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동대문역, 침식 요인, 거대한 검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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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는 ‘웨이브’라는 현상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상에선 일종의 ‘이벤트’일 뿐이었다.
- 보물 상자(이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맵’ 곳곳에 이런 행운의 기회가 존재했다.
‘마침 이곳에 상자가 있다니, 운이 좋다.’
물론, 이런 이벤트 상자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찾기 쉬운 건 절대 아니지만, 서울 곳곳에 여러 개가 존재하며,
때마침 여기에 한 개가 자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다행히 이 주변에는 보는 눈이 없었다. 이현욱은 즉시 보관함을 열었다.
철컹-
그 안에는 2개의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은색 반지와 금색 카드였다.
우선, 반지부터 집어 들었다.
- 마나 탱크(2단계)를 획득했습니다.
‘괜찮군.’
지난번에 허영태로부터 얻었던 마나 탱크는 3등급이었다.
그것만 해도 10억을 호가하는 값비싼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2등급이다.
어도 6배는 더 비싼 놈이다.’
그러니까 이 작은 반지가 60~70억짜리란 소리였다.
물론 그 효과는, 3등급과 비교하여 50% 정도 높을 테지만, 그 50% 차이가 전투 시에는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체감해본 사람은 알 터였다.
이현욱은 나머지 하나, 금색 카드를 꺼내 들었다.
- 특성 개화(특수)를 획득했습니다.
*획득과 동시에 귀속되는 아이템입니다.
‘이건…… 대박이다.’
앞선 마나 탱크는 사실상 서비스에 불과해 보일 정도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이었다.
특성의 ‘개화(開化)’란 쉽게 말해서 ‘스킬’이 새로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레벨 성장 플레이어〉는 5레벨 상승할 때마다, <레벨 외 성장 플레이어〉는 능력이 일정량 상승할 때마다 혹은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마다 무작위의 ‘특성 개화’가 이루어진다.
즉, 플레이어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스킬을 얻을 기회는 감소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무런 대가 없이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 ‘특성 개화(특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이현욱은 Y를 선택했다.
- 축하합니다! 행운의 기회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정보]
- 이름 : 금속 변형
- 등급 : D
- 효과 : 마나를 소모하여 통제하는 금속의 형태를 ‘변형’합니다.
* 스킬 적용 대상의 양에 따라서 소모 마나가 달라집니다.
‘금속 변형, 말 그대로 금속을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스킬이다.’
이현욱은 쇠 구슬을 하나 꺼내 들어 금속 변형을 시도했다.
우극— 우극—
쇠 구슬이 오그라들 듯 짓눌리더니, 넓적하게 펴지고 이내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다.
이는 심지어 ‘강체화’된 신체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현욱은 왼손에 강체화를 거는 동시에 금속 변형을 시도했다.
쩌저저저---
손등과 손가락 위로 비늘처럼 단단하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렇듯 일반적인 강체화처럼 보였으나, 이내 조금씩 길쭉해지고 날카로워지더니 마치 표범의 발톱처럼 돋아났다.
시-익-!
이 손톱을 휘두를 때, 손톱에다가 무게를 싣는다면 생각 이상으로 강력할 터,
무기가 없는 비상 상황 시 호신용으로, 혹은 적을 기습하기에도 좋을 듯했다.
‘당장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활용도가 상당한 스킬이다.’
금속의 모양을 마치 지점토처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건, 활용도가 아주 높을 수밖에 없었다. 가령, 거대한 철근을 체인처럼 만들어서 오우거를 묶어 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이현욱이 한 단계 성장하는 사이, AMT 병사들은 역내 점검을 마쳤고,
2소대장 임무를 맡은 안민태가 대표로 와서 보고했다.
"식별되는 문제점은 없습니다. 방어막도 풀 충전 상태로 제 기능 중입니다. 아, 그리고 수색 간에 야간에, 불침번 세워서 경계할 지점을 미리 확인해두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대 내에서 별 볼 일 없는 들러리 중 하나일 뿐이었던 안민태였지만, 이제는 알아서 척척 일을 처리한다. 여러모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재로 성장 중이었다.
"그래, 밤이라서 이동할 수 없지만, 마법 드론 띄워서 일대의 몬스터 위치 확인하고 날이 밝기 전에 쉘터를 뜰 준비를 마친다. 내일은 오늘보다 2배는 더 길 테니, 쭉 쉬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김세희 병장은 어디 갔어?”
"어, 아까, 저기 개찰구 쪽에 있으셨는데……."
이현욱 김세희를 찾아 나섰다. 그녀에게 줄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찰구 근처, 한적한 곳, 그곳에서 김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거 한 번 불러냈다고 지랄이야, 지랄은! 진짜!”
그런데 무슨 일인지 다소 격양되어, 누군가에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이현욱이 코너를 돌아나가 김세희와 마주 보는 순간—
쉭—!
그녀의 얼굴 앞에 떠 있던 무언가가,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사역하는 바람의 정령인 듯했다.
"김 병장, 어…… 누구랑 얘기해요?”
"아……."
김세희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정령이랑 싸우고 있던 모양인데…….'
정령술사의 힘은 ‘정령 친화력’ 혹은 ‘정령 지배력’에서 비롯된다.
정령과 교감하여 힘을 빌리거나, 아니면 압박하여 강제로 힘을 끌어내거나— 그 두 가지 수치 높을수록 보다 높은 등급의 정령을 더욱 많이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령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도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이때의 김세희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령이랑 욕하고 싸운다니, 생각보다 더 막장이잖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앞서, 바람의 정령의 힘을 빌려서, 순식간에 쇄도하여 공익태 부하들의 뒤를 잡았던 모습만 봐도 그녀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정령과 화해만 한다면, 능력이 대폭 향상할 것이었다.
"큼, 무슨 일이세요?”
김세희가 뻘쭘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이렇게 혼자 따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하다는 거, 모르는 거 아니죠?”
"아, 뭐, 예……."
"그래서 잡으러 온 건 아니고, 줄 게 있어서요.”
이현욱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녹색 빛깔이 도는 작은 돌이었다.
"정령의 돌입니다. 이럴 때 일일이 부대에 보고할 필요는 없겠죠. 김 병장이 쓰세요.”
김세희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지만 난처한, 그러면서 그런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한,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입 모양에서 다 티가 났다.
방금까지 그 정령과 욕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정령을 위한 선물을 얻다니…… 이걸 사용하라면 정령에게 직접 전해줘야 하는데, 그건 영 껄끄러운데…… 그런 생각 중이었다.
"아, 고,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정령술사라는 건 어떻게 아셨죠?”
평소에 쌍수 단도를 사용하는 그녀의 진짜 특성을 알아보는 이는 드물었다.
"김세희 병장이야, 우리 중대에서도 유명하죠.”
"흠, 그다지 그쪽으로는…… 아무튼, 고마워요.”
이현욱은 돌아서며, 말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런데…… 싸우지 말고 잘 지내봐요, 좀.”
"뭐, 뭐, 뭐가…… 작전 때 빼고는 차, 참견하지 마시죠?”
김세희는 붉어진 얼굴 위로 짜증을 한가득 담아내며 이를 드러냈다.
하긴, 역시 제 정령이랑도 욕하고 싸우는 여자인데,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닐 터였다.
이내 밤이 내렸고, 이현욱은 중대 전체에 경계 및 휴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중대원들은 하나 같이 초조한 표정이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서울 침식까지 4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강박감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않을 거다. 이 안에서, 일이 터질 테니…….'
이현욱은 지금, 역 경비대장과 마주 보고 이야기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하철 선로를 통해서 몬스터가 들어왔었다는 말씀이죠?”
이현욱의 물음에 경비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쥐 형태의 몬스터였습니다. 물론 평범한 쥐는 아니고 개만큼 컸죠.”
초반에, 지하철 선로를 통하여 몬스터가 침입하는 걸 막아냈다고 했다.
다행히 그때는 몇 마리가 안 되었기에, 작은 소동에 그칠 수 있었다만…….
‘다음에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검은 파도처럼 밀고 들어와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식인 쥐 떼, 헬 레트(Hell Rat) 지금쯤이면 감당하기 힘든 만큼 많은 숫자가 저 아래에 득실거리고 있을 터였다.
"뭐, 그 뒤로 그쪽은 단단히 막아 놨습니다. 아마 절대로 못 뚫고 들어올 겁니다.”
"예, 그렇겠죠.”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마법 방어막이 사라지고, 쥐 떼가 쉘터 안으로 검은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그렇게, 수천 명이 산채로 쥐 떼에게 잡아 먹히고 만다.
그 이유 역시나…… 쉘터 안에 배반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배교자.......'
배교자 공현준, 본디 프리스트 계열의 플레이어였지만, 반대급부인 ‘어둠의 힘’을 탐하기 시작하더니, 플레이어를 납치하여 생체 실험을 자행하기에 이르렸던, 미친놈이었다.
놈은 빌런이 된 후, 고든 프라이스의 지원을 받아 마음껏 제 연구를 펼친다.
그리고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이들을 모아서 ‘매드 사이언티스트’ 집단을 세우는데…….
‘빌런 중에서도 특히나 악독한 놈들이었다.’
놈들은, 베이징에 독 안개를 살포하여 단 하루 만에 무려 400만 명을 학살하는, 역사상 유례 없는 테러를 저지른다.
‘심지어 그 학살을 저지른 이유는, 네크로맨서에게 시체를 공급해주기 위함이었다.’
네크로맨서는 그 시체를 바탕으로 언데드 군단을 일으켜, 한반도로 진군했다.
바로 그때, 최정철 장군이 전술 핵폭탄급의 활약을 하여 1차 침공을 겨우 막아낸다.
어쨌든, 지금 공현준 그놈이 바로 이 장소에 있었고…….
‘저기 있군.’
이현욱은 방금, 놈의 위치를 식별했다.
왜냐하면, 놈이 이현욱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15분 전—
동대문역 지하 1층, 쉘터 입구 부근에는 ‘공공 성소’라는 공간이 있었다.
성소(聖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으로, 성물(聖物) 오브젝트 아이템을 일정량 이상 배치할 경우 일정 지역 내에 ‘성역(聖域) 버프’가 제공되는 방식이었다.
그 버프의 효과는 아주 다양했는데, 대표적으로 상태 이상 회복력이 대폭 상승하며, 프리스트의 신성력도 몇 배로 상승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즉, 이곳은 다 죽어가는 플레이어도 살릴 수 있는, 일종의 응급실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안쪽 사무실…… 이상하게도 성물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성소 관리인, 공현준, 그는 지금 어딘가로 ‘마나 통신’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예, 접 니다.”
- 그래, AMT 병력이 그쪽, 쉘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사실인가?
이 목소리는 기백준이었다.
"예, 맞습니다. 한…… 오십 좀 안 되는 숫자였습니다.”
- 혹시, 서은하, 그 여자도 거기에 있나?
그의 목소리에는 아주 옅은 짜증이 담겨 있었다.
다섯 도살자, 그들이 일시에 당했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 한 일이었는데, 일말의 가능성이라면…… 바로 서은하였다.
신성기사단의 둘째 딸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흠…… 아뇨, 군복 입고 키 큰 여자 중에서 갑옷 입은 여자는 없었네요. 하도 훑고 다니다 보니까 이상한 놈으로 찍혔습니다. 아 뭐, 이상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요. 하하!”
- 쯧— 어쨌든, 단 한 놈도 살려서 내보내선 안 돼.
"예, 여기 들어온 이상 절대로 살아서 못 나갑니다. 아주 제대로 준비해뒀습니다.”
그는 낄낄 웃으며 돌아서서, 구석의 캐비닛을 열었다.
철컥—
그 안에 온갖 가지각색의 플라스크와 페트병이 들어 있었다.
공현준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옅은 갈색의 액체, 그걸 커피포트에 따랐다.
"예, 제가 이미 이 안에 있는 역 경비원 16명에게 차를 대접한다고 속이고 야수화 물약을 먹였습니다. 주문만 시동하면, 그것들이 짐승이 되어서 민간인들을 찢을 겁니다.”
- .......
"으흐흐,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오늘 밤, 쉘터에 마비 독가스를 살포한 다음……."
그는 캐비닛 구석에 있는 웬 검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지하의 쥐 떼를 불러들이는 이 경종을 울리면,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이 두 눈을 뜬 채로 눈알과 내장이 갉아 먹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참 재밌지 않습니까?”
- 그래, 너는 언제나 철저하게, 계획대로 행동한다는 거 잘 안다.
"물론이죠. 이번에도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 이번 일만 잘 되면 상당한 연구 지원금이 지원되는 건 당연하고…… ‘체어맨’께 널 소개하겠다.
"예! 감사합니다! 곧 뵙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순간, 마나 메신저가 저절로 꺼졌다.
때마침 마나 배터리가 완전히 소모된 듯했다.
그 커피포트를 끓이며,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히든 퀘스트]
- 어울리지 않는 빛을 벗고 어둠을 두르게 될지니…….
1) 생체 실험 : 야수화 실험 성공 30회 (17/30)
2)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시오. (진행 중)
3) 지하에 움트고 있는 ‘헬 레트’ 무리에게 양분을 공급하여 3만 마리를 양성하시오. (진행 중)
* 보상 : 저자를 알 수 없는 어둠 마법서 - 3
그는 그 메시지를 훑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계획대로, 이 퀘스트는 오늘 밤 성공될 예정이었다.
"자, 18번째 실험 대상을 찾으러 가볼까?”
그는 하얀 가운을 걸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성소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시시때때로 AMT 병사들을 훑었다.
그러다가, 어딘가 사뭇 달라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등 뒤에 2개의 검을 장비한 남자가, 경비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저 남자가 바로 AMT의 리더다!’
그는 기발한 생각이 들어서 큭큭, 웃었다.
'저 남자가 대응 명령을 내리는 순간, 딱 웨어 울프로 만들어버리면…… 재밌겠는데?’
그리고 오늘 밤의 거사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리더부터 처리하는 게 훨씬 편리할 터였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숨기고 푸근한 미소를 피워낸 뒤, 저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가 혼자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남자의 이름은 이현욱, 계급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공현준을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공현준은 이런 인간들에게 대화를 끌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이번 웨이브 언데드가 주요 몬스터라던데, 사실인가요?”
“……아, 예, 맞습니다.”
"이런, 대응하시기가 영 힘드셨겠습니다.”
먼저 그가 가장 신경 쓰고 있을 문제를 꺼내어, 대화의 물꼬를 튼다.
"아무래도 예, 그렇죠.”
"저는 동대문역 성소 관리인, 그러니까 프리스트입니다. 그리고 국제 플레이어 대학교 레이드 학부에서 <흑마법대응이론〉을 전공했죠. 부족하지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리고 그 문제점에 관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어필한다.
"아, 정말입니까?”
"예, 박사 과정 중입니다.”
그러자 역시나 남자의 눈매에서 경계심이 싹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잘됐네요. 그렇다면,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단단한 무표정이었던 남자의 표정이 풀어지고, 어느새 근심을 담겨 있었다.
‘역시 쉽다, 쉬워!’
그는 미소를 숨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아는 한,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 실체가 없는 고스트 계열을 마주치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보셨다시피 우리 부대에는 현재 프리스트가 거의 없으니……."
"음…… 그것참 어려운 문제네요.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는 즘 어려운데, 여유 있으시면 차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저기, 제 사무실에 관련 자료가 있기도 하고요.”
남자는 난처한 듯 손목시계를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20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공현준은 AMT 지휘관을 성소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자,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은,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플레이어 의무 임무 기간’에 AMT 군의관으로 복무할까 고민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아무래도 연구를 계속하려면, 조금 길지만, 성소 관리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실상은 거기서 거기랍니다. 하하—”
공현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미리 끓여둔 커피를 두 잔 따랐다.
물론, 그 안에는 다른 무언가가 첨가되어 있었고, 남자의 앞에 그 커피를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향이 좋네요.”
"비싼 커피는 아니지만, 인스턴트 중에서는 제일 괜찮더라고요.”
남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컵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그래, 마셔라, 어서 삼켜라.......'
그러나 그가 속으로 외운 주문은 먹히지 않았다.
남자는 별안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컵을 다시 내렸다.
"아! 그런데 선생님, 제가 전투 중에 상처를 입었는데,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조바심이 났지만,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대원 중에서는 프리스트가 없나요?”
"실력이 영 형편없습니다. 아무래도 전부 하급 플레이어인지라……."
"아, 그럼 어디 한번 보죠.”
"여기, 왼쪽 팔목입니다.”
남자가 전투복의 소매를 걷었다.
그런데 ……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그저 창 모양의 작은 문신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음…… 어디가 다쳤다는 거죠?”
"자세히 보시면, 여기—”
시이이이—
'응?'
이상했다. 그의 손목에서 문신이 사라지며, 웬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푸—욱—
"......."
공현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복부에 긴 창대가 처박혀 있다는 것을, 다소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꺼—꺼어……."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낸 뒤, 바들바들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표정의 차가운 표정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쩌저저저—
그의 손가락 피부에 비늘 같은 게 돋아났다.
그리고 이내,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돋아났다.
“커—!”
공현준은 소리를 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 이현욱이 공현준의 입 모양을 바라보며 따라 말했다.
"대, 체, 왜……."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겠지. 우리도 그렇게 느꼈어.”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은색의 쇠 구슬이었다.
"자,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네가 나한테 커피를 대접했는데, 우연히도 나는 그 커피를 쏟았고, 하필이면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신성력이 담긴 쇠 구슬에 닿은 거야.”
이현욱은 쇠 구슬 위에 컵을 기울였다.
커피가 쇠 구슬에 닿자…….
치이이이——
"신성력이, 독성과 반응하여 이렇게 이상 반응이 일어났지……."
“끄, 끅—”
"당연히 나는 의심을 했고 너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해. 그때 국회의원 박길상이 연관된 듯한 말을 해도 괜찮겠는데…… 아무튼, 그러다가 내가 방심한 듯 보이자, 흉기를 꺼내 휘두르는 실수를 하고말고……."
공현준이 허리춤에 숨겨 놓았던 단검이 저절로 빠지더니, 어느새 공현준 왼손에 들려졌다.
내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 그래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순간—
시—익—!
이현욱이 왼손을 휘둘렀고, 놈이 책상 위로 엎어졌다.
‘쉘터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을 믿을 거다.’
공현준을 처리하고,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 박길상을 엮을 수도 있을 듯했다.
이현욱은 놈의 복부에 박혀 있던 ‘아킬레우스의 창’을 회수했다.
그리고 놈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던 ‘마나 탱크(3등급)’까지 얻었다.
아무래도 내일쯤이면, 마나 총량이 몇 배로 불어날 듯싶었다.
"음, 여긴가?”
이현욱은 공현준의 등 뒤, 캐비닛 문을 열고 그 안을 살폈다.
온갖 플레이어 제조 물약들이 들어 있었다.
"야수화 물약…… 이때부터 연구했었군.”
이현욱은 이 물약의 ‘최종 단계’를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것들이 대구 도심을 헤집고 다녔고,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그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놈이 준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때, 캐비닛 끝에 독특한 모양새의 ‘검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보이는 아이템이다.’
그걸 들어 올리자 눈앞에 정보가 떠올랐다.
- 악마의 경종을 획득했습니다.
* 마나를 불어넣을 시 일대의 ‘지옥 태생’을 끌어들입니다.
"이건……."
그래, 지하 터널에서 수도 없이 번식하고 있을 쥐 떼를 불러들일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공현준은 이걸 이용해서 쉘터의 피난민들을 학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현욱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러면, 게임이 너무 쉬워지는데……."
아무래도, 지하에 들끓고 있는 식인 쥐 떼를, 단숨에 박멸해버릴 수 있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