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파도 위로 내리는 비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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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하, 그녀는 전격(電擊)과도 같았다.
광채를 몸에 두른 채, 빛처럼 쏘아졌고 단숨에 헌티드 아머 5기를 고꾸라뜨렸다.
그런 서은하의 뒷모습에서, 수색대원들은 강렬한 희망을 보았다.
“와, 저게 말로만 듣던 서은하 공략소대장님의 전투······.”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고, 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와 함께 작전을 치르는 공략소대 간부들에게 익히 듣긴 들었다.
공략소대의 저격수, 강익준 하사의 말에 따른다면,
서은하 중위의 전투 방식은 ‘성기사’가 아니라 ‘광전사’에 가깝다고 했는데······.
“진짜였어······.”
그 말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민태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자! 우리도 소대장님 뒤를 따르며 엄호 사격한다!”
사방을 경계하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서은하를 따라서 조금씩 나아갔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가 어둠을 밀어냈기에, 지옥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단하게 뭉친 채 사방에서 몰려드는 좀비들을 하나둘 끊어냈다.
“오른쪽에서 온다!”
“-집중 사격!”
그렇게 어느새 백 마리가 넘는 좀비가, 그들의 뒤에 빨래처럼 늘어져 있었다.
‘······된다! 이번에도 된다!’
저 지옥 같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솔직히 가망이 없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1대대에서 가장 유명한 두 플레이어가 진짜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반전되었다.
‘서은하 중위님도 대단하지만, 최영준 병장님도 만만치 않다.’
오른쪽, 나무 사이에서 최영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칵!”
최영준에게 복수하겠다고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중절모는 지금 외발이 된 째 쩔뚝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최영준은 그를 바짝 추적하며 환도를 휘둘렀다.
촤-악!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공격에 놈의 오른쪽 어깨가 날갯죽지까지 잘리며 너덜거렸다. 놈은 뒤로 펄쩍 뛰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단 2차례 칼을 섞었는데, 놈은 이미 중상을 입었다.
‘확연한 실력 차이다.’
최영준의 전투는 자주 봐본 것이었다만, 언제나 압도적으로 적들을 베어 넘겼기에 오히려 그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역시 된다!”
안민태는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이대로만, 이대로만 밀어붙인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끝날 것이었다.
‘이 정도의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니, 기적이다!’
저 두 명의 강자가 같은 대대에 있다는 게,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퍼-엉!
어디선가 난데없는 폭음이 울리며 안민태의 사고가 정지했다.
“윽!”
수색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정면의 어둠 속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수색대원들의 앞으로, 무언가 날아들었다.
쿵-
“어?”
······그건, 서은하였다.
그녀의 이마에서 새빨간 피가 죽, 흘러내렸다.
안민태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소, 소대장님?”
“뒤로, 무, 물러나······.”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녀의 몸에서 광채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 그쪽 이름이 괜히 유명하겠어?”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대단한 실력, 내가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여자의 등 뒤로 4개의 팔이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중 1개가 검은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두 번째 선물까지, 제대로 준비해 온 거예요.”
위위위위--
그건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서은하가 내뿜는 광채를 밀어내고 있었다.
- 주의! ‘그레고리 아자젤’의 저주가 퍼집니다! 일대의 신성력이 억제됩니다!
“윽! 하, 하필이면······ 타락 천사의 보구······.”
유대교에서 등장하는 ‘그리고리(Grigori)’는 타락 천사의 조직이었으며 ‘아자젤(Azazel)’은 그들의 리더였다. 즉, 본디 신성력을 사용했지만, 그 힘을 배반하고 어둠의 힘 귀의한 이들이었다. 그런 설정을 모티브로 한 ‘타락 천사의 보구’는 반(反) 신성력 아이템이었다.
쉽게 말해, 신성 스킬 사용하는 플레이어에게는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는 아이템이었다.
서은하의 갑옷, 방패, 대검에 떠올라 있던 백색의 문자들 위로 웬 검붉은 얼룩 같은 게 번져나가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백색 빛이 옅어지며 서은하의 힘이 감소하고 말았다.
서은하는 다시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흐, 윽······.”
하지만 신성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그녀의 힘이 제대로 발휘될 리가 만무했다.
쿵- 쿵-
비틀거리는 그녀를 향해, 헌티드 아머 3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그것들이 한층 더 커 보였다.
당장이라도 서은하를 짓눌려 죽일 것처럼······.
심지어 최영준 쪽도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방금, 중절모 흡혈귀의 사지를 전부 도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놈의 잘려나간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신체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뭐야, 연기?”
연기 형태라면, 최영준의 칼만으로는 벨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기가 중절모 흡혈귀의 온몸을 휘감더니······.
고-오-오-오-오-
“어? 최영준 병장님! 조심하십-”
하나의 돌풍으로 변하여 최영준을 덮쳐버렸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최영준은 그렇게, 검은 연기에 휩싸여 저 멀리,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그 뒤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이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두 개의 희망이, 동시에 꺼져버렸다.
“아, 갑자기 이게 무슨······.”
“이제, 우리, 어, 어떡합니까?”
수색대원들은 심장이 철렁이는 걸 넘어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우린 다 죽었다.”
“이제라도 도, 도망가야 해······.”
이내 패닉이 찾아왔다.
“야! 정신 차리고 무기 들어 올려!”
“아······.”
“계속 싸워야 해! 11시 방향, 좀비 떼가 다시 온다!”
그들은 다시 눈앞에 적들을 바라보며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저 두 사람마저 안 된다면, 희망은 없다는 걸, 이들 모두가 알았다.
“헉! 하, 하필이면 저게 이쪽 옵니다!”
쿵- 쿵- 쿵- 쿵-
서은하가 헌티드 아머 3기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이, 다른 2기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쏴! 쏴!”
신성력이 담긴 화살이, 그것들을 향해 일제히 쏘아졌다.
팅- 팅-
그러나 그 거대한 갑옷에 흠집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으아아아!”
“안 돼! 도망쳐!”
쿵- 쿵-
그렇게 다가온 놈의 그림자가, 탱커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안민태는 그것을 올려다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마, 망했다.”
이건 진짜 죽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만 해도 이런 느낌이 벌써 두 번째였던 것 같았다.
그때는 최영준 병장이 기적처럼 등장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그런 기적 따위를 두 번 바라는 건 솔직히······.
터-엉-
“······응?”
웬 굉음에, 안민태는 방패를 슬며시 내렸다.
궁--
텅 빈 갑옷이 거대한 동종(銅鐘)이라도 된 것처럼 청명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갑옷의 가슴팍에 은색의 막대 같은 게 처박힌 채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에에에--
괴성, 헌티드 갑주 안에서 악령이 울부짖었다.
신성력이었다. 저 정체불명의 막대엔 신성력이 담겨 있었다.
놈이 무기를 내려놓고 그 막대 같은 걸 뽑아내려고 했지만······.
터-엉- 터-엉- 터-엉-
이어서 3발이 더 날아들어 갑옷 곳곳에 처박혔다.
더 많은 신성력이 갑옷 안을 자극했다.
그러자 더는 못 참겠는지,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오더니 갑옷이 무릎을 꿇었다.
쿠-웅-
악령이 스스로 리빙 아머를 탈출해버린 것이었다.
“저거······ 그 말뚝 아닙니까?”
몇몇 수색대원들은 그게 뭔지 알아봤다.
그때, 등 뒤 어두운 숲속에서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무기에 장착하는 플래시 라이트,
다수의 AMT 병사들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지원군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남자는 역시나 이현욱이었다.
“아! 이현욱 병장님!”
안민태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담겨 있었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이 지옥 속에서 활약하고 있을 그 남자,
이현욱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다가와서 안민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안민태,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다.”
“아! 그렇습니다!”
안민태는 사기가 바짝 오르는 걸 느끼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전부 뭐해? 다시 싸울 준비 해!”
그의 외침에, 뒷걸음질 쳤던 수색대원들이 다시금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현욱을 따라온 지원 병력이 그들의 양옆으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2중대 소속의 여군들이었는데, 대다수가 마법사 플레이어들이었다.
“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링크 마법 준비해!”
키가 작은 여 병장이 소리치며 그녀들을 이끌었다.
김세희, 2중대에서 가장 유명한 병사였다.
한편 이현욱은 천천히 전장을 살피는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읽었다.
- 해당 리빙 아머의 ‘마스터 권한’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의 ‘통제력’이 낮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헌티드 아머를 쓰러뜨리는 순간 떠오른 메시지였다.
리빙 아머는 마법으로 설계된 전투 병기로써, 일종의 자동 사냥 아이템이었다.
보통은 마법사들이 ‘통제 마법’을 통하여 마스터 권한 확보하여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통제력을 활용하는 거다.’
통제력은 플레이어의 능력 중에서도 아주 희귀하고 강력한 편이었다.
화염을 통제하는 인페르노,
전류를 통제하는 박준모,
죽음을 통제하는 네크로맨서,
그리고 이현욱은 금속을 통제하며, 시스템상 이현욱의 ‘금속 통제력’은 리빙 아머의 ‘마스터 권한’을 확보할 수 있는 만능열쇠이기도 했다.
‘통제한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리빙 아머의 표면, 음각으로 새겨져 있던 다양한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가 작동하듯 차례차례 켜지더니, 이내 시퍼런 안광이 점등했다.
쿵-
그것이 몸을 일으켜 이현욱의 앞에 우뚝 섰다.
- 리빙 아머의 ‘마스터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역시 괜찮은 것들을 많이도 가져왔군.”
이현욱은 미소가 흘러나오는 걸 막았다.
“이, 이현욱?”
서은하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늦을 뻔했지만, 그래도 제때 왔습니다.”
“너! 지금 농담할 때야? 윽······.”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이현욱이 다가가 부축했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속에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오광묵을 죽인 또 다른 한 명이 있다더니······ 드디어 나타나셨군?”
이현욱은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았다.
‘캐롤 최, 다섯 도살자의 리더다.’
블러드 로드의 두 번째 자식, 기백준의 하수인 중 하나였다.
흡혈귀인 동시에 죽음의 마법을 다룰 수 있기에 언데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물론 죽음의 군단장, 네크로맨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끄에에에······
그녀의 등 뒤, 너른 골짜기에 녹색 안광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많이도 모였군.”
이현욱은 그것들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주 성대한 파티를 벌이려던 참인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실례 좀 해야겠어.”
“후- 그 파티의 식탁에 올라갈 게 너희 머리란 걸 알고 하는 말이겠지?”
캐롤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지져서 껐다.
그러나 이현욱은 캐롤에게는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너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저 앞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나저나 비가 올 것 같은데, 우산은 있나?”
다소 뜬금없는 말에 캐롤의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없다면, 유감이지만······ 이만 파티를 그만 끝내야 할 것 같아.”
이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2중대의 마법사들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 같이 완드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어서 김세희 병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이야! 링크(Link)!”
링크(Link), 다른 곳에서 캐스팅된 마법을 불러오는 마법이었다.
15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법진을 그렸고 15개의 빛줄기가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쩌-어-엉-
빛줄기들이 한 점에 모이며 융합되었다.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웅-
검은 하늘의 한 가운데에 원형의 일렁임이 일어났다.
이어서 마치 하늘의 뚜껑이 열리듯,
그곳에서부터 옅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포탈이다.”
포탈(Portal)이란 차원의 터널, 즉 다른 ‘어딘가’와 연결된 문이었다.
“비가······ 온다고?”
캐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제야 불길함을 느낀 듯했다.
그때, 이현욱의 어깨-워키토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칙- 대대 무기고 발 광역마법 전개 완료!
광역마법통제관, 문태호 소령이었다.
“예, 확인했습니다.”
- 칙- 그러나 명심해! 광역 포탈의 유지 시간은 단 3분이야!
“예, 압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이현욱이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목표는 상공에 열린 ‘광역 포탈’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니,
그 너머의 것들을, 공간을 초월하여 움켜쥐었다.
“······폭우가 쏟아져서, 더러운 것들을 씻어 내기에 충분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손이 낙하했고,
포탈로부터, 수백 가닥의 섬광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칙- 투하 완료. 행운을 빈다.
그날 서울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