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112화 (112/221)

112화.  < 제주도, 파에톤 레이드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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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은 붉은 바람을 뚫고 걷고 있었다.

그가 내리밟는 지면이 자글자글 끓어올랐으며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늪처럼 발이 푹푹 빠졌다. 또한, 바닥이 점점 내리막을 형성했는데 원형의 ‘플레어 쉴드’에 의해서 지형이 녹아내린 것이었다.

콰—아—아—아——

그 열 폭풍 속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일대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끓어오르며 산소란 산소가 죄다 타버렸기 때문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무구 세트 효과가 아니었으면 몇 초 못 버텼다.’

이현욱은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아킬레우스의 무구 세트 효과(2/4) 남은 시간 : 18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도 이제 단 18초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조차 무적은 아니다.’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의 전설처럼 이 무구의 효과에도 결함이 있다. 그건 뻔하지만, 아킬레우스의 건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강체화를 ‘아킬레우스 건’에 집중했으나…… 이마저도 한계가 드러났다. 엄청난 열기가 강체화를 녹이고 있었다.

‘빨리, 중심부로 가야 한다!’

곧 정면으로 붉은 요동침이 다소 옅어지는 부분이 나타났다.

‘저기다!’

이현욱은 그곳으로 몸을 던지듯 날렸고,

웅——

거친 열풍이 가시고 고요한 땅이 나타났다.

여긴 플레어 쉴드 중심부…… 마치 태풍의 눈처럼 평온했다.

여전히 산소가 없었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저기에 있다.’

그곳에 염화의 거인 파에톤이 웅크리고 있었는데 가슴 쪽으로 열기가 모이며 응축되는 게 보였다. 3단계 염화 폭풍의 준비 과정이다.

이현욱의 침입을 눈치챈 것인지, 그것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감히 여기에 들어오다니, 타 죽고 싶은 모양이로군…….」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그것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이는 신적인 존재감을 과장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천장—플레어 쉴드에서부터 불기둥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이현욱은 피하지 않았다.

콰—아—앙——!

"아직, 무적이다.”

- 아킬레우스의 무구 세트 효과(2/4) 남은 시간 : 3초

이현욱의 오른팔에 각인된 묠니르를 소환, 놈을 향해 쏘아 보냈다.

쩡—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좋아, 놈은 지금 방어력이 많이 깎인 상태다.’

앞선 공세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바, 데미지가 잘 들어갔다.

그는 왼팔의 각인에서 샷건 ‘블랙 라이노’를 소환한 뒤, 파에톤의 머리를 겨눈 채 앞으로 나아가며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콰—앙——! 콰—앙——!

아무리 월드 보스 몬스터일지라도 버티기 힘든 충격의 연속이다. 한 방, 한 방, 폭음이 터질 때마다 놈의 피부 조각이 떨어진다.

「감히…… 감히…… 감히……」

오류가 난 듯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파에톤, 이현욱은 멈추지 않고 모든 셀을 쏟아부어 파에톤의 머리통 곳곳을 박살 내버렸다.

콰—앙——! 콰—앙——!

이내 플레어 쉴드의 회전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화—아—아—아...

이내 한낱 연기처럼 풀어지며 이리저리 흩어진다.

- 해당 지역에 발생하던 <염화 폭풍 : 3단계>가 취소됩니다.

“……됐다.”

이로써 적어도 스킬을 ‘캔슬’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바로 그 순간, 흩어지는 플레어 쉴드를 뚫고 누군가 날아들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뻐—억——!

한태산, 그가 날아들어 파에톤의 이마에 플라잉 니킥을 꽂았다. 블랙 라이노 사격으로 갈라져 있던 피부가 쩍—하고 쪼개진다.

"이번에는 진짜 끝장을 내주마—!”

한태산의 양손에서 시퍼런 기(氣)가 감돌기 시작했다.

"흡!”

그가 양쪽 주먹을 동시에 내지르자 두 줄기의 기가 뒤엉키며 흡사 한 마리의 용처럼 굽이치더니, 파에톤의 전신을 뒤덮고 짓이긴다.

콰—가—가—가——!

「가, 가, 가, 가, 감히……」

이제는 아주 말을 절기 시작하는 페에톤, 끝이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한태산 씨, 머리 위는 조심하세요.”

“……뭐? 이번에는 또 뭔데—!”

이현욱의 말에 한태산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지금까지 이현욱이가 말을 걸 때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는데…….

후우우우——!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하늘에서부터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가까워진다.

그건 거검, 모글레이였다.

쩌—억——!

이현욱이 벌려 놓고 한태산이 쪼개놓은 이마의 균열 안으로, 모글레이의 검 끝이 처박히며 마그마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린다.

‘쇼크웨이브—’

쩌—어—엉——!

그러나 월드 보스 몬스터인 만큼,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가지는 않았고, 몸 곳곳에 난 균열에서 울혈이 터진 듯 마그마가 흘러나왔다.

"너 이 자식, 또 마지막에 기여도 빨아 먹으려고——!”

한태산도 질세라 펀치 연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안 진다!”

뻐—버—버—버—버——!

기관총 같은 펀치 세례, 파에톤의 몸뚱이가 찰흙처럼 조각난다.

「감…… 히…….」

그 말을 끝으로, 염화의 거인 파에톤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결국, 머리통만 남는 순간, 한태산이 내려찍기를 날렸다.

퍼—억——!

- 축하합니다! 월드 보스 몬스터 ‘염화의 거인 파에톤’을 처치하였습니다!

* 해당 <서든 이벤트>의 보상은 기여도에 따라서 ‘차등 지급’됩니다.

"후......."

한태산은 숨을 고르며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살폈다.

- 축하합니다! 행운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2등)

"......."

그는 말없이 이를 까득, 갈았다.

이번에도 2등…… 1등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현욱…….'

이는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두 사람이 보스 몬스터에게는 엇비슷한 데미지를 주었을지언정, 앞선 활주로 위의 죽음의 군당을 깡그리 쓸어버렸던 이현욱이었다.

한편 이현욱은 1등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총 2개,

하나는 붉은색 결정체였고 나머지 하나는 금색 카드였다.

- 태양의 파편(전설)을 얻었습니다.

- 특성 개화(특수)를 얻었습니다.

‘태양의 파편…… 이건, 전설 등급의 재료이다.’

얼마 전에 코도 신지로와 내기에서 얻은 <샐러맨더의 오브>와 비슷한 성질의 아이템으로써, 오브로 만들어 쓰는 게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2개의 아이템에 화염 속성 스킬을 달 수 있다.’

아직 모글레이에 <샐러맨더의 오브>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건 전설 등급인 만큼 전설 등급 무기에 사용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음, 묠니르에 적용이 되려나?’

이미 전기 속성이 그 자체인데 태양의 힘을 담을 수 있을까?

그건 이현욱도 모르는 영역이었기에 시도해보아야 할 듯했다.

그런데 보상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헬리오스의 가호를 지니고 있으므로 받았던 히든 퀘스트, 그 보상이 함께 도착했고, 그것 역시 무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 태양 마차의 코어(전설)을 얻었습니다.

‘이게 있으면 제대로 된 비공정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다.’

이현욱이 그렇게 흐뭇해하고 있을 때, 한태산이 다가왔다.

"이현욱, 너 이 자식……."

"한태산 씨, 덕분에 계획대로 잘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뭐? 웃기지 마. 네가 없었더라도 나 혼자 끝냈을 거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제가 없던 게 아니니까요.”

그래, 이제는 예전처럼 스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한태산은 염화의 폭풍을 견뎌내고 파에톤을 잡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견디지 못하고 희생 되었을 터…… 이번 공략은 확실히, 이현욱이 플레이 메이커였다.

"야, 이번에는 이상한 속임수를 잔뜩 써서 너한테 유리한 상황을 잘 만들었는데, 다음번에는…… 진짜 정정당당하게 붙어 봐.”

그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며 그렇게 유치한 핑계를 시작했다.

"글쎄요, 저는 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 레이드를 하는 거라서요.”

"뭐? 이 자식이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는 것, 그게 레이드죠.”

"지금 누가 누구한테 가르치려— 윽!”

그는 난데없는 두통에 말을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우우——

하늘에 떠 있던 프리드웬이 급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이현욱의 마나 메신저에서 여상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칙— 마스터! 라퓨타가 공격 받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하, 역시나…….'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방비를 해두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한다.’

그쪽에서도 작정하고 병력을 준비했을 터, 아무리 방호를 해놓았다고 하더라도 마음 놓고 한가하게 귀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 한태산 씨,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또 소리야. 이제는 네가 입만 열면 신경이 곤두서네, 썅—”

"한태산 씨는 이렇게 폐관 수련 시간 낭비하는 게 싫어하시는 거로 아는데, 이 부탁을 들어주시면 서울로 빠르게 모셔다드리죠."

라퓨타의 무단침입자를 때려잡으러 가기에 앞서, 최고의 무기를 하나 챙겨갈 생각이었다.

***

"......."

어느 지하주차장, 기백준은 차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에 한 줄의 핏줄이 돋아나서 꿈틀거렸다.

“씨발……."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러니까, 라퓨타로 입성한 지 15분이 지났는데, 연락이 없다?”

"……예, 솔직히 이 정도면 실패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자리, 조수석에 타 있는 남자가 말했다.

본디 계획대로라면, 지금쯤이면 웨어 울프 특공대가 라퓨타에 침투하여 연 양방향 포탈을 통해서 라퓨타에 입성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양방향 포탈이 열리긴커녕 연락조차 없었다.

"저…… 마스터, 어떻게 그냥 이 땅을 뜨시겠습니까?”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맨손으로 어디를 갈 수 있겠어?”

“예, 그렇긴 합니다.”

“……지금부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정면으로 뚫는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근처에 주차된 트럭, 그 안에 블랙 오크들이 가득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 미리 준비해둔 인질들도 동원할까요?”

"그래, 그것도 준비해. 그게 있으면 상황이 유리해질 거다.”

이내, 지하주차장 문이 열리며 6대 트럭이 줄지어 나갔다.

***

서은하는 휘하 병사들에게 시민 대피와 지역 봉쇄를 명령한 뒤, 자신은 넝쿨 아래에 서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웨어 울프를 기다렸다.

켕——!

그것들은 추락의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위험한 존재인 만큼, 그녀가 직접 나서서 하나하나 처리했다.

푹!

“하— 이걸로 14마리째……."

종전, 넝쿨을 타고 올라간 웨어 울프는 족히 마흔 마리가 넘었다.

즉, 나머지는 기어코 라퓨타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저 위에도 누군가 있긴 한 것 같은데……”

현재 라퓨타에 관해서는 그 어떤 정보도 공개되고 있지 않았다. 며칠 전, 그곳에서 강철 함대가 발진한 게 유일한 정보라면 정보였다.

‘이번에도 이현욱, 걔가 관련된 건 확실해.’

이현욱, 이제는 아득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존재…… 그 남자를 알고 난 뒤부터 모든 사건에 그 남자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 칙— 소대장님, 웬 시내버스가 접근합니다.

“……시내버스? 그런 게 여기로 왜 와?”

- 그게, 시민들이 타 있는데…… 젠장, 정지 명령을 안 듣습니다!

서은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방패를 쥐고 도로 쪽으로 나갔다.

우우우우——!

정면의 4차선 도로, 시내버스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정지!”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서 수차례 경고했지만, 속도가 줄지 않았고,

"어어!”

철제 바리케이드에 충돌하기 직전,

끼이이이——!

그제야 아슬아슬하게 급제동을 했다.

"아니, 뭐야?”

서은하는 쌍안경을 통해서 그 안을 살폈다.

‘……안에 시민들이 그대로 있잖아?’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역력해 보였다.

‘젠장, 인질이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내 그 뒤로 소속을 알 수 없는 6대의 차량이 줄지어 들어왔다.

세단, SUV, 택배 트럭 등 일관성 없는 조합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린 존재들은…….

어! 브, 블랙 오크입니다!”

총 21마리의 블랙 오크와 14명의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인류가 몬스터와 나란히 서 있다니…….

이 장면은, 세상이 뒤집힐 만한 한 것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소대장님, 저기 저 남자는 태산 길드의 기백준 대표입니다.”

강익준 하사의 보고에 서은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저기, 두 번째 SUV 차량 쪽입니다.”

그곳에는 정말로, 백색 정장을 입은 기백준이 서 있었다.

‘뭐야? 저기에 태산 길드가 왜 있는 거야?’

얼마 전부터 각종 비리에 연루되었던 태산 길드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블랙 오크와 같이 서 있는 모습은 심히 충격적이었다.

그때였다.

“—어이, 기백준이! 역시 너 이 자리에 나올 줄 알았어!”

어디에선가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네 차가 강원도로 빠질 때 아 이 새끼 꼼수 쳤네 했지, 인마!”

한 빌딩의 그림자 속에서 몇 개의 인영이 올라온다.

"그래, 쪽팔리게 굴속에만 숨어 있는 것도 못 할 짓이지?”

그들은 검은 옷과 검은 복면을 입은 이들이었다.

"그 잘난 태산 길드의 대가리께서 쥐새끼처럼 숨어 있느니, 그냥, 내가 바로 블랙 오크랑 형님 동생 하는 매국노 테러리스트니까 잡아 가시오! 하고 밝히는 게 낫지? 이 병신이…… 넌 오늘 뒤졌다.”

그 남자는 온갖 악담을 퍼부어대면서 검은 복면을 벗었다.

‘저 사람은 <현무>길드의 부마스터, 오경표잖아?’

그는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14위, 창의 마술사 오경표였다.

그런데 그는 평소에 AMT 측과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즉, 지금 이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껄끄러운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오경표 씨? 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는 서은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내밀며 속삭였다.

"이런 거 막 공개하면 안 되는데, 나 정부 측 블랙 요원이요.”

그건 AMT 신분증이었는데, 중령 계급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어…… 이거, 진짜입니까?”

"그건 나중에 확인하시고 일단은 저쪽에 집중하시지, 서 중위?”

"아……."

서은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헷갈렸다.

그때 기백준이 입을 열었다.

"전부 잘 들어라, 딱 한 번만 경고한다.”

그는 눈에 핏대를 세우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위로 라퓨타가 보였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그 순간, 그의 어깨에서 왼 촉수 같은 게 치솟더니—

콱!

옆, 시내버스의 창문 관통한 뒤 젊은 남자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야! 이런 미친 새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방금, 비키라고, 말했잖아! 이 개새끼들아!”

푹—!

양쪽에서 고성이 오고 가는 사이에 또 한 명의 희생됐다.

어느새 시내버스의 좌측 창문 2개가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는 예상 밖의 무차별적인 살인이었기에 대응할 수 없었다.

"꺄아아——”

"사, 살려주세요!”

그러자 서은하와 오경표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뭐가 됐든 일단, 물러서야 합니다.”

"하, 그래야겠네, 이거……."

AMT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기백준 측은 그 거리 만큼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디, 저격 같은 병신 짓은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저 버스 안에서 누가 시민이고 인질인지 구별해낼 자신은 없겠지?”

시내버스 안에는 약 스무 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기백준의 방금 언급을 보건대, 그 안에 기백준의 부하가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저벅— 저벅—

이대로라면 저들의 속셈을 그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 하사, 내 말 들리나?”

서은하는 뒤에 서 있는 강익준이 들릴 정도로만 속삭였다.

"예, 바로 뒤에 있습니다.”

“저 안에 있는 시민들, 죽지 않을 정도로 감전시킬 수 있겠어?”

그 말에, 강익준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 저, 옷 벗고 쇠고랑 차게 만드시려는 겁니까?”

"이현욱은 구광 그룹 딸 구출할 때, 어떻게 잘 했다던데?”

"하, 또 그 자식입니까? 하…… 일단, 알겠습니다. 신호하죠.”

그는 들고 있던 Barrett M82A1의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저벅—

그리고 방아쇠에 천천히, 검지를 얹었다.

저벅—

이어서 한 걸음 더 물러설 때—

“……지금입니다.”

신호와 동시에 총구를 바닥으로 향한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작은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그는 저격수였지만, 본래 특성은 마법사로서 ‘마탄 사수’였다.

타—앙——!

총성, 총알은 총구가 아니라 마법진에서 쏘아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서은하가 기백준의 얼굴을 향해 ‘홀리 라이트’를 쏘았다.

“윽!”

적중, 놈이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의 촉수가 허공을 휘저었다.

그사이 버스 앞창문을 꿰뚫고 들어간 50구경짜리 총알, 그곳에 인첸트된 전류 마법이 발동—사방으로 시퍼런 전기가 뻗어 나갔다.

파지지지——!

서은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나아갔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거리를 좁혔고 시내버스와 십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쾅—!

그녀는 시내버스의 앞창문을 박살 내며 난입하여 바닥에 한차례 구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빠르게 한 바퀴를 돌며 감전된 승객들의 차림새를 살폈다. 정확히는 무기를 숨기고 있는 놈을 골라냈다.

‘찾았다!’

총 3명, 서은하는 놈들의 턱을 한 대씩 가격해서 기절시켜버렸다.

그 모든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투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젠장! 그냥 쳐! 저 새끼들 다 죽이고 라퓨타로 올라간다!”

이내, 양측이 무차별적으로 충돌했다.

사방에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AMT 저격수들이 행동을 개시했고,

또 그들을 노리고 있던 블랙 오크 암살자들이 등장했다.

"—1중대, 방어 대형을 갖춘다!”

쾅! 쾅! 펑! 쾅!

서울역 앞 대로변, 온갖 마법이 작열하며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쇠붙이들이 충돌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시시때때로 비명과 함께 피가 뿜어지며 아스팔트 위를 끈적하게 물들여갔다.

"끄아아아—”

"젠장, 의무병! 여기 힐 좀…… 컥!”

그리고 그런 난전에서는 블랙 오크 정예부대를 당해내기 힘들었다.

제3항마여단 1대대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야! 기백준, 이 개 같은 새끼야! 이리 와!”

한편, 오경표가 창을 뽑아 들고는 기백준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아군 병력이 밀린다고 해도 기백준만 잡으면 끝이었다.

"야! 네가 아무리 랭킹이 높아도 나한테는 안 되는 거 알지?”

기백준의 랭킹은 10위, 오경표의 랭킹은 14위, 액면 그대로 보면 기백준이 한 수위처럼 보였으나 1대1에서는 ‘소환술사’ 특성인 기백준보다 '전사 : 창 특화’ 특성인 오경표가 압도적인 우위였다.

하지만 기백준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어디 와 봐. 오늘은 내 모든 걸 걸었다.”

기백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검을 꺼내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렇게 흩뿌려진 피가 바닥에서 저절로 움직이며 마법진을 그렸고,

츠츠츠츠——

그 안에서부터 웬 거대한 입이 튀어나왔다.

"......응?"

그 기이한 광경에 오경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그 입이 쩍 벌어지며 기백준의 왼팔을 물어뜯었다.

촤—악——!

"끄아아아——!”

- 주의! 해당 지역에 ‘마수 소환 의식’이 시작됩니다.

"너 이 새끼, 설마…… 악마의 힘까지 손을 댔어?”

기백준은 ‘소환술사’특성으로서 각종 크리처를 소환하여 싸운다.

그런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그는 악마와 계약함으로써, 고위 보스 몬스터 수준의 마수(魔獸)가 득실거리는 ‘마수 우리’ 사용 권한을 획득, 마수를 소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수를 소환하는 건 크나큰 대가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악마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기백준의 잘린 팔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웬 포탈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기이한 짐승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 주의! 마수 ‘케르베로스’가 등장했습니다.

3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맹수,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

그 6개의 붉은 눈동자가 오경표를 향해 드리웠다.

“......응?”

그 압도적인 위용에 오경표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것은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짙은 적개심을 드러냈고, 오경표가 천천히 창대를 고쳐잡는 순간— 3개의 주둥이가 날아들었다.

쩌억! 쩌억! 쩌억!

"큭! 뭐가 이렇게 빨—”

오경표는 가까스로 3개의 방향에서 날아드는 3개의 이빨을 피했다.

하지만, 측면에서 날아드는 앞발을 피하지 못했다.

뻑——!

제대로 적중당한 뒤, 십여 미터를 날아가 한 트럭에 처박혔다.

"큭! 이 미친 새끼가 별 좆 같은 걸 다 소환하고 있네……."

그간 기백준을 잡는 순간을 고대하며 그가 다루는 크리처는 전부 파악하고 있던 오경표였으나, 이런 마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것의 이빨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쩌억! 쩌억! 쩌억!

‘이거, 너무 빠르잖아!’

뻐—억——!

이번에도 3개의 주둥이를 피했으나 앞발에 내리 찍히고 말았다.

그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서 다시 날아드는 이빨을 피해냈다.

콰직!

그가 방금 누워 있던 자리의 아스팔트가 케이크처럼 푹 파였다.

‘젠장! 나 혼자 상대할 게 아니야! 적어도 110레벨이 넘는다!’

100레벨 이상부터는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도 혼자 상대하는 게 힘든 고위 보스 몬스터였다. 그가 느끼기에는 이 괴물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오경표를 쫓던 게르베로스가 멈춰 서더니 2개의 머리가 고래를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무엇을 발견했는지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컹! 컹! 컹! 컹!

바로 다음 순간—

콰—앙——!

웬 청동 거인이 수직으로 추락하며 케르베로스를 깔아뭉갰다.

그리고 4개의 전기톱으로, 그것의 목덜미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콰드드드——!

철퍽— 순식간에 첫 번째 머리가 잘려나갔다.

깨갱—깨갱—깨갱—깨갱—!

나머지 2개의 머리가 서럽게 울부짖으며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이 나라에서는, 공공장소에서는 목줄은 필수라고 들었습니다. 이제 2개의 목줄만 있으면 될 것 같으니까, 힘들더라도 지켜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청동 거인 위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박준모였다.

그는 무언가 육중한 물체를 들고 있었다.

그건 <뇌신의 철퇴>였다.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 쏘았다.

파—자—자—자—자——!

언뜻 보면 무차별적으로 쏘아진 것만 같은 시퍼런 전기 다발들—

하지만 박준모의 눈이 파랗게 빛나며, 정밀 유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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