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서울의 영웅들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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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폭격의 폭음이 울리는 가운데, 이현욱이 두 발로 우뚝 섰다.
빌런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대체 어떻게 그 두꺼운 밧줄을 풀어낼 수 있던 건지,
그리고 저 오크 두 마리를 꼬치처럼 꿰뚫은 저 창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숱한 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딴 걸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저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젠장, 링 선포해!”
최민성의 외침에 가죽 재킷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합장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황금색 빛이 터져 나왔고,
주변 10㎡의 공간에 사각형의 반투명한 박스를 형성했다.
웅—!
- 해당 지역에 ‘결투 역장’이 선포됩니다.
* 300초간, 외부와 ‘단절’됩니다.
"링, 선포했습니다.”
결투 역장은 일명 ‘링’이라고 불리는 격투가 계열의 스킬이었다.
일정 공간을 ‘폐쇄’하여 상대를 가둔 채 두들겨 패는 용도였다.
한편, 이현욱이 날린 아킬레우스의 창은 현재 그 공간 밖, 오크의 몸에 꽂혀 있었다.
이현욱이 그걸 잡아당겼지만,
텅—
역시나 반투명한 결투 역장에 막혀서 들어올 수 없었다.
"와…… 대체 저 창은, 씨발, 어디에서 꺼낸 거예요?”
“이현욱 씨가 너무 친절하게 능력을 알려주셔서 나름대로 쇳조각 싹 다 치우고 대비한 건데…… 그래도 비장의 한 수는 숨기고 계셨군요. 하하하…… 역시 철두철미한 분이야.”
"......."
"그런데, 저 창…… 더 못 꺼내죠? 1개가 끝이죠?”
최민성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더는 이현욱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이현욱이 다른 무언가 숨기고 있을 수 있다는 걸, 배제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이현욱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 현상을 눈치챘다.
갑옷처럼 변한 피부,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는 어떤 기운…….
언뜻 봐도 평범한 방어 스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통제 계열이라서 몸이 약하다고 제 입으로 말한 것도 설마…… 기만이었어요?”
최민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통제 계열 주제에, 4대의 1로 이 좁은 곳에서 싸우겠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빌런 넷이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납치될 때 그들의 무기는 수거되지 않은 듯했는데, 금속 무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히히히—! 상황이 더 재밌어지는데?”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정신이 나간 듯한 여자, 박지현이었다.
그녀는 제 동료 둘을 펄쩍 뛰어넘더니, 이현욱을 향해 뼈로 만들어진 단검을 내질렀다.
"죽어—!"
그 움직임이 고양잇과 동물의 사냥처럼 엄청나게 빨랐다.
그런데…….
파지지지——!
"아갸갸갸가—!”
어디선가 날아든 시퍼런 채찍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고,
그대로 추락, 땅에 머리부터 처박힌 뒤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4대 2야! 나도 있다, 이 자식들아—!”
박준모였다.
그의 양팔은 여전히 등 뒤로 묶여 있었지만,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전류가 길게 늘어져서 마치 긴 꼬리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전류 통제 센스가 날로 늘어가는 중이었다.
"젠장! 뭐해? 당장 죽여!”
최민성이 그렇게 외치며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슈슈슈슈슈——
6개의 투사체가 이현욱과 박준모를 향해 유도 미사일처럼 날아들었다.
“이—!”
박준모는 전기 채찍을 그물망처럼 넓게 펼치며 2발의 매직 미사일을 상쇄했다.
반면 이현욱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터—더—더—덩—
매직 미사일이 적중했건만, 그의 몸 주변에서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그의 온몸을 두터운 ‘마나 실드’가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오리할콘’을 흡수하여 한 층 업그레이드된 상태였다.
그때, 더벅머리 남자가 달려들며 이현욱의 머리를 향해 나무 곤봉을 치켜들었다
“씨발—어디 이것도 막아 봐!”
그 끄트머리에 검붉은 에너지가 감돌고 있었다.
‘무기 강화 스킬이다.’
저게 적용된 이상 단순한 나무 곤봉이 아니라, 무거운 메이스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현욱은 왼팔에 강체화를 집중하고 팔꿈치를 들어 올려, 그것과 맞부딪쳤다.
뻐—억—!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부러진 건, 곤봉이었다.
"자, 막았다.”
“……어?"
놈은 일순간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현욱은 언제나 그렇듯,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왼발이 놈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빠—각—
모든 금속 통제력이 실린 브라질리언킥, 그 일격에 놈의 경추가 으스러졌다.
"이런 개새끼가—!”
이현욱은 몸을 빙글 돌리며, 자신의 사각으로 파고드는 대머리 남자를 향해 ‘카운터 뒤차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파악한 듯, 놈은 뒤로 펄쩍 뛰어 빠졌다.
"후…… 격투기 좀 할 줄 아나 봐?”
놈은 이현욱의 근접 전투 실력을 알아본 듯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 가드를 올렸다.
"오랜만에 자세 좀 잡고 싸워야겠는데, 이거? 흡!”
놈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앞손—왼손 잽을 두 번 내질렀다.
이현욱이 한 걸음 물러서자, 뒷손—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그러나 이현욱은 피하지 않고,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움켜쥐듯 잡아챘다.
턱—
“……오, 잡아?”
"아니, 부술 거다."
"뭐?"
콱—!
"끄아아—!”
정말로, 남자의 주먹이 삶은 감자처럼 으깨졌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현욱의 손바닥 안에서부터 뾰족한 가시가 돋아났기 때문이었다. 이현욱은 그 상태로 손목을 크게 돌려서, 놈의 주먹을 더욱 처참하게 우그러뜨렸다.
콰지지지—!
"꺼어어……."
그렇게 정신 못 차리는 놈을 향해, 이현욱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촤—악—!
날카로운 손톱이, 목을 긋고 지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두 남자가 쓰러지기까지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아, 아……."
박준모와 대치하며 다음 마법을 준비 중이던 최준성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있었다.
짧은 싸움을 지켜보며 승산이 없다는 걸 직감한 것이었다.
그의 앞으로 이현욱이 다가갔다.
"결계 발생 오브젝트, 어디에 있어?”
"좆까, 안 말해……."
최선의 대답기 끝나기도 전에 이현욱이 놈의 목덜미를 그어버렸다.
반 박자, 아니, 한 박자는 빠른 처단이 아닐 수 없었다.
"끄으—?”
놈도 예상 밖이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불필요한 입씨름은 좋지 않다.’
그 이유는, 리더인 최준성이 ‘전원 자살 주문’을 외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런은 비밀 유지를 위하여 조직원에게 각종 '안전장치’를 걸어둔다.
앞선 다섯 도살자 때처럼, 뇌를 태워버리는 ‘잠재 주문’이 그것이었으며, 기백준이나 최준성 같은, 조직에 충성하는 리더들이 그런 주문의 발동권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놈들을 먼저 제거한다면, 그 부하들을 심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으으으......."
박준모가 기절시켰던 여자, 박지현이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이현욱은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켁!”
"정신 좀 차려봐, 너만 남았어.”
“……사, 살려줘!”
그 부탁에,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만 해준다면, 당연히 살려줄 거야.”
"그게…… 정말이야?”
천방지축 날뛰는 모습을 보아하니, 생각의 깊이가 다소 얕아 보였다.
즉, 구워삶기에 좋은 인물상이었다.
"그래, 우리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야. 불필요한 살인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이 손 좀 치워줘……."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도덕에 구애받으면, 도덕 밖의 빌런을 이길 수 없다.
잠시 후, 이현욱과 박준모는 모든 감옥 문을 뜯고 사람들을 꺼내주었다.
그 숫자가 족히 이백 명은 보였다.
"자, 모두 쉿— 침착하게 저희 말을 따라주세요.”
박준모가 그들을 인솔하여 한 곳에 모았다.
대다수가 패닉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김세희가 구조대를 이끌고 도착할 거다.’
이현욱은 사실, 15명의 병력 외에 나머지 전 병력을 근처에 대기시켜 두었으며,
그들에게 공중 폭격이 끝나면 곧장 백화점으로 들이닥치라고 명령해두었다.
이는 태산 길드를 비롯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제3의 계획이었다.
이현욱은 애초에 태산 길드와 접촉하기 전부터, 이 모든 걸 계획해두었다.
“박준모, 넌 여기에서 민간인들을 보호하며 구조대를 기다린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테러리스트들, 아직 몇 명 더 있는 거 알지? 조심해.”
자신을 태산 길드라고 밝힌 건 총 6명, 4명이 이곳에 함께 들어왔지만, 나머지 2명은 뒤에 남았다. 그리고 1명이 다른 길드인 척 위장하고 있다는 걸, 박지현을 심문하여 알아냈다.
즉 아직 처단해야 할 인물이 셋이나 남아 있었다.
"아,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결계 생성 장치를 파괴한 뒤 곧장 옥상으로 간다.”
"예! 몸조심하십시오!”
역시나 박지현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옥상 정원에 다종족 흑마법회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보스 몬스터’와 ‘침식 요인’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뚯이었다.
이현욱은 즉시 백화점 안으로 진입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옅은 햇빛 덕분에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리하여 드러난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곳곳에서 나무뿌리가 돋아나 있었으며 지구의 것이 아닌 벌레들이 기어 다녔다.
‘토굴에 들어온 것 같군,’
그때, 저 끝에서 횃불을 든 고블린 3마리가 나타났다.
끽! 끽!
놈들을 이현욱을 발견하고 울부짖더니 조잡한 화살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화살을 발사할 수는 없었다.
화살촉이 거꾸로 움직여, 제 목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이현욱은 그것들의 철제 무기를 몽땅 긁어모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놈들 이후에는 앞을 막아서는 몬스터가 없었다.
공중 폭격 이후 강철 중대의 공세가 시작되자 전부 그쪽으로 몰려간 듯했다.
‘그리 지능이 높지도 않은 데다가 여러 종족이 뒤섞여서 오합지졸이다.’
보스 몬스터—강력한 고위 흑마법사의 지배를 받고 있긴 하다만,
지능이 낮은 종족들이 같이 생활하는 만큼, 제대로 된 체계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혼란이 발생하면 이렇게 아주 개판 오 분 전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 점을 공략하는 게, 다종족 혹마법회의 레이드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이현욱은, 아주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기계실 : 관계자 외 출입금지
박지현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 ‘결계 생성 오브젝트’가 있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덩치 큰 오크 두 마리가 슬레지해머 같은 걸 들고 서 있었다.
그으으—?
결계 생성 장치를 지키는 경비병들인 모양이었다.
두 놈이 콧김을 내뿜으며 이현욱 앞을 막아섰다.
"비켜, 시간 없어.”
물론 위협이 될 리 만무했고, 이현욱은 놈들을 순식간에 때려눕힌 뒤, 내부를 수색했다.
이내 복잡하게 얽힌 배관 안쪽, 시퍼런 불빛을 내뿜는 기이한 장치를 발견했다.
웅— 웅—
‘이거다.’
사각형의 검은 기둥 위에 웬 작은 구체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내려온 붉은색 뿌리 다발이 그것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 구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흡수하여 옥상으로 보내고 있는 듯했다.
콰드드——!
이현욱은 별다른 고민 없이 뿌리를 잡아 뜯어내고, 장치를 통째로 뽑아버렸다.
쿠구구구.......
그 순간, 건물 전체가 한 차례 뒤흔들렸다.
누군가에게는 불길한 징조겠다만, 이현욱에게는 길조였다.
‘결계가 사라지는 소리다.’
- ‘혹마법 결계 술식 유지 장치’ 파괴하셨습니다.
- ‘드워프제 그레이트마운틴 엔진(전설)’을 획득하셨습니다.
파괴 메시지와 획득 메시지가 동시에 떴다.
그런데…… 그 아이템이 무려 ‘전설’ 등급이었다.
"흠, 그나저나 이걸 여기서 얻을 줄은 진짜 몰랐는데……."
이현욱은 ‘드워프제 그레이트마운틴 엔진’이라는 이름의 구체를 자세히 살폈다.
수많은 ‘결계 생성 오브젝트’를 파괴해 봤지만, 대다수가 '마나 수정’ 형태였다.
즉 마나 스톤처럼 마나가 정제된 일종의 배터리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건 ‘마법공학’으로 설계되고 제작된, 아주 섬세한 기계장치였다.
그것도 고작 결계 따위를 유지하는 데 쓰기에는 아까운 ‘무한 동력 장치’였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센티널>이 이런 걸 달고 날아다녔었지, 아마?’
하늘의 항공모함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비공정 게이트센티널,
그 거대한 괴물이 이런 엔진을 3개나 달고 대륙 사이를 날아다녔다.
어디선가 듣기로는 사실상 핵발전소 급의 동력원이라고 했던가…….
이현욱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것에 금속 통제력을 부여했다.
그러자,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금속이다. 그렇다면…… 흡수할 수 있는 건가?’
지름 5cm 정도, 어떻게 입을 크게 벌리면 한 입 거리이긴 하겠다만…….
핵발전소 수준의 동력원을 삼킨다는 건 왠지 좀 꺼림칙했다.
어쨌든, 삼키려고 했을 때 빨려 들어가듯 삼켜지면 흡수 가능한 물건이었고,
경고 메시지가 뜨면 흡수 불가능한 물건이었기에,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이현욱은 눈 질끔 감고, 그것을 입에 넣었다.
꿀꺽—
됐다, 빨려 들어갔다.
- 금속 홉수까지 (알 수 없는 시간) 남았습니다.
‘알 수 없는 시간…….'
이런 메시지를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이현욱은 그때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뭐가 나올진 몰라도, 좀 무서운 게 나올 것 같은데.......'
괜스레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이현욱은 위층, 옥상으로 향했다.
***
한편, 백화점이 내려다보이는 20층짜리 아파트의 옥상,
그곳에는 최태용 일병을 포함한 14명의 사수 플레이어들이 대기 중이었다.
"어라, 저기 저거 누구예요? 우리 쪽 사람들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3대의 K-1 53기갑수색차량과 7대의 군용트럭, 강철 중대였다.
이현욱이 따로 빼놓았던 그 후속 병력이 백화점으로 진입 중이었는데, 이에 관해 단 한마디도 들은 적 없는 플레이어들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AMT, 저거 당신들 부대 아니에요?”
"아…… 예, 맞습니다.”
한 플레이어의 물음에, 최태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곳곳에서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한테는 아무런 언급도 안 했잖아요!”
"방금 그 공중 폭격도 그렇고, 왜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속입니까?”
"강철 중대, 강철 중대, 대단하다고 소문나서, 우리는 그냥 깍두기 삼겠다는 겁니까?"
최태용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건 아니고…… 저도 잘…… 제 지휘관이 나중에 설명해주실 텐데……."
그때, 그들이 원망 어린 시선을 돌릴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어…… 모두 저기 좀 보세요!”
백화점을 감싸고 있던 보라색 일렁임이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됐다! 결계가 열렸다!”
사수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며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작전대로 ‘저격’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집중할 시간이었다.
"좋아, 이제 저 새끼들한테 한바탕 퍼부어줍시다!"
그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사격 준비를 마쳤을 무렵, 백화점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원래 옥상 정원이 있었을 공간에, 거대하고 기괴한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들이 곳곳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씨발, 더럽게도 많네……."
족히 이백 마리를 될 듯했고 그사이에 5m짜리 거인, 트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정중앙에 쌓여 있는 웬 검은색 돌무더기였다.
그건 흑마법사들이 악신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종의 ‘제단’인 듯했는데…….
"저, 저게 뭐야?”
꿀럭— 꿀럭—
그 위에서, 웬 시뻘건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피니, 피막과 핏줄이 뒤엉킨 모습으로, 마치 태반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게 얼핏 보였다.
"저거 딱 봐도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요?”
"뭔가…… 곧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숱한 레이드를 경험한 플레이어들은 직감했다.
저런 현상은 보통, 무시무시한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기 직전임을 의미함을.......
그런데 불길한 징조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태반에서 뻗어 나온 웬 ‘촉수’ 같은 게 꿈틀거리며 무언가를 빨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벌거벗겨진 사람이었다.
"헉!”
그 사람들은 지금 ‘제물’로 바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체액을 빨아 먹혀 죽은 사람의 사체가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었는데.......
족히 백 명이 넘을 것 같았다.
"이런 시발……."
플레이어들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진한 울분을 느꼈다.
"젠장, 저격이고 나발이고, 지금이라도 당장 쳐들어가서 그냥 싹 쓸어버립시다!”
문제는 분노와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는 점이었다.
그 누구도 다음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 저 사람…… 뭐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단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
이현욱이 옥상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마법 드론 한 대가 스쳐 지나가며,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턱—
군용 배낭이었다.
그 안에는 이현욱의 무장과 마나 메신저가 들어 있었다.
그는 손짓 한 번으로 무기 꺼내어 장비하고, 마나 메신저를 켰다.
우어어어—!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십여 마리의 몬스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아, 여기는 강철 중대장이다.”
- 칙— 잘 들린다.
"마법사들, 작전대로 준비되었나?”
- 칙— 준비 완료,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태산 길드와 조우하기 전부터 준비해온 비밀 작전, 이제 그 마지막 단계였다.
우어어어—!
이현욱은 몬스터 무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백화점 건물,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지휘 차량’을 감지했고,
그 위에 얹힌 묵직한 한 자루의 거검, 모글레이—그것을 끌어당겼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몬스터들이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콰—앙!
모글레이가 내리박히며 뿌연 연기가 치솟았고, 몬스터들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이현욱은 왼손으로 모글레이의 자루를 움켜쥔 채, 오른손으로 마나 메신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강철 중대에 단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하늘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