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연금술 공장, 혈마법, 역병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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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 협상을 하러 왔다.”
연구소 B동의 로비, AMT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고요하기만 한 인질극 현장에서 차분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다분히 이질적이었다.
"......."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18명 테러리스트는 물론이거니와,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수백 명의 인질 역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즉, 이 건물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단 한 곳에 맺힌 것이었다.
'……뭐야, 저거? 어떻게 들어온 거야?’
테러리스트들의 리더 이 실장은 그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짧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은신’이었다.
‘접근하면 인질을 죽이겠다고 그렇게 엄포를 놓았는데도 이딴 방식을 강행하다니…….'
이 실장은 어이가 없어서 연달아 코웃음을 치며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 역시 죄다 총구를 들어 올렸다.
철컥— 철컥—
“쯧쯧— 이런 멍청한 새끼들, 그렇게 말했는데도 기어코 은신으로 기어들어 와?”
7.62mm 20발들이 탄창, 그중 약 10발 정도에 ‘인첸트’가 걸려 있었다.
이걸 난사하면 플레이어에게도 적잖은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어이, 이걸 그냥 총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인질뿐만 아니라, 너도 죽는 거야!”
"그 말,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응? 이 새끼, 이거 뭐라는 거야?”
그 남자, 이현욱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인질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요!”
그들이 보기에도 무모한, 아니, 정신 나간 듯한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우, 우리 몸에 폭탄이 있어요!”
"제발 멈춰요!”
잘못했다가는 여기에 있는 수백 명이 깡그리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현욱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저벅— 저벅—
"씨발, 쏴! 그냥 다 죽여 버려!”
참다못한 이 실장이 그렇게 외쳤고 다시금 온갖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잠시 후 비명이 멎었을 때,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초, 총이……."
틱—틱— 틱—틱—
여기저기에서 보잘것없는 금속 소리가 들릴 뿐, 총성은 단발도 울리지 않았다.
딱—
이어서, 웬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이 쥐고 있던 총들이 사분오열되며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뾰족한 송곳으로 변하는 것을, 놈들은 보았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푹—푹—푹—푹—!
그것들이 일시에 테러리스트들의 목덜미를 찔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17명의 몸뚱이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뭐야!”
하지만 이 실장, 그는 나름 마법사 플레이어였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마나 실드’를 덧대어 날아드는 금속 송곳을 튕겨냈다.
텅!
"이런 개 썅!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인질을 살릴 생각은 없다는 거냐!”
그는 인질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맨손이었지만, 인질들은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웅——
인질들 사이사이에 폭탄 조끼를 입혀둔, 그곳에 마나를 부여한다.
그리하면 마나 회로가 작동하여 ‘격발 스위치’가 눌릴 것이었다.
이는 실장이 이미 몇 번이고 인질들에게 협박처럼 했던 말이었다.
"어, 어어—”
“—꺅!”
그렇기에 인질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을 질끔 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야, 뭘 그렇게 계속 하는 척만 하는 거야?”
이현욱이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어? 뭐, 뭐야……."
"그래서, 세 번째 계획은 없나?”
"그럼…… 협상 끝이다.”
18개의 소총 부품들이 금속 변형으로 쇠사슬 모양으로 변했다.
그리고 뱀처럼 날아들어 이 실장의 목을 휘감더니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커, 커—억!”
그는 그렇게, 교수대에 매달린 것처럼 바둥거렸고,
이현욱의 허리춤에서 10개의 쇠 구슬이 날아들었다.
뻑——!
첫 번째 일격은 옆구리—구슬이 거의 반쯤 파고들었다가 튕겨 나왔다.
그 강타에 갈비뼈가 으스러진 듯, 놈은 꺽꺽—거리더니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끄아아—사, 살려줘!”
"안타깝게도 나는 인질 같은 건 안 잡는다.”
10개의 쇠 구슬이 그의 몸 주변을 이리저리 회전하며,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뻐—버 —버—버—버——!
단 몇 초 만에 수십 방의 타격— 놈의 몸, 웬만한 뼈들이 잘게 잘게 으스러졌다.
이내, 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풀썩—
거기까지, 총 18명의 테러리스트가 제압되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인질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 상황을 훑어보았고 이내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어……."
"그 사람 맞죠? 이현욱…… 서울의 구원자!”
"헉! 맞아요! 그가 우리를 구하러 왔어요!”
그들은 이현욱을 알아보고 격한 관심을 표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건물 안쪽을 천천히 훑으며, 허리춤에서 마나 메신저를 집어 들었다.
칙—
“……협상 끝났습니다."
그렇게 무전을 보내면서도 그의 시선은 건물 안쪽,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통로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텅 빈 어둠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괴성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께에에에———
저 아래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조금 더 격렬해지고 있다는 걸, 그는 느꼈다.
‘슬슬 시작될 거다.’
그리고…….
- 주의! ‘악마의 시험대’의 입장하셨습니다.
* 해당 지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움트고 있습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999특수임무대대의 최정예 팀 ‘코브라 스쿼드’의 분대장 이길현 대위,
그는 이현욱이 은신 스킬로, B동에 침투하는 장면을 본 뒤 콧방귀를 뀌었다.
"젠장, 재수 없는 자식…… 어디, 얼마나 잘 하는지 봅시다. 아주, 인질 한 명이라도 잃어 봐! 내가 방송에 나가서 저 인간이 혼자 하겠다고 억지 부렸다고 다 말할 테니까!”
이현욱 병장, 오늘날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의 활약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그 어떤 영상 자료나 사진 한 장조차 없었다.
그가 활약했던 4차 웨이브 존에서는 모든 전자 장비가 먹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리 잘난 놈도 실수하기 마련인데,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할 생각을 안 해?”
뭐, 그래도 국가에서 공인하는 영웅인 만큼 그 사람의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다만…… 이렇게 난데없이 나타나서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하니, 여러모로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대위, 그래도 입조심 해. 그 사람이 윗선에다가 안 좋게 보고하면 어쩌려고 해?”
작전 팀장 오성훈이 어르듯 말했다.
"무려 청와대 라인, 우성문 실장 라인이잖아? 그 늙은 호랑이 눈 밖에 나면 피곤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이렇게 들러리 취급하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나도 기분 나쁘긴 한데, 그쪽이 조곤조곤 말하는데 자네가 먼저 시비 건 거 알지?”
"일단은, 이 작전에 집중하자고, 저 양반이 들어갔으니까 곧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거야. 그리고 아무리 재수 없어도 그 사람이 이번 일 잘 처리해주기를 바라고 있잖아?”
그때, 생각보다 이르게 첫 번째 무전이 들어왔다.
- 칙— 협상 끝났습니다.
그 내용을 듣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어, 뭐가 끝났다는 겁니까?”
방금 그건 분명 이현욱의 목소리였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순식간에……."
그가 진입하고 고작 1분여 지난 시점이었다.
좀처럼 믿을 수 없었기에, 마법 드론 1대의 고도를 낮춰 건물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로, 테러리스트들이 죄다 쓰려져 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들의 몸 주변에 피 웅덩이가 고여 있는 걸 보아하니 자비 없이 처리한 듯했다.
"허…… 진압팀, 진입한다!”
작전 팀장, 오성훈의 명령에 일대에 대기 중이던 진압팀들이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그 무엇보다 인질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확보한다!”
오성훈 역시 진압팀의 뒤를 이어서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로비에 발을 내딛는 순간…….
- 주의! ‘악마의 시험대’의 입장하셨습니다.
* 해당 지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움트고 있습니다.
눈앞에, 붉은색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 팀장님, 이거 보이십니까? 무, 무언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성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덜미가 시큰거려옴을 느꼈다.
아무래도 곧 좋지 않은 일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 이는 베테랑의 감각이었다.
"그래, 나도 봤다. 이현욱 병장은 어디에 있지?”
"저기,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서 있습니다.”
이현욱은 무슨 일인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살피고 있었다. 그건 지하 시설로 내려가는 화물용 엘리베이터였는데 대형 트럭도 실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크기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오성훈을 마주 보았다.
"오 팀장님, 인질극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예, 시스템 메시지를 봤습니다. 젠장,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건지……."
그때, 진압팀 요원 두 명이 인질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저, 팀장님, 여기 이분이 현 사태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백색 가운 차림, 연구원인 듯했다.
"저는 이 연구소의 마나제어연구부 책임연구원 안용운입니다.”
"예, 말씀하실 게 혹시 이곳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이벤트’에 관한 겁니까?”
"예, 맞습니다. 저희도 상황이 이렇게 미처 돌아갈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아래에는 이, 인간을 잡아먹는 끔찍한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일 테고요. 그래서 아마도...... 생존자는 없을 겁니다.”
"음…… 괴물이라면 몬스터 말씀이실 테고, 설마 게이트라도 열린 겁니까?”
오성훈의 물음에 연구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게이트는 아닙니다. 그 괴물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예? 몬스터를 만들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는 처음 들으면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영생을 주제로 시작된 연구였으나 점차 악마의 현혹에 넘어가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그 목적은 악마에게 인간들을 공양하여 ‘힘’을 얻는 것이었다.
‘영생을 얻는 방법 중에서 가장 손쉬운, 악마의 힘을 빌리는 걸 택한 거다.’
그리하여 악마의 뜻대로, 실험실에서 ‘아귀(織鬼)’의 알을 배양하기에 이른다.
그 숫자가 무려 삼천 팔백여 개…….
지금, 그것들이 알을 까고 나와서 첫 번째 사냥에 나선 것이었다.
"젠장, 그게 뭔지 몰라도 일단은 저기에서 못 나오게 틀어막아야 하는 건 확실한데……."
오성훈으로서는 이 연구원의 설명만으로는 아직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없었지만, 시스템 메시지로 경고가 표시된 만큼 웬만한 난이도의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반경 5km 안에, 아파트가 아주 많습니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의 '마나 메신저’의 버튼을 눌렀다.
“아— 작전 팀장이다. 전 병력 전투태세 유지, 지금 당장 이 건물을 포위한다.”
그런데, 연구원이 그의 판단을 부정하듯 고개를 젓더니 애원하듯 말했다.
"저, 그것들을 막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상당수의 프리스트와 성기사를 동원해야…… 아니, 더 ‘성물’을 잔뜩 가지고 와서 이 근처에다가 ‘성소’를 벙커처럼 설치해야 합니다.”
“……성물이라니, 그런 게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그 괴물을 죽이면 웬 검은 연기가 터져 나오는데, 거기에 닿으면 저주에 빠집니다.”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곳의 경비팀들이 아귀를 죽인 뒤 발생한 어떤 ‘연기’에 노출되었는데, 잠시 후 시름시름 앓더니 이내 ‘지옥의 주민’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주민을 죽이면, 또 검은 연기가 발생해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다.
그게 바로 수도권 동부를 휩쓸었던 ‘역병’의 정체였다.
"그 검은 연기는 방독면이나 방호복 그런 것으로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생물학적인 감염이 아니라 마법적인 저주다. 조금 더 쉽게 말해서, 몸이 아니라 영혼 자체를 오염시키는 현상으로, 일반적인 MOPP 방식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설명을 듣고 있자 하니, 오성훈의 얼굴이 점차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 대체, 여기에서 어떤 끔찍한 걸 만들어낸 겁니까?”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최정예 특수 부대일지라도 대응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대테러 작전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니었다.
"테러가 아니라, 재앙이잖아, 이건……."
지역적인 테러가 아니라 국가적인 재앙 그게 맞았다.
"오 팀장님, 지금 당장 이 주변의 민간인들을 피신시키고 지역을 폐쇄해야 합니다."
이현욱의 말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선 그래야겠군요. 일단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죠.”
그때였다.
쿠—구—구—구——
이내 건물 전체가 뒤흔들리며, 정체 모를 괴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끄에에에——
화물용 엘리베이터 통로, 저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안 돼! 그, 그것들이…… 지하에서 먹을 게 떨어지자 지상으로 나오려는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구원은 뒷걸음질 치더니 건물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끄에에에——!
이현욱과 오성훈 역시 천천히 그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멀어졌다.
저 괴성의 주인들과 맞닥뜨릴 순간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오 팀장님, 여기는 저한테 맡겨주시고, 일대 차단선 작전을 지휘하십시오.”
그 말에, 오성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지금 또 혼자서 저것들을 막아보겠다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저는 저주 면역이 있어서 그 저주에 개의치 않고 싸울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악마의 영향력을 막을 수 있는 ‘대천사의 약초’를 구해서 미리 섭취한 상태였다.
- ‘대천사의 정화’가 적용 중입니다. (00:14:53)
"그렇다고 쳐도, 저 괴성을 듣건대, 숫자가 어마어마합니다. 큰 화력이 필요할 겁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제 화력은…… 세간의 소문대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 말에 오성훈은 어떤 유명한 이야기를 떠올랐다.
"아, 설마 강철비를……."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건, 광역 마법인 ‘양방향 포탈’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무기고와 전장의 하늘을 연결, 강철 무기를 비처럼 쏟아내는 방식,
그건 매스컴을 통해서 질리도록 들은 최고의 연계 기술 ‘강철비’의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광역 마법’을 시전해 줄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 활용 방법을 다양화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성훈은 이 남자랑 대화할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혼자서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모든 면에서 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알게 모르게 이 남자의 말을 믿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막힘 없이 방향성 제시한다.’
그런 종류의 사람을 믿고 따르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몰랐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격변이 일어났다.
쿵—! 쿵—! 쿵—! 쿵—!
발아래 지하에서부터 한층 한층 무너져내리는 소리, 건물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었다.
"젠장, 건물이 무너집니다!”
"—모두 밖으로 나가!”
이현욱은 온몸에 강체화를 둘렀고 오성훈 역시 마나 실드를 가동했다.
으적—
엘리베이터 부근,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건물이 한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아귀 놈들, 기둥까지 물어뜯어 버렸군?’
세상 밖으로 나올 출입구를,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오성훈은 뒤흔들리는 건물에서 탈출했다.
"젠장, 어서 민간인들 권외로 대피시켜!”
쿠—구—구—구—구——
직후, 연구소 B동 건물이 반쯤 무너지며 1층 로비가 훤히 드러났다.
그곳의 바닥에 거대한 싱크홀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시커먼 어둠 속, 붉은 눈동자들이 은하수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모양새가 점점 진해지고 커질수록 역겨운 괴성 역시 증폭되었다.
끄에에에——
지옥의 입구 같은 그 구멍 앞에 단 한 명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근처 빌딩 위에 배치되어 있던 방송국 카메라가 그의 뒷모습을 잡았다.
"......."
그 장면을 바라보며, 오성훈은 어떻게 ‘강철비’를 불러온다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저 남자는 지금, 그저 웬 방패를 하나 쥐고 있을 뿐이었다.
끄에에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괴성, 진동, 악취…… 오성훈은 손에 땀을 쥐었다. 저도 모르게 저 남자를 믿겠다고 했지만, 상황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밀리면 공격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저 남자가 실패하면, 저 괴물들이 도심으로 들어가는 걸 방치하는 꼴이 된다.’
그때였다.
이현욱이 방패를 들어 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응?"
그 순간—
후—우—우—웅——!
거대한 물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일대에 돌풍이 일었다.
"뭐, 뭐야!”
이 장소에 있던 군인, 기자, 민간인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고 입을 찍 벌렸다.
분명 텅 빈 허공이었는데,
마치 마술처럼 혹은 순간이동처럼 백색의 비공정이 번쩍이며 등장한 것이었다.
이현욱은 등 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을 들었다.
‘그래, 이제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
자신이 가진 힘을 억지로 숨기는 것도 여러모로 손해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드러내놓고,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잡아낼 생각이었다.
그는 프리드웬의 그림자 아래에서,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철컥—!
프리드웬의 램프도어가 열리고 화물칸에 탑재되어 있던 공중투하장치—AD-1이 하나둘씩 비상했다.
우우우우——
12개의 공학적인 정육면체가 허공을 부드럽게 유영하여 주인의 등 뒤에 정렬했다.
이현욱은 그것들의 ‘아공간’을 개방하며 등 뒤에서 샷건—블랙라이노를 끌어내렸다.
철컥—
천천히 눈을 감고 차가운 금속들을 느꼈다.
그것들을, 물처럼 흘려보낼 준비를 끝마쳤다.
서울의 구원자 이현욱,
강철비(Steel Rain)를 비롯한 그의 활약상들,
지금까지 소문만 무성할 뿐,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