도즈 연맹의 검열을 피해갈 가능성이 컸다.
이현욱은 최선두의 왜건에 탑승했다.
“후…… 그런데 앞으로 또 며칠을 달려야 할 테니, 안심하기는 일러요.”
조수석에서 소피가 말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그 이름대로 아프리카에서도 내륙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은 넓은 건 둘째치고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다.
그 무법의 허허벌판을 통과해 지나가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한 나흘은 더 달려야 할 거예요. 그런데 저…… 혹시 어디 아파요?”
그녀가 이현욱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남자가 어디가 아플 리가 없지만, 그래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어제 물어보려다가 말았는데, 며칠 전부터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요.”
지난 8일간의 항해를 거치며 이현욱의 안색이 부쩍 수척해 보였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체내 용광로’를 무리하게 돌렸기 때문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냥 열대 기후가 안 맞는지 조금 피곤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져 있는 상태인 건 맞았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이렇게 머리가 복잡한 건 처음인 것 같군.’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메인 퀘스트’ 때문이었다.
이현욱은 그 내용을 시간이 날 때마다 몇 번씩 곱씹었다.
[메인 퀘스트]
- 두 번째 삶의 기회, 의무, 운명…….
축하합니다! 당신은 두 번째 삶이라는 기회를 훌륭하게 수행 중입니다. 그리 하여 ‘결말’로 나아갈 수 있는 운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세계의 핵심 요소들을 목격하고, 진실로 한 발자국 다가가십시오!
1) 이 세상 어딘가에 열려 있는 ‘블랙 게이트’를 추적하시오.
2) 전생—첫 번째 세계에서 찾아올 ‘차원 이동자’를 처치하시오.
3)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와 조우하시오.
‘결말, 블랙 게이트, 차원 이동자, 진실…… 저 블록은 또 뭐야?’
전부 다 하나 같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
그중에서 단연 거슬리는 건 2번 항목이었다.
‘전생, 첫 번째 세계에서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이라니…….'
이현욱의 첫 번째 살았던 삶, 그 세계에서 누군가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과거의 몸으로 ‘회귀’한 이현욱과 달리, 원래의 몸으로 차원을 뛰어넘어서.......
'……이건 영 좋지 않다. 8년 후의 힘을 가진 자라면,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그게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다만, 최악의 상대가 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게 네크로맨서라면…….'
이현욱은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쨌든, 이 재앙에도 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임으로 완전히 일그러져버린 세상이다.
‘그래서, 이 게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 세상 모두가 한 번쯤은 품었던 의문이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이처럼 게임과 시스템은 여전히 미지(未知)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새 완전히 적응했다.’
해결할 수 없는 진실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었고,
그렇게 생존을 위해서 투쟁한 결과로, 인류는 적응에 성공했다.
즉, 이제는 이 게임을 그저 새로운 질서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말로, 포기해버린 거다.’
지금 이 순간, 이현욱은 목표가 수정되었다.
‘내가, 이 게임의 끝을 본다.’
***
아프리카를 횡단해 나아간 지 3일이 되는 날 새벽, 마침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남수단 간 국경 지대 초원의 한 돌산 아래였다.
그곳에 4대의 왜건이 대기 중이었다.
"소피, 저들이 저항군들입니까?”
"맞아요. 아마도 정예부대가 마중 나왔을 거예요.”
그쪽으로 접근하자 한 흑인이 양팔을 벌리며 환대 의사를 보였다.
"—아! 소피 그린, 우리들의 든든한 지원군께서 돌아오셨군!”
"리앙고, 무사하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지 반갑게 끌어안았다.
"어, 그런데 보위는 안 왔어요? 둘이 항상 같이 다니잖아?”
"그게, 형은 지금 기분이 영 좋지 못해서 말이야……."
리앙고라고 불린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쪽, 한 왜건에서 덩치 큰 흑인이 내리며 선글라스를 벗더니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보위인 듯했는데, 리앙고와 달리 소피 일행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했다.
“아…… 우리가 <올드 피스>와의 계약 조건 확보에 실패해서 저러는 거지?”
“하— 미안해 소피, 타국민인 우리를 목숨 걸고 돕는 당신들한테 저런 태도라니……."
"아니야, 이해해. 내가 호언장담해서 다른데 쓰일 수도 있는 자금을 받아갔잖아.”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기에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때, 소피가 이현욱 옆에 앉아서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저 둘, 베르트랑 형제는 저항군 사령관의 조카들인데 사실상 이인자들이죠. 그리고 형인 보위가 올드 피스 길드와의 거래를 주장해서, 저희를 통해서 그쪽과 접촉했던 거고요.”
잠시 후, 보위가 다가왔다.
"소피, 이 위험한 곳까지 다시 찾아와주신 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보위, 마지막 열쇠 파편을 확보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제가 호언장담했는데……."
그는 그 대목에서 한동안 말이 없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은도즈 연맹의 주요 무기를 가로채서 시간이라도 벌었으니 괜찮습니다.”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는 건, 딱 시간만 벌었다는 것이었다.
이 내전을 끝낼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인 <올드 피스>길드의 지원군…… 그걸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제삼자인 이현욱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이현욱의 정체를 밝힌다면, 저 원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 저항군 병력 안에 배신자가 있다.’
- 예, 작전 내용을 설명 안 해줘서, 무슨 일인지 이제야 파악하고 연락드립니다.
그의 귓속으로 웬 마나 메신저를 교신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그 인형 병기, 전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베르트랑 형제가 움직인 겁니다.
- 잘했다. 너희 가족은 평생 배부르게 먹을 거다.
- 하…… 감사합니다!
- 곧 그곳으로 제11 기갑부대가 갈 테니까, 만에 하나 이동하면 다시 보고하도록 해.
‘아, 이러면 한동안은 마스크 생활을 계속해야겠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내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최후의 요새인 ‘북부 요새’를 수호 중인데, 한 달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맙소사…… 우리가 인도에 갔다 오는 사이에 상황이 더 안 좋아졌군요?”
"그 사이에 3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는데, 전부 크게 패해서 최악의 상황입니다.”
저항군 측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듯했다.
그때, 보위가 15대의 트럭—인형 병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소피, 저걸 가로채 온 건 대단하지만, 그냥 파기해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이유는 앞서서 인형 병기를 수장해버리자고 했던 알베르토와 같은 맥락이었다.
저걸 온전히 들고 다니다가는, 언젠가는 인형술사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우려였다.
"아, 제가 깜빡하고 말씀 못 드린 게 있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욱을 가리켰다.
"여기 이분은 저희가 첸나이에서 만난 인연인데, 리빙 아머 통제가 가능하신 분이에요. 인형 병기 찬탈도 이분 덕에 가능했던 거죠. 그리고 감사하게도 우리를 돕기로 했어요.”
소피가 보위에게 은근슬쩍 이현욱의 존재를 알리면서도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그가 이현욱을 바라보더니…… 그 흔한 인사 한마디 없이 고개를 돌렸다.
"소피, 그 어떤 불의 마법사나 불의 정령술사도 인페르노 앞에서는 불을 뽐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피워 낸 화재가 인페르노의 권능을 한층 더 불어나게 해줄 뿐이죠.”
쉽게 말해서, 아무리 그래 봤자 인형술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빙 아머로만으로는 '인첸트리스 트윈스’의 기갑부대를 상대할 수도 없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148대, 지난 전투 때 등장한 ‘인첸트 탱크’의 숫자입니다.”
현재 적들, 은도즈 연맹의 막강한 무기는 총 2가지였다.
그중 첫 번째는 질리도록 들어온 전쟁 용병 ‘인형술사’였다.
두 번째는 인첸트리스 트윈스(Enchantress Twins)라고 불리는 마법사 쌍둥이였다.
그리고 아마도 저항군으로서는 인형술사보다 이쪽이 훨씬 까다로운 적수일 것이었다.
‘그녀들은 인첸트에 특화된 마법사 플레이어 듀오다.’
그건 안양 듀오와 비슷한 능력이었는데, 안양 듀오가 자신들의 무기에 질 좋은 중첩 인첸트를 건다면, 그녀들은 대규모 병기에 인첸트를 걸어서 양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즉, 일종의 광역 인첸트 마법이다.’
그 적용 대상은 인류의 화약 병기들, 더 나아가서 탱크 같은 기갑 병기까지 해당했다.
이내 여기저기에서 그 인첸트 탱크에 관한, 부정적인 감상들이 터져 나왔다.
"그 마법 방어막을 두른 탱크들은 정말이지, 멈출 수 없는 끔찍한 괴물들입니다.”
"제가 모든 마나를 써서 회심의 한 방을 쐈는데, 무한궤도가 끊어지는 거로 끝났습니다.”
"하…… 그렇다고 해서 대전차포를 쏘자니, 마법 방어막에 튕겨 나가고……."
마법 보호막이 달린 장갑, 인첸트된 기관총, 던전 강으로 만들어진 주포의 탄두…….
그것들은, 웬만큼 강력한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상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리고 얼마 전에 들어온 첩보로는 중앙 격납고에 전차만 269대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인첸트가 끝나서 출격하는 순간, 북부 요새까지 무너지고 말 거예요.”
이처럼 저항군은 이미 사기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은 <올드 피스>길드의 지원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물건너 갔으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서, 살아남기 위해서 반대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경우도 많을 거다.’
이런 분위기에서 알 수 있듯 결국 저항군의 항쟁은 실패하고 말 예정이었다.
그래서 ‘수다르사나’도 은도즈 연맹에게 넘어간 뒤 빌런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흐름에 이현욱이라는 변수가 들어왔다.
'이제 슬슬 이 따분한 대화가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현욱은 이들의 대화를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감각은 지금, 저 높은 창공의 ‘후긴’에 닿아 있었다.
그 순간—
"—습격입니다!”
어디선가 울리는 날카로운 외침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리앙고가 그렇게 되묻자, 경계병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서북쪽 평야에서 약 9km 부근에서 전차들이 접근 중입니다!”
"아니, 그렇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몰랐다는 거야?”
"그, 그게 아무래도 광역 은신 마법이 인첸트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식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숨겨둔 카드를 꺼내 들었군?”
그때, 보위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대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총구는 다름 아닌, 이현욱을 향했다.
"형! 지금, 뭐 하는……."
"리앙고, 넌 가만히 있어!”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잘못 짚은 듯했다.
“……거기 정체 모를 제삼자, 마스크 벗어 봐!”
“보위! 이분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보장해요!”
소피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사람은 윌리엄 텔을 죽여서 우리를 구해줬어요!”
“……윌리엄 텔? 안구 적출자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그리고 저 인형 병기도 이 사람 혼자서 탈취했고요!”
그녀의 변호에도 보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글쎄, 그건 내 눈으로 못 봐서 모르겠고……."
"뭐? 지금 저를 못 믿겠다는 말이에요?”
"오래전부터 당신들은 믿었지만, 영 도움이 안 됐잖아?”
“……보위,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서 싸웠잖아!”
그렇게 상황이 격화되어갈 무렵, HPA 팀장 알베르토가 끼어들었다.
"하…… 이봐요, 탱크가 오는데 지금 뭘 하는 거야! 쏘려면 빨리 쏴!”
그는 또 다른 이유에서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이런 씨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냥 전부 수장하고 왔어야 했는데......."
자기 뜻을 무시했다가 저 수많은 인형 병기를 결국 빼앗기게 됐다는 분노였다.
‘이거야 원, 아주 콩가루군…….'
여기에 있는 모두가 좋은 뜻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한마음 한뜻은 아니었다.
"그린, 이 나라는 끝났어! 총재님께 전화해서 발 빼자고 말씀드릴 테니까, 짐 싸!”
HPA 조직원들은 도망칠 준비를 서둘렀고 저항군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쿠구구구——
어느새 북쪽에서부터 땅 울림이 다가온다.
수십 대의 전차, 그것도 인첸트된 전차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비추는 서치라이트가 북쪽 둔덕을 새하얗게 밝혔다.
곧 마법으로 덮인 강철 덩어리들이 둔덕을 넘어서 등장할 것이었다.
그때, 이현욱이 입을 열었다.
"너, 보위라고 했나?”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테니까……."
이현욱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는 저항군 소속의 남자였다.
“그게 증명되면, 저 남자를 처분해.”
"그게 무슨 소리냐? 알아듣게끔 말해!”
열을 내는 보위를 마주 보며 이현욱은 싱긋 웃어 보였다.
"사람은 의외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말이야. 그 대신……."
그 순간, 이현욱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틱!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긴 보위였지만,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웅——
“……눈으로 보여주면, 훨씬 쉽게 믿더라고.”
그때였다.
쾅——!
“젠장, 포격이다!”
휘이이이——!
고요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의 휘파람 소리, 점점 선명해진다.
고폭탄, 그 안에는 인첸트 된 던전 강 유산탄이 들어 있었다.
즉, 폭발과 동시에 주변을 짓이겨버리는 마법 병기였다.
“—피, 피해!”
그런데 그때, 포탄이 허공에서 직각으로 꺾이더니 허구한 곳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꽝——!
"어?”
쾅—쾅—쾅—쾅——!
그 이유를 가늠할 틈도 없이 연달아 불을 뿜는 인첸트 전차들,
그러나 그것들도 죄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가 버린다.
“……저 사람이 포탄을, 튕겨내는 거야?”
이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늘에 떠 있는 이현욱에게 향했다.
“……정체가, 뭐야?”
은도즈 연맹의 인첸트 전차군단, 그건 저항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현욱은 24대의 전차들을 마주하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저 조금 큰 쇳덩어리일 뿐이다.’
그가 왼손을 천천히 돌리는 순간—
'파쇄!’
텅! 텅! 텅! 텅! 텅! 텅!
전방에서, 굉음이 연달아 울린다.
그건 ‘무한궤도’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24대의 인첸트 전차가 일제히 멈춰 섰다.
끼기기기기——!
이어서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린다.
이번에는 포신이 녹아내린 뒤 휘어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은…….
'전차 안, 포탄의 작약 때려서 터뜨린다.’
콰—과—과—과—과—광——!
한순간에, 북쪽 둔덕이 시뻘겋게 물들어버렸다.
그 화려한 배경을 뒤로한 채로, 이현욱의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자, 이 정도면 증명됐나?”
명한 얼굴로 이현욱을 올려다보는 보위,
그를 향해, 이현욱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전쟁, 내가 끝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