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69화 (69/221)

69화.  < 서울, 악마, 성녀 - 3 >

==========================

전생의 이현욱은 ‘슬로우 스타터’였다. 그가 능력 성장 방법을 발견하고 영웅으로 성장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그렇기에 그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건들을 모르는 건 아니다.’

이현욱은 다소 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능력 성장이나 전투 훈련은 당연하고 정보와 지식 습득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디언 정보부에서 활동하며 온갖 정보를 수집했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이 활약하기 이전에 벌어졌던 사건에 관하여 아주 잘 알았다.

심지어 빌런 세력의 내부자와 접촉하여 그들의 정보를 빼내기까지 했다.

그가 빌런의 행보에 관하여 아주 세세하게 아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현욱은 성녀, 에밀리아 뮐러를 바라보았다.

현재 나이 만 27세, 눈에 띄는 미녀, 그러나 지금 그녀의 꼴은 엉망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프리스트라는 여자가 정작 본인은 어딘가 병약한 기색이 역력하다.

푸석푸석한 머리, 짙은 눈그늘, 충혈된 볼, 갈라진 입술,

하지만 지금, 오직 눈동자만은 아주 또렷했다.

‘……나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빌런’이라는 말을 꺼내며 이현욱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솔직히 속으로는 다소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알고 있다고 맞장구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음, 빌런이라면……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역 같은 겁니까?”

이현욱의 능청스러운 물음에 에밀리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진짜…… 몰라요? 진짜로요?”

"솔직히, 어떤 의미의 빌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가디언’이라는 건 들어봤어요?”

"......."

"어라, 당신이 진짜로 4차 웨이브를 저지한 영웅이라면, 이걸 모를 수가 없을 텐데요?”

빌런과 가디언 그 상관관계까지 알고 있다.

그리고 ‘퀘스트’가 발동하는 메커니즘까지…….

이현욱이 알기로 이 여자는 빌런도 가디언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정보를 얻었다는 뜻이었다.

"예 맞습니다. 제 눈앞에 가디언이 되라는 히든 퀘스트가 떴지만, 거절했습니다.”

서울역 언럭키 이벤트 때 양주섭을 죽인 이후 가디언이 되라는 ‘히든 퀘스트가’ 떴으나 그절했다. 그 당시, 거절할 시 다시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이어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웨이브 종식 및 악마 소환 저지 이후에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왜요? 퀘스트가 엄청난 기회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요? 그걸 왜 거절했죠?”

"저는 세상을 망친 원흉을 시스템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그것에 놀아나기 싫어서요.”

"아…… ‘반시스템주의자’라, 되게 의외네요.”

이현욱이 그럴듯하게 둘러대자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총재님이 그 가디언이신 겁니까?”

아닌 걸 알지만, 그렇게 물었다.

"아뇨, 저는 그냥…… 가디언이었던 사람과 친했어요. 네, 그래서 당신이 가디언인 줄 알고 부탁하려는 게 있었는데…… 하, 괜한 말을 한 셈이 됐네요. 썅, 방금 그 말은 잊어줘요.”

역시 이 여자한테는 ‘특별한 정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뭔지 캐물을 수는 없었다.

"후, 어쨌든 당장은 앞서 부탁드린 ‘와이트 트리 가드’ 감시, 그게 더 중요해요.”

“……짐작하시는 그 내부의 배신자는 앞서 말했던 그 ‘빌런’이겠군요.”

그녀는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예요.”

"빌런, 그들은 누구죠?”

이현욱은 전혀 모르는 척 그렇게 물었다.

"그건…… 저도 자세하게는 몰라요. 그저, 시스템을 악용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는 비밀 집단이고, 내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 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만 알고 있죠.”

조금 틀렸다. 시스템을 악용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기회를 제공하는 거다.

'그나저나 성녀가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라면…….'

역시 와이트 트리 가드의 전대 단장 니콜라스 스틸이었다.

‘그 남자는 가디언의 초대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초대 ‘의장’이기도 했는데, 던전 공략 도중 돌연 실종된다.

이후 몇 달간 그 던전 안을 수색했지만, 끝내 시체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는데…….

몇 년 뒤, 고든 프라이스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그게 놈의 계략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즉, 니콜라스가 고든의 정체를 눈치챘고, 성녀에게 어떤 언질을 줬던 거다.’

그래서 빌런들은 무언가 알고 있는 에밀리아를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한 거고…….

그러나 고든 프라이스라는 거물이 가디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터…… 그저 숨어서 몸을 사리고 있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었다.

‘이 여자는 내가 4차 웨이브를 막은 직후 가디언 후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를 이용해서 고든 프라이스에 관한 정보를 캘 생각이었군? 나름 뭔가 해보려고 한 거다.’

생각해보면 상당한 도박 수로, 궁지에 몰린 처지에서의 발악이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총재께서 평소에 좀 다소 이상한 태도를 보이신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겁니까?”

"뭐, 제가 원래 딱히 성녀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사람이 좀 많이 아니긴 한데……."

그녀는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망나니짓도 위장이었다.

"도드라지는 미친 짓은 세인트 돔 밖으로 나올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 거긴 해요. 제정신이 박혀 있는 이상, 사람들이 절 가만히 놔두겠어요? 여기저기서 지랄 맞게 불러대겠죠.”

세인트 돔 안에서는 그 누구도 성녀를 죽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인트 돔의 출입 허가자들은 전부 그녀를 해할 수 없도록 ‘신성한 맹약’ 주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즉, 아무리 빌런일지라도 그녀를 암살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군.’

이런 내막이 있는데 세상은 끝내 그녀를 그저 정신 나간 여자로만 기억하게 되었으니.......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한테……”

이현욱은 부담스럽다는 듯 말했고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솔직히 도박이에요. 지금 도박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아무런 수가 보이지 않을 때, 일말의 가능성이 등장했다.

일단 빌런은 아닌 게 확실하며 무려 ‘후긴’을 운용하는 때 묻지 않은 뉴페이스,

그녀는 이현욱에게 ‘베팅’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 부탁, 해줄 수 있어요? 하…… 내가 오죽하면 처음 보는 당신한테 이런......."

그녀는 처음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력감이 묻어나왔다.

그녀는 세상에 단 31인뿐이라고 알려진 S등급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스스로 싸울 수는 없는 특성…… 언제나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

‘평소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배신으로 죽었으며 그 뒤에 자신은 수차례 암살 위협을 겪었다.

심지어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세력을 쌓는 건 사치였을 터…….

이현욱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행히도 그 도박, 제대로 베팅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에밀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음, 네?”

“……오늘 하루 말고, 앞으로도 계속 믿어주셔야 합니다. 저도 앞으로 그 대단한 성녀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오늘, 꼭 빚을 지게 만들고 두고두고 받아낼 겁니다.”

이현욱이 자신감 넘치다 못해 이미 성공한 것처럼, 그렇게 요구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배신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그녀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그놈들을 처단할 생각이었다.

그런 이현욱의 모습을 에밀리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얼마든지요. 오히려 비즈니스 관계가 더 마음 편하—딸꾹—”

다시 터져 나온 딸꾹질, 에밀리아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오랜만에 멋진 말 좀 했나 했는데…… 딸꾹! 윽……. 자, 어쨌든, 밖에 나가면 다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들 엄청나게 궁금해하겠죠?”

그녀는 다시금 위스키병을 집어 들었다.

"정신 나간 호색한 성녀가 웨이브를 막은 영웅 이야기에 빠져서, 그 영웅을 유혹했지만, 끝내 목표 달성은 못 한 거예요. 어때요? 사람들이 기겁하면서 더 캐묻지 않겠죠?”

그리고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몇 개 풀어헤쳤다.

이현욱은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핑계입니까?”

"내가 왜 미친 짓을 했겠어요? 혹시 ‘괴짜 점수’라는 심리학 용어, 알아요?”

"평소에 어떤 모습으로 위장하셨길래……."

“궁금해요? 내가 당신을 진짜 신뢰할 수 있게 되면 자세히 알려 줄 수도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이현욱을 일으켜 세웠다.

"좀 자연스럽게 엉겨 붙을게요.”

그러더니 이현욱의 오른팔에 바짝 붙었다.

‘아무래도 망나니 같은 모습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VIP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에 대기 중이던 우성문과 피터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피터! 내가 요즘 매력이 좀 떨어지긴 했나 봐아—!”

그녀는 잔뜩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를 짜증을 냈다.

"예? 그게 무슨......."

"광역 마법 시전 전에 영웅의 양기 좀 받으려고 했더니, 에이, 됐어요!”

그 말에 와이트 트리 가드의 단장, 피터 클라크는 얼굴을 붉혔다.

"하…… 에밀리아, 제발— 당신은 세인트 돔의 얼굴이란 말입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다가와서 에밀리아의 정수리에 큼직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서 황금색의 빛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후우우——

그건 ‘정화’ 상태 이상 회복 마법으로 알코올까지 해독할 수 있었다.

"악! 나한테 제발 좀, 정화 마법 좀 걸지 말라고 했는데……."

일순간 술이 확 깨버린 에밀리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삶에 의욕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이현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그녀의 연기에 감탄했다.

"이제 슬슬 홀리 필드를 시전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정신 차리셔야죠.”

"하…… 알았어요……."

에밀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성녀의 서울 정화 작전, 동시에 와이트 트리 가드 내부 빌런 색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

서울 변두리의 오피스텔 공사 현장, 그곳을 향해 은밀한 발걸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정보원 플레이어3팀 소속의 방첩 요원들로,

대(對)플레이어 첩보전을 전문적으로 하는 특수 요원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골목, 검은색 밴의 정차해 있었다.

- ......야, 원 팀장! 너희끼리 들어가면 개죽음이야!

"하......."

- 제발 부탁이다. 흑호 부대 진압팀이 곧 도착하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리고 있어!

"젠장, 국장님! 그럼 놓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벌써 몇 번째입니까?”

플레이어3팀장, 원진수는 그렇게 성을 내었다.

그의 팀은 검성 시해자라고 불리는 ‘레드 플레이어’ 오키타 카이토를 추적 중이었다.

며칠 전, 놈이 부산항을 통해 밀입국했다.

그 이후 거대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놈의 존재가 다소 잊혔지만,

이들의 추적 작전은 한 시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그야말로 신출귀몰,

꼬리를 잡았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녔으나, 매번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씨발,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더니…….'

현장을 감식한 결과 ‘그림자 링크’ 스킬 즉 ‘그림자 남작’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빨리 잡지 않으면 진짜 큰 사건이 터질 거다!’

무려 ‘그림자 남작’과 ‘검성 시해자’의 조합…… 그야말로 완벽한 자객들이었다.

‘무조건 누군가 죽는다. 그것도 엄청난 거물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놈들을 막아야 한다.

이 사건의 책임자인 원진수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원 잘 들어라,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놈을 잡아둬야 해.”

그는 국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방패를 들고 오피스텔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아주 은밀하게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좋아— 이제 드론 띄운다.”

사일런스 마법이 걸린 마법 드론이 비행하며, 건물 안쪽을 관측했고,

아직 뼈대밖에 없는 건물 안에 한 남자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원진수는 마법 드론과 연결된 ‘고글’을 통해 그 장면을 확인했다.

'......놈이다!’

건물 안에 가부좌하고 있는 남자…….

오키타 카이토, 놈이 맞았다.

'씨발, 남의 나라에 와서 대체 뭘 하는 거냐!’

그는 악다구니를 집어삼키며 ‘진입’을 명령하는 핸드 사인을 보냈다.

저벅— 저벅—

그를 선두로 하여 무려 24명의 플레이어 요원들이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악명 높은 검성 시해자를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흑호 부대의 진압 팀이 올 때까지 내가 버티고 있을 수 있다.’

원진수, 그는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194위, B등급 1티어의 탱커였다.

‘아무리 놈의 공격이 매서워도 몇 분 버티는 건 무리가 아니다.’

어느새 6층에 도달, 놈이 있는 방문 앞이었다.

원진수는 철문을 걷어찼다.

쾅—!

문짝이 통째로 넘어갔고 원진수는 방패를 앞세워서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정면의 어둠 속,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는 놈이 보였다.

24명의 요원 중 12명이 일사불란하게 진입, 놈을 포위했다.

움직이지 마!”

이내 오키타 카이토,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키타 카이토! 넌 완전히 포위됐다! 저항하면 그대로 가루가 될 거다!”

이곳에 있는 24명의 플레이어 외에도 3명의 저격수 플레이어가 그를 겨누고 있었다.

"......."

그는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지?’

이건 좀 의외였다. 분명한 항복 의사, 너무나 순수한 투항이 아니던가…….

원진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방패를 굳게 움켜쥐었다.

“……놈이 항복했다. 마법 방진으로 구속한다.”

그런데 그때, 놈의 오른쪽 손목이 천천히 비틀어졌고 무언가를 ‘쥐는’ 형태를 취했다.

"씨발, 카이토! 움직이지 마! 조금만 더움직—”

놈의 오른쪽에 서 있던 부팀장의 고함이 중도에 벚었다.

오키타 카이토의 오른손이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는, 한 자루의 칼이 쥐어져 있었다.

‘젠장, 언제 발도한 거야?’

원진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음에도 그 움직임을 전혀 식별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쪽에 서 있던, 부팀장을 포함한 3명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철퍽——

그의 시선 안으로, 머리 2개가 굴러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부팀장의 머리였다.

‘……아공간발도술!’

아공간에서 칼을 꺼내는 동시에 적을 베는 기술,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검성 국표성을 베었다는 그 비수였다.

"저격수들—뭐해—!”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쉭—— 쉭——

그 순간 놈의 칼이 두 차례 더 움직였고, 몇 명이 더 고꾸라졌다.

원진수의 왼쪽 뺨에 피가 철퍽, 하고 튀었으나 그는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면 죽는다.’

이내 놈의 시선이 원진수에게 닿았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칼을 휘둘렀다.

의외로 정직한 궤적의 공격,

'—막을 수 있다!’

원진수는 앞으로 나아가며 방패에 ‘선봉장의 의지’ 스킬을 부여했다.

트롤의 일격도 견뎌내는 방패 강화 스킬— 그렇게 두 쇠붙이가 부딪치려는 순간,

'……사라졌어?’

그의 손아귀에서 칼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손은 칼을 휘두르듯 계속 움직인다.

그리고 그 궤적이 방패를 넘어서는 순간,

그의 손아귀에서—

윙——

칼이 다시 나타났다.

마치 점멸하듯, 일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아, 아공간…….'

원진수는 아공간발도술의 진짜 의미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게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칼날이, 방패를 뛰어넘어서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촤——악——!

그게 끝이었다.

원진수가 죽은 이상 나머지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단 몇 초 만에 24명의 목이 전부 달아났다.

그리고 그 직후…….

쉬이이이——

그의 그림자 안에서 무언가 치솟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회색 가면을 쓴 남자였는데, 양손에 피에 절은 단검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저격수들을 처리한 것이었다.

그는 이 장소를 한 번 둘러보더니 감탄했다.

"이야, 하나 같이 참수로 죽이다니, 이상한 강박증 있는 거 아니야?”

"......."

"그나저나 이번에 검성 시해자에 이어서 성녀 시해자라는 별명을 얻겠어? 하하—"

회색 가면 쓴 남자가 낄낄 웃으며 그렇게 묻자,

오키타 카이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았다.

일말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을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검성의 칭호는 오로지 검대 검의 승부를 통해 대물림 되고, 지금은 내 것이다. 나는…… 검성 시해자가 아니라 그냥 검성이다." ***

홀리 필드 전개를 앞두고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이현욱은 '후긴’을 작동시켰다.

기이잉——

동그란 구체가 순식간에 공학적인 까마귀로 변했다.

- ‘후긴’이 활성화되며 ‘모든 감각’이 최대 50배까지 확장됩니다.

* 초당 마나 감소 : 24〜120

후긴이 비상했고, 일대의 모든 것들이 그의 감지 안에 들어왔다.

‘감각의 50배 확장, 이건 실로 엄청난 능력이다.’

그는 시야를 자신의 몸으로 복귀시킨 뒤, 가볍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심장이 흔들리고, 피가 흐르고, 근육이 날뛰고, 폐를 부풀어 오르는,

그 세세한 감각들 하나하나가 아주 명징하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능력 상승, 그렇기에 압도적인 페널티,

본디, 전투 시에 사용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아이템,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

그는 천천히, 등 뒤에서 운사암수를 꺼내어 쥐었다.

‘생각해보니, 검을 제대로 휘둘러 본 것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과거에서 눈을 뜬 이후, 지금까지 금속 통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일종의 화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현욱은 훗날 검성이라고 불리게 될 남자, 최영준이 인정한 재능,

그는 사실 무기를 휘두르는 육탄전이 가장 자신 있었다.

‘오키타 카이토 놈이 설사 내 화력을 뚫고 들어오더라도…….'

이현욱은 천천히, 검 끝을 움직였다.

'......막을 수 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