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악마 숭배자들, 시가전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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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아무리 사람이 죽어나가는 잔혹한 ‘레이드’일지라도, 그 영역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스포츠’이자 ‘쇼’로 통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이벤트는 단연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의 대결, 그러니까 ‘PVP’였다.
"야! 지금 당장 TV 틀어 봐!”
"응?"
“아 빨리! 이현욱이랑 오키타 카이토랑 붙는대!”
"뭐? 그게 진짜야? 와 씨! 개 재밌겠다!”
그와 동시에 베팅 사이트가 열리며 도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의외로, 오키타 카이토가 (-280)으로 탑독이었다. 즉, 100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280달러를 걸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현욱이 패배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는 앞서서, 세계 각지의 랭커 플레이어들이 ‘검성 구타자’라는 소문에 대해서 일축하기를, 그건 낭설일 거라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이현욱이 아무리 잘났어도 ‘통제’계열이 ‘전사’계열을 1대1로, 그것도 육체적으로 구타하는 건 시스템 설계상 불가능하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실체가 증명될 순간이었다.
***
오키타 카이토는 눈을 감았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앞으로 4분 51 초…….'
그림자 남작이 원하는 건 5분 ‘그림자 링크’의 쿨타임이 채워질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일 터였다. 비록 이현욱이 던진 정체불명의 아이템에 의해서 그 스킬이 원천 봉쇄당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번째는 허무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검성, 5분이야! 버티기만 해!”
"이, 이봐! 또 눈깔 돌아간 거 아니지?”
그래, 오키타 카이토는 한 걸음 더 나갈 생각이었다.
'……그 시간 안에 저놈을 죽인다.’
그는 지난번의 싸움을 뼈저리게 기억했다.
‘그때는 솔직히 방심했다.’
아공간 발도술(亞空間 拔刀術)
그 최고의 일격을 막아낸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심지어 검의 정점에 올랐다고 평가받았던 전대 검성, 국표성 역시 그 일격을 계산해내지 못하고 옷을 내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때는 그 누구와 마주하더라도 단칼에 목을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건…… 다른 말로 방심이었다.
‘이제는 처음부터, 내 전력을 다한다.’
그는 오른손에는 카타나를 쥐고 왼손에는 단도를 쥐었다.
"아, 내 주먹질이 좀 아팠나보네, 대비 좀 한 걸 보면?”
이현욱은 오키타 카이토의 전략을 눈치챘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건 사실이었다.
이현욱에게 ‘언더훅’을 잡혔을 때, 길이가 긴 검은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단도는 바로 그런 순간을 대비한 것이었다.
‘아무리 가까이 붙더라도 칼을 쓸 수만 있다면, 이긴다.’
오키타 카이토는 대답 없이 바닥을 박찼다.
쉭— 신중하게, 정확하게, 빠르게, 그의 발과 검이 쇄도했다.
이현욱이 뒤로 물러나며 왼손을 살짝 움직였다.
하늘에 떠 있는 AD-1에서 온갖 무기들이 쏟아졌다.
쾅—!
그때, 그림자 남작의 발아래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 발톱이 그것들을 향해 날아들었고 AD-1 한 대가 으스러지며 추락했다.
그러자 서은하와 김세희가 그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이현욱, 저놈은 우리가 맡을 테니, 집중해!”
서은하가 홀리 라이트를, 김세희가 바람의 칼날을 쏘아냈다. 그리고 근처에 대기 중이던 AMT 저격수들의 공격도 이어졌다.
그렇게, 1대1 결투 환경이 만들어졌다.
쉬—쉬—쉬—쉬—쉬——!
수십 자루의 검과 창이 오키타 카이토의 등과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건, 이미 예측된 공격 패턴이었다.
"—소용없다!”
훙——!
오키타 카이토가 횡으로 크게 휘두르자, 마치 폭발하듯, 강력한 검풍이 일어나며 무기들을 이리저리 튕겨 내버렸다.
그 바람의 장막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몇몇 날붙이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감지했고 그 속도까지 계산했다.
챙! 챙! 챙! 챙!
물 흐르듯 움직이는 그의 칼이 날아드는 무기를 튕겨내고, 부러뜨리고, 깨뜨리며 이현욱을 향해 점점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놈을, 죽일 수 있다.’
제아무리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그 방아쇠를 당기는 자는 무른 살덩이일 뿐이다.
즉—_
단 한 번만 베면, 끝난다!’
챙! 챙! 챙! 챙!
이현욱의 손끝을 따라서 칼과 창들이 쏟아져 내렸지만, 오키타 카이토의 전진에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양단하고 튕겨내며 기어코 이현욱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단 두 걸음 거리,
칼을 뻗으며 닿을 거리에 도달했고,
채—앵——!
1합(合)이 이루어졌다. 오키타 카이토는 아공간을 사용하지 않고 칼을 연달아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공세를 받아내는 이현욱의 몸놀림까지, 세상이 놀랄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보통내기가 아닌 건 인정한다!’
오키타 카이토 역시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욱의 검에 대한 이해도와 감각은 결코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명실상부 최고 수준이었다.
그것도 근접 무기에 관한 특성이 아니거늘, 이 정도 감각이라니, 솔직히,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된다!’
그러나 오키타 카이토는 그 최고 중의 최고였기에, 이 싸움의 끝에서 피에 물들 게 될 칼날은 그의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챙! 챙! 챙! 챙!
정신없이 합을 나누던 시점, 그가 ‘아공간’을 열었다가 닫았고, 그의 칼이 사라졌다가 이현욱의 검 안쪽에서 현현했다.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고 정신없는 공방을 벌이며 틈을 노린 것!
'—끝이다!’
그 찰나의 순간, 이현욱의 어깨 부근에서 금속 돋아났다.
그것은 긴 칼날로 변하여 오키타 카이토의 칼을 쳐냈다.
‘뭐?’
이어서 이현욱의 몸 곳곳에서 칼날이 돋아나더니, 쏘아졌다.
쉭—쉭—쉭—쉭—
‘뭐야! 어떻게 몸에서 비수가 치솟는 거야!’
강체화와 금속 변형을 연계한 공격, 이건 예상 밖이었다.
오키타 카이토는 그 비수들을 피하고자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역으로, 이현욱이 전진하며 검을 휘둘러댔다.
챙! 챙! 챙! 챙!
마치, 전세가 역전이 된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오키타, 이번에도 너무 성급하게 들어온 것 같지 않나?”
그리고 그건 맞았다. 어느새……
웅—
그의 주변을, 온갖 금속 조각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었다.
쩌저저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뒤엉키며 창의 형태가 되고 있었다.
이건 마치, 창병 부대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개미지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큭, 언제 이렇게……."
“나를 상대할 때는, 1대1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백, 수천 자루에 달하는 병장기들이 살아 숨 쉬듯 움직인다. 분명 일인이거늘, 그가 휘두르는 전력은 병단의 규모이다.
오키타 카이토는 자세를 낮추며, 그것들의 돌진을 대비했다.
그러나, 칼날의 돌진 대신 한 마디의 빈정거림이 날아들었다.
"오키타 카이토, 너는…… 애초에 날 이길 수 없다.”
이현욱은 나긋하게, 아이에게 가르쳐주듯 말했다.
“너는 그때, 네가 방심해서 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마치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말에, 자못 당황했다.
"입, 닥쳐라, 곧 찢어줄 테니……."
이현욱이 싱긋 웃었고 오키타 카이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 생각해 봐, 나는 그때 성녀를 지켜야만 했잖아?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싸우질 못했다. 하지만......."
이현욱은 검을 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지금은, 오로지 내 방식대로 할 수 있다.
그러자 또 다른 금속들—지금까지 수차례의 전투에서 만들어진 수천 개의 금속 조각들이 이현욱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
고—오—오—오—오——!
그것들은 나선형으로 뭉치며 거대한 회오리를 형상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형태가 변하는 게, 마치 검은 파도를 등에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화산재를 등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고—오—오—오—오——!
그것은 흡사 어떤 ‘아우라(Aura)’ 같았다. 초월적인 존재의 등 뒤에서 넘실거리는 경외의 빛무리— 그러나 그 부피와 면적이 점점 늘어나자 악마가 몰고 나온 지옥의 연무에 가까웠다.
카—가—가—가—가——!
자욱하게 모여든 쇳조각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아무리 용감한 자일지라도 저곳을 향해서 전진하지는 못한다. 그건, 분쇄기를 향해 걸어가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어디…… 이걸 뚫고, 내 심장을 노릴 수 있겠어?”
이현욱은 전생에 숱한 암살 시도에 시달렸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서은하라는 방패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나 옆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방법을 고안한 게 이거다.’
상대가 다가오지 못하게, 강철 폭풍을 몸 주변에 두르는 것,
혹자는 이것을 ‘아이언 스웜(Iron Swarm)’이라고 불렀다.
이현욱은 아이언 스웜을 몰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카—가—가—가—가——!
그의 걸음걸음마다, 일대의 아스팔트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큭, 그딴 잔재주가 통할까 싶으냐—!”
후—웅——!
오키타 카이토는 강력한 검풍을 쏘아 보내 이현욱의 그 아이언 스웜을 일부 벗겨냈다. 하지만 그건 일순간일 뿐, 잠시 출렁거리며 밀려났던 강철 아우라는 이내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무겁지?’
오키타 카이토는 이현욱 몸 주변에서 비행 중인 작은 금속 조각들이 하나하나 무겁다고 느껴졌다. 그저 허공에 떠 있는 작고 가벼운 그것들을, 누군가가 꽉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실체는, 엄청난 수준의 금속 통제력이었다.
‘이현욱……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오키타 카이토는 행동의 방향을 잃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외통수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카— 가—가—가—가——!
‘저것에 칼 한 자루 단신으로 맞서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건 마치, 수백 개의 칼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이런, 젠장…… 어떻게…….'
오키타 카이토, 그는 천천히 깨달았다. 이현욱이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했으며 이제는 자신의 검을 깰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무두질 된 강철이 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의지가 꺾이는 순간, 모든 게 결판났다.
이현욱이 달려들었고, 오키타 카이토는 뒷걸음질 쳤다.
이현욱의 아이언 스웜이 뭉치며 칼과 창이 제작되어 쏘아졌고 오키타 카이토는 살기 위해서 칼을 휘저으며 그것들을 쳐냈다.
챙! 챙! 쩍! 챙! 쩍!
하지만 그렇게 막아내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칼로 쳐내 박살 낸 금속 조각이 응집, 다시금 칼과 창이 되어 날아들었다.
‘아니, 이 모든 걸 계속 쏘아댈 만한 마나가 있단 말인가?!’
오키타 카이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챙! 챙! 챙! 챙! 챙!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공세라면, 마나가 바닥나야만 했다.
‘사, 사기야…… 이건 사기야!’
그리고 그 아이언 스워머는 악몽처럼 점점 확장되어 간다.
그것의 그림자가, 오키타 카이토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 씨발, 사기야!”
그렇게 오키타 카이토를 집어삼키기 직전—
"검성, 숨을 고르고 빈틈을 노리시게!”
어디에선가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이현욱이 고개를 돌리니, 무너진 모텔 건물의 잔해 속에서 노인 한 명이 몸을 일으켰다.
이현욱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저 늙은이는 신쇼쿠라고 불리는 일본의 흑마법사다.’
그는 ‘악마 숭배자’라는 게 밝혀지며 플레이어계에서 퇴출당하기 전까지는 일본 랭킹 13위의 자리를 유지하던 강자였다.
그의 목조 지팡이에서 보라색 빛이 터지며 일대를 물들였고,
기괴한 소리와 함께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광선이 날아들었다.
츠— 츠— 츠— 츠— 츠——!
‘젠장, <심연의 채찍>이다!’
그것은 상당한 고위 흑마법이었다. 자신이 가진 스킬이 아니라 악마의 권능을 빌려와서 사용하는 대가성의 ‘차용 마법’으로, 신성력을 제외한 웬만한 방어력은 무시하는 강력한 필살기였다.
츠— 츠— 츠— 츠— 츠——!
이현욱 강체화의 마나 실드를 최대치로 증폭했다.
그리고 모글레이를 끌어와, 방패 삼았다.
하지만 저걸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젠장, 아이언 스웜을 전부 소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오키타 카이토를 또 놓치고 말 것이었다.
콰—앙——!
그때, 무언가가 ‘심연의 채찍’을 가로막으며 폭발이 일어났다. 그 보랏빛 광선 속에서, 옅은 백색의 빛이 피어올랐다.
우우우우——
회색 갑주를 입은 여기사, 서은하가 방패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녀의 회색 갑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큭! 이현욱, 빨리—”
그래, 서은하는 그래도 최고의 탱커였다.
"예! 조금만 버티세요!”
이현욱은 다시 오키타 카이토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여전히 이현욱의 ‘아이언 스웜’안에 갇혀 있었다.
쾅—!
그 안에서 검기를 쏘아내며, 깨부수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저건 내가 생각해도 상대하기 까다롭다.’
아무리 깨부수더라도 결국 더 작은 금속이 될 뿐이다.
즉, 그 규모가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이현욱은 그 안으로 페일노트를 쏘아 보냈다. 오키타 카이토는 이미 집중력이 분산되어 있던 모양인지 그 공격을 허용했다.
“—큭!"
그의 허벅지에, 페일노트가 박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현욱이 직접 뛰어들어갔다.
이 역시, 완벽한 틈을 노리고 행한 급습이었고,
촥— !
기어코, 이현욱의 검이 그의 왼팔을 절단했다.
"끄아아아—!”
오키타 카이토가 쥐고 있던 카타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아이언 스웜이 놈의 몸을 감싸고 뒤엉키며, 놈을 구속했다.
마치, 강철 거인의 손에 움켜쥐어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거, 거짓말…… 말도 안 돼! 전부 사, 사기야!”
그가 절규하며 발버둥 쳤지만, 잘 엮인 강철 감옥을 찢을 순 없었고, 이내 이현욱의 주먹이 그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뻑—|
강체화가 걸린 이현욱의 주먹은 슬레지해머로 내리치는 것과 같았다. 이는 오키타 카이토로서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그의 입에서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다.
뻑—!
단 2방...... 오키토 카이토 눈이 뒤집히며, 몸이 축 처졌다.
"......."
그렇게, 검성 오키타 카이토 그의 비참하디 비참한 완패였다.
그리고 검성 구타자, 그 별명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축하합니다!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웬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그걸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이현욱은 그대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콰—과—과—과—과——!
아이언 스웜이 움직이며, 나머지 두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런 썅—!”
그림자 남작과 신쇼쿠가 격하게 저항했다.
그림자 남작은 ‘그림자 덫’를 열어서 수십 개의 그림자를 이용, 날아드는 모든 금속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 주변으로 다트 형태의 ‘신성 근원’이 박히자 그림자 덫이 증발해버렸다.
"씨발, 이현욱, 너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는 무기력감을 느끼며 절규했다.
'역시, 이건 저놈의 완벽한 카운터다.’
그림자 남작의 스킬은 대부분 그림자 세계를 이용하는 공간 마법이므로 이 신성 근원을 잘 이용한다면, 놈은 할 게 없었다.
이내 그림자 남작은 서은하에게 멱살이 잡힌 뒤, 아스팔트 위로 매쳤고, 신쇼쿠와 그의 제자 역시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렇게 최악의 레드 플레이어 셋이, 이 땅에서 붙잡혔다.
이현욱은 숨을 고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좋아…… 현상금이 짭짤하겠군.’
***
“하하……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시나리오도 아니고…… 이거야 원, 말 그대로, 아주 완벽한 영웅 이야기가 쓰였군?”
우성문 실장은 오늘 하루 동안 서울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들을 세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흐뭇하게 웃었다.
"이현욱, 과연 이현욱……."
이현욱, 근래 그가 관심이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
도대체 그런 초특급 인재가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다가 이제야 등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만, 뭐가 됐든 그가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과 같은 편이라는 게 중요했다.
"그는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빠른 통찰력을 발휘해 신비로울 정도야. 내가 온갖 플레이어를 만나봤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 보는 것 같단 말이지…… 매번 나를 놀라게 해.”
그러나 그의 앞, 긴 책상에 앉아 있는 보좌관들은 조금 다른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딱딱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솔직히, 이현욱의 활약상은 분명 기이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인물이 사리사욕을 쫓아서 거대 민간 길드에 소속되는 게 아니라, 정부 기관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걱정이었다.
"저…… 실장님, 솔직히 저는 조금 걱정입니다.”
그렇게 말한 건 이교진 팀장이었다.
"……이현욱, 너무나 빠르게 크고 있습니다. 그, 라퓨타를 너무 오래 함구한 것도 걸리고, 그 전부터 조금 제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현욱이 너무 자라서, 혹시나 울타리 밖으로 뛰어나가서 날뛸까 봐 걱정입니다. 나이도 아직 어리니까, 그릇된 야망을 품게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이교준 팀장은 물론이거니와 각개 보좌관들 역시 엇비슷한 우려를 표했다. 이현욱의 아성이 우성문이라는, 이 나라의 견고한 목줄을 끊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우려였다.
“……이 나라가 어떻게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세계 각국의 공권력이 플레이어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혼란을 겪을 때, 우성문과 몇몇 정부 인사들의 노력과 헌신이 아주 견고한 ‘울타리’를 완성하고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우성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나라의 안정……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 이 나라는 어땠을까? 이 팀장, 그리고 여러분…… 과연 우리는 이 나라를 잘 지탱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까지야 최선을 다해왔지만, 앞으로 더 큰 위기가 온다면 우리는 말이야. 저런 영웅이 필요해."
이교준은 입을 쩍 벌렸다가, 천천히 다물었다.
“……설마, 이현욱을 후계자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랫동안 우성문을 모셨기에 그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 그곳의 수장인 실장은 정무직 공무원이었다만, 다른 부처럼 정부가 바뀔 때마다 ‘임명’되는 자리는 아니었고 아주 특수하게 ‘승계’되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자네들이, 다음 타자가 되어주겠지만, 더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이현욱이 한 가지 길이 될 거다.”
이 나라 공권력의 기둥인 우성문은 아직 건강하지만, 평생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방식들, 가령 ‘체계’와 ‘정보’로 거대 길드들을 통제하는 건 지금까지는 유효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지속해야 하고 보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거대 길드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건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힘…… 언제나 그렇듯 그게 핵심이다.’
그에게 없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절대적으로 강력한 힘, 넘볼 수 없는 공공의 통제력.......'
그는 이현욱에게 그런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
서울 안에서 벌어진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이현욱은 우성문 실장의 대리인인 이교준 팀장에게 짧게나마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그때, 한 가지 부탁을 받았는데…….
"흠......."
그 부탁을 들어주기가, 영 찝찝했다.
"그 한 마디, 솔직히 어려울 것 없지 않으십니까?”
“뭐, 그렇긴 한데, 그게 사실이 아니니 말입니다.”
"예? 사실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이 팀장님은 그 말을, 장담할 수 있으십니까?”
이현욱의 물음에 이교준은 눈을 끔뻑였다.
"큼, 그래도 때로는 시민들에게 한마디 말로 안위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영웅이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영웅은 무슨, 일단은 알겠습니다. 어려운 건 아니죠.”
이현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런 말 한마디 못 해주는 것도 웃기니까…….'
직후, 이현욱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 저기, 이현욱이다!”
"저기 잠깐만요! 인터뷰 좀 해주세요!”
"이현욱 씨, 이제는 슬슬 한 말씀 좀 해주세요!”
기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우르르 몰려와서 마이크를 들이대며 온갖 질문을 해댔다. 하지만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듯했다.
찰칵! 찰칵!
이곳에서 찍히는 사진은 아마도 오늘도 ‘서울의 영웅 이현욱, 기자들의 질문에는 묵묵부답’ 같은 제목으로 기사화될 터,
그런데.......
"오! 멈춰 섰다!”
"와! 드디어 한 말씀 해주시는 겁니까?”
이현욱이 카메라 앞에 섰다.
기자들은 그것만으로도 흥분했다.
지금까지 이현욱이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그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만든 사이보그라는 설이 돌 정도였다.
"......."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의 침묵 속에서, 이현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울은, 안전합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는 그렇게, 단 한 마디를 덩그러니 남기고는 사라져버렸다.
이는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에서 부탁한 것이었다.
‘뭐, 일종의 여론 호도다.’
그걸 부탁한 의도야 뻔했다. 근래 들어서 서울에서 연달아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국민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사건을 해결한 인물의 한 마디가— 그것도 공식적인 석상에서 내뱉은 첫 마디가 ‘안전’이라면…….
- 또 한 번 서울을 구한 이현욱, 서울은 안전하다!
- 이현욱 역사적인 첫 마디 “서울은 안전합니다.”
- 서울 시민들이 뽑은 최고의 플레이어 1위에 ‘이현욱’
- 충격! 지난 2달간 이현욱이 구한 목숨을 추산해보니…….
이렇게, 이교준의 말했던 것처럼, 영웅이라고 여겨지는 이의 한 마디는 많은 사람에게 작게나마 안정감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겨우 사흘 뒤,
그렇게 만들어진 안정감이 하루아침에 깡그리 사라지게 된다
난데없이, 상하이의 블랙 오크 왕국이,
대한민국에 선전포고해온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다름 아닌 라퓨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