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제주도, 파에톤 레이드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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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뻘건 쇳물이 파도처럼 활주로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흘러간 자리의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며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꽈—르—르—르—르——
- 야 이 씨!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짜증이 가득 섞인 한태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쇳물로 샤워하는 건 싫을 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거…… 저걸 전부 다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니죠?”
강서윤이 프리드웬의 램프 도어에 매달린 채 물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군?’
그녀의 물음처럼 저건 이현욱의 금속 통제력 이상의 용량이었다.
"저것도 액체니까 일부는 알아서 흐르고 있는 거죠.”
금속을 액체 상태로 만들어서 움직이면, 끈적한 쇳물이 서로 엉겨 붙으며 금속 통제력 이상의 양을 뒤엉켜 흐르게 할 수 있다.
또한, 일부분만을 통제해서 전체의 흐름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가령, 가장자리에 힘을 주거나 하단부를 경사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수로’를 형성하여 한 방향으로 운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꽈—르—르—르—르——
그렇게 통제되는 수백 톤의 쇳물이, 스켈레톤 군단을 덮쳤다.
웅——
그 순간, 죽음의 사제들이 힘을 모으더니 검은 돔을 펼쳐냈다. 이현욱의 강철비를 손쉽게 막아냈던 그 광역 방어막 스킬이었다.
'……이번에는 뚫어낼 수 있다.’
이현욱은 쇳물을 회오리처럼 일으켜서 검은 돔을 내리찍었다.
그것도, 단 하나의 점에 힘을 집중했다.
퍼—버—버—버—버——!
흡사 드릴로 한 곳을 후벼파는 듯한 집요한 회오리 공세,
그러자 검은 돔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먹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현욱은 숨겨두었던 마지막 ‘비법’을 꺼내 들었다.
[스킬 정보]
- 이름 : 오러(세인트)
- 등급 : D
- 효과 : 마나(10)를 소모하여 특정 무기에 ‘오러(세인트)’를 부여합니다.
* ‘신성력을 내재한 금속’을 일정량 이상 삼키면 스킬 등급이 향상됩니다.
‘이건 꽤 오랜만에 사용하는 것 같군.’
즉, 이제부터는 성스러운 쇳물의 소용돌이가 된 것이었다.
쩌—어—엉——!
결국, 검은 돔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한 부분이 으스러져 내렸다.
그 구멍 안으로 쇳물이 한 마리의 붉은 용처럼 굽이쳐 들어간다.
그 용의 머리가 향한 곳은 악마의 군단 중심부,
죽음의 사제들이 모여 있는 곳,
그 위로 시뻘건 용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퍼—어—어—어——!
이현욱은 멈추지 않고 회오리를 가속하며 적들을 완전히 짓이겼다.
꽈—드—드—드——!
그 무시무시한 기현상을 막아낼 재간은, 놈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꽈—드—드—드——!
그렇게 20마리의 죽음의 사제를, 말 그대로 단숨에 녹여버렸다.
"......."
-.......
한태산이 활약할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한태산이 보여준 게 초인적인 힘이었다면,
이현욱이 자아낸 건 재앙적인 파괴력이었다.
서로 다른 영역이었지만, 가시적으로는 이현욱의 압승이었다.
- 어! 저기, 스켈레톤들을 감싸고 있던 녹색 빛이 사라집니다!
죽음의 사제의 전멸로 인해서 ‘아우라’를 잃은 것이었다.
"이현욱 씨, 이제 금속 통제…… 가능하죠?”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어느새 스켈레톤들이 쓰고 있는 철모, 입고 있는 철제 갑옷,
그것들이 전부 이현욱의 통제 범위 안으로 포함되었다.
사실은 이때부터가 이현욱의 진정한 쇼 타임이었다.
이현욱은 프리드웬의 램프도어에 서서 활주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렸다.
‘파쇄—’
이내, 수천 개의 해골이 일제히 폭발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
어느 빌딩의 12층, 블라인드가 처진 창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건너편 빌딩의 정문을 부근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어? 나왔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포착했는지 급히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칙—
“……여기는 까마귀2, 어미 곰이 굴에서 나온다.”
그러자 그 건물의 뒤쪽에 주차되어 있던 SUV 한 대가 서둘러 시동을 켰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큼, 여기는 검은 쥐1 어미 곰 추적 시작하겠다.”
그렇게 은밀하게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는 이들은 우성문 휘하의 비밀 정보 부서인 ‘특수비밀경찰국’ 일명 <흑조>의 정보원들이었다.
그러나 ‘어미 곰’ 기백준 역시 그들의 추적을 눈치채고 있었다.
"마스터, 추적이 따라붙었습니다. 뒤쪽 2차선의 SUV입니다.”
그의 옆자리, 여성 마법사 플레이어가 그렇게 말했다.
“……쯧쯧, 아주 탐정 놀이 제대로 하고들 계시는군?”
그는 귀찮다는 듯 선글라스를 쓰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곧 트럭이 도착할 겁니다. 이동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아주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으니까 티 나지 않게 잘 해.”
"예, 신중하게 ‘랑데부’하겠습니다.”
어느새 그들이 탄 세단 옆으로 한 대의 큰 트레일러가 다가왔다.
두 차량은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며 약 1분간 내달렸다.
그리고 어느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렸고 두 대 모두 멈춰 섰다.
"그럼, 근거리 텔레포트 시작하겠습니다.”
그녀가 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옅은 빛이 차 안을 채웠다.
웅——
그다음 순간, 기백준은 웬 어두운 공간 안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옆에서 달리던 트레일러 안이었다.
이후 트레일러는 좌회전했고 세단은 우회전했다.
정부의 감시자들은 당연하게도 세단을 쫓아갈 것이다.
그게 강원도 양양군의 어느 폐공장으로 갈 때까지 말이다.
'그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나는 라퓨타에 있을 거다.’
그때, 트레일러 안쪽에서부터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마스터, 이제 서울역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우리 특공대는 잘 도착했나?”
"예, 이미 현장에 도착해서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야. 조심해야 해.”
"예, 주의해서 통제하라고 다시 한번 명령하겠습니다.”
라퓨타는 서울역 상공에 떠 있었다.
그렇기에 서울역을 먼저 장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하에…… 그 씨앗 잘 심어뒀겠지?”
“예, 재물만 바치면 순식간에 자라나서 라퓨타에 닿을 겁니다.”
그들의 계획은 체계적이었고 그 어떤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곧, 라퓨타에 발을 내딛게 될 것이었다.
***
한편, 라퓨타에는 박준모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싫은 티를 많이 냈던 것 같아요.”
그는 비공정 포트의 난간에 걸터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풀이 잔뜩 죽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현욱 병장님도 기분 나쁘셨던 거고, 그래서 저를 여기에 두고 가신 거죠. 제가 또 싫은 티를 낼 게 뻔하니까요…… ."
이현욱은 언제나 김세희와 박준모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이번 제주도 공략에는 평소와 달리 딱 박준모만이 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현욱이 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라퓨타에 있으라고 했는데…….
“아니, 왜일까…… 왜……."
지금 이 순간, 박준모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이건,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자신만 빼고 피시방에 갔을 때의 그 기분이었다.
잘 생각해보니 이게 일종의 좌천인가 싶었다.
"이현욱 병장님은 제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제가 그 은혜를 갚지 못할망정…… 눈치도 없이 이등병처럼 계속해서 징징거렸던 거죠. 그래서 저런 놈 데리고 다니다가는 사고가 나겠다 싶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정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준모 씨, 너무 가셨다.”
"그럼 왜 저를 여기에 있으라고 하셨을까요?”
"어, 음……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대비하신 거죠.”
“……여기에, 무슨 일이 생길 수가 있어요?”
박준모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시퍼런 하늘밖에 없다.
여기는 새 한 마리조차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이정준도 머쓱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 그러니까 저렇게 무기들도 준비해두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가리킨 곳에는 ‘뇌신의 철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한테도 경비 잘 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했고요.”
이현욱은 제주도로 떠나기 전, 이정준을 불렀었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라퓨타 경비를 맡아달라고 했다.
‘뭐, 그건 어디까지는 만에 하나를 대비한 것일 테지만…….'
텅—텅—텅—텅—
그때, 어디선가 공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비공정 포트에서 청동 거인이 농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탈로스, 라퓨타의 총괄 AI인 그 녀석이 새 몸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긴, 저런 게 지키고 있는데 누가 여길 들어오겠는가?
"......뭐,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지만요.”
"그러니까요. 저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곳에 배치된 거죠.”
"아니…… 후…… 배고픈데 밥이나 먹죠.”
쾅!
그건 농구 골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벌써 3개째였다.
***
그 시각, 강철 함대가 제주도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모두 잘 들어요! 지금부터 이 근처를 성역화할 겁니다!”
강서윤의 명령에 따라서 각종 성물 오브젝트가 설치가 시작되었다.
이 작업에 동원된 성물 오브젝트만 하더라도 무려 245개였다.
“—동서남북 4방향 연계 성소, 전부 설치 완료됐습니다!”
- 해당 지역에 ‘성스러운 힘’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주국제공항 일부분이 성역 버프를 받게 됐다.
"자, 이제 이곳으로는 언데드가 접근할 수 없을 거예요.”
여기를 거점으로 두고, 프리스트들이 일대 하늘에 ‘홀리 라이트’을 쏴서 레드 위습 무리를 밀어내면 항공로가 확보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하나의 문제를 마주했다.
그건, 난데없이 날아든 경고성의 시스템 메시지였다.
- 주의! 해당 지역에 <염화 폭풍 : 1단계>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 남은 시간 : 00:09:59
".......응?"
그 메시지는 제주도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떠올랐다.
"여, 염화 폭풍이라니 …… 이게 무슨 말이죠?”
“……씁, 어감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거야 당연하죠. 애초에 경고잖아요. 아 씨 또 뭐야?”
그리고 그 10분 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퍼—어—어—어—어——!
“어! 뭐야!”
제주도 백록담, 그곳에서부터 웬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은 구름에 꿰뚫고 올라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정말로, 화산이 폭발하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그 직후, 엄청난 열풍이 산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
"어!"
그 열풍의 위력은 멀리에서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서 하늘 위로 비상하고 있었으니…….
이어서, 도심지에 불어닥치며 차들이 죄다 뒤집힌다.
그다음 순서는 공항이었다.
"젠장! 전원, 강풍에 대비한다!”
그 열풍이 활주로에 닿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에,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그사이에 광역 마법 방어막을 준비하여 전개했다.
“전원— 방어막 뒤로 피해!”
화아아아——!
"큭! 뜨, 뜨거워!”
그런데도 그 열기에 화상을 입는 플레이어가 속출했다.
"헉! 헉! 제, 젠장, 이건 갑자기 또 뭐야!”
"아니, 보스 몬스터는 백록담에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여기까지 데미지를 준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대다수가 랭커인 만큼, 짜증은 내되 우왕좌왕하지는 않았으며 능숙하게 다음 열풍을 대비했다.
'……염화 폭풍, 그건 이 이벤트의 페이즈2다.’
이현욱은, 당연하게도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였다.
보스 몬스터 파에톤과 거래한 악마의 군단, 그것들을 전부 제거하자 보스 몬스터인 염화의 거인 파에톤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은, 플레이어들의 공략 준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즉, 이건 일종의 시간제한 미션이 될 거다.’
아니나 다를까…….
- 주의! 해당 지역에 <염화 폭풍 : 2단계>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 남은 시간 : 00:29:59
“……젠장, 또 오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2단계야!”
이렇게, 단계가 점점 올라간다.
처음, 1단계는 겨우 강력한 열풍에 불과했다.
‘하지만 5단계가 되면, 한라산 전체를 불태울 거다.’
전생에, 필리핀 제도의 섬을 21개나 태워버렸던 그 위력…….
그리고 끝에 가서는 작은 태양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렇듯 월드 보스 몬스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을 처치해야 한다.’
이내, 강서윤이 그룹 리더들을 긴급 소집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계획을 완전히 틀어야 합니다.”
이곳에 거점을 마련해서 민간인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천천히 공략을 준비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불을 통제할 수 있는 인페르노가 던전 공략을 끝내고 복귀할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었는데, 그것도 안 될 겁니다.”
이제는 방법은 단 하나다.
"우리가…… 최대한 빨리, 저 보스 몬스터를 공략해야 해요.”
즉, 지금 당장 레이드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 이거 영 좋지 않은데……."
"이렇게 변수가 많으면 또 변수가 있을 테고요.”
하지만 한태산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그냥 빠르게 처치하고 가는 게 좋지, 뭐!”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욱을 흘겨보았다.
"내가 잡몹 때려잡는 건 좀 귀찮아서 설렁설렁하게 되지만, 덩치 큰 놈 하나 패는 건 게 진짜 잘하거든? 다들 걱정 안 해도 돼."
일 대 다는 이현욱에게 꿀릴지언정 일 대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했다.
'한태산, 그만큼 보스 몬스터 전에 유리한 플레이어는 없다.’
그는 ‘부르져(Bruiser)’ 혹은 ‘딜탱’ 계열로서 흔히 말하는 ‘딜링’과 ‘탱킹’이 동시에 가능한 플레이어 중, 최강자였다.
그렇기에 보스 몬스터와 1대1 정면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괴물…….
"야, 너, 한 번 잘했다고 너무 의기양양해진 건 아니지?"
이현욱은 피식 웃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윽! 오늘 왜 자꾸 머리가 아픈 거야!”
직후, 강철 함대가 다시 비상했다.
그리고 수백 미터 상공으로 고도를 높이자, 이 땅,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잿빛 연기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전 ‘염화 폭풍’ 덕분인지 좀 씻겨 나간 상태였다.
"와…… 한라산이 완전 잿더미가 됐네요.”
백록담 부분은 완전히 타올라서 거뭇거뭇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잿더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건 움직이는 나무, 정확히는 숯으로 변한 나무들이었다.
- 절규하는 포플러 (LV. 73)
- 절규하는 포플러 (LV. 72)
포플러, 우리 말로는 미루나무다. 그리스 신화에서 파에톤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미루나무로 변한 그의 누이들을 본뜬 몬스터였다.
“자, 저것들은 일단 다 무시하고 보스 몬스터부터 찾읍시다.”
강서윤이 전 함대에 명령했다.
"뭐, 그놈을 치기 시작하면, 당연하게도 저것들이 달려들 겁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공략하고 올라갈 시간은 없어요. 그러다가 아까 그 염화의 폭풍에 전부 도트 데미지 입어서 만신창이가 될 테니까요.”
그건 이 강철 함대 멤버의 수준을 믿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산속에서 몬스터 무리에게 포위당할지라도 그걸 버텨내며, 그사이에 한태산을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이 보스 몬스터를 사냥한다.
이는 레이드라기보다는 단순무식한 강제 돌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합리적인 작전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음…… 분명 여기쯤에서는 눈에 띄어야 할 텐데요.”
현재 강철 함대는 백록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감시망에 포착되는 물체는 없었다.
"……그 거대한 게, 안 보일 리가 없잖아요?”
염화의 거인 파에톤은 그 이름대로 20m가 넘는 괴물이었다.
그런 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데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상 15층짜리 아파트에 준하는 크기가 아니던가?
"자, 모두 조심해요. 저번에 방송국 헬리콥터가 당한 것처럼—”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푸—화—아—아——!
어디선가 폭음이 울리며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고, 어느새 백록담의 서쪽 측면에서 잿더미 속에서 시뻘건 손이 튀어나와 있었다.
- 아니, 저 자식 우리가 오는 걸 알고 매복해 있던 거야?
"—지금이야!”
그때, 기다렸다는 듯 강서윤이 소리쳤다.
우우우우——
이내 강철8, 강철4, 2대의 비공정의 하단부가 열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곳에 타 있는 건 도희선을 비롯한 ‘물의 마법사’들이었다.
직후, 허공에 무언가 생성되며 공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그건 지름만 12m에 이르는 ‘그레이트 워터 볼’이었다.
그게 무려 5개가 피어오르며 날아드는 불기둥과 맞부딪쳤다.
"모두 꽉 잡아! 충돌한다!”
퍼—엉——!
불과 물의 정면충돌에 엄청난 수증기 폭발이 일어났다.
근처에 있던 비공정들은 수십 미터를 밀려날 정도였다.
- 큭, 그래도 막았다!
이는 파에톤의 일격을 예상하고 준비한 방어 전술이었다.
"아줌마, 지금 당장 이 뒷문 열어—!”
한태산이 그렇게 외치며 램프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이현욱이 따라서 나갔다.
“......응?"
그러자 한태산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뭐야, 설마 너도 나갈 생각이냐?”
“그렇습니다.”
까득—
"이 자식, 너 의기양양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의기양양이라니, 저는 근거 없이는 행동 안 합니다.”
"하…… 너는 통제 계열이잖아! 저 거인한테 뒤지고 싶어?”
일명 ‘통제 계열’이 방어력이 약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상식이 편견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잘 모르시나 본데, 제가 탱킹도 좀 하는 편입니다.”
이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강체화를 걸어 보였다.
"아, 나랑 악수할 때도 그렇게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이야……."
그는 엄지와 검지, 집게손가락으로 강체화가 된 이현욱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심지어, 그 표면에 덧씌워져 있던 마나 실드까지 으그러졌다.
"야, 봤지? 그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악수, 봐준 거야.”
맙소사, 악수를 봐준다는 말이 세상이 있었던가…….
"내가 남 걱정은 안 하는데 솔직히 너는 죽기 아까운 인재잖아?”
한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이현욱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서라—자식, 혈기왕성한 게 나 어릴 때 보는 것 같네?”
그때 램프 도어가 열리며 뜨거운 수증기가 치고 들어왔고, 한태산은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이휘이 내저은 다음 다이빙해버렸다.
"저 새끼, 하여튼……."
뭐,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니, 저게 당연하다.’
한태산이 바보도 아니고 상황 파악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아니 좀 바보 같은 면이 있긴 한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세계 랭킹 5위였다.
그의 눈은 웬만한 플레이어보다는 정확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뭘 준비했는지 몰라서 그렇다.’
이현욱은 오늘, 흔히 말하는 ‘템빨’ 좀 세워볼 생각이었다.
이현욱 역시 한태산을 따라서 허공으로 몸을 내던졌다.
- 아오! 너도 씨발, 한 고집 하는구나?
그 모습을 봤는지, 한태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 주의! 해당 지역에 <염화 폭풍 : 2단계>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 남은 시간 : 00:00:03
어느새 2차 염화 폭풍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할 것이었다.
- 칙— 전 함대, 고도 상승한다!
강서윤의 목소리와 함께, 강철 함대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현욱은 반대로, 자신의 몸에 금속 통제력을 짓누르듯 부여하여 더 빠르게 추락했고, 저 멀리 몸을 일으키는 염화의 거인이 보였다.
- 염화의 거인 파에톤 (LV. 128)
그리고 놈의 몸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퍼—어—어—어—어——!
정말로, 터져버렸다.
아니, 체내의 열을 제트 엔진처럼 내뿜어버렸다.
콰—과—과—과—과——!
그 시뻘건 열기가, 이미 숯 더미로 변한 나무숲을 한 차례 더 뒤집어엎으며 날아들었다. 이현욱은 모글레이를 소환하여 땅에 내리박은 다음에, 그것을 붙들고 버텼다. 그리고 열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 ‘헬리오스의 가호’가 적용 중입니다.
그에게는 이 순간을 준비한 특별한 아이템 1호가 있으니 말이다.
"......오! 새끼, 진짜로 버티잖아!"
그건 한태산의 목소리였다.
약 10m 옆에, 한태산이 자세를 낮춘 채 열기를 견디고 있었다.
그는 이현욱과 눈이 마주치더니 찡긋 윙크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뜨거우므로, 결국 멈춰 섰다.
‘쯧쯧, 지금 허세 부리면 더 쪽팔릴 텐데……."
이현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태산 씨! 혹시 그리스 신화에서 파에톤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현욱이 문득 물었다.
"응? 뭔 소리야? 난 그런 거 잘 모른다!”
"흠, 고위 등급 게이트는 대부분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랭커들은 공략 전에 신화 원전을 찾아본......."
"—아 씨, 몰라! 그냥 쥐어패면 다 죽는데 그걸 왜 봐!”
그래 , 그렇긴 하겠지…….
"저 새끼도 이 열 폭풍만 끝나면 쥐어팰 테니까, 잘 봐!"
이현욱은 피식 웃었다.
“그럼 제가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응? 뭘?”
"저기 저 보스 몬스터의 약점 말입니다.”
“뭐? …… 그게 뭔데?”
"그, 신화 속에서 파에톤을 죽인 게 뭔지 압니까?”
"아, 모른다고— 그리고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이현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유명한 제우스의 번개입니다!”
멋대로 태양 마차를 끌고 지상을 어지럽힌 파에톤,
그에 분노한 제우스가 놈을 격추한다.
저게 지상으로 떨어진 이유가, 원전에서는 그러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
즉, 파에톤의 약점은 ‘번개’이다.
하지만 번개도 번개 나름이지 저렇게 거대한 괴물을 박준모가 내뿜는 전격 공격 같은 것으로 리타이어 시킬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제우스의 번개에 맞먹는 또 다른 번개는 무엇일까?”
이현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른쪽 손목의 문신을 활성화했다.
시이이---——
어느새 그의 손에, 한 자루의 망치가 들려 있었다.
- ‘묠니르’ 스킬 ‘뇌신의 분노’가 사용 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르—르—르——!
저 멀리 서쪽 하늘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