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서울, 악마, 성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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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중턱,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진 듯한 드넓은 잔디밭에 헬리콥터가 안착했다.
그곳에서 내린 건 우성문과 보좌관들이었다.
이내 선글라스를 쓴 요원들이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이 팀장, 성녀는 도착했나?”
이 팀장이라고 불린 안경 쓴 남자, 이교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아직도 술에 취해 있습니다.”
"젠장, 그럼 그렇지……."
이역만리까지 날아와서 세계 최대 도시를 구해야 하는데, 음주 상태라니…….."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온 성기사들의 행패가 좀…… 골치 아플 정도라고 합니다.”
성녀의 친위 성기사단 <와이트 트리 가드>가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건 이미 유명했다.
‘초대 단장, 니콜라스 스틸이 전사한 이후부터 조직 전체가 급속도로 한심해졌다.’
우성문은 그 누구보다 명예를 알았던 니콜라스를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와이트 트리 가드는 모두에게 인정 받았었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를 한심한 인간들이 채우면서 조직 전체가 명예를 잃었다.
우성문은 이 나라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사람이 최고의 힘인 시대이거늘, 정작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시대야.”
그는 오랫동안 인재를 육성해왔기에 그런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날은 인품이나 노력이 실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으로 일어나는 각성과 무작위로 주어지는 특성…….
‘운만 좋아도 최고가 될 수 있는, 비상식적인 시대이기도 하지…….'
우성문은 그런 부조리함을 느끼던 중, 하나의 얼굴이 떠올렸다.
‘이현욱…….'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하위 F등급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제약 따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내더니 어느새 최고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 그가 진짜 인재다.’
우성문은 이현욱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서울 하늘이 이번에는 붉게 물들었습니다. 도봉구 도봉산 일대에서 원인 불명의 마나 파동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정부의 ‘이상현상분석팀’이 원인 규명에 나섰습니다.
이현욱은 트럭의 짐칸에 실린 ‘공중투하장치’를 점검하면서 한 귀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음, 여기에다가 쇠 구슬을 넣으면 여러모로 활용하기 좋을 것 같은데?’
사각형의 큼직한 박스, 그 내부의 대부분은 ‘아공간 생성 장치’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하단 부에 다용도의 수납공간이 존재했다.
이현욱은 그 안에다가 쇠 구슬을 잔뜩 쏟아 넣었다.
하나에 55개, 2개의 공중투하장치에 총 110개를 구비할 수 있었다.
- 이어서 4차 웨이브를 종식 시킨 영웅들, 강철 중대와 그들의 지휘관 이현욱 병장도 이번 작전에 투입된다는 소식입니다. 세부 사항은 기밀 사항이기에 전해드릴 수는 없으나…….
“……오! 우리 이야기 또 나옵니다.”
그 지점에서, 트럭 밖에 대기 중이던 강철 중대원들이 반응하며 시시덕거렸다.
“이제는 뭐, 뉴스에 나오는 거 질리게 보지 않았냐?”
"아무리 그래도 나올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어차피 전부 이현욱 병장님 이야기인데, 뭘……."
강철 중대뿐만 아니라 1대대 전 병력은 지금, 어느 8차선 도로에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번 사태에서 강철 중대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이들의 그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도봉산과 이어지는 북한산 남쪽에 ‘차단선’을 설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4차 웨이브의 영웅들에 관한 관심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불필요하게 뉴스 일부분을 떡하니 장식하는 것이었다. 이현욱은 그 지점에 영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강철 중대가 움직이는 게 왜 뉴스에 나와? 하여튼, 유명세는 여러모로 좋지 않다.’
이현욱은 트럭의 짐칸에서 내리며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 40분 전, 서울 어딘가에서 붉은색의 에너지 기둥이 솟구쳤다.
그것이 하늘을 닿은 직후 붉은 구름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거대한 고리 모양으로 변한 채, 서울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기분 나쁜 소리까지 울린다.
‘저 악마의 권역 안으로는 웬만한 신성 방어막을 두르지 않는 이상 접근할 수 없다.’
도봉산, 악마의 소환 장소는 지금 ‘악마의 권역’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그 근처로 다가가면 강력한 ‘지옥 마력’에 의해서 생명력을 갉아 먹힌다는 게, 정부 측에서 공표한 정보였다.
물론, 작정하고 준비해서 공략에 나선다면야 어떻게든 진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만…… 그런 방법을 아무리 고민하는 것보다, 성녀의 ‘홀리 필드’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성녀가 이 땅에 오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 그런데 이현욱 병장님은 곧 다른 작전에 투입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태용의 물음에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곧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혹시 무슨 일로 어디에서 부른 겁니까?”
최태용이 조심스럽게 묻자, 옆에 있던 안민태가 탄식을 내뱉었다.
"인마, 그게 기밀이니까 말씀 안 해주시는 거 아니겠냐!”
“아, 음…… 그래도 우리끼리는 공유해주실 줄……."
"우리끼리는 무슨, 이 자식이 이제 이현욱 병장님하고 맞먹으려고 하네?”
"아, 진짜!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현욱이 성녀 경호 작전을 맡게 되었다는 건, 당연하게도 기밀 사항이었다.
이미 이 땅에 도착한 성녀는 현재 비밀리에 어디론가 이동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가 ‘홀리 필드’를 시전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인 ‘성소’ 중 한 곳일 터,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성소라면 역시나 ‘북악산 대성소’였다.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실제로 청와대 지하 벙커와 연결되어 있었다.
성녀가 그곳에 도착하고 주변 정리가 끝난 뒤에야 이현욱을 호출할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필요하다고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 인력이긴 하니까…….'
이현욱에게 경호에 관한 모든 걸 오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호출을 해오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게 있다.’
이현욱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황금색 카드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특성 개화 2단계(특수)
- 효과 : 새로운 스킬을 무작위로 개화하거나 이미 보유한 스킬을 강화합니다.
이는 ‘특성 개화’ 아이템 2개를 융합하여 ‘2단계’로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다.
‘이제 이걸로 어떤 스킬을 올리냐인데…….'
이번 일은 철저하게 '변수’로 발생한 만큼, 이현욱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판단했다.
‘역시 이번에는…… 강체화에 투자한다.’
솔직히 ‘브레스 룸’을 먼저 강화하는 게 낫지 않은지 수차례 고민했다. 브레스 룸의 격이 상승할 경우, 체내 용광로도 확장되어 성장 속도도 빨라질 테니 장기적으로 이득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미래만 내다보다가는, 돌부리에 걸릴 수도 있다.’
전생, 그의 최대 약점은 방어력이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그게 문제였다. 그가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로기에 빠진 찰나의 순간, 모든 게 끝이나 버렸으니…….
물론, 이번 생에는 기초부터 달랐다. 이미 전생의 방어력을 넘어선 상태긴 했다.
하지만.......
‘오키타 카이토, 놈이 분명 나타날 거다. 놈의 일격을 버티려면 아직 부족하다.’
이현욱은 검성 시해자가 성녀 암살의 ‘살수’ 역할을 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전생에도 놈이 성녀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으니…….'
그렇기에 이현욱은 ‘특성 개화 2단계’를 과감하게 강체화에 투자했다.
- 축하합니다! 특성 개화(2단계)를 사용하여 ‘강체화’ 스킬이 대폭 강화됩니다!
[스킬 정보]
- 이름 : 불굴의 강체화(剛體化)
- 등급 : B
- 효과 : 마나(20)를 소모하여 신체 일부분을 일시적으로 ‘강화’합니다.
1 [마나실드 (이중 구조)]
2 [비밀 각인 (2)]
3 [알 수 없음]
* ‘고경도 마법 금속’을 일정량 이상 삼키면 스킬 등급이 향상됩니다.
D등급에서 단숨에 2단계 상승하여 B등급이 되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올릴 수 있는 스킬의 최대치는 A등급,
즉, 이제는 강체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이었다.
이현욱은 왼손에 ‘강체화’를 건 뒤, 달라진 감각을 천천히 느꼈다.
더욱 촘촘해진 밀도의 금속 피부와 ‘이중 구조’로 질겨진 마나 실드…….
'이 정도면 아다만트로 만든 갑옷에다가 상급 마법 보호막을 덧씌운 것과 같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장갑차가 된 셈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스킬 ‘비밀 각인’의 숫자도 2개로 늘어났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테스트해봐야 하는데.”
이현욱은 다시금 트럭 짐칸에 올라타서 ‘공중투하장치’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시이이이——
그러자, 그 거대한 기계 덩어리가 녹아내리듯 연기로 변하다니.......
- 각인되었습니다.
공중투하장치, 이 거대한 물체도 결국은 아이템이기에,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이현욱의 오른쪽 손목에 다소 큼직한 사각형의 문신이 새겨졌다.
‘역시 된다. 이러면 대박인데…….'
이게 고무적인 이유는, 이 공중투하장치 안에 30개의 무기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현욱은 반대 손, 왼손에서 ‘아킬레우스의 창’을 빼내고 나머지 1개의 공중투하장치를 각인했다.
그리하여 총 60개의 무기— 그리고 하단 수납공간에 들어 있는 총 100개의 쇠 구슬까지,
무려 수백 개에 이르는 다양 한 무기가 그의 양쪽 손목에 수납된 것이었다.
‘좋아, 일종의 인벤토리가 생긴 셈이다.’
이로써 장갑차 수준의 방어력과 전폭기 수준의 화력을 단신에 품었다.
‘역시 강체화를 올리는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그때, 트럭 밖에서 웬 외침이 들려왔다.
"이현욱 병장님! 서은하 중위님께서 찾으십니다.”
한편, 이번 작전에 서은하도 동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성기사인 만큼 성녀 측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실은 그녀가 각성 직후 2년간을 세인트 돔에서 성기사 교육생 생활을 하면서 성녀— 에밀리아 뮐러와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즉, 서은하를 호출한 건 외교적인 목적이 더 컸다.
이현욱은 도로에 길게 늘어 서 있는 1대대의 차량 대열 끝으로 가서 서은하를 만났다.
그녀는 트럭의 짐칸에 걸터앉은 채 회색 갑주를 착용하며 이현욱을 올려다보았다.
"이현욱, 그쪽에서 차를 보내왔다. 슬슬 출발 준비해.”
반대쪽 차선에 검은색 SUV가 보였다. 우성문이 보내온 차량이었다.
"저는 이미 준비 끝났습니다.”
"아,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려 봐. 갑옷 입는 게 읏— 조금 고되거든……."
서은하의 준비가 끝나자, 두 사람은 김강석에게 보고한 뒤 SUV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던 중, 그녀가 문득 물어왔다.
"이현욱, 너는 성녀를 직접 본 적이…… 당연히 없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이현욱은 지난 삶에서도 성녀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가 아직 F등급의 오명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성녀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녀에 관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도 질리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정상이 아닌 사람이야. 여러모로 좀 골치 아플 수도 있어.”
성녀의 악명은 이현욱도 익히 들었다.
성녀라고 하면 보통 고결, 순결, 정의로운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건 종교와 연관된—특히나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스테레오 타입일 뿐.
S등급 프리스트인 에밀리아 뮐러가 성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건 종교나 성격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녀가 가진 신성 능력 때문이었다.
‘애초에 성녀는 별명일 뿐이고, 사실상 이단 심문관에 가깝지…….'
심지어 그녀의 능력 성장 방법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암흑 계열의 존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 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본다면 저주와 다름없는 능력 성장이었다.
차드 공화국이 유난히 암흑 계열 스킬을 익힌 플레이어에게 무자비하며, 심지어 성녀가 직접 그들을 고문하고 처단하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사람 성격이 좋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그런 악독한 여자일지라도 인류에게 꼭 필요한 무기 중 하나였다.
***
대한민국 대성소(大聖所)의 위치는 국가 기밀이었다.
서울 어딘가에 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대성소가 일종의 ‘안전가옥’인 동시에 ‘비밀 병동’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청와대가 습격받으면 청와대 지하 벙커가 아니라, 이곳으로 피신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으며, 국가 중요 인사나 랭커 플레이어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이곳으로 옮겨진다.
‘나도 몇 번 실려 왔었지…….'
대한민국 최고의 ‘성역(聖域) 버프’를 받은 회복 주문은 다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낸다.
우우우우——
SUV가 북악산의 군용 도로를 따라서 올라갔다.
한동안은 빽빽한 나무숲만이 보이는,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 <광역 신기루 결계>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런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한순간에 눈앞에 너른 지역 펼쳐졌고 그 중심에 백색의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북악산 대성소, 오랜만이군.’
외관은 정말로 별거 없이 그저 사각형의 백색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였다.
애초에 숨겨진 장소인 만큼 외관을 중요시하지 않은, 효율 그 자체의 설계였다.
그리고 저 건물을 뒤덮고 있는 나무숲 속에 수없이 많은 ‘블랙 요원’들이 숨어 있으며,
하늘에는 수십 대에 이르는 ‘마나 드론’이 비행—일대 모든 지역을 감시 중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백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바로 ‘와이트 트리 가드’였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키가 작고 안경 쓴 남자가 이현욱과 서은하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교준 팀장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고 소속을 밝히지 않는 걸 보아하니, 비밀 부서의 요원인 듯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여기서부터는 모든 통신 장비를 소지할 수 없습니다.”
이현욱과 서은하는 완벽한 내부인인 아닌 만큼, 형식적인 몸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두 분은 성녀, 에밀리아 뮐러 50m 이내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혹시나 잘못 접근할 경우 제압되거나 상황에 따라서 경고 없이 사살될 수 있으니, 유념하셨으면 합니다.”
이 둘의 임무는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이 건물 자체를 방어하는 것뿐,
에밀리아 뮐러의 주변은 그녀의 친위대인 와이트 트리 가드— 그중에서도 12명의 고위 성기사가 지킨다.
그 외에는 그 누구도 그녀의 주변으로 접근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때, 이교준의 옆에 서 있던 다른 요원이 ‘이어 마이크’에 손을 얹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팀장님…… 이현욱 병장을 지하 3층 VIP실로 모시라고 합니다.”
그 말에 이교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VIP실이라니, 그걸 대체 누가 지시한 거야?"
“그게…… 성녀가 직접 요청한 사항이랍니다.”
“성녀가, 대체 왜……."
이교준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현욱도 마찬가지였다.
‘성녀가 나를…… 왜?’
심지어 서은하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현욱, 성녀가 너를 왜 호출해?”
"잘 모르겠습니다.”
서은하는 골똘히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욱, 뭐가 됐든 조심해. 아까 말했듯, 제정신이 아니야……."
서은하의 살벌한 조언을 끝으로 이현욱은 요원 셋의 인솔을 받아서 지하 4층의 VIP실로 향했고,
삼엄한 경비와 다중 보호막이 쳐진 긴 복도를 지난 끝에 거대한 철문을 마주했다.
"자, 여기입니다. 그 어떤 무기도 반입할 수 없으니 전부 꺼내주시죠.”
이현욱의 무기를 꺼내놓자 이내 두꺼운 방호 문이 열렸다.
철컥——
상당히 넓은 실내, 가운데에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 우성문이 앉아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건너편, 금발 머리의 왜소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에밀리아 뮐러, 성녀다.’
그녀는 이현욱이 발견하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요— 안녕—!”
……다소 황당한 첫인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우성문은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그 이유를 알만도 했다.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 성녀를 초빙했거늘, 성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듯했다. 마치 불량품을 받은 기분일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이현욱 병장, 세인트 돔 총재께서 서울의 영웅을 불러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말입니다.”
"네네, 맞아요, 내가 불렀어요.”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총재님? 시간이 없으니 빨리하시죠.”
우성문 거의 탄식이 섞인 말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그의 말은 들은 채도 안 하고는 턱을 괸 채 이현욱을 쳐다보다가,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미스터 우, 걱정하지 말아요. 힛— 함부로 잡아먹지는 않아요.”
일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미스터 우, 나, 이 사람이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에요. 조금 개인적인—음, 좀, 뭐랄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요.”
횡설수설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우성문은 고개를 저었다.
"총재님,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 없습니다.”
우성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다 거치고 있었다.
방금, 경호 작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이현욱을 잠깐 언급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성녀의 눈초리가 변했다.
그녀는, 이현욱이 서울을 2번이나 구하고 ‘후긴’을 운용할 수 있다는 설명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것 같더니, 그를 호출하라고 떼를 써댔다.
그리고 이제는 단둘이 이야기를 하겠단다…… 설마 S등급으로 각성했다는 걸 눈치채고 차드 공화국으로 빼내 가려는 게 아닐까, 괜스레 걱정이었다.
"아, 진짜…… 딸꾹! 나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어린애의 투정이나 다름없는 협박…… 우성문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얼핏 노기가 스쳤다. 그는 에밀리아 등 뒤에 서 있던 기사를 바라보았다.
"피터,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그 말에 피터라고 불린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밀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 피터, 딸꾹— 당신도 잠깐만 나가 있어요.”
피터가 화들짝 놀랐다.
"예?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총재님 곁을 떠납니까!”
"딸꾹— 제발, 나 좀 짜증 나게 하지 말아줘요.”
일순간, 두 사람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
승자는 에밀리아였다.
피터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일런스……."
그녀의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무언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었다.
"딸꾹— 딸꾹—"
"......."
"이름이 이현욱, 맞죠? 서울의 구원자…… 그것도 두 번이나 구했다고요?”
이현욱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을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
이 여자, 방금까지 어딘가 모자란 듯했는데, 지금은 아주 멀쩡한 느낌이었다.
특히나 눈동자, 동태 눈깔 같더니 한순간에 또렷해졌다.
‘설마 망나니인 척을 한 거야? 대체 왜…….'
이현욱은 자신이 모르던 역사와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이 전설 등급의 초감각 아이템 후긴을 다를 수 있다고 들었어요.”
"예, 맞습니다.”
“후긴이면, 감각이 폭증돼서 주변의 거의 모든 걸 인지할 수 있는 거, 맞죠?”
“……모든 건 아닙니다만, 평소보다는 훨씬 잘 봅니다.”
그녀는 갈증이 아는지 탁자 위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 미스터 우의 사람 보는 눈은 최고라고 했죠. 그런데 그가 방금, 경호 작전 설명을 하면서 당신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을 두 번이나 구해냈으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한 통속은 아닌 것 같고......."
믿었던 사람, 싫어하는 사람…… 아직 술이 덜 깬 듯한 난해한 말이었다.
"......한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부디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이현욱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서울 전체를 정화하는 ‘홀리 필드’를 쓰면 30분 동안 무방비 상태가 돼요."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나를 암살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때를 노릴 거예요. 그때 당신이......."
에밀리아는 고개를 쭉 빼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와이트 가드를 집중적으로 감시해줬으면 해요.”
이현욱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말뜻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현욱은 담담한 표정으로 에밀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어서 그녀가 내뱉은 말에, 이현욱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빌런이라고 들어봤어요?”
이현욱이 알기로 이 여자는, 가디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