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동대문역, 침식 요인, 거대한 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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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은 성소 사무실을 적당히 어질렀다.
마치 몸싸움이 있던 것처럼 연출한 것이었다.
직후, 무전을 해서 안민태와 김세희를 호출했다.
“이, 이게 무슨……."
그들은 성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성소 관리자가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현욱 병장님,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현욱은 미리 준비해둔 시나리오를 읊었다.
이 남자가 대접한 커피를 우연히도 신성력이 담긴 쇠 구슬에 쏟자, 검은 연기가 치솟았으며, 이에 의심을 표하자 남자가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즉시 사살했다.
두 사람은 의심 없이 그 말을 믿는 듯했는데…….
“아니!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예요?”
김세희가 버럭 화를 냈다.
"예?”
"왜 여기 혼자 앉아 있어요? 저한테는 아까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하……”
"웃음이 나와요? 지휘관이 이런 곳에서 잘못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사실 다 계획하고 움직였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 질타에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그런데 이거 혹시…… 우리 부대를 공격한 테러리스트와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안민태의 말처럼, 이들은 출발 전부터 몬스터 외 ‘테러리스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이현욱은 대답 대신 웬 검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건, 일대의 지옥 태생을 끌어들이는 아이템 ‘악마의 경종’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몬스터를 조종해서 쉘터의 피난민을 학살하려고 했어.”
“미친……."
현재 이 쉘터에는 3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모여 있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 이 사실, 아직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예,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게 알려지면 진짜 난리가 날 겁니다.”
"맞아,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어.”
이현욱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이 이상한 커피를 마신 사람이 이미 꽤 많을 거야.”
그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헉! 그러면, 갑자기 누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무슨 독인진 몰라도 누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네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자—”
이현욱은 캐비닛에서 갈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그걸 손에 쥐는 순간, 눈앞에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 야수화 물약 3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제조 아이템)
즉, 저 커피를 마신 이는 야수화(野默化)하여 ‘웨어울프’로 변하게 된다.
"그 증상이 여기 친절하게 쓰여 있지만, 문제는 누가 이걸 마셨는지 알 수 없다는 거지.”
이에 김세희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마침…… 이런 ‘저주’를 분석하는 스킬이 있는 애가 한 명 있어요.”
김세희는 2중대 소속 프리스트, 최유진 상병을 호출했고, 그녀가 급히 달려왔다.
"유진아, 쉘터의 사람 중 누가 이 물약을 마셨는지 알아낼 수 있겠어?”
김세희의 물음에 최유진은 야수화 물약을 살피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렇긴 한데, 한 명 한 명 제 ‘스캔 스킬’을 활용해서 검사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3천 명이 넘는 사람을 검사하는 건 무리지 않겠습니까?”
하긴, 사람들한테 이 끔찍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는 전수 조사는 힘들 터였다.
애초에 사실을 알릴 수 있다면, 커피를 마신 사람만 따로 나오라고 하면 끝날 문제였다.
"그러면, 그 몬스터 변하는 그거, 언제쯤 시작될 것 같아?”
"그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저주가 발현되려면 주문자가 주문을 외워야 하는데…… 주문자가 이렇게 죽어버렸으니, 그 마법이 당장 발현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면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다는 거지?”
"주문자가 설정한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 당장은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이현욱이 상황을 정리했다.
“좋습니다. 이 사실은 일단 묻어두고…… 안민태, 경비대장이랑 이정준 씨 모셔와.”
“예? 어? 그 사람들한텐 지금 이 장면, 보여줘도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어. 상황을 통제하긴 위해선 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이 쉘터 안에는 강철 중대 외에도 몇 개의 플레이어 세력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역 경비대와 이정준 일행은 강철 중대에게 우호적인 집단이었다.
쉘터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내 경비대장과 이정준이 성소에 도착했고, 이현욱은 그들에게 현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말도 안 돼…… 대체, 그 사람이 왜……."
공현준의 시체를 바라보는 경비대장은 눈이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당혹스러운 한편, 속이 매슥거리는 참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그가 말하길, 자신을 비롯한 부하 몇 명이 바로 오늘 아침, 저 커피를 대접받아 마셨다고 했다.
즉, 그들 역시 언제든지 ‘야수화’될 수 있는 상태였다.
“……이해가 안 갑니다. 겉으로 볼 땐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속아서 당할 뻔했죠.”
이현욱은 공현준의 서랍 안에서 비밀 노트를 꺼내어 펼쳤다.
“이게 이 사람의 실체입니다. 비윤리적인 연구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미친……."
비밀 노트의 내용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개나 고양이를 해부하고 토막 낸 사진들이 한가득 부착되어 있었다. 심지어 다른 노트에는 노숙자를 유인하여 실험한 내용도 있었는데, 그건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이건 ‘흑마법’과 관련된 생체 실험 일지였다.
"세상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웨이브라는 무법 상황은, 숨기고 있던 욕망을 드러낼 기회였을 겁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아……."
실제로, 웨이브가 열린 지역의 ‘희생자 유형’을 분석한 결과, 플레이어 간의 살해 행위가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통계가 존재했다.
즉, 무법 지대가 되는 순간 평범한 시민으로 보였던 누군가가 강도로 돌변하여 다른 이의 재산과 목숨을 노렸다는 뜻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믿음은 방심이 된다.
"그리고 팀장님, 정준 씨, 두 분께 제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우리 부대는 지하로 내려가서 몬스터를 토벌할 겁니다.”
“……예?”
"앞서 말씀드렸듯 저희의 임무는 ‘침식 요인’ 수색이고 그건 필연적으로 몬스터가 많은 곳에 존재합니다. 지하에는 아주 많은 몬스터가 있을 테니, 확인해봐야만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지상과 지하는 차원이 다른 환경일 텐데요……."
이현욱의 선언에 경비대장은 회의를 숨기지 않았다.
이들 역시도 AMT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정준이 이현욱을 지지하고 나섰다.
“제가 봤습니다. 이분들 진짜 장난 아닙니다.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면 큰코다칩니다.”
"음......."
"진짜입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음......."
이정준의 강조에도 경비대장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이정준이라는 남자 역시 누군가를 보증할 만큼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에 이현욱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희가 지하로 내려가면, 통로의 마법 방어막을 다시 작동하세요. 그리고 저희가 전멸할 위기에 처하더라도 절대 열지 마시고요. 그렇게만 한다면 쉘터 안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겁니다.”
“어, 그건 좀……."
“부탁드립니다.”
경비대장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알겠습니다. 부디, 그게 옳은 선택이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정준의 표정은 경비대장과 완전 정반대였다.
그는 굳은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이현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하지만, 저희도 돕겠습니다.”
이정준 일행은 총 18명이었다.
이현욱을 포함한 강철 중대가 40명이었으니, 비교하여 절대 적지 않은 전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손을 뿌리치는 건 바보짓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예? 무슨……."
이현욱은 싱긋 웃었다.
"예, 레벨을, 아주 빠르게 올릴 기회일 겁니다.”
***
불이 꺼진 지하철 플랫폼, 그곳은 한 치 앞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듬성듬성 설치된 비상등만이 옅은 녹색 빛을 발하여, 마치 깊은 석회 동굴 같은 스산함이 감돌았다.
그곳에…….
대—앵——
저택의 괘종시계 같기도 하고, 산사의 동종 같기도 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작됐다.”
플랫폼 중앙에 설치해둔 ‘악마의 경종’이 작동한 것이었다.
대—앵——
그 무겁고 낮은 울림이 터널 안,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자.
찌지지지지지——!
어둠 속에서부터 요란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
바닥을 울리는 진동, 지하철이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거대함이 몰려온다.
AMT 병력은 지하 플랫폼과 1층 역사를 연결하는 넓은 계단에 도열하여, 그 괴현상을 몸소 느꼈다. 그들의 시선은 터널 부근에 향해 있었지만, 어둠을 꿰뚫어 볼 순 없었다.
유일한 감각은 소리였다.
어느새 울음소리와 진동이 목전으로 다가왔고…….
쿵—구—구—궁—!
그곳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붉은 조명탄이 선로 위로 떨어지며 어둠을 밀어냈다.
팟—!
그리하여, 그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터널을 빠져나온 헬 레트 떼가 선로 위에서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서로를 짓밟고, 할퀴고, 뒤엉키며 미리 열어둔 스크린도어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찍—찍—찍—찍—!
역겨웠다. 짐승 떼가 아니라 끈적한 액체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지하철을 가득 채웠다.
다행히도 AMT 병력 전원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그 악취에 노출되지 않았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계단에 우뚝 서서, 오직 이현욱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대기한다.”
찍지지지지지—!
헬 레트 떼가 악마의 경종 근처에 뒤엉키며 넘실거렸다.
몇 마리인 분간할 수 없었다.
적어도 수백, 아니, 천 마리가 넘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지금이야!”
이현욱의 외침이 플랫폼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5발의 빙결 마법이 쏘아져 나가, 쥐들이 들어온 터널 입구에서 터졌고, 일순간 수십 센티 두께의 얼음벽이 형성되어, 그 거대한 구멍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저것들은 이제 도망칠 수 없다! 전진해!”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 떼’였다.
척—척—척—척—
강철 중대는 단단한 대형을 이룬 채 계단을 내려가, 놈들을 향해 나아갔다.
“2열, 화염구 발사!”
2중대 선임 마법사, 손혜민 상병이 그렇게 외치자 탱커 바로 뒤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화염 마법을 시전함과 동시에 뒤로 빠졌고, 3열이 앞으로 나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마치 ‘전열보병’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콰—과—과—과—광—!
헬 레트 떼거리의 중심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찌이이이!
단숨에 수십 마리가 불타오르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스프링클러를 미리 잠가 두었기에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제발, 한 번만 눈 딱 감고, 입 다물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자, 좀!”
대열 중심에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건 김세희였다.
그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쌍욕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러자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단검 끝에서 피어났다.
“하― 고맙다, 고마워!”
정령은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는데,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김세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김세희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싶었다.
“그래…… 후— 일단, 행차해주셨으니까, 네 할 일은 해줄 거지? 응?”
바람의 정령은 관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춤을 추듯 허공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치솟고 있던 불길을 자극하여 마치 파도처럼 일으켜내더니, 헬 레트 무리를 집어 삼켜버렸다.
퍼—흐—!
불과 바람, 이 역시도 단순하지만 확실한 시너지 효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쓸어버려도, 이 역겨운 쥐 떼는 여전히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무는 법…….
찍—! 찍—!
그것들이, 강철 중대의 방패 대열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 옵니다!”
일렬로 선 탱커들이 방패를 다닥다닥 붙인 채, 쥐 떼와 충돌했다.
큰 개만 한 쥐들이 방패 위로 몸을 날리며, 날카로운 이와 발톱을 드러냈다.
쾅—!
"버텨! 절대 밀리지 마!”
그때, 방패를 공격하는 헬 레트를 향해 웬 시퍼런 채찍이 날아들었다.
파지지지——!
그 한 방에 헬 레트 4마리가 일시에 감전되며 나동그라졌다.
그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박준모였고, 그건 전류 채찍이었다.
이현욱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박준모…… 능력을 점점 제대로 활용한다.’
박준모의 능력은 ‘마법’이 아니라 일정량의 전류를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단순히 전기를 쏘아 보내는 걸 넘어서 ‘일정한형태’를 유지하며 근접무기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직 많은 양의 전류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슬슬 상당한 효율을 뽑아내는군.’
전류 채찍은 서서히 방전되어 십여 초 뒤 사라지고 말았지만, 고작해야 5번의 투사체를 날리는 것에 불과했던 과거의 방식보다는 휠씬 효율적이며 실로 비약적인 전투력 상승이었다.
이현욱은 이 녀석의 잠재력을 다시금 확인했다.
"좋아! 놈들이 서서히 녹는다! 한 걸음 전진!”
안민태가 그렇게 소리치자, 탱커들이 합을 맞추며 앞으로 조금씩 전진했다.
그럴 때마다 앞에 쌓인 헬 레트의 시체가 밟히고 으스러지며 핏물이 발목을 적셨다.
철퍽— 철퍽—
그렇게 밀고 들어가자, 헬 레트 떼는 본능적으로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그럭— 절그럭—
이미 반대쪽에도 병력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리빙 아머, 그것들이 2열로 길목을 틀어막고 거대한 망치와 도끼를 휘둘렀다.
퍼—억—!
헬 레트가 달라붙어 발톱을 휘둘러댔지만, 갑옷의 표면에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이다.’
이현욱의 손짓에, 리빙 아머, 그 텅 빈 갑옷 안에 숨겨 놓았던 쇠 구슬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바닥을 굴러, 헬 레트 떼거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본디 헬 레트의 털은 상당히 두껍고 많은 편이라서, 쇳조각으로는 데미지를 주기 힘들다.’
마치 섬유 계열 방탄복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 털이 불에 그을려 죄다 타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현욱은 그 순간을, 바로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쇄—!’
퍼—버—버—버—벅—!
마치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수십 마리의 헬 레트가 갈기갈기 찢겼다.
“놈들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저건 몬스터가 아니라, 경험치일 뿐이다!”
그렇게, 일방적인 포위 섬멸전이 시작되었다.
천 마리가 넘는 괴물 쥐 떼거리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한채 온갖 공격에 휩쓸리며, 터지고—찢기고—불타고—갈리며 한낱 곤죽이 되어 플랫폼 위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잔혹한 장면이었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약 10분이 지났고.......
후우우우우——
동대문역 1호선의 플랫폼엔 어느새 자욱한 연기와 고약한 악취만이 감돌고 있었다.
“……끄,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숨 막히는 싸움, 아니, 학살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엄청난 효율의 레벨 업 타임이기도 했다.
이정준과 그 동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너도 레벨 업 했냐?”
"응, 나는 2레벨이나 올랐는데? 대박이다.”
"오.......”
안도, 감탄, 경이 등이 뒤섞인 오묘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로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한편 대대원들 사이에서는 ‘이현욱 코인’이라고 불리던 게 다시금 증명된 순간이었다.
"역시, 이현욱 병장님한테 붙으면 엄청 빨리 성장한다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아니, 소문으로 듣던 것 그 이상이다. 미쳤어, 그냥……."
그렇게, 다른 이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안민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었기에, 선지자가 된 양 이제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 축하합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LV. 30)
"허허……."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이 시스템 메시지처럼, 어느덧 30레벨에 이르렸다.
2분대장 오상국의 레벨이 31인 걸 생각하면, 비약적인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곧 된다. C등급—!’
플레이어가 우대받는 세상일지라도 F~D등급을 솔직히 찬밥 신세였다.
티어가 존재하는 C등급부터가 사실상 진짜 플레이어 대접을 받았다.
그 단계가 머지않았다는 걸, 안민태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 축하합니다!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여 해당 ‘파티’에 <신성한 가호> 부여됩니다!
"어? 안민태 상병님, 혹시 이거 보이십니까?”
"그러게, 신성한 가호…… 이게 뭐냐?”
모두의 눈에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벤트 버프다.’
웨이브는 이 게임에서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평시와 다른 다양한 요소가 존재했으며 ‘버프’도 그중 하나였는데, 수차례 전투로 괜찮은 성과를 거두며, 히든 버프 발동 조건을 만족한 듯했다.
‘이건 절대 작지 않은 버프다. 전력이 대폭 상승했다.’
신성한 가호, 신성 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신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버프였다.
어둠 계열의 몬스터가 주로 등장하는 이번 웨이브 특성상, 엄청난 이점이 아닐 수 없다.
웨이브라는 고래를 잘근잘근 씹어먹을 이빨이 하나 더 돋아난 셈이었다.
"일단, 현장을 정리한다.”
이현욱은 화재 진압을 지시하고, 자루를 가져와서 ‘마나 스톤’을 회수했다.
마나 스톤이 어찌나 많은지, 5개의 자루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와……."
"이거 무슨, 아까 좀비 떼 잡았을 때보다 훨씬 많습니다.”
모두가 감탄해 마지 않았다.
AMT 병사로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보상은 따로 있다.’
저 터널 안의 어둠 속, 보스 몬스터가 지키고 있을 물건들…….
그것들은 이런 잡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득템이었다.
현장 정리가 진행되는 사이, 이현욱은 안민태, 김세희, 이정준을 불렀다.
“이제부터 우리는 터널 안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그 말에, 그들 모두가 터널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저 안은 생각 이상으로 좁아서 전 병력이 들어가는 건 악수가 될 겁니다. 우왕좌왕하다가 뒤엉킬 수 있죠. 그래서, 제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진입할 겁니다.”
이현욱은 김세희를 바라보았다.
"저와 안민태 상병이 한 소대를 데리고 들어갈 테니 김세희 병장과 이정준 씨는 뒤에 대기해주세요. 만약 저희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때 바로 지원 와주시면 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민태, 우리는 15명만 추려서 데려간다.”
"예, 제가 뽑아놓겠습니다.”
이제, 저 터널 안의 어둠을 헤집고 들어가, 첫 번째 ‘침식 요인’을 제거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는다.’
이현욱이 전생에 애용했던 애검(愛劍),
거대한 검이라고 불리는 전설 속의 대검,
'모글레이(Morglay)’를 되찾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