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마지막 침식 요인 - 1 >
============================
1시간전…….
“......예? 그게 말이 돼요? 월드 보스가 지, 지금 출현한다고요?”
강서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월드 보스 몬스터 출현을 알리는 ‘전체 공지’가 웨이브 존의 하늘에 띄워졌다. 웨이브 존 외부에서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건 당연하게도 이곳 <서울 침식 대응 본부>였다.
"예, 맞습니다! 불과 약 2분 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니, 그런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확실한 정보에요?”
"침식 지역 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제보가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웨이브 존 곳곳에서, 하늘에 떠오른 전체 공지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렇다면 조작이거나 사기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도대체 무슨……."
월드 보스 몬스터라는 끔찍한 존재는 언제나 웨이브 4일 차쯤에 등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3일 차도 아닌 2일 차였다.
단적으로 비교해서 2배나 일찍 등장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몇 번 안 되는 선례를 가지고, 그게 전부라고 여기는 건 바보짓이었다.
이 게임은 언제나 플레이어의 뒤통수를 때리곤 했으니까…….
"젠장! 즉시 월드 보스 몬스터 출현 지점을 파악하고 대피 명령을 내리세요!”
"—예!”
“그런 게 등장하면, 쉘터고 뭐고 소용없어요! 다 뚫리니까 그냥 그 지역을 벗어나야 해요! 조금만 늦으면 시간당 몇만 명씩 죽어 나갈 수도 있어요! 서둘러요!”
강서윤은 즉시 전 인력을 투입하여 웨이브 존 안으로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다.
‘저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마나 교신 외에는 자세하게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불과 5분 뒤…….
"저— 본부장님!”
“네? 또 무슨 일이에요?”
“방금, 그 월드 보스 몬스터가……."
"아! 드디어 나타난 거예요? 젠장, 위치가 어디랍니까?”
강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그러나 비상통신담당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놈이 방금, 처치되었다고 합니다.”
처치라니.......
강서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네? 방금 뭐, 뭐라고요?”
"저도 믿기지 않는데…… 웨이브 존 하늘에, 전체 공지가 5분 만에 그렇게 수정되었다는 소식이 속속히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 월드 보스 몬스터가 처치되었다는 내용이랍니다.”
강서윤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2일 차에 월드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 것도 믿기지 않는데, 고작 5분 만에 그게 처치당했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월드 보스 몬스터가 무슨 멧돼지도 아니고 갑자기 출현했다가 순식간에 퇴치당하겠는가?
‘누군가 작정하고 사기를 치고 있거나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
산전수전 다 겪은 S등급의 플레이어일지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도 안 되는 소식이 하나 더 들어왔다.
"보, 본부장님!”
"......."
이번에는 또 뭐란 말인가…….
그녀는 이제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돌렸다.
그 어떤 소식이 날아와도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두 번째 침식 요인이 공략되었다고 합니다!”
미친…….
"뭐라고요—! 어, 어디에서요? 누가요?”
거듭되는 충격 때문이지 좀처럼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길 바라며 그렇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강철 중대입니다! 월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 것도 그들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서윤은 허탈감이 잔뜩 담긴 미소를 지었다.
놀라운 희망이 연달아 생기자, 마냥 벅차오르기보다는 외려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강철 중대…… 걔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제는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그 조직이 서울의 절반을 구해냈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강서윤은 보다 정확하게 확인하라고 명령한 뒤,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1시간 전에 타 놓았던 커피를 홀짝였다. 식다 못해 차가워진 상태였다.
그때, 출입구 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아, 또 뭐야……”
강서윤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어,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비키세요, 우리는 정부 소속 요원입니다.”
"여기가 정부 소속 시설인데 이게 무슨…… 출입 허가증을 보여주세요!”
그 정부 요원이라는 작자들은 심지어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 경비병들은 그깟 총 따위에 굴하지 않고 길을 막아섰다.
"아, 비켜줘도 돼요. 아는 사람들이에요.”
강서윤의 말에 경비병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양복 요원들 사이에서 호리호리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미안합니다. 출입 허용이 나지 않길래 그냥 들어왔습니다.”
안경을 썼음에도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와 호랑이 눈썹,
마주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하는 인상이었다.
물론 강서윤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실장님, 무슨 일이죠? 이번 상황, 저한테 전권 위임하신 거 아니었어요?”
대통령 직속 기관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 실장 우성문,
한국 플레이어 랭킹 9위의 A등급 플레이였다.
그는 정부 소속 플레이어 중 최고위직으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두 번째 침식 요인 공략 성공, 그 소식 들고 왔습니다.”
"음, 그 정보는 방금 들어와서 내부 공유조차 안 했는데 어떻게 벌써 아셨지? 하하……."
하긴, 아무리 강서윤에게 권한 위임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양반들이 정보 수집을 안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이 안에 있는 전문 인력 중 누군가는 저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서울을 내버릴 땐 언제고,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우리 바빠요.”
노골적으로 빈정거림, 그녀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라지만, 강서윤은 그런 직함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S등급 플레이어였다.
“내버리다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저 침식 이후를 대비하기로 했을 뿐입니다.”
“아, 그래요? VIP가 저 안에 계셨어도 그렇게 ‘이후’를 대비하셨을까요?”
서울역 반경 10km, 그 안에는 청와대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외부 행사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웨이브라는 파도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성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청와대의 쉘터는 아주 튼튼합니다. VIP께서 안쪽에 있었다고 해도 똑같이 명령하시고, 5일을 버티셨을 겁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죠. 정부는 맹인이 아닙니다.”
강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정말로 그랬을 터였다.
이들이 바보거나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때로는 기적을 피해갈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일어난 비현실적인 일…… 예, 변수가 일어나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운이 좋게도 웨이브를 막을 가능성이 보이니까 관여하겠다는 뜻이었다.
강서윤은 그 점에 영 기분 나빴지만, 어쨌든 돕겠다는 뜻이니 좋은 소식이었다.
"예, 말씀하세요.”
“강철 중대…… 그 친구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연결해주시죠.”
강서윤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 저도 그 잘난 친구들 목소리 좀 듣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안 돼요.”
"음, 이유가 뭐죠?”
"제가 거절하는 게 아니고 걔들이 교신을 안 받아줘요.”
강서윤은 제3항마여단 1대대장, 김강석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강철 중대의 지휘관 이현욱 병장과는 직통 연결을 할 수 없었다.
그쪽에서 외압 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겠다고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실로 대단한 배짱이었지만, 실제로 엄청난 성과를 내는 만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받을 겁니다.”
우성문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무슨 근거인가 싶어서 강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성문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강철 중대의 지휘관 이현욱, 그 친구에게 엄청난 지원을 해줄 생각입니다.”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강철 중대에 관해서 아주 상세한 정보까지 얻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우성문의 옆에 AMT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천명호…….'
그는 흑호 부대 간부이자 AMT비밀정보부서 <비형랑>의 블랙 요원이었다.
그 탓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최고의 암살 계열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엄청난 지원이라니, 그게 뭐죠? 밖에서 뭔가 넣어줄 순 없을 텐데……."
“웨이브 존에 있는 정부 <2호 무기고>, 그곳으로 통하는 포탈을 알려줄 생각입니다.”
강서윤 그 말을 듣고 짐짓 놀랐다.
그래, 플레이어의 전력을 가장 빠르게 강화하는 방법은 역시나 ‘아이템’이었다.
"젠장, 진작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요? 아끼다가 똥 되는 거라니까요?”
그 말에 우성문은 양팔을 펼쳐 보이며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하…… 무기만 있으면 뭘 합니까? 그걸 휘두를 전사가 있어야죠.”
정부 측에서는, 서울을 구원할 전사가 등장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
해가 저물갈 무렵, O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차량 행렬이 들어왔다.
쉘터의 시민들은 창문으로 모여들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왔다!”
“버스가 4대나 있어요! 거의 다 구했나 봐요!”
"하…… 다행이다, 정말……."
이곳에 남아 있던 이정준과 그 일행들이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경계했고,
버스에서 내린 백여 명의 사람들이 쉘터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갔다.
그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몇몇 사람이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흐으으…… 살았다……."
"어, 엄마, 울지 마…… 으아앙—”
어느새 학교 안 울음바다가 되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딸이랑 같이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강철 중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납치, 감금, 제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경험이었으니, 당연했다.
"이젠 다 괜찮아요……."
"여기에 있으면 다시 잡혀갈 일 없어요.”
쉘터 안에 있던 시민들이 나와서 그들을 보듬어주었다. 그들도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었었기에 납치되었던 이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호야!”
"어? 희망아!”
희망이와 지호, 두 꼬마 친구가 재회했다.
"희망이 네가 나 구해달라고 이 군인 아저씨들한테 부탁했다는 게 진짜야?”
“응! 맞아!”
"고마워! 넌 내 진짜 친구야!”
처음에는 이렇게 훈훈한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이분들, 진짜 영웅이야! 그래서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 잘했지?”
"응! 그런데 희망아, 그건 솔직히 내가 더 잘 알아!”
“……응? 왜?”
지호의 ‘내가 더 잘 앎’ 선언에 희망이의 얼굴이 굳었다.
“희망이 너는 군인 아저씨들 싸우는 거 못 봤잖아? 난 바로 앞에서 봤어!”
"어, 나, 나는……."
"맞지? 못 봤지? 헤헤, 얼마나 멋졌는지 내가 말해줄까?”
"야! 신지호! 아무리 그래도 이 군인 아저씨들, 내가 먼저 알았어!"
누가 더 친하냐, 누가 더 잘 아냐, 누가 더 먼저 알았냐 등등…….
애들답게 별거 아닌 거로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애들이란…….'
이현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박준모가 녀석들에 다가갔다.
"자자, 같은 편끼리 싸우면 안 돼.”
그는 두 꼬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사람 좋게 웃었다.
"솔직히, 희망이 덕분에 아저씨들이 출동한 거잖아? 그렇지?"
"네, 맞아요!”
"그리고 지호는 아저씨들이 올 때까지 용기 있게 잘 버티고 있었지?"
“네! 진짜 무서웠는데 잘 참았어요!”
"이야— 그럼, 둘 다 대단하네?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큰일 났겠다!”
저 녀석, 애들 어화둥둥 해주는 데 꽤 소질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사실, 저런 말도 누가 하는지에 따라서 달랐다.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이 하면, 애들일지라도 무시하기 마련이다.
박준모, 한때 한없이 무시 받던 F등급 병사,
녀석은 지금 부정할 수 없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쉘터의 사람들이 서서히 안정감을 찾아갈 무렵, 밤이 내렸다.
“자, 오늘은 진짜로 쭉 쉰다.”
이현욱은 다소 이른 시간부터 휴식을 명령했다.
내일은 한층 더 지옥 같은 전투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내일 오후, 안양 듀오가 3번째 침식 요인을 공략한다.’
그리하여 웨이브 존에는 단 하나의 침식 요인만이 남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도 <추가 이벤트>가 발생한다.’
추가 이벤트, 그건 플레이어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예상 밖의 선전을 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시스템의 백태클…….
이현욱이 경험해본바, 3개의 침식 요인을 공략할 시, 마지막 남은 침식 요인의 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된다. 그리하여 ‘완성체’가 되어서 플레이어들을 맞이한다.
'마지막으로 남는 침식 요인은 청룡산의 철갑독충이다.’
철갑독충(鐵甲毒蟲)
헬 레트가 지상을 휩쓰는 파도 같았다면, 그것들은 하늘을 뒤덮는 폭풍과 같았다.
콘크리트 건물마저 갉아 먹어치우며 인간의 존재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재앙…….
앞서서 서울역 언 럭키 이벤트 때 마주했던 ‘갑옷맹독거미’처럼, 외피가 철갑이긴 하다만,
그 숫자가 워낙 많아서 이현욱의 금속 통제력으로 전장을 좌우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추교용…… 놈이 교묘하게 작전을 방해할 거다.’
그놈에 대응할 방법은 이미 마련해놨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교용은 무려 A등급 플레이어다. 현재로서는 김강석이나 서은하보다 랭킹이 높았다.
까딱 방심했다가는 한순간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때, 통신분대장이 찾아와서 대용량 마나 메신저를 내밀었다.
"이현욱 병장님, 대대장님 교신입니다.”
“......응?”
약 2시간 전, 침식 요인 제거 직후 이미 한 차례 보고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면,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충성, 병장 이현욱입니다.”
- 이현욱 병장, 미안한데…….
김강석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가득 배 있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 정부 측에서 자네의 마나 메신저 패턴을 알려달라고 강력하게 요구 중이야. 그간 내가 계속해서 차단하긴 했는데, 하— 이번에는 상당한 윗선이 등장해서 말이야…….
여기에서 ‘마나 메신저 패턴’은 일종의 전화번호였다.
즉,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압박한 것이었다.
"음…… 예, 그럼 연락을 받아보겠습니다.”
솔직히 귀찮았다.
정부 측 고위 관계자와 연락을 유지해봤자, 현재로서는 지원받을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테고 오히려 쓸데없는 훈수를 둘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강석이 저렇게 절절맬 정도면 윗선 중에서도 상당히 윗선이다.’
지금 이현욱이 엄청난 공로를 세우고 있긴 하다만,
권력의 눈 밖에 난 공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는 합을 맞춰주는 수밖에…….
이내 마나 메신저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칙— 나는 국가게이트대응전략실장 우성문이다.
‘거물이긴 거물이군.’
우성문이라면, 정부 소속 플레이어 중 일인자라고 볼 수 있었다.
그보다 랭킹이 높은 공직자도 있었다만, 입김 하나는 그가 단연 최고였다.
- 자네 자기소개는 필요 없으니 곧장 본론으로 가도 되겠나?
"예, 말씀하십시오.”
- 정부의 <2호 무기고>로 통하는 포탈 입구 주소와 접근 권한을 주겠다. 그걸 이용하여 모든 침식 요인을 성공적으로 공략해서...... 서울을 구해줬으면 한다.
짧고 간결한 요구였다.
‘정부의 2호 무기고, 즉 국가 소속의 무기고 중 두 번째로 크고 중요한 무기고다.’
그 실제 위치는 불명, 이현욱도 몰랐다.
거에 얼핏 듣기로는 애초에 물리적인 입구가 없는 공간으로, 오로지 비밀 장소에 숨겨진 포탈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다고 한다.
‘대대 무기고만 활용해도 상당한 전력이었는데, 여단 무기고도 아닌 정부 무기고라니…….'
잘만 사용하면 화력의 구경(口徑)이 몇 배로 증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칙— 가능하겠나? 가능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군.
"지금까지 두 차례는 운이 좋았습니다. 계속 운이 좋기를 바라며 정진하겠습니다.”
그 이후, 우성문은 비밀 포탈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 다만, 문제점이 하나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 포탈 관리인의 보고에 따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근처에 좀비 트롤을 비롯한 언데드가 유난히 많이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야. 내 경험을 토대로 판단했을 때 자네 병력만으로 돌파하기 어렵다고 예상하는데…… 제3항마여단에서 병력 지원이 갈 거다.
솔직히 지원 따위는 필요 없었다.
특히나 간부라면, 작전 진행 간 껄끄러움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군소리할 필요도 없었다.
- ……내일 그들과 합류해서 작전을 진행하도록 해. 어때, 괜찮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하나 확인하고 싶습니다.”
- 그래, 말해.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만, 2호 무기고에는 값비싼 무기가 많을 겁니다. 그것들이 전투 중 유실되더라도…… 저희 책임이 없는 것, 맞습니까?”
이렇게 묻는 이유는, 여러모로 꽤 많이 분실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처럼 쏟아내고 때로는 좀 맛도 좀 보고 하다 보면…….
- 물론이다. 하지만 유실과 횡령은 다르다는 걸, 병사들에게 인지시켰으면 한다
'하지만 횡령과 흡수는 또 다른데…… 음…….'
무기고 안에는 아주 질 좋은 금속들이 잔뜩 있을 터였다.
재료 아이템도 상당히 있을 텐데, 아다만트나 오리할콘이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원석이 아니라 가공되고 정제되어 훨씬 순도 높은…….
꿀꺽—
그 순간 군침이 넘어가는 걸 느끼며, 이현욱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쇳덩이를 떠올리면서 군침을 삼키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젠장, 나도 중증이다.'
***
다음 날 아침.
용산의 제3항마여단본부에서 3대의 기갑수색차량이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여단본부 공략중대원 12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강철 중대’에 합류하여 그들의 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건, 이들로서는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젠장, 그 잘난 강철 중대의 지휘관이 병사라는 게 진짜입니까?”
선두 차량, 뒷좌석에 타 있는 근육질의 남자, 김동훈 중사가 물었다.
"아니, 우리 막내가 하사 5호봉인데 참나, 병사가 중대장? 와— 어이가 없네…… 아니 병사가 괜히 병사입니까? 능력이 없어서 아무런 선택도 못 받고 남은, 잉여 인력 아닙니까?”
단순히 계급으로만 본다면, 병사밖에 없는 부대를 지원하라는 게 탐탁지 않을 만했다.
그 말에 조수석의 남자, 소대장, 고진한 대위가 피식 웃었다.
"야 김동훈, 근데 너도 병사 출신 아니냐?”
"소대장님, 저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완숙해진 상태 아닙니까?”
"그 시간이 영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 것 같은데......."
김동훈은 그 무서운 얼굴을 이리저리 구겨서 퍽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튼, 저는 솔직히 믿기 힘듭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야야, 뭐 어쩔 거야? 정부에서 공인한 웨이브의 영웅들인데, 까라면 까는 거다."
"아오! 그거 증거라도 있답니까? 그 새끼들, 장난질 치는 거 아닌지……."
"......."
“혹시 자기가 작전 지휘관이랍시고 막 하대하고 위험한 일 시키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김동훈이 계속해서 징징거리자, 고진한은 살짝 짜증이 난 듯했다.
"아, 시끄러워! 야 그럼 네가 인사할 때 기강 좀 잡던가! 기강 잡는 거 네 주특기잖아?”
"오! 그래도 됩니까? 역시 소대장님도 아닌 척하시면서 저랑 비슷한 마음 아닙니까?”
그 말에 고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약간 정곡을 찔리긴 한 것이었다.
"아니, 너랑 비슷한 건 아니고…… 병사가 나한테 명령할 거 생각하면 씁, 좀 그렇긴 하지?”
군대라는 조직의 분위기라는 게 으레 그런 법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그 ‘계급’만은 절대 법칙으로 존재한다.
특히나 병사가 간부를 지휘하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 제가 눈 마주치자마자 조인트 한 대 까고 시작하겠습니다!”
"하—제발……."
그러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울 외곽의 한 주택가였다.
"자,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이동한다.”
공략 3소대는 무기를 장비하고 골목으로 진입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 근처에 온갖 언데드가 도사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하사, 걔들 어디쯤 있는지 한 번 무전 넣어 봐.”
그때였다.
- 칙— 여기는 강철 중대, 현재 전투 중, 접근하지 말 것!
꽤 다급한 경고 메시지였다.
김동훈은 그 말마저 아니꼬웠다.
"허— 아니 썅, 지금 누가 누구한테 경고하고 접근하지 말라는 거냐?"
그리고 이내, 그 전투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아주 가까이였다.
그들은 긴장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측면의 담벼락이 으스러지며 녹색 거인이 튀어나왔다.
“젠장! 좀비 트롤이다! 전투 준비!"
놈은 무언에 밀린 건지, 뒷걸음질 치며 모든 걸 짓밟아 으스러뜨렸다.
"탱커 앞으로, 다리 묶을 빙결 마법 준비해!”
좀비 트롤이 얼마나 위험한 몬스터인지 잘 알기에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그때 , 그들의 눈에 이상한 게 포착되었다.
트롤을 향해, 사람의 몸통보다 훨씬 큰 거검이 날아들었다.
퍼——석——!
그 일격에 좀비 트롤의 머리가 잘려나가, 건너편 집의 지붕에 처박혔다.
머리 잃은 몸뚱이가 맥없이 뒤로 고꾸라졌고, 건물 하나를 으스러뜨렸다.
쿠구구구.......
집이 무너지며 뿌연 연기가 치솟았고, 트롤의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경으로 거대한 흑색 거검이, 허공에 우뚝 서 있었다.
웅——
“……저, 저게 뭡니까?”
김동훈이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짧지 않은 플레이어 생활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그때, 무너진 담벼락 쪽, 그 뿌연 연기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AMT전투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의 왼손이 거검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이 떨어지는 순간,
콱——!
거검이 추락하여 아스팔트에 박혔다.
이내 뿌연 연기가 가시며, 남자의 등 뒤, 무너진 건물 틈 사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엉망이 된 주택가, 그곳에 좀비 트롤 2마리가 도축장의 소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미친......."
그렇다. 이 주변에서만 총 3마리의 좀비 트롤이 사냥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행한 사람은, 아무리 봐도 저 남자 한 명으로 보였다.
그 광경 앞에 여단본부 3공략소대원들은, 왠지 모르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칙— 여기는 강철 중대, 전투 종료, 이제 접근해도 좋다. 이상—
“소대장님, 저분…… 어디 소속인지 아십니까? 장난 아닌 것 같은데……."
김동훈이 그렇게 속삭였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AMT 내에서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즉, 상당히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진한으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거기, 누구십니까?”
고진한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 남자는 이쪽을 돌아보더니…… 거수경례를 했다.
“아?"
고진한 옆에 서 있던 김동훈은 저도 모르게 맞경례를 했다가, 주춤거리며 팔을 내렸다.
"저는 강철 중대 지휘관, 이현욱 병장이라고 합니다.”
"아……."
"저희 작전을 지원 오신 여단본부 2공략소대, 맞습니까?”
그의 얼굴을 정면을 마주했을 때, 기강을 잡을 생각 같은 건 감히 떠올리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