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인천, 마계, 암시장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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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계는 ‘지하 경제’가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생태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플레이어 세력, 즉 길드의 힘이 정부의 통제력을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또한, 플레이어가 가진 스킬을 이용하면 법의 감시망을 피하는 게 쉽기 때문이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플레이어들이 법의 심판을 무시하고 날뛸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우리나라야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편이지만, 외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가령, 라틴 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처럼 치안이 빈약한 지역은 지하 경제가 양지 경제의 몇십 배에 달하는 상황이었으며 그것의 주축이 되는 게 바로 ‘암시장’이었다.
또한, 세계 각지의 암시장들은 상호 교류하며 범국제적인 정보망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곳, 인천의 암시장 역시 그 거대한 ‘뒷골목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암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빌런들이 이 은밀한 통로를 이용, 대한민국을 위협할 터, 이현욱은 이곳마저 장악하여 놈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편, 이현욱은 사막을 걸으며 주변을 틈틈이 살피고 있었다.
"음, 여기는 원래 사막이 아니었군요?”
이현욱의 눈에 군데군데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 질문에 고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때는 꽤 비옥한 초원 지형이라, 여의도의 2.5배에 달하는 농지에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죠. 저기, 던전 북쪽 늪지에서 검은 넝쿨이 자라나기 전까지는, 예……."
검은 넝쿨이라고 불리는 식물 군락 몬스터 ‘스왈로우’는 일대의 모든 수분을 빨아들이는 존재로서, 한 번 등장하면 일대 수 킬로미터를 사막으로 만들어버리는 대재앙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강, 호수, 지하수 등 주변 지형의 물을 흡수하지만, 그렇게 모든 걸 죄다 빨아들인 이후에는 나무의 수액을 먹고, 더 나아가서 생명체의 체액을 노리기에 이른다.
즉, 식인 나무가 온 세상을 뒤덮음으로써 이 땅은 결국 살 수 없는 곳이 될 예정이었다.
이현욱은 그 끔찍한 몬스터가 만들어낸 범지구적 위기를 하나 기억했다.
‘앞으로 4년 뒤, 아마존에 이와 같은 스왈로우가 퍼지며 세계적인 비상사태가 열린다.’
아마존, 그곳에 스왈로우가 뿌리내린다. 그리하여 지구의 허파가 고사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세계는 대동단결하여 그 유례없는 재앙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고 수준의 분석가 플레이어와 연금술사 플레이어들이 집결—연구를 거듭한다.
그 결과, 스왈로우의 생장을 억제하는 효과가 담긴 ‘오브젝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즉, 이현욱은 그걸 어떻게 만드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당신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예?”
"우리가 이런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 말이에요. 우리는 외부에 알린 적이 없는데 말이죠.”
고진화가 의문을 담아 물었고 이현욱은 이미 생각해둔 대답을 했다.
"음, 몇 년 전에 ‘블랙 헤르츠’에 이와 관련된 자문을 구하시지 않았습니까?”
블랙 헤르츠는 암시장 VIP들의 고급 정보가 교환되는 비밀 채널이었다.
"아, 그렇긴 한데…… 아니, 설마…… 그 정보가 대체 어떻게 누출된 거예요?”
이현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블랙 헤르츠는 보안이 철저한 곳인데,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예요?"
고진화는 블랙 헤르츠의 보안마저 무시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나본데,
사실 이 모든 건, 전생에 동료가 되었던 고진화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이었다.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게이트 키퍼를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고진화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지는 중이었다.
‘이 남자 난데없이 나타나서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 말한다. 분명, 거물이다.'
얼굴을 뒤덮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그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은밀한 비밀을 눈치채고 있는 걸 볼 때,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아 갈수록, 고진화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말하길, 레드홀 마을을 구할 방법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 그 반대라면 …… 아주 위험하다.’
그런 게 아니길 바라며, 고진화는 남자를 마을로 인도했다.
"아, 마침 도착했네요. 자, 저기가 우리 마을이에요.”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던전 중심부의 검붉은 색의 분지 지형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앙부에 꽤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던전 속 마을이라……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요. 이름이 레드홀 마을이죠?”
이현욱은 이미 한 번 목격한 바 있지만, 처음 보는 척 감탄을 해 보였다.
박준모도 옆에서 ‘와, 던전에 마을이라니…….’라고 중얼거렸다.
"네, 저 붉은색 분지 지형이 빨간 구멍 같아서 레드홀이라고 부르곤 하죠.”
인천 암시장의 주축인 레드홀 조직은 사실, 이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현욱과 박준모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
"아니 미친…… 저, 저것들은 뭐야!”
경계심을 넘어선 적대감, 그들은 낯선 방문자의 반응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해한다. 이 마을의 역사를 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외부 세계에서 쫓겨나서 이 음지로 들어와 비루한 삶을 사는 것일 테니…….
"이봐, 고 반장! 그 사람들 대체 누구야? 그렇게 함부로 데려와도 되는 거야?”
이렇게, 고진화에게 따지고 들기까지 했다.
"아…… 이건 그럴 일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있어요.”
고진화는 그들을 안심시키고는 이현욱과 박준모를 게이트 키퍼의 거처로 안내했다.
그곳은 의외로 되게 조촐한, 마을의 다른 집과 다르지 않은 작은집이었다. 너와집이라고 해야 할까, 나무 조각으로 지붕을 쌓아 올린 뒤 새끼줄로 묶어 놓은 1층짜리 주택이었다.
"아빠, 아니, 촌장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고진하가 그렇게 말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음…… 지하 조직의 보스치고는, 거처가 좀 작네요.”
그건 박준모의 감성이었다.
‘그럴 수밖에, 이곳의 주인은 애초에 보스라기보다 촌장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음지를 지배하는 엄청난 거물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고진화가 나와서 이현욱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현욱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실 한쪽에 서 있는 백발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당신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아픔의 치유 방법을 안다는 나그네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마나 버너에 주전자를 올리고는, 마나를 불어넣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어두운 실내가 한층 밝아지며 노인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히 드러났다.
이 백발의 노인이 바로 지하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레드홀의 보스인 고준철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10억 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는 ‘레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런데 행간에 알려진 그 악명과 달리, 실제 모습은…… 그저 배 나온 할아버지였다.
‘그래도 한때는 대한민국 랭킹 6위였던 남자다.’
그는 1세대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서 한때 대한민국의 거대 길드를 이끌었던 수장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기득권층에게 탄압을 받은 끝에 이렇게 음지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게 무려 11년 전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흑마법사이기 때문이다.’
12년 전부터 시작된 흑마법 탄압…….
오늘날, 흑마법 스킬은 악으로 규정되어 ‘습득’하는 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제도 역시 인위적인 것인 만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흑마법 스킬이 게 극단으로 간다면 '악마’ 혹은 ‘악신’의 힘을 빌린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성기사들을 주축으로 흑마법 규제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며 흑마법사 축출이 시작됐다.
‘하지만 모든 흑마법사가 악에 물드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남자, 고준철처럼 흑마법사지만, 그 힘의 악한 면을 악용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특히나 고준철의 적들은 그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당시 사회 분위기상, 그를 비롯한 흑마법사들과 그 가족들은 이런 음지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마녀사냥이 자행됐다.’
이 레드홀 마을은 그런 비통한 역사를 품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음…… 그런데 자네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인가?”
그러고 보니 이현욱과 박준모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마스크를 내렸다.
그러자 고준철과 고진화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오, 이게 누구야……."
"어? 뭐, 뭐야! 당신, 그, 그 사람 맞죠?”
고준철은 씩 웃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현욱, 서울의 구원자이자 검성 구타자가 아니던가?”
그는 바깥의 정보에 빠삭한지 이현욱의 별명 두 가지를 모두 언급했다.
"예, 요즘은 그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합니다.”
"허허— 오늘날 가장 날 나가는 젊은이가 여기 이 누추한 움막까지 오다니"
이럴 때는 유명세라는 게 좋긴 좋았다.
자기소개 생략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정도의 신뢰까지 확보가 되니 말이다.
삐이이——
그러는 사이, 주전자의 물이 끓었고 그가 차를 따라서 내밀었다.
"그래서 바깥세상의 영웅에 여기까지 행차하셨다면, 큰 용건이 있을 텐데?”
"예?”
"자네가 정말로 검은 넝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해도 동화 속 영웅처럼 그저 선의만을 품고 이 위험천만한 장소까지 찾아온 건 결코 아닐 거라고 보는데, 그렇지 않은가?”
"아, 물론 합당한 대가를 바라고 왔습니다. 저는 자선사업가는 되지 못해서 말입니다.”
이현욱의 1차 목적은 라퓨타를 운용할 ‘인력’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래,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해. 그런데…… 그것들을 제거할 방법이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우리가 그동안 거의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거든……."
그의 눈이 빛났다. 낯선 방문자의 난데없는 제안임에도 의구심보다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그만큼 이곳, 레드홀 마을은 현재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인 거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암시장의 큰 축인 만큼, 검은돈이 창고에 쌓여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수배자이기에 이곳을 벗어나서 사는 건 여러모로 어려웠다.
즉,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터전을 지키고 싶을 것이었다.
"예, 확실한 정보가 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이현욱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몇 가지 묻고 싶은데……."
그때, 고준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검은 덩쿨을 제거할 그 방법이 무엇이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래도 일을 맡기기 전에 어떤 검증은 하겠다는 자세였다.
"그 검은 넝쿨, 스왈로우를 처리한 선례가 있습니다.”
이현욱은 의도적으로 검은 넝쿨인 ‘스왈로우’를 언급하며 신뢰성을 더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몇 번의 대화만으로 이 노장을 구워삶아야만 할 것이었다.
"오, 그게 정말인가? 나는 이 세상 모든 정보를 뒤져도 왜 그걸 찾지 못했을까?”
“……그건 국가 기밀이라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국가 기밀, 이 역시도 의도적인 단어 선정이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고준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밀, 기밀이라…… 그건, 정부 측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인가?”
고준철은 음지에 사는 레드 플레이어인 만큼, 정부라는 면에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예, 저는 정부 기밀부서 소속입니다. 하지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기밀부서…… 그 말에, 고준철은 이현욱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
그렇게 십여 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가 됐든 상관없지, 우리도 ‘구원’해줄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는 차를 한 입, 후룩 마셨다.
"그래서, 자네가 바라는 대가는 무엇인가?”
그 대가 중 하나는 사람이었다. 라퓨타를 관리할 F등급의 플레이어, 그러나 남자는 지금 F등급이라고 알려진 만큼, 그리 귀한 인력으로 여기고 있진 않을 터, 일단 생략하기로 했다.
그 대신, 다소 민감한 문제를 먼저 끄집어냈다.
"제가 바라는 건…… 태산 길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음, 태산이라니……."
이 마을, 레드홀은 훗날 태산 길드의 끄나풀이 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정말 다행히도 지금은 그저 음지 사업의 ‘파트너’ 관계일뿐이었다.
그러나 고준철이 죽은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태산의 손아귀로 넘어갈 운명이었다.
“……정부가 작정하고 태산 길드를 뒤흔들고 있다던데, 이건 그 일환이군?”
"예, 그리고 그걸 주도하고 있는 게 바로 접니다.”
"자네,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군그래? 처음에는 우성문이 만드는 광대인가 싶었는데......."
이렇듯 이현욱은 몇 번의 대화만으로 차곡차곡 자신의 존재를 부풀리는 데 성공했다.
그 이유는 아주 무게 있는 요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조금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죠. 태산을 완전히 날릴 정보가 필요합니다.”
“……뭐?
기백준과 태산 길드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를 키웠다.
‘……놈들은 마나 추출장, 환각초 재배, 더 나아가 플레이어 인신매매까지 자행했다.’
여기 레드홀은 그들과 파트너 관계인 만큼, 주요한 정보를 품고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태산을 다시 한번 거하게 흔들어 버릴 어떤 ‘증거’였다.
"아시다시피, 태산 길드는 곧 양지에서 거세될 겁니다.”
"그래, 우성문 실장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만큼, 벗어나기 힘들 테지……."
"예, 맞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레드홀도 피해를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즉, 잘못하다가는 당신들도 당한다…… 이는 은근한 협박이기도 했다.
고준철 역시 그걸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렸고,
바로 그때, 이현욱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뱉었다.
"저는 지금, 어르신께 우리 쪽에 붙으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뭐? 자네가 말하는 '우리’라면, 설마 정부를 말하는 건가?”
"예, 어느 정도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을은 무사할 겁니다.”
“하— 지금 정부가 우리를 거두어준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 되나 싶은데?”
고준철을 비롯하여 레드홀 마을 구성원의 상당수가 레드 플레이어, 즉 수배 중인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정부와 협력하라니…… 좀처럼 신뢰하기 어려운 말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건 제가 보증하죠.”
그 말에, 고준철은 노골적인 냉소를 머금었다.
"뭐? 하하하…… 대체 자네가 대체 뭔데 이렇게 당당하게 제안할 수 있지?”
"......."
"이봐, 젊은 친구…… 내가 자네 이름을 듣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거늘, 지금 자네가 그 정도 급이 된다고 내 앞에서 떠벌리고 있는 건가? 하하하…… 이것 참......."
"......."
"그래, 혈기왕성한 나이에 어떤 업적을 이루면 스스로에 도취하여 자신이 대단해 보이겠지만, 노인네 앞에서 그렇게 주름을 잡아봤자 굼벵이 구르는 재주로 보인다는 거, 아나?”
그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하지만 이현욱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표정이었다.
고준철은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품고 있었지만, 이현욱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오, 이것 봐라, 뭔가 있기는 있군?’
이현욱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퍽 여유로운 자세였다.
"어르신께서 방금 저를 서울의 구원자, 검성 구타자, 두 가지 별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부르더군?”
"그건 전부 사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가지가 별명이 더 추가될 예정입니다.”
“……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현욱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웬, 검은색 구체였는데.......
기이잉——
그것이 열리며 한 마리 까마귀가 되었다.
"그, 그건 후긴—!”
고준철은 그 아이템을 알아보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전설 등급의 아이템,
하지만 그 누구도 운용할 수 없는, 최악의 오버 핸디캡을 지닌 물건이었다.
그 대단한 걸, 어째서 이 남자가 가졌는지 고준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는 지금 정부의 핵심 전력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그걸 훔쳤을 리는 없으니, 그래, 사실이겠군?”
"그리하여 제 별명에는 후긴의 운용자, 따위가 추가되겠죠.”
이현욱은 이어서 왼쪽 검지를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하나 더, 라퓨타의 관리자……."
그 대목에서 고준철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뭐? 서, 설마……."
"예, 라퓨타의 관리자, 그렇게 불리게 될 겁니다.”
무려 라퓨타라면, 그 무게감이 달랐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2번째 S등급 플레이어라고, 그렇게 불릴 겁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고준철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처음에는 그의 얼굴에 의심이 드러났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S등급이라는 부품이 추가되자 이 이현욱이라는 남자에 관한 소문들…… 그 어딘가 엇나가 있던 모든 정황이 그럴듯하게 맞물려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시, F등급 플레이어가 그 대단한 일을 해낼 리가 만무하지…… 세상을 속였군?"
고준철의 표정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S등급, 그건 차원이 다른 아우라였다.
이현욱은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르게 제안하겠습니다.”
"음?"
“……정부가 아니라, 제 라인을 타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을 할 때, 때로는 과시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
고준철은 이현욱을 바라보며, 단 몇 초 만에 새로운 감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미래 권력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