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인천, 마계, 암시장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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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여 새로운 ‘스킬’이 주어집니다.
이현욱은 그 메시지를 멍하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절여져 있었다. ‘체내 용광로’를 최대 수준으로 가동한 채 수십 시간을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로 얻은 스킬의 상세 내용을 확인했다.
[스킬 정보]
- 이름 : 인사이트 렌즈
- 등급 : D
- 효과
1) 시스템 분석 : 숨겨져 있는 ‘시스템 정보’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천리안(千里眼):시력이 대폭 향상됩니다. (+300%)
* 숨겨진 조건을 만족할 시 스킬 등급이 향상됩니다.
이 스킬은 전생에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이현욱은 그 기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내가 전생에 가지고 있던 유틸리티 스킬 중에서도 최고였다.’
유틸리티 스킬은 즉 비전투 요소의 스킬이지만 활용 범위가 아주 넓은 부류를 뜻했다.
이현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탈로스, 내가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지?”
「해당 작업에 돌입하신 지 28시간 48분이 지났습니다.」
“28시간……."
이현욱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공 모양의 기계 장치, 탈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웬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탈로스 : 비전투 모드 (LV. 130)
* 해당 NPC는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NPC의 이름, 레벨, 성향까지 쉽게 알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인사이트 렌즈>는 이런 식으로 몬스터—NPC의 기본적인 정보를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나저나 탈로스의 레벨이 130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높잖아?’
이 ‘레벨’이라는 게 강함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었다만, 가장 일반적인 기준이긴 했다.
그런 면에서 무려 130레벨인 탈로스는 아주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크 국왕 스토녹스가 175레벨, 드래곤이 180~200레벨 사이였던 걸 고려하면 말이다.
‘물론 아직 청동 거신, 그 몸이 없는 만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언젠가 저 녀석의 ‘전투 모드’를 활성화할 수 있다면, 굉장한 무기가 될 것이었다.
그때, 오더 타워의 문이 열리고 박준모가 터덜터덜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머리카락이 왠지 모르게 다소 곱슬곱슬해진 상태였다.
"아! 이현욱 병장님, 일어나셨습니까?”
"박준모, 어땠어? 낙뢰 좀 잘 떨어져?”
"아…… 예…… 생각보다 아주, 많이 쳐댑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이어서 설명하길, 이현욱이 잠들어 있는 동안 무려 11번의 낙뢰를 맞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능력치의 5배에 이르는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래? 잘 됐다. 그럼 이제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와야겠다.”
"......."
그때, 이현욱의 눈에 무언가 감지되었다.
- 해당 아이템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치는 박준모의 허리춤 부근, 그건 검은색의 완드였다.
이렇듯 ‘플레이어의 프로필’은 확인할 수 없을지언정 ‘아이템 정보’는 볼 수 있었다.
‘해석한다.’
- 아이템 정보 해석 중.......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아이템 정보]
- 이름 : 다크 우드 완드(희귀)
- 효과 : 마나 총량(+100), 마법 시전 속도(+10%)
이렇듯, 상대가 지닌 아이템의 정보도 손을 대지 않더라도 알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 한 몸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가진 아이템의 기능을 알 수 있는 것—이건 눈앞에 있는 잠재적인 적대자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해주는 아주 귀중한 정보였다.
그리하여 숱한 암살 시도를 막아낼 수 있었던 이현욱만의 비밀스러운 방호 체계였다.
“……근데 김 팀장은 어디 갔어?”
“아, 여기에 없으면 그, 초현실 훈련장에 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현욱이 잠들어 있는 동안 김세희 역시 쉬지 않고 훈련을 한 듯했다.
‘김세희……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파였다. 환경만 된다면 알아서 성장할 거다.’
이현욱은 박준모가 가져다준 찬물을 마신 뒤, 창가로 다가갔다.
라퓨타의 최정상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건, 그 어떤 호텔이 부럽지 않은 최고급의 뷰였다.
그때, 그의 품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 마나 메신저(암호화 모델) : 수신 중…….
이 마나 메신저는 암호를 공유하는 또 다른 마나 메신저와 1대1로 연결된 상태였다.
그 대상은 당연하게도 성녀, 에밀리아 뮐러였다.
- 와 드디어 받았다!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요? 나보다 먼저 암살당한 줄 알았잖아요!
혀가 아주 사방팔방으로 꼬부라지는 목소리다. 역시나, 술을 끊지는 못한 듯했다.
"술 먹고 전화하려고 보안 연락망을 마련한 게 아닐 텐데요?”
- 이거야 원, 오해를 아주 크게 하시네요? 비즈니스 차원에서 연락한 거예요.
"그래요? 무슨 일이죠?”
- 저번에 말했던 그 마법공학 쪽 사람들, 구했어요. 9명 정도에요.
그녀는 이현욱이 부탁한 대로 마법공학 쪽 연구원을 물색하고 있었고 마침내 찾은 듯했다.
물론,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인력인지는 이현욱이 직접 만나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음, 마침 잘됐네요. 마침 그 사람들이 앞으로 일할 곳을 둘러보고 있었거든요.”
- 네? 음— 설마, 라퓨타……?
이현욱의 라퓨타의 관리자인 걸 아는 만큼 곧장 알아차렸다.
"맞아요. 어제, 아니 그저께인가, 처음으로 올라왔어요.”
- 와…… 언젠가 나도 꼭 가고 싶네요. 거기도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잖아요? 그렇죠?
“예,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방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현욱은 한편으로 ‘세인트 돔’ 자체를 이곳 라퓨타로 옮겨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녀가 차드 공화국이 세인트 돔이 아니라, 라퓨타로 온다면…… 엄청난 이점이 될 거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차드 공화국이 난리가 날 것이었다. 그 땅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를 통째로 빼앗는 셈이니 정치적인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즉,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 거다. 이 나라가 결국, 인류 최후의 보루가 될 테니…….'
빌런에 대응할 수 있는 총력을 이 라퓨타라는 한 점에 모아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2시간 뒤, 일행은 지상으로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_^) 지하 49층으로 내려가시면 광역 강하 장치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라퓨타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전체를 ‘권역’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라퓨타의 편의 기능 중 하나인 ‘광역 강하 장치’를 이용하면, 서울 어디로든 ‘텔레포트’이동이 가능했다.
일행은 라퓨타의 최하단부인 B49층까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곳은 한 층 전체가, 그 어떤 기물이나 벽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텅 빈 곳이었다.
「자, 그럼 광역 강하 장치를 활성화하겠습니다!」
우우우우——
그러자 49층 전체의 바닥이 투명해지며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더니,
중심부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며 시퍼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광역 강하 장치 : 텔레포트 좌표를 설정하십시오.
이렇게 라퓨타에서는 서울 어떤 지역이든 텔레포트를 통하여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현욱은 서울 외곽 한적한 장소를 선택했고 이내 그곳으로 텔레포트를 타고 떨어졌다.
"자— 당연하지만, 우리가 어디에 갔다 온 지는 비밀입니다.”
"음, 그런데 혹시…… 라퓨타의 관리자라는 걸 계속 숨기려는 거예요?”
김세희의 물음에 이현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곧 밝힐 겁니다.”
적어도 우성문에게만큼은 슬슬 이 사실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라퓨타 개척에 필요한 온갖 자원을 충당한다.’
하지만 그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 팀장은 오늘 일 있다고 했죠?”
"네, 제 동기들을 희망 길드에 소개하려고요.”
김세희 AMT 동기들이 희망 길드에 가입하기로 했다.
그녀가 분대장으로서 한차례 지휘했던 이들인 만큼, 앞으로 희망 길드의 ‘공략팀’이 구성될 때 핵심 인력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 팀장은 일 보시고, 박준모, 너는 나랑 갈 곳이 있다.”
"예? 아니, 이, 이번에는 또 어디를……."
박준모는 끝내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현욱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라퓨타를 관리할 직원을 한 명 스카우트할 거다.”
“……네?”
"저 대단한 물건을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저 거대한 시설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 수많은 인재와 잠재 아이템들이 음지에 묻혀 있었다.
이현욱은 그것들 조금 이른 시점에 끄집어내어, 저 천공에 올릴 생각이었다.
***
인천광역시는 오래전부터 ‘마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무래도 예로부터 폭력 사건이 잦았기에 반쯤 농담조로 붙여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유치한 별명이 사실상 현실이 되었다.
"이현욱 병장님…… 마계에서 찾는다는 인력이 대체 누구입니까?”
박준모는 불안한 표정으로 인천 남동구—마계의 한 골목을 쓱 훑었다.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면…… 무서운 사람일 것 같은데……."
반쯤 뭉개진 잿빛의 도심,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진 골목, 거미줄처럼 갈라져서 까뒤집어진 도로……
그리고 아이템, 총, 칼 등 무기를 든 괴한들이 골목에 선 채 행인들을 노려본다. 저들이 쥐고 있는 무기는 결코 과시용이 아니며 종종 인간을 대상으로 쓰이고 있을 것이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 속 할렘가 같은 풍경 앞에서 박준모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여기는 여전히 플레이어 경찰조차 접근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렇듯 인천 남쪽 구도심, 그곳은 지금 무법지대로 변해 있었다.
세상이 게임으로 변한 초창기, 이곳에 무려 4개의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전력이 부족했기에 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주변부에 ‘차단선’을 설치하고 지역 전체를 고립 시키는 극약처방이 시행되었다.
그로부터 무려 2년이 지난 뒤, 몇 개의 길드가 공략에 성공했지만…….
‘이곳은 이미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본 뒤 폐허가 되었고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지역에 꼬이는 부류는 한정되어 있었다.
범죄 조직, 방랑자, 레드 플레이어, 그런 이들이 이곳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흔히 말하는 ‘슬럼화’가 되어갔다.
"이상하게도…… 죄다 저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 여기는 원래 그런 동네야.”
박준모는 깊은 산 속에서 맹수의 눈빛에 둘러싸인 기분이었으나, 이현욱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 약 10분 뒤, 한 건물 앞에 섰다.
<백제 잡화>
그런 이름의 5층짜리 상가였는데,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한 ‘잡화 상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곳은 사실 지하의 어떤 비밀 시설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 중 하나였다.
"잠깐, 여기서 기다린다.”
이현욱은 그렇게 말한 뒤, 가만히 서서 건물의 입구 쪽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박준모는 의아할 따름이었지만, 언제나처럼 무슨 의도가 있겠거니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런데 사실, 이현욱의 감각은 이미 건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정확히는 건물 안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었는데, 벽 너머 누군가의 마나 메신저에 ‘마나 연결’을 걸어서 주변 소리를 도청하는 중이었다.
- 음, 녹색의 아다만트 원석 좀 구하려고 합니다.
-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 그렇다면 다른 걸 큐레이팅 받고 싶네요.
“좋아, 여기까지…… 이제 들어간다.”
"어? 예? 아, 예!”
짤랑—
"어서 오세요.”
콧수염의 남자 종업원이 이 지역과 썩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로 반겼다.
하지만 그 발아래에는 한 자루의 샷건이 세워져 있었다는 걸, 이현욱은 감지했다.
이현욱은 자연스럽게,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녹색의 아다만트 좀 구하러 왔습니다.”
그 말에, 미소를 띠고 있던 종업원의 얼굴이 싹 굳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녹색을 띠는 아다만트 원석은 없습니다.”
"아, 비슷한 물건이라도 구경하고 싶은데 ‘큐레이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이현욱을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현욱 병장님, 방금 그게 무슨……."
“쉿— 당분간 입 열지 마.”
방금 이현욱이 말한 모든 건 일종의 암호로, 이곳에 숨겨져 있는 어떤 시설로 내려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였다.
그 암호는 매일 정각에 바뀌기에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하여 입수해야만 했지만, 이현욱은 마나 메신저를 해킹—도청을 통하여 암호를 알아냈다.
철컥—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웬 문을 열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다시 나올 때는 여기가 아니라 8번 출구나 11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좁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 여기는 대체 어디로 내려가는 길입니까?”
"인천 마계, 이 슬럼가는 사실 그저 위장막에 불과해.”
"예? 그렇다면 이 도시가 뭘 숨기고 있는 말씀입니까?”
“그래, 이곳의 진짜 목적은 블랙마켓, 암시장을 품는 거야.”
슬럼화되어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도시, 그 위장막 아래 숨겨진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온갖 불법 아이템이 거래되는 거대한 암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끼익— 끼익—
그렇게 낡은 계단을 따라서 약 십여 미터를 더 내려가자 철문이 하나 나타났다.
철컥—
그걸 열자, 상당히 넓은 터널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우와......."
마치 거대한 탄광에 들어온 것 같은 어두침침하고 매캐한 통로를 따라서 수많은 인파가 오가고 있었다.
이는 여름철 동남아의 야시장의 한 장면 같기도 한, 다소 정신없는 풍경이었다.
"자, 리자드맨 꼬리로 만든 정력 강화 물약 사세요!”
"거기 오빠들— 늪지환각초 한 대 빨고 가는 거 어때?”
그리고 시장이라는 이름답게 사방에서 열렬한 호객 행위가 이어졌다.
낯선 풍경 앞에 박준모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와……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도 있었구나……."
그렇게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 씨— 뭐야!”
남자 둘, 온몸에 문신을 그려 넣은 거구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그 모습에 박준모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헉 ! 죄송합니다!
"아! 제, 제가 정신을 딴 데 두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박준모는 덩치 둘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앞서 나가고 있는 이현욱의 뒤에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박준모, 방금 그거, 실수한 거다.”
"……예?”
“이 무법천지에서 그렇게 얼빠진 모습을 내보이면 좋은 먹잇감이라는 뜻이야.”
"어, 그,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렇게 뻘뻘 거릴 바에 차라리 전류를 방출해서 기절시키는 게 나았을걸?”
박준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아보지 마. 조급한 모습을 내는 건 약자라는 뜻……."
하지만 이미 늦었다.
"......!"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는 순간, 그 거구들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 이, 이현욱 병장님…… 저 사람들, 지금 저희를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이현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야 원, 귀찮게 됐군.’
그 잠깐의 충돌만으로, 놈들은 이 두사람을 먹잇감으로 인식한 듯했다.
이현욱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며 놈들의 쥐고 있는 금속—무기를 훑었다.
권총 2자루, 단검 4자루, 그리고 몇 개…….
그런데 그중에는 ‘마나 메신저’도 있었다.
이현욱은 그곳에 ‘마나 연결’을 통하여 해킹을 시도했다.
그들은 때마침 누군가와 교신 중이었다.
- ……예, 그쪽으로 가는 두 놈 맞습니다. 딱 봐도 어리바리 까는 게 초행 아닙니까?
- 그래? 마스크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이는데…… 괜히 잘못 건드는 거 아니야?
- 아닙니다. 저희랑 부딪쳤는데, 완전 애송이입니다. 그리고 그때 슬쩍 보니까, 허리에 찬 완드나, 뭐 가진 게 좀 있던데요? 용돈 벌이가 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한 건 하시죠?
역시나…….
이곳은 무법지대인 만큼, 저런 족속이 널리고 널렸다. 그렇기에 스스로 지킬 수 없으면 가진 걸 몽땅 털릴 수밖에 없었으며 더 나아가 목숨을 잃는 것도 예삿일이 아닌 곳이었다.
- 정균아, 이런 부업 하는 거 게이트 키퍼께서 아시면 안 되니까, 조용히 처리하자?
- 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현욱은 저들의 교신 내용 중에서 ‘게이트 키퍼’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게이트 키퍼를 언급하는 걸 보면, 저것들은 <레드홀>조직원들이군?’
레드홀, 그들은 이곳을 지배하는 3대 세력 중 하나로서, 아이템 밀매 브로커 조직이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잘 됐다.’
이현욱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레드홀 조직원이었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모종의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힘들게 찾아 나설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이현욱은 미행을 눈치 못 챈 척 계속 걸었다.
"이현욱 병장님, 저희……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박준모, 딱 보면 모르겠냐? 여기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아, 그렇다면……."
그래, 결국은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계속 걷는다.”
이 지하 도시는 상당히 넓었다. 십수 년 전 이곳이 탄생한 이후 확장을 거듭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오래된 도심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졌으며 음습한 골목길도 존재했다.
저벅— 저벅—
이현욱은 의도적으로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덩치가 정면에서 나타나서 길목을 막아섰다.
그리고 등 뒤로, 6명이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채 다가오고 있었다.
"......."
이현욱과 박준모는 결국, 골목 한가운데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으흐흐…… 안녕, 친구들? 우리, 아까 만났지?”
그렇게 양쪽 골목에서 나타난 숫자는 총 9명이었다.
“이 친구들, 이 동네는 초행인 것 같은데, 우리가 싼값에 가이드 좀 해주는 게 어때?”
"그래, 그러자! 여기는 워낙 위험해서 이런 연약한 친구들은 언제 뒤질지 모르잖아?”
이현욱은 천천히 그들이 지닌 무기를 훑었다.
‘소지품을 볼 때 플레이어는 고작해야 2명, 나머지는 일반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협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 미리 경고하는데 허튼짓하지 마. 이게 그냥 총처럼 보이지는 않겠지?”
한 놈이 그렇게 말하며 권총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놈들은 하나 같이 권총을 쥐고 있었다. 콜트 M1911, 분명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총기였다.
‘하지만 총알을 마법 금속으로 만든 뒤 인첸트까지 걸어뒀을 거다.’
즉, 몬스터나 플레이어의 몸에 둘려 있는 ‘배리어’를 뚫을 수 있을 터, 저 정도의 무기라면…… 적어도 C등급 정도의 플레이어를 위협할 수 있었다.
물론 격발과 동시에 일어나는 ‘마나 파동’ 때문에 몇 발 못 쏘고 망가질 테지만, 플레이어를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효과적인 방법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현욱은 미소를 머금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응? 형님, 저 병신이 말귀를 몰라 듣는 것 같은데요?”
"쯧, 그래? 그런 애들은 다리에다가 한 방 쏴주면 재깍 깨닫더라.”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선두의 대머리 남자가 이현욱의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틱—!
“어?”
틱—틱— 틱—틱—!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이게 왜—”
"야, 뭐해! 저리 비켜 봐!”
틱—틱—틱—틱—!
그들 중 다른 이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겨댔지만, 공이치기 자체가 전혀 후퇴하지 않았다.
“……그거, 삽탄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내가 한 번 확인해봐도 될까?”
능청스러운 목소리, 그렇게 말한 건 이현욱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왼손을 가슴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뭐, 뭐 이 새끼야?”
그 순간, 놈들의 권총으로부터 탄창이 빠져나왔다.
“……어?"
딱—
이어서 이현욱이 손가락을 튕기자,
촤—자—저—자——!
그 9개의 권총이, 마치 무너져 내리듯 완전분해되더니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
그 기이한 장면을 바라보며, 놈들은 일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상상도 못 한 장면 앞에서 다른 무기를 꺼내 들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듯했다.
"그래, 너희가 본대로 우리가 이 동네는 초행길이라서 그런데……."
이현욱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싱긋 웃었다.
"......길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우리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해서 말이야."
놈들은 대답하지는 않았다만, 양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철컥—철컥—
9개의 총기가 허공에서 다시 조립되어, 자신들의 머리통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