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연금술 공장, 혈마법, 역병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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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한강 변에 자리 잡은 국내 최고의 연금술 연구 단지
그곳의 주변에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태가 사태인 만큼 현장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졌으며 일대 고층 건물도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그들은 어떻게든 한 자리를 차지했다.
"김 기자,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지 않냐? 저 안에서 음모가 들끓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나도 느낌이 팍팍 온다. 그게 아니고서야 왜 하필이면 연구소를 점거하겠어?”
그러나 그 이후로 몇 시간이 지나도록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경찰 당국은 ‘협상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사건이 정체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 저기 봐!”
인질극 현장 주변, 은폐 중이던 999특수임무대대의 병력이 마침내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그 작전이 성공적이었는지, 수백 명의 인질이 건물 밖으로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서, 선배! 테러리스트가 전원 사살됐다는데, 그게…… 이현욱이 한 일이랍니다!”
그들이 말하길, 이현욱이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했다고 한 것이었다.
“—뭐? 또 이현욱이야? 아, 아니,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오늘날, 그 누구보다 유명하지만, 정작 단 한 번도 활약상을 드러내지 않은 영웅,
그가 비밀리에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속보] 강동구 인질 현장 ‘서울의 구원자’ 이현욱 투입 정황 포착 (1보)
[속보] 강동구 구출된 인질들 “이현욱이 나타나서 구해줬다.”
[속보] 강동구 테러리스트의 무기 ‘강철의 조종자’ 이현욱 앞에서 무력화 (1보)
세상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토론하기 시작했다.
"후…… 추측성 기사 좀 그만 쓰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모습 좀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사실, 기자들에게 있어서 이현욱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그가 몰고 다니는 이슈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거늘 정작 실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기사를 쓸 때 ‘가정’에 기대야만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더 큰 사건이 터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 마무리 분위기잖아?”
"아, 하긴…… 이러면 이번에도 그 인간 활약상을 볼 수가 없겠네……."
그때였다.
쿵— 쿵— 쿵— 쿵—
"어, 이거 뭐야?”
발아래, 지하 어디선가 굉음이 울리더니 지축이 한바탕 뒤흔들렸고,
이내 연구소 건물 B동, 사건의 중심지인 그곳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어! 뭐, 뭐야!"
"건물이 무너진다! 모두 피해!”
다소 갑작스러운 전개 속에서, 그들은 이현욱이라는 이슈를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잠시 후, 방송국 카메라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예, 저는 KAC 인질극 현장에 나와 있는 이정훈 기자입니다!"
이정훈, 그는 MBS 보도국의 플레이어 전문 취재기자였다.
그의 등 뒤로, 반쯤 무너진 연구소 B동 건물이 보였다.
“……제 뒤로, 원인 불명의 충격으로 인해 주저앉은 연구소 건물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내 붕괴로 인해 자욱하게 일어났던 분진이 옅어지며 거대한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절절히 흘러나오는 어떤 괴성, 그것을 방송국 마이크가 잡아냈다.
끄에에에——!
기이한 육성의 뒤엉킴…… 저 검은 구덩이 자체가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
이에 화면 속, 마이크를 쥐고 있는 이정훈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갔다.
"어, 지금, 어떤 기이한 소리가 부, 붕괴 현장의 구멍 아, 안에서……."
이상하게도 혀가 절로 꼬였다.
‘뭐야, 젠장!’
지금 당장 이곳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그의 무의식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충동을 억지로 밀어내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아무래도 무, 무언가가…… 그것도 아주 많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언급에 맞춰, 중계 화면이 상공의 드론 카메라로 전환, 구덩이 안을 클로즈업했다.
그 순간, 이정훈은 물론이거니와 스튜디오의 앵커들조차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수십 미터 깊이의 싱크홀, 그곳을 붉은 은하수처럼 빼곡하게 수놓은 붉은 안광(眼光),
인간의 상체에 파충류의 꼬리를 가진 정체불명의 괴인(怪人)들이 구덩이 안쪽 벽면을 빼곡하게 수놓은 채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적어도 수백 마리, 아니 수천 마리…….
그건 마치 흰개미 굴에 초소형 카메라를 집어넣은 것 같은, 징그럽고 역겨운 장면이었다.
또는 지옥이 범람을 앞둔 듯한 모습이었다.
끄에에에——끄에에에——
이어서 정부 측 요원들의 다급한 고성이 방송국 마이크에 잡혔다.
"지금 당장 이 현장을 이탈하십시오! 이곳에 광역 저주 디버프(Debuff)가 퍼질 겁니다!”
이어서 군용 수송기들이 날아들며, 하늘이 우르르 진동했고,
고집스레 버티고 있던 기자들마저도 허둥지둥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저, 저희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 계속해서 상황을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정훈이 장소를 이동하는 가운데에도, 드론 카메라는 계속해서 싱크홀 쪽을 비췄다.
그런데 그때였다.
카메라에 다소 이상한 장면이 하나 포착되었다.
괴인—아귀들이 기어오르고 있는 구덩이 앞에, 누군가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어?”
이정훈 역시 그 장면을 확인한 뒤, 화면 위로 목소리를 입혔다.
"어! 저기 보십시오! 구덩이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의 정체를, 이정훈은 기자로서 단숨에 알아보았다.
"마, 맙소사! 서울의 구원자 이현욱입니다! 그가 구멍 앞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그는 그제야 이현욱이 이 현장에 와 있다는 걸 상기했다.
"그것도 홀로 서 있습니다! 설마 저 괴물들을 혼자서 막으려는 걸까요?”
이 한 장면만으로도 대박이거늘, 이어지는 장면들은 하나 같이 놀랍기 짝이 없었다.
우우우우——!
그의 머리 위로 웬 거대한 백색 물체가 마술처럼, 번쩍하고 등장했다.
긴 타원형의 백색 몸체, 유선형의 부드러운 곡선, 4장의 날개가 새겨진…… 비행선이었다.
"헉! 비, 비공정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비공정인 듯합니다!”
세상에 단 3대 밖에 없다고 알려진 아이템형 비공정, 그 4번째 존재의 첫 등장이었다.
우우우우——
이어서 그것의 후미가 열리고 웬 검은색의 ‘정육면체’가 줄지어 비상하기 시작했고,
그 ‘정육면체’의 표면의 마나 회로가 옅은 빛을 흘리며 이현욱의 등 뒤로 정렬했다.
"지금 그가 무언가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괴물들을 막아낼 작정인 건 확실합니다!”
검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 떼거리를 홀로 막아선 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등 뒤로 늘어선 정육면체의 기계 장치들,
그것들이 햇빛을 반사하여 번뜩이는 모습은 자못 우아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 그림, 진짜 대박이다! 결과만 좋다면 역사에 남을 한 컷이야!’
플레이어 전문 기자 7년 차인 이정훈은 이 장면이 내포된 엄청난 의미를 이해했다.
‘그래…… 음지에서 실력을 쌓아가던 영웅이 마침내 진짜 데뷔전을 순간, 그런 거다.'
이내, 이현욱이 왼손을 들어 올림으로써 역사적인 첫수를 두었다.
터—더—더—더—더—덩——!
정육면체의 비행체의 밑면에서 무언가 낙하, 바닥에 내리박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깃발 형상이었는데, 긴 장대 끝에 웬 거대한 잎사귀가 매달려 있었다.
그 잎사귀가 웬 녹색의 아우라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 해당 지역에 <신목의 영역>이 적용됩니다.
* 모든 ‘어둠 계열’ 속성의 몬스터가 약화합니다. (-15%)
* 모든 ‘신성 계열’ 속성의 데미지가 상승합니다. (+20%)
이는 세계수의 이파리로 만든 일종의 ‘성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성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반영구적인 ‘오브젝트’로서 제작·설치·보존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신목의 영역>은 ‘소비 아이템’ 형식의 성물이었다.
쉽게 말해서, 설치가 아주 간단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가 마치 저 괴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무언가를 ‘전개’합니다!”
이정훈은 안정감을 되찾은 목소리로 현장 중계를 이어나갔다.
"지금으로써는 왜 그가 혼자서 나섰는지,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 상황 앞에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거늘,
이현욱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가벼운 손짓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귀 떼의 첫 번째 행렬이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끄에에에——!
그 역겨운 모습이 온전히 카메라에 담겼다.
그때—
정육면체들이 구덩이를 포위하듯 반구형 대형을 이루더니 몸체의 중심부에서 긴 ‘관’이 돌출되었다. 그리고 이현욱이 왼손을 뻗는 순간, 그 ‘관’들이 금속 발사체를 뿜어냈다.
투—두—두—두—두—두——!
일제 사격으로 형성한 빈틈없는 화망(火網),
선두, 수십 마리의 아귀가 그곳에 걸리고 말았다.
퍼—버—버—버—버—버——
그것들의 몸이 사분오열되며 이리저리 널브러졌다.
"보, 보십시오! 이현욱의 스킬이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괴물들이 죄다 쓰러집니다!”
그런데, 그것들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푸—우—우—우——
- 주의! 해당 지역에 ‘악마의 숨결’이 퍼집니다.
그 기분 나쁜 연기가 이현욱의 전신을 휘감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건 아귀들도 마찬가지였다.
끄에에에——!
놈들은 이현욱의 공세에도 결코 멈춰 서지 않고 계속해서 밀고 나왔다.
그 어떤 감정 없이, 그저 먹잇감의 냄새를 따라서 폭주하는 난폭한 짐승들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그것들이 구덩이 밖을 걷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왼손을 움켜쥐는 순간, 쏘아져 나간 수백 발의 쇠 구슬이 폭발했다.
쩌—저—저—저—정——!
그것들이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자 구덩이를 막 벗어났던 수십 마리가 휩쓸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파편들이 구멍 주변부를 따라서 회전하며 ‘쇳조각 회오리’를 형성했다.
쿠—오—오—오—오—오——
칼날 폭풍, 그 회오리가 구덩이를 휘감으며 사납게 몰아친다.
"와…… 마치— 거대한 믹서기를 연상게 하는 기술입니다!”
이에 아귀 떼의 전진이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진짜로, 저 괴물 떼거리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정말, 어, 엄청난 화력입니다!”
이현욱은, 그렇게 밀어내며 구덩이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가…… 저 괴물 공세를 그저 막아내는 게 아니라, 뚫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세상이 목격했다.
***
이현욱은 이 순간이 닥쳤을 때 좁은 통로를 지킬 수만 있다면, 아귀 떼거리를 막아내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 예측했고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예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생각보다 더 쉽잖아?’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수십 마리의 아귀가 고깃덩어리가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다.
‘역시, 내 예상보다 내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현재 조종 가능한 금속 무게 : 491kg
* 초월 감각(+30%)이 적용 중입니다.
* 강골(+10%)이 적용 중입니다.
* 월드 보스 몬스터 슬레이어(+5%)가 적용 중입니다.
* 서울의 구원자 (+100%)가 적용 중입니다. : 상위 추가 효과와 중첩됩니다.
이는 다분히 <서울의 구원자>라는 효과 덕분이었다.
앞선 모든 효과를 포함, 금속 통제력을 2배로 올려준다.
'이제 서울 안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력한 화력을 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숫자의 금속을 통제할 ‘마나’ 역시 충분했다.
- 마나:67,441/74,459
* 초당 마나 회복 속도 : 199
그동안 노움의 유적지 A3에서 얻은 ‘노움제 소형 마나 발생 장치’를 꾸준히 삼켰기에, 마나 총량은 물론이거니와 마나 회복 속도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레벨 외 성장 특성의 이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전투나 훈련 없이도 매 순간 차곡차곡 업그레이드된다.
‘그리고 이 정도면 밖에서 농성하는 게 아니라, 직접 들어갈 수도 있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이 되는 자가 저 아래, 지하 연구 시설 깊은 곳에 있다.
이현욱의 본래 계획은 아귀 떼거리의 범람을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그놈이 제 발로 직접 기어 나올 테니…….'
그런데 지금은 직접 들어가서 놈이 다른 작당을 꾸미기에 앞서 선수를 칠 수 있을 듯했다.
‘놈은 아마 당황했을 테고, 지금쯤 급히 다른 계획을 세울 테지만…….'
여기에서 이현욱이 과감한 전진을 택한다면 놈의 계획이 또 한 번 틀어질 것이었다.
저벅— 저벅—
그렇기에 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철컥—
아직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샷건 <블랙라이노>를 등 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에 구덩이를 에워싸고 있던 ‘쇳조각 폭풍’이 또 다른 움직임을 펼쳐지기 시작했다.
쩔겅—쩔겅—
이현욱은 그것들을 ‘금속 변형’하여 서로 엉키게 했고, 일종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물론, 평범한 고리는 아니었다.
뾰족한 칼날이 사납게 돋아나 있는, 가시관 같은 형상이었다.
‘낙하—’
이현욱이 손을 떨어뜨리는 순간, 그 고리가 고속 낙하했다.
콰—드—드—드—드——!
그것은 구덩이를 헤집고 떨어졌고 벽면을 타고 올라오던 아귀들을 긁어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시 한번 ‘파쇄’를 일으키며 좁은 통로 안을 죄다 짓이겨 버렸다.
콰—아—아—아—앙——
구덩이 안에서부터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단숨에 엄청난 숫자를 죽였을 것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목록]
4) 악마 학살자
- 조건 : 악마 유형의 몬스터 999마리 이상 사냥
- 효과 : 악마 유형의 몬스터에게 입히는 데미지 상승 (+20%)
이는 전생에도 달성한 적 있는 업적이었다.
‘악마를 상대할 때, 그 무엇보다 필요한 무기다.’
지금까지는 악마라는 게 아주 특별한 이벤트에서나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훗날, 점점 차원의 틈새가 헐거워졌네, 어쩌고 하면서 놈들이 직접 강림한다.’
그러한 시기가 올 때까지 이 악마 학살자 등급을 높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 첫 단추를 꽤 일찍 끼운 것이었다.
이현욱은 구덩이 몸을 던지며 자유 낙하했다.
'역겹군…….'
코를 찌르는 악취,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바닥에 추락 직전, 강체화된 신체를 허공으로 띄웠다.
웅——
그는 시체가 쌓여 있는 바닥에 착지하지 않고 중도에 벽면의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곳은 복도였다. 벽에 나 있는 층 표시를 보아하니 지하 6층이었는데, 긴 통로를 따라서 온갖 점액질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아마도 아귀 떼가 이곳을 통과했다는 흔적일 터,
‘이 길을 따라서 가면 되겠군.’
이곳, 지하 연구동은 지하 10층까지 있는 아주 거대한 시설이었다.
그렇기에 관계자가 아닌 이상,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도 아귀 떼에 의해서 건물 자체가 형체를 갈기갈기 찢겼다면 더욱이.......
하지만…….
'……움직임이 있다.’
그의 감각 안으로 '움직이는 금속’들이 포착되었다.
‘아귀 떼가 금속을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을 테니…….'
즉, 인간의, 살아있는 인간의 움직임일 것이었다.
***
“……젠장! 이게 말이 돼!”
안경을 쓰고 백색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이곳 지하 9층의 비밀 시설 ‘실버 라인’ 책임자인 최태준 박사였다.
그가 맡은 프로젝트의 이름은 ‘신화’로, 말 그대로 신이 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즉, 시스템을 이용해서 인간이 영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그의 연구 목적이었다.
오늘, 그 대업의 첫 번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씨발, 이게 갑자기 뭐야!”
이렇듯, 좋지 않은 실험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11명의 연구원이 고개를 쭉 숙인 채 서 있었다.
"그게…… <공양 프로젝트>은 빈틈없이 진행되었지만, 외부 변인이 있었습니다."
그 변인은 단 한 명의 플레이어, 이현욱이었다.
"그 남자가 여기에 나타날 줄도, 그리고 그렇게 강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 말은 최태준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도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저 여자를 데리고, 1번 2번을 가지고 탈출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묶여 있는 한 여자를 가리켰다.
"어, 그렇다면 저희는……."
누군가 그렇게 묻자 최태준의 눈초리가 매섭게 일어났다.
"그거야 당연히, 대의를 위해서 이곳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 한 마디에,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던 연구원의 눈동자가 굳은 신념으로 변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들은 이미 악마의 힘에 현혹된바,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곧이곧대로 명령을 따랐다.
그때였다.
"—박사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이 건물 안에 생존자는 없잖아?”
"그게…… 아마도 외부 침투인 것 같은데…… 아직 얼굴이 확인 안 됐습니다.”
그는 CCTV 화면을 확인했다.
정말로 한 남자가 암전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 길을 아주 잘 찾아서 오고 있었다.
"어? 저 미친 새끼, 뭐야? 뭔데 지금 여기를 한가롭게 걷고 있어?”
"아마도 이현욱, 그 인간이 들어온 듯 합니다.”
"아니, 왜 혼자서 여길 들어오는 거야? 이러면 썅…… 내 탈출 계획도 차질이 생기잖아!"
그는 머리를 헝클어버렸다. 완벽했던 계획에 또 하나의 변수가 일어났다.
"후......."
"이화준, 너희 팀이 해줄 게 하나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너희는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면서, 저 남자를 생체 폐기물 소각장으로 인도한다.”
즉, 같이 소각장 안으로 같이 들어가서 불타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호명된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미 목숨을 버릴 마음가짐이 완성된 상태였다.
"박사님, 그놈이 방금 우리 연구실 라인 복도로 진입했습니다.”
이에 최태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것처럼 눈이 축 처졌다.
"후…… 우리는 여기 안전문에서 버틴 거다. 전부, 티 내지 말고, 잘해.”
그의 말에 다른 연구원들 역시 고된 얼굴을 자아냈다.
이어서 그가 손짓하자 단단히 닫혀 있던 ‘안전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 연구원이 밖으로 쭈뼛거리며 나갔다.
"꺅! 거, 거기! 누, 누구십니까!”
그녀는 당황한 연구원 역할을 충분히 잘 해냈다.
“……생존자입니까?”
어둠 속의 남자, 이현욱이 그렇게 물어왔다.
‘좋아, 그게 당연한 반응이야. 이제, 겁먹은 여자를 안심시키고 너는 방심하면 돼.’
최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들어왔든 간에 여성 생존자 앞에서는 경계심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 마, 맞아요! 구조대원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음, 어떻게 이 사태를 피하신 겁니까?”
"네…… 여, 여기에는 두꺼운 안전문이 있어서요. 우, 운이 좋았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이기까지 했다.
시키지도 않은, 상당한 연기력에 최태준은 흐뭇했다.
"그렇다면 안에, 몇 명이 있습니까?”
"흑…… 아, 지금…… 13명이에요.”
"이 사태는 어느 정도 통제됐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 정말 무서웠어요. 흑흑—”
저벅— 저벅—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경계심을 풀었다는 뜻이었다.
"저, 그런데 혹시……."
“흑— 네?”
"한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네, 마, 말씀하세요.”
"거기에, 최태준 수석연구원도 있습니까?”
"아, 맞아— 예?”
"......."
"어, 바, 방금…… 누구 말씀하시는 거죠?”
일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한 줄기 파공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