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서울, 4차 웨이브의 도시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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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북면의 군용도로, 그 내리막길을 트럭 행렬이 지나고 있었다.
강철 중대였다.
우우우우----
선두의 K-153 기갑수색차량은 척후로서, 단독으로 백여 미터를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무기를 실은 4대의 트럭-지휘 차량-병력을 실은 3대의 트럭-후방 경계 차량 순이었으며, 주변을 철두철미하게 경계하며 시속 40km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이현욱은 지휘 차량의 조수석에 타 있었다.
"……어라, 이현욱 병장님, 저기 저 큰 새가 아까부터 계속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뒷좌석에서 창밖을 경계하고 있던 박준모가 말했고,
이현욱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삐이이---
창공을 울리는 명료한 울음소리, 날개가 활짝 펼친 맹금 한 마리가 비행 중이었다.
"그냥 평범한 새 같지만, 혹시 몰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평범하지 않아.”
"예?"
"저건 지구상의 그 어떤 새도 아니야.”
"아! 설마, 대대장님의……."
박준모가 눈치챘는지 그렇게 말했고 이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대대장 김강석의 '권속’ 중 하나인 ‘그레이트 콘도르’였다.
익장(翼帳)이 무려 12m다. 날개를 펼치면 웬만한 트럭보다 커서,
가까이에서 본다면 새가 아니라 공룡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그것이 강철 중대의 상공을 날며 주변을 경계해주는 중이었다.
물론 주인과 멀리 떨어질 수는 없으니 계속 따라오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레이트 콘도르의 그림자 아래로 ‘마법 드론’ 2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마법 드론은 마법 공학 기술로 제작된 최첨단 아이템으로, 마나를 불어 넣은 마법사 플레이어와 연결되어서 시야를 공유하며, 몬스터가 내뿜는 마나를 감지할 수도 있었다.
- 칙- 여기는 강철3, 현재까지 이상 식별 없으며 곧 도심지로 진입한다. 이상.
최태용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장 앞의 기갑수색차량에 타서 주변을 경계 중이었다.
남산의 끝이 보이는 걸 지켜보며, 이현욱은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흔히 워키토키라고 부르는 이 군용 무전기는, 평소에는 전파로 통신하지만, 마나 산란 상황으로 전파가 방해받을 때는 ‘마나 통신’이 가능하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칙-
"강철 작전 대장, 이현욱 병장이다.”
그의 목소리는 강철 중대 전체, 10대의 차량에서 울려 퍼졌다.
- 칙- 우리는 이제 서울 도심으로 진입한다.
그 말에, 모두가 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들어간다는 게, 이렇게 불안하다니…….
낯선 감각이었다.
- ……침식 원인을 찾으려면 몬스터가 많은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즉 숱한 전투가 벌어질 거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의 적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만이 아니다.
이현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대원들은 ‘흡혈귀’를 떠올렸다.
부대에 잠입하여 5분대기조를 학살한 테러리스트…….
그러나 그들의 정체가 빌런이라는 건 오직 이현욱만이 알고 있었다.
‘아직은 전세계가 빌런의 존재를 모르는 게 낫다.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
다섯 도살자 중 캐롤 최와 양희주, 둘을 생포했으나 심문하기 전에 돌연 죽어버렸다. 의무 장교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어떤 ‘잠재 마법’ 에 의해서 뇌가 타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현욱은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기백준이 걸어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제 부하들이 혹시나 생포되어 빌런 조직의 베일이 벗겨질까, 극단적인 처방을 해둔 것이었다.
-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 넓은 서울에서 ‘침식 요인’을 찾아내는 건, 길고 긴 행군이 될 거다. 그러나 긴장하되 당황하지 말고 항상 내 지휘에 집중해주길 바란다.
길고 긴 행군…… 원래는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이현욱은 ‘그것’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즉, 운이 좋은 행군이 될 터였다.
- ……나중에, 이 작전이 끝난 뒤에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
서울이 사라지지 않아야지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음 저기, 도심이 보입니다.”
그렇게, 강철 중대는 남산을 벗어나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서울 도심을 마주했고,
D대 학교와 S호텔 사이의 ‘장충단로’를 따라서 북상했다.
- 칙- 전방에 사거리, 사주경계 철저히 할 것- 이상.
곧 장충체육관 사거리가 나왔다.
그 널찍한 사거리에는 평소와 달리 고요만이 감돌았다.
"음, 다행입니다. 생각보다 도로를 막고 있는 차가 많이 없습니다.”
본부중대 소속의 운전병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무려 천만의 도시 서울이건만, 도로는 상당히 한산했다.
"새벽에 일이 발생하기도 했거니와, 시민들이 도보로 이동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강철 중대의 행진은 잦은 멈춤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때였다.
- 진행 차선에 몬스터 식별- 정차하여 확인하겠다! 이상.
선두의 긴급 무전이었다.
이현욱은 선두, 최태용 일병에게 1대1 교신을 걸었다.
"최태용, 이건 개인 통신이다. 상황 보고해.”
- 좀비 한 마리가 도로 위에 떡 하니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네 느낀 점 말고, 사실만 간결하게 보고 해.”
- 붉은 피부의 좀비 딱 한 마리입니다. 제자리에서 그냥 빙글빙글 돌기만 합니다.
그의 보고에, 뒷좌석에서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어떻게…… 겨우 한 마리인데, 그냥 제거합니까?
이현욱은 고민했다.
흔히 좀비라고 부르는 ‘지옥의 주민’은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했다.
그렇기에 그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좀비라고 뭉뚱그려 대응하는 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고…… 지옥의 주민 정도야, 아무리 몰려와도 상대할 수 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최태용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어, 또 뭔가 있습니다. 저건…… 사람입니다. 손을 흔들면서 저희에게 다가오는데, 쏘지 말라는 뜻 같습니다. 무장한 걸 보아하니 플레이어 같습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플레이어라…….
“......기다려, 내가 간다.”
이현욱은 병장 계급장을 떼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K2C1 소총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박준모 역시 따라 내리며 이현욱을 엄호했다.
이현욱은 앞으로 걸어가며 인근의 금속-움직이는 금속을 탐지했다.
아군 행렬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건 총 7개였다.
하지만 조금씩 미동하는 불확실한 움직임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다.
‘적어도 16명, 작지 않은 집단이다.’
약 50m 앞, 최태용이 차에서 내려서 그들 중 키가 큰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이현욱이 접근하자 최태용과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뒤로 6명의 플레이어가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머지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듯했다.
“……그쪽이 이 부대 책임자입니까?”
남자가 물어 왔다.
긴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걸 보아하니 마법사 계열인 듯했다.
"예, 맞습니다.”
"저 좀비, 절대로 건들면 안 됩니다. 방금 큰일 날 뻔하신 겁니다.”
이현욱은 대답 없이, 최태용에게 쌍안경을 건네받아 약 이백여 미터 밖의 좀비를 살폈다.
특이한 생김새였다. 160cm 정도의 단신이었는데 머리가 아주 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머리에는 눈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대신 입이 유난히 컸으며 목이 개구리처럼 부풀었다.
“……사이렌 좀비군요.”
"예, 한 마리만 건드려도 죄다 몰려올 겁니다. 저기 교차로 부근에 잔뜩 몰려있습니다.”
사이렌 좀비, 외부의 위협을 감지할 시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어 다른 좀비를 불러들이는 개체로 좀비 수백 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저희는 남산의 AMT부대인데, 혹시 어디 소속이시죠?”
"아, 저희는 그냥 작은 길드원들입니다. 청화 길드 하청이죠.”
하청 길드란, 대형 길드와 계약을 맺고 다양한 잡일을 처리해주는 편이었다.
대형 길드의 공략 작전 시 ‘짐꾼’이나 ‘총꾼’ 혹은 ‘던전해체반’ 등이 그 예였다.
그렇다고 해서 약한 이들은 아니었다. 적어도 AMT 병사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쪽 부대가 지금 무슨 작전 중인진 몰라도 북쪽으로 가시는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거긴 좀비 밭이라서 갈 수 없습니다. 대신 저희와 함께 남쪽으로 가주시겠습니까?”
다소 뜬금없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현욱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남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 바로 옆, 장충동 주민센터 쉘터의 마법 보호막이 작동을 멈추면서, 대피해 있던 천 명이 넘는 주민들이 붕 떠 버렸습니다. 거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동대입구역이나 약수역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그 천 명 중 플레이어는 18명이 전부라서 말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주민을 이끌고, 대형 쉘터로 이동할 생각이니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분명 좋은 취지의 일이었으나, 작전 중인 군 병력을 가로막고 요청할만한 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북쪽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현욱의 말에,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저기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기 DDP 부근에 온갖 좀비가, 적어도 오륙백 마리 넘게 모여 있습니다. 그쪽으로는 절대로 못 갑니다.”
"예, 이해했습니다. 뚫고 갈 생각입니다. 그게 저희 임무고요.”
"......."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현욱의 등 뒤, AMT 병력을 쓱 훑어보았다.
너희의 전력을 가늠해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요, 미안하지만, 그랬다간 당신들 다 죽을 겁니다. 사이렌 좀비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또 뭐가 있습니까?”
“……좀비 트롤이라고 아십니까? 저 앞에 그게 두 마리나 있습니다.”
남자의 말에 이현욱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그 좀비 트롤, 직접 보신 게 맞습니까?"
"하하, 이제야 용감하게 전진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십니까?”
"......."
"예, 저기 위쪽 DDP 2호선 쉘터를 두드리고 있는 걸, 제 눈으로 봤습니다. 당신들, 병력은 많아 보이는데 하...... 아시겠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은근슬쩍 AMT의 수준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뭐, 타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AMT의 경우 공략소대가 아니라면, 대부분, 좀비 트롤을 잡을 수준이 못 되었으니…….
하지만 이현욱의 생각은 다른 곳에 맺혀 있었다.
‘찾았다. 첫 번째 먹을거리…….'
좀비 트롤, 놈이 특별한 아이템을 품고 있을 것이란 것을 이현욱은 직감했다. 웨이브 때 출현하는 엘리트 몬스터라면, 무조건 고가치 아이템을 ‘드롭’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피난 가신다면,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이현욱의 말에, 남자와 그 일행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진짜, 제 말을 이해하시긴 한 겁니까? 하- 이봐요, 당신, 계급이 어떻게 됩니까?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계급장도 없고, 책임자 맞습니까?”
그러나 이현욱은 대꾸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DDP 사이에 아무도 없는 거 맞습니까?”
"예? 당연히 전부, 아직 주민센터 쉘터에 있죠. 그건 왜 묻습니까?”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의 워키토키를 눌렀다.
"전원, 전투 준비-”
그 말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뭐, 뭐라고요? 지금 전투, 싸우겠다고요? 미쳤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더는 조언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 바보짓을, 지금 하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이현욱의 허리춤에서 무언가 쏘아져, 대로를 따라서 날아갔다.
쉭--
페일노트였다.
"아, 아니, 지금 무슨……."
확-
그것이 전방의 사이렌 좀비의 옆구리를 그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리 유효한 데미지는 아니었으며 그저 심기를 자극할 정도에 그쳤다.
그러자 놈의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며, 목이 부풀더니…….
꿰-애-애-앵-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굉음을 토해냈다.
마치 금관악기와 같은 울림통, 그게 바로 사이렌이었다.
그 굉음이 멎자, 아주 잠깐의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께-에-에-에-에-
저 멀리, DDP 사거리에서부터 역겨운 괴성이 합창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대로 수백 마리의 좀비가, 사이렌을 듣고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께-에-에-에-에-
고요한 도심에 울리는 그 이성이 결여된 육성……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남자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발, 미쳤어? 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공격할 거면 단숨에 숨통을 끊기라도 해야지 이게 무슨 짓-”
"아뇨, 일부러 그런 겁니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대체, 무슨……."
이현욱은 다시 워키토키를 들어 올렸다.
“4번 트럭, 전진해서 개방한다.”
이현욱의 명령에 트럭 한 대가 행렬에서 빠져나오더니, 이현욱의 바로 뒤까지 왔다.
그곳에서 4명의 병사가 내렸고 2명이 주변을 경계하고 2명이 화물칸 문을 열어젖혔다.
이현욱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본 채, 등 뒤, 트럭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훙-
화물칸 안에서부터 철제 상자 두 개가 날아와 이현욱의 양옆에 놓였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철컥, 소리와 함께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잔뜩 들어 있었다.
두 개의 상자의 내용물이 부글부글 끓듯 움직이더니 허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건…… 엄청난 숫자의 쇠 구슬, 던전 강철로 만들어진 쇠 구슬이었다.
'상자당 550개씩, 총 1100개다.’
그것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타고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촤-라-라-라-라-
그 모습이 마치 새하얀 쥐 떼가 도로를 따라 집단 이동하는 것처럼,
혹은 밀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오러-'
이현욱은 그것 중 일부에 ‘오러(세인트)’를 부여했다.
얼마 전, 허영태에게 얻은 ‘마나 탱크’를 소화한 뒤, 마나 총량과 회복력이 대폭 상승한 덕에 과감하게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신성력을 부여받은 쇠 구슬 1,100개가 맹렬하게 굴러가, 이쪽으로 몰려오는 수백 마리의 좀비 떼와 겹치어지며, 놈들의 다리 아래에 놓이는 순간-
이현욱의 입이 움직였다.
"파쇄-”
쩌-저-저-저-저-정-!
폭음과 함께, 피 안개가 푸스스- 피어올랐다.
"아……."
좀비 수백 마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풀썩 주저앉았다.
엄청난 숫자의 쇠 구슬이 일제히 폭발하며, 그것들의 발목을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의 살점이 사방으로 비상하여, 후두두 떨어졌다.
끅-끄에에-
좀비인 만큼 그것만으로는 죽지 않겠다만, 다시는 두 발로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즉, 바닥을 기어서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되었으므로, 더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민태, 지금부터 경험치를 먹는다.”
그 말에, 이현욱의 등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8개의 방패를 선두로 하여, 무력화된 좀비 떼를 향해 진격했다.
"뭐, 뭐라고요? 지금, 경험치를…… 먹는다고요?”
그렇게 전진한 AMT 병력은 신성 무기를 휘두르며, 좀비를 하나둘 끝장내기 시작했다
그래, 진짜로, 먹고 있었다.
너무나 손쉽게 경험치를 빨아 먹는 것이었다.
"......."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저 정도 규모의 좀비 떼가 피해야 할 재난이 아니라, 일개 경험치로 여긴다니 그건, 적어도 B등급 플레이어쯤 되어야 반쯤 허세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니, 아무리 B등급일지라도 저 많은 좀비를 단숨에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 사람들, 대체 뭐야? AMT 맞아?’
남자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하지만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좀비도 좀비다만, 가장 큰 위협은 따로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이현욱에게 달려갔다.
"바, 방금 그 한 방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예,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예, 당장,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합니다! 그게 올 겁니다! 좀비 트롤-”
하지만 그의 경고는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쿠-웅-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정면의 건물 위로…… 거대한 머리통이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그으으……
5m에 이르는 녹색 거인이 반쯤 썩는 동태 눈깔 천천히 굴려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바로 좀비 트롤이었다.
"아…… 조, 좆됐다……."
플레이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고, 전진해 있던 AMT 병력도 급히 후퇴했다.
트롤(Troll)이란,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을 가진 거인 몬스터였다.
오죽하면, 트롤의 피가 최고급 회복 물약의 핵심 재료로 사용되겠는가?
그런데 그런 트롤이 좀비가 되었다면…….
죽일 생각은 애당초 포기하는 편이 옳았다.
쿵-
그것이 이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럴 때마다 군데군데 파인 살점 속에서 구더기가 후두두, 떨어졌다.
“……이, 이제 어쩔 겁니까? 빨리 차 돌리라고 하세요!”
남자가 벌벌 떨며 소리쳤다. 도망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현욱은 오히려 싱긋 웃었다.
‘역시, 있다.’
저 거대한 좀비의 몸 안에서, 어떤 ‘질 좋은 금속’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현욱은 워키토키를 눌렀다.
삑-
그리고 아주 짧게 단 한 가지의 명령만을 내렸다.
“……나머지 트럭, 전부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