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서울, 악마, 성녀 - 4 >
==========================
북악산 대성소의 중심부에는 면적만 19,410²에 이르는 원형의 공간이 존재했다.
일명 ‘세인트 파크’라고 불리는 곳으로 공원처럼 온갖 식생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건 조경의 결과가 아니었고 ‘성물’이 방출하는 생명력으로 인하여 자연스레 피어나는 것이었다.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신성한 힘이 가장 밀집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웬 거대한 백색의 제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성 마법의 효과를 대폭 강화해주는 설치형 오브젝트였다.
그곳에 성녀, 에밀리아 뮐러가 올라서서 ‘홀리 필드’를 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지랄 맞은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다소곳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한편…….
"저희가 있고 <신념의 방벽>이 있는 한,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와이트 트리 가드의 단장, 피터 클라크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건 오만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득 찬, 근거 있는 말이었다.
"예, 그렇겠죠. 저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우성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색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단장인 피터를 제외하고 11명의 기사가 성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B등급 이상의 성기사 12명, 그들은 ‘하이가드’라고 불리는 최정예 성기사들이었다.
“분명…… 12명의 성기사가 연계하는 그 스킬이라면, 핵폭탄이 터져도 안전할 테니까요."
그들이 원형의 대형을 이룬 채 시전하는 <신념의 방벽>그건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데, 그 때문에 성녀 암살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우성문은, 무슨 일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피터…… 어차피 여러분의 신념의 방벽에 무언가 닿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제공한 이 장소는 외부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이번에는 우성문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애초에 누군가 이곳을 습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성녀가 이 땅에 온 게 기밀일뿐더러, 북악산 대성소 자체가 숨겨진 장소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A등급의 마법 방어막과 총 15대의 이상파동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내부 방비마저 완벽했다.
“하하—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곳에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는 방패라……."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실력을 은근슬쩍 과시하는 두 수장이었다.
하지만.......
‘쯧, 둘의 콧대가 오늘 조금 짓눌리겠군…….'
이현욱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저 두 사람과 백여 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후긴’을 통한 50배의 감각—청각 상승 덕분이었다.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
그들의 준비가 부족하거나 방심한 건 아니었다.
‘내부에…… 그것도 가장 믿는 구석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현욱은 후긴의 시선을 통하여 12명의 고위 성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들 중에 <죽음의 4기사> 중 한 명인 데스나이트, 훗날 그렇게 불릴 기사가 있다.’
네크로맨서가 지휘하는 죽음의 군단의 선봉장이 되어 세상을 짓밟아나갈 빌런…… 놈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이가드’ 중 하나로서, 백색의 갑주로 시커먼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이현욱은 그가 이곳에 거대한 폭탄을 터뜨리고 말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찌감치 그 폭탄을 제거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놈을 배신자로 지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녀가 이현욱을 믿고 그에게 색출 임무를 맡겼다지만, 무작정 몰아갔다가는 오히려 수포가 될 가능성이 컸다. 모두가 성녀의 상태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더더욱이…….
‘그렇기에 후에 덧나지 않게 완벽한 색출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터져야만 한다.’
이현욱은 그때를 위하여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저 이현욱이라는 사람,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때, 피터의 입에서 이현욱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후긴을 저렇게 쓸 수 있다니, 마나 총량이 대체 얼마나 되길래……."
“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신예 중 한 명입니다.”
그러자 역시나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현욱을 곁눈질하는 게, 후긴을 통해 보였다.
"저는 솔직히, 다소 의아할 따름입니다. F등급 플레이어가 대체 어떤 업적을 쌓아서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 그래서 제 부하들 사이에서는, 조작설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만…… 저 남자의 활약을 직접 보신다면, 금방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현욱, 저 젊은 피가 이 땅을 2번이나 구해냈습니다.”
우성문의 거듭된 옹호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 실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게 맞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가 활약하는 건 볼 수 없겠군요. 우리에게 방패가 쥐어져 있는 한, 그가 활약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요.”
그에게는 오늘은 그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다는 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글쎄, 과연 오늘이 아닐 수 있을까…….'
그때, 그가 끼고 있던 이어 마이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분 뒤, 서울 정화 작전이 시작됩니다.
슬슬 ‘홀리 필드’ 시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자! 모두 정위치로 이동한다!”
이곳 ‘세인트 파크’에는 오로지 성녀의 친위대인 와이트 트리 가드만이 남는다. 아무리 동맹 관계라고 할지라도, 성녀 주변으로 외부인이 접근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현욱 역시 우성문과 함께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이현욱의 시선은 여전히 저 하늘 위 검은색의 까마귀에 투영되어, 세인트 파크—성녀의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 번째 폭발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될 테니 …….
‘기다린다. 그리고 한발 앞서서 움직인다.’
***
“5분 뒤에 홀리 필드 시전이 시작된다! 모두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려라!”
카를로스 벨포트라는 이름의 B등급 성기사가 그렇게 외쳤다.
그는 와이트 트리 가드의 부단장이었다.
“WTG, 우리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30분간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의 우렁찬 고함에 따라서 12명의 하이가드, 30명의 성기사, 10명의 프리스트가 움직였다. 이렇듯 이곳을 지키는 신성 계열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무려 52명이었다. 하나의 파티에 1명이 있을까 말까 한 성기사가 한 자리에 수십 명이 모여 있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모든 단원이 정위치를 한 것을 확인한 카를로스는 단장, 피터 클라크를 바라보았다.
"피터! 모두가 정위치 했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에서 방패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는 와이트 트리 가드의 기사들을 쭉 둘러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신념의 방벽>을 시전한다.”
짧은 명령, 성녀 에워싸고 있던 12명의 하이가드가 방패를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들의 방패의 중심에서 백색의 빛이 피어오르더니 한 대 뒤엉켰고…….
우우우——
백색의 빛무리가 거대한 돔 형태가 되어서 일대를 뒤덮었다.
- 열둘의 고위 성기사가 모든 신성력을 연계하여 ‘신념의 방벽’이 형성되었습니다.
* 주의! 포인트를 이탈할 경우 해당 영역이 ‘무효화’되며 복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30분간,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신념의 방벽은 B등급 이상의 성기사 12명이 연계해야지만 쓸 수 있는 최상위 방어 스킬이었다. 다만, 스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일정한 위치—포인트를 이탈할 수 없었다.
즉, 최정예 성기사인 하이가드 전원이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되는 셈,
하지만 그런 걸 감수할 만큼, 성녀를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스킬이었다.
“피터, 혹시 내가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단장으로서 잠깐 맡아줄 수 있겠지?”
카를로스가 피터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카를로스, 이런 중요한 순간만큼은 무게감을 좀 가졌으면 좋겠군.”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무려 7년을 함께한 전우, 눈빛만 봐도 서로의 뜻을 알 만큼 믿는 사이— —라고 피터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작 카를로스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피터…… 그곳은 네 자리가 아니야. 원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카를로스는 장난기 넘치는 웃는 얼굴을 한 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피터를 증오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몰래 품어온 시기와 질투가 자라난 결과였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빨리 각성했고 그 누구보다 이 조직에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조직을 위하여 헌신해왔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체, 내가 왜 너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지?’
최고의 자리는 번번이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전대 단장인 니콜라스와 성녀 에밀리아의 총애를 받은 피터가 언제나 그보다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정작 레벨은 자신이 더 높건만…….
‘실력이 아니라 그깟 인연으로 좌우되는 게 최고의 성기사단이라니, 가당치 않다.’
그릇된 질투심은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사악한 불씨를 피워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4년 전 어느 날,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며 그 불씨가 불길로 번지게 된다,
‘고든 프라이스…… 나의 새로운 인도자…….'
그 남자는 카를로스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충격적일 정도로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전대 단장 니콜라스 스틸을 함정에 빠뜨려 제거하라…… 카를로스는 그 요구를 따랐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함정에 빠뜨렸을 때, 그의 눈앞에 낯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그건 이상한 내용의 '히든 퀘스트’ 메시지였는데, 카를로스는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히든 퀘스트]
- 옅은 빛에서 피어난 짙은 어둠.......
1) 에밀리아 뮐러의 죽음 (진행 중)
* 보상 : 히든 특성 전직 (데스나이트)
그는 현재 ‘빌런 퀘스트’를 수행 중이었다.
그것도 성녀의 죽음이라는, 몹시 어려운 난이도의 퀘스트였다.
‘나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녀의 양손에서부터 백색 빛이 번져 나왔다.
우우우우——!
- 해당 지역에 홀리 필드가 전개됩니다. (1%)
마침내 서울 정화 작전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었다.
동시에, 성녀 암살 작전의 첫 번째 총알이 장전되는 순간이었다.
“자! 홀리 필드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30분간, 모두 집중한다!”
홀리 필드의 시전 시간은 평균 31분, 에밀리아의 컨디션이 좋다면 28분까지 단축된다.
그리고 그녀가 그 현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자각을 잃는 시점은 15분 무렵…….
‘그때가 되면, 스킬 시전을 중단할 수 없게 되지…….'
카를로스는 바로 그 지점을 기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을 억누르고 성녀를 곁눈질했다.
병약하지만,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
곧, 그녀의 머리가 잘려나가, 피 분수가 뿜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 해당 지역에 홀리 필드가 전개됩니다. (50%)
스킬의 절반이 완성되자, 에밀리아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백색 고리가 생성되었다.
웅——
이제는 ‘홀리 필드’ 전개를 무를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완벽한 무방비 상태다.’
즉, 마침내 때가 되었다.
그는 참고 있던 뜨거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절그럭—
"어? 부단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의 오른쪽에 있던 성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렇게 물었다.
"부단장님, 더 움직이시면 부단장님 ‘영역’이 파손될 겁니다!”
"월터, 그건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나를 뭘로 보는 건가?”
“예? 그럼 대체 왜 그러시는……."
그가 한걸음 발을 내딛자—
파지지지———!
신념의 방벽을 구성하는 12개의 부분 중 한 부분이 유리처럼 으스러져 내렸다.
- 신념의 방벽 (11/12)
쩌저저저.......
나머지 11개는 여전히 유지가 되지만, 하나의 큰 구명이 생긴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었다. 와이트 트리 가드 전원이 그 장면에 경악하며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 과도한 신성력 사용으로 인하여 신성력이 60분간 대폭 감퇴합니다. (-50%)
"큭—”
텅!
그는 방패를 내던지고는 원형 대열을 벗어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카를로스, 자,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야?”
피터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피터, 사실은 내가 몇 년 전에 어떤 퀘스트를 받았는데 말이야……."
“뭐?”
"그래서, 미안하지만, 내가 저 백색 창녀를 죽여야만 할 것만 같아……."
"그게 무슨, 대체 왜……."
하지만 그가 성녀나 동료 성기사를 직접 시해할 수는 없었다. ‘신성한 맹약’ 때문이었다.
즉, 다른 손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는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알 수 없음
- 효과: 알 수 없음
이건 ‘그림자 남작’으로부터 넘겨받은 아이템으로 이번 작전의 중요한 열쇠였다.
촤—악——!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고 동맥이 끊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후두두——
그는 팔을 들어 올려 그 피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큭, 피터 클라크, 잘 들어라…… 이건 네가 초래한 실패다!”
"젠장, 카를로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 피터의 얼굴 위로 진한 당혹감이 피어오른다.
"언제나 생각해왔던 건대, 너 같은 무능력한 놈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다.”
"......."
"와이트 트리 가드를 위하여 그리고 저 백색 창녀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면, 네가 믿는 친구일지라도, 감시를 붙여서 철저하게 관리 했어야지…… 나였으면 그랬을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의 상처에 ‘힐’을 했다.
그러는 사이, 사방에 흩뿌려진 다량의 혈흔이 저절로 움직여서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그것이 부글부글 끓더니 다음 순간, 증발하듯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공처럼 뭉친 핏물, 그것의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우우우우——
—포탈이 열렸다.
이내 그 안에서부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밋밋한 회색 가면을 쓰고 보라색 로브를 입은 아주 키가 큰 괴한…….
"그, 그림자 남작—!”
피터는 그 괴한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온갖 특이한 수법으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미지의 특성을 보유한 레드 플레이어, 그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는 방법의 이동 스킬을 사용하기에 추적이 불가능하였다.
'피로 포탈을 열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바로 지금, 그가 새로운 이동 기술을 선보인 듯했다.
그것도 이들이 가장 믿고 있던 부단장, 카를로스 벨포트와 내통하여…….
그리고 그렇게 열린 포탈에서부터, 괴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녀다! 저기 성녀가 있다!”
"오, 병약한 미녀! 완전 내 스타일인데 죽이기 전에 가지고 놀면 안 되나?”
"으흐흐— 저 당황한 얼굴들 좀 봐!”
무려 70여 명…… 딱 봐도 무법적으로 보이는 플레이어들, 그들이 악마 소환이라는 음모를 꾸민 집단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벅— 저벅—
70여 명의 괴한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코트에 검은 셔츠의 장발의 사내,
"거, 검성 시해자……."
검성 시해자 오키타 카이토,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은 오로지 성녀, 에밀리아 뮐러에게 닿아 있었다.
이미 사냥을 마음먹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저 인간과 1대1로 마주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피터는, 그에게서 짙은 살기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피포식자의 본능이었다.
“우 실장님, 이곳 상황 보고 계십니까? 젠장! 빨리 와주십시오!”
- 예!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지, 저것들까지 들어오면 너무 정신없어서 재미없어진단 말이야.”
그림자 남작이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양팔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다음 순간, 5줄기로 나뉘어서 바닥을 따라서 마치 뱀처럼 기어가더니, 이곳 ‘세인트 파크’로 들어오는 5개의 통로로 비집고 들어갔다.
- 주의! 해당 지역에 ‘그림자 덫’이 발생합니다.
그 5개의 통로의 바닥과 벽이, 놈의 그림자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이어서 건물 안에서부터 달려 나오던 정부 측 요원들이 그 그림자를 밟는 순간,
슈슈슈슈——
“윽! 이, 이게 뭐야!”
바닥과 벽면에서 튀어나오는 수십 개의 그림자—손아귀가 요원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윽! 이, 이게— 안 떼어집니다!”
"젠장 바닥에 마법 공격을 해 봐!”
그건 아무리 등급이 높다고 해도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기이한 주술이었다.
그렇게 지원군의 발이, 바로 앞에서 묶이고 말았다.
그림자 남작의 가면 안쪽에서 큭큭, 하는 웃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자, 검성, 딱 5분뿐이야. 내가 경비견들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을 시간 말이야.”
그의 말에 오키타 카이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칠십여 명의 괴한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와이트 트리 가드— 어떻게든 놈들을 막고, 공간을 채워라!”
11명의 하이가드를 제외한, 40명의 와이트 트리 가드가 괴한들의 앞을 막아섰다.
"—목숨을 아끼지 마라! 너희라면, 남은 15분을 버틸 수 있다!”
성기사와 프리스트 조합, 그것도 무려 40명이다.
공격력은 배제하더라도 방어력 하나만큼은 최상위 수준일 터였다.
방패 라인을 만든다면, 어떻게 해서든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 주의! ‘그리고리 아자젤’의 저주가 퍼집니다! 일대의 신성력이 억제됩니다!
눈앞에 그런 메시지가 성기사와 프리스트들의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위위위위——
괴한 중 한 명이 웬 팔찌를 들어 올리고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검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건 타락 천사의 보구, 반(反) 신성력 아이템이었다.
그것이 힘을 발하자 성기사와 프리스트들의 신성력이 대폭 감퇴했다.
이곳이 성소인 만큼, 그 힘이 빠르게 옅어지겠지만, 일순간 그 효과가 적용된 것이었다.
"윽—!”
"히, 힘이…… 빠집니다……."
"성소가 우리를 축복하니 잠깐뿐일 거다! 버텨— 컥—"
그렇게 한층 물러진 그들을 향해, 오키타 카이토가 쇄도했다.
촤—아—아—!
발도와 동시에 휘둘러진 단 한 번의 검—그 짧은 움직임에 8명의 머리가 떨어지는 건,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봐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피터 클라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계속해서 ‘홀리 필드’ 전개를 진행 중이었다.
‘젠장, 지금 그녀를 건드렸다가는 마나 역류 때문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게 된다.’
홀리 필드, 엄청난 규모의 정화 마법인 만큼 페널티도 상당했다.
중도에 억지로 중단한다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피터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움직여야 하나……."
"단장님! 지금 신념의 방벽을 풀면, 신성력이 대폭 하락할 겁니다!”
신념의 방벽을 시전한 이후 1시간 동안 50%의 신성력 감소를 겪는다.
이어서, 저 타락 천사의 보구의 힘에도 노출되고 말 것이었다.
‘그래, 무기력해진 상태로 저 미친 괴물과 맞서는 건 자살행위다.’
피터는 성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다가오는, 검을 든 귀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렇게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성기사들, 제 자리를 지키세요.”
이 급박한 상황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음성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스가 이탈하여 깨진 ‘신념의 방벽의 틈, 그곳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은신 마법이 해제되며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다, 당신은—!”
이현욱, 서울의 구원자라고 불리는 남자가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 빈자리는 내가 채우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본디 카를로스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로 걸어 들어가, 우뚝 섰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지원 오는 한국 정부 측 병력은 그림자 남작의 ‘그림자 덫’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후긴으로 감시하고 있다가 낌새가 보여서 바로 왔습니다. 그래서 덫에 걸리지 않았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서 오키타 카이토를 마주 보았다.
피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당신만으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검성 시해자, 오키타 카이토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제가 저 남자를 이길 순 없어도, 막아서 시간을 끌 수는 있습니다.”
피터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신은 통제 계열 플레이어이지 않습니까! 절대로……."
"피터, 신념의 방벽을 풀면 안 됩니다. 당신들은 느려 터져서 저 남자를 못 잡을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신념의 방벽이 풀리는 순간, 놈이 쇄도하여 성녀를 노린다면.......
'……그래, 절대로 못 잡는다.’
그렇기에 그의 말처럼, 그가 오키타 카이토와 검을 맞대서 버틸 수만 있다면,
이렇게 신념의 방벽을 유지한 채 ‘깨진 틈’을 막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으흐흐, 뭐야 이제 한 놈 남은 거야?”
“이야—저기 저놈이 혼자서 구멍을 막으려나 본데?”
마지막 희망이었던 40명의 와이트 트리 가드는 이미, 너무나 손쉽게 정리되었다.
그리고리 아자젤의 저주 때문에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던 것이었다.
프리스트들이 정화 마법을 쓴다면 그 저주를 단숨에 벗겨낼 수 있었겠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검성이 쇄도하여 가장 먼저 프리스트들의 목을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십 명의 괴한이 신념의 방벽의 틈—이현욱을 향해 다가왔다.
"죽여—!”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놈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현욱이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천천히 양팔을 들어 올렸고,
시이이이——
그의 양팔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웬, 거대한 금속 상자 두 개가 튀어나와, 하늘로 비상했다.
우우우우——
조용하지만 공학적인 엔진 소리, 검은 스틸 재질 표면, 그 위에 수놓아져 있는 마법 회로, ‘공중투하장치(프로토 타입)’가 이현욱의 머리 위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저건……."
일순간, 달려들던 괴한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텅—
그때, 공중투하장치의 하단부가 열렸고,
쉬—쉬—쉬—쉬—쉬——!
그곳에서부터 110개의 쇠 구슬이, 마치 산탄총을 쏜 것처럼 일제히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