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파도 위로 내리는 비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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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문태호 소령은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걸레짝이 된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지휘통제실부터 저 멀리 대대 무기고까지 이르는 긴 복도까지······.
수백, 아니 족히 천 개가 넘는 각종 무기가, 사방팔방 처박혀 있었다.
실제 중세의 전쟁터도 이런 풍경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이게 무슨······ 혹시 폭격 같은 거, 날린 거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현욱이 대답했다.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근데 저건······ 확실히 죽었겠지?”
복도 끝에는 자신을 날려버렸던 ‘괴한’이 말 그대로 으깨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무언가 큰 덩어리에 창대가 수십 개가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확실하게 죽였다.
심지어, 양쪽 눈과 심장 부근에는 은색 쇠말뚝이 박혀 있기까지 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이었다만, 저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
문태호는 오른손만으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왼쪽 어깨 아래로는 감각이 없었다.
“시발, 면목 없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소령인데 한 대 맞고 기절이나 하고······.”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문태호는 이현욱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자식, 대단하다 대단하다 주변에서 난리여도 나는 시큰둥했는데, 대단하긴 하구나.”
이 사달이 난 직후, 대대장이 이현욱부터 찾았을 때 솔직히 조금 아니 꼬았다.
아무리 이 녀석이 최근 말도 안 되는 공을 세웠다고 한들, 부대 전체가 사라질 판국에 소령 계급의 당직 사령인 자신을 제쳐두고 일개 병사를 호출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새삼스레 대대장이 안목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솔직히 직접 마법을 쓰는 건 영 재능이 없어서 애초에 처음부터 광역마법 주특기 쪽으로만 계속 팠다. 그래서 소령 달고 있는 거긴 하다만, 미안하다 참······.”
마법사 계열이라고 해서 전부 똑같은 건 아니었다,
처음 얻는 ‘패시브’ 스킬에 따라서 그 방향성이 결정된다.
문태호의 경우 ‘마나 감지’와 ‘흐름 분석’ 쪽에 특화되어 있었다.
즉, 직접 마법을 쓰는 것보다 마법을 분석하고 통제하는 게 중점이었다.
그렇기에 여러 명의 마법사-많게는 수백 명이 힘을 합쳐 만드는 마법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보직인 ‘광역마법통제관’ 역할이 제격이었다. 할 일은 그다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통제관님, 지금 이렇게 대화하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문태호는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렇지······.”
“저 통제관님, 그렇다면 통제관님께서 가장 잘 하시는 거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이현욱의 말에 문태호는 눈을 끔뻑거렸다.
“광역마법,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게······ 지금 왜 필요한데?”
“장거리 양방향 포탈을 열어서, 이곳과 토템 근처를 연결하려고 합니다.”
“······.”
“허락하신다면, 2중대에서 마법사들을 차출해오겠습니다.”
문태호는 이현욱이 말하는 바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이현욱은 싱긋 웃었다.
“영내에 침투한 적들을,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전진한다.”
이현욱이 빠진 22명의 ‘토템수색대’는 서은하의 지휘를 따라 남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밤이 내린 산속, 달빛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스며들지 못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전등을 켤 수는 없었다. 언데드에게 기척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나이트 비전’이 충분히 있어서, 그걸 착용한 채 밤을 꿰뚫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선두의 정지 사인,
수색대 전원이 숨을 죽이고 나무와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선두의 손짓,
모두의 시선이 그 지점으로 향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마침내, 목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그어어어-
남산 중턱에 피어나 있는 수백의 녹색 불빛, 죽은 자들의 안광(眼光)이었다.
수백 마리의 언데드가, 남산 중턱에 운집해 있었다.
‘조금 전에 상대했던 그 좀비와 다르다.’
안민태는 직감했다.
저것들은 위병소 근처에 출현했던 ‘지옥의 주민’보다 등급이 높은 몬스터였다.
일단 덩치부터 훨씬 컸으며 온몸에서 녹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속도와 힘 모두 종전에 상대했던 좀비와 차원이 다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저건 대체 뭐야?’
쿵-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2m가 넘는 거대한 갑옷 군단,
그것들의 텅 빈 투구 안에서 녹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건, 리빙 아머다.’
살아서 움직이며, 주인의 공간을 침입하는 모든 것들을 공격하는 전투 병기······.
‘실제로 본 적은 있지만······ 저건 훨씬 크다.’
주인이 없는 리빙 아머의 경우 마법사 플레이어가 ‘통제 마법’을 걸어서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종종 호신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만······.
저렇게 많은 숫자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안민태는 몰랐지만, 저건 단순한 리빙 아머가 아니었다.
통제 마법이 아니라 악령이 빙의된 리빙 아머, 헌티드 아머였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한, 상위 등급의 언데드였다.
그리고 그곳에 열린 보라색의 게이트는 끊임없이 새로운 몬스터를 토해내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언데드의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나고 말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
그 악몽 같은 한 장면을 지켜보며, 수색대원들은 기가 질렸다.
저 언데드 군단을 뚫고 나아가서 그 ‘토템’이란 걸 찾아내 파괴해야 한다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작전 투입 전, 서은하가 했던 한 마디가 이들의 머릿속에 돌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가 실패하면, 그것들이 남산 아래로 내려갈 거다. 적어도 수만 명이 죽겠지······.”
그래······.
수만, 아니, 어쩌면 수십만 명의 목숨이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맞아, 여기서 포기하면 전부 끝장이야.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들킨다면······ 무조건 죽는다.’
본능이 그렇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게 꼭꼭 숨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저 죽음의 행렬에 휩쓸려 일부가 되고 말 것이라고······.
그런데······.
“······어? 소, 소대장님?”
그 누구도 아닌, 서은하가 몸을 일으키더니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행동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접근하면, 지천에 깔린 언데드에게 발각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다가 들키겠습니다!”
병사 하나가 애타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미, 들켰어.”
“······예?”
그러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역시, 이름값 좀 있는 성기사는 다르시네요.”
여자의 목소리,
그와 함께 서은하가 바라보고 있는 부근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정장을 입은 여자였는데, 마치 그림자 속에서 사람이 분리되어 나온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성기사 여럿 죽여봤는데, 이걸 눈치챌 줄이야.”
여자는 입에 담배를 물었고, 서은하가 등 뒤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일부러 시간이 끄는 꼴 못 봐주니까, 딱 한 마디만 묻는다. 너희는 누구야?”
여자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정체불명의 창백한 손이 담배를 쥐었고,
칙칙- 그녀의 진짜 손이 담뱃불을 붙였다.
“음, 그게, 우리가······ 후- 누구인지 말해주려면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할 텐데요?”
그때였다.
촤-악!
칼이 살점을 헤집는 소리- 어느새, 최영준이 서은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 환도를 뽑아 들고 있었는데, 그의 발밑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단검을 쥐어진 손, 잘린 손이었다.
“큭······.”
이어서 저 멀리, 중절모를 쓴 남자가 착지했다.
그의 오른손 부근에서 피가 후두두, 떨어졌다.
“소대장님, 머리 위에 한 놈이 더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마워.”
서은하의 머리 위에는 반투명한 보호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나 실드,
그녀가 입고 있는 갑옷에 내재된 스킬이었다.
“······캐롤, 허영태와 양희주가 동시에 당한 이유, 알 것 같습니다.”
중절모의 남자가 최영준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그들로서도 예상 밖의 실력자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쟤네 둘 다 여기에 있는데, 오강묵은 대체 누구한테 죽은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방금 오강묵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어쩌면 실력자가 한 명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 중절모 남자의 잘린 손이 꿈틀거리더니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도도도--
그것은 마치 거미가 된 양 손가락으로 바닥을 기어, 제 주인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끝내 제 주인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촤-악!
그것의 손가락 죄다 분리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번에도 최영준이었다.
“아이고, 이제는 거미처럼 말고 애벌레처럼 기어야 하겠네?”
최영준이 싱긋 웃으며 검지를 세워서 꿈틀거렸다.
중절모의 남자가 최영준을 노려보았다.
“······저 남자는, 제가 죽이겠습니다.”
“네가 가지고 싶다는 뜻이잖아?”
“맞습니다.”
“좋아, 그럼 성기사는 내가 가진다.”
이내 두 흡혈귀의 눈이 붉은색으로 번뜩였다. 그 순간, 놈들의 등 뒤, 나무 사이의 어둠 속에서 수십-수백 개의 녹색 안광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끄에에에-
산속을 울리는 수백 개의 발소리와 역겨운 울음소리, 그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언데드 군단이 지척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전투 준비!”
안민태가 소리치자 수색대원들이 스킬을 장전했다.
“자, 우리 유명한 성기사님, 어디, 실력 좀 볼까요?”
캐롤이 싱긋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께에에- 께에에-
나무 사이에서, 좀비 떼가 개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보이는 숫자만 해도 몇십 마리였다.
수색대원들은 서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명령 없이, 방패를 끌어 내렸다.
웅-
그녀가 방패를 들어 올리자 그 위로 백색의 문자들이 떠올랐다.
룬 문자였다.
그것들이 방패 주변을 빙글빙글 회전하다가 하나둘 중심으로 모이자-
쩌-어-어-엉-
엄청난 백색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오며, 반경 20m 내에 백색의 돔을 형성했다.
파-하-아-아-
그 안에 들어온 좀비 수십 마리가 단숨에 산화해버렸다.
엄청난 신성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최영준에게 그 방패를 건네주었다.
“이 돔은 7분간 지속한다. 애들 보호하면서 지원 사격해줘.”
지금 이 말은, 그녀가 단독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었다.
“음, 가능하시겠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어.”
서은하는 검을 눈앞에 치켜세우고, 눈을 감았다.
웅-
회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가 빛을 발했고, 갑옷이 순백색으로 변한 것 같은 착시가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광채를 온몸에 두른 채 어둠을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에 맞수를 두듯, 반대 측에서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2m짜리 갑옷 ‘헌티드 아머’였다.
쿵- 쿵- 쿵- 쿵-
캐롤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쪽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선물, 그 첫 번째야.”
“······.”
헌티드 아머는 신성력만 높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생긴 것처럼 물리 방어력은 물론이거니와 상당한 마법 저항력이 걸려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내부에 있는 악령을 ‘신성력’으로 직접 타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무려 30마리였다.
그런데, 서은하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전신 갑옷, 그 육중한 무게를 견디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렇게 도움닫기를 한 뒤,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더니-
쩌-엉!
선두의 헌티드의 아머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두 갑옷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서은하는 놈의 가슴팍을 밟고 한 번 더 공중으로 치솟아, 그대로 낙하하며 헌티드 아머의 머리통에 대검을 박아 넣었다.
쩡-!
그 순간, 그녀의 대검에서 백색 빛이 터져 나왔다.
파-하-아-아-
홀리 라이트,
그것의 몸 안쪽까지 새하얗다 못해 시퍼런 빛이 번져나가자, 갑옷 틈 사이에서 검은 연기가 밀려 나왔다. 검은 연기는 사람 얼굴 형상이었는데, 고통엔 찬 듯 비명을 내질렀다.
빙의되어 있던 악령이 소멸하며 평범한 ‘리빙 아머’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쿠-웅-
그 거대한 갑옷이 허무하게 고꾸라졌다.
또 다른 헌티드 아머들이 달려들었지만, 다르지 않았다.
쩡! 쩌-엉! 쩡! 쩡!
서은하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망치와 창을 피해내고, 헌티드 아머의 관절 틈 사이로 대검을 휘둘러서 끊어내며 그 강철 거인을 풀썩 주저앉혔다.
그리고 갑옷 안으로 ‘홀리 라이트’를 집어넣어, 악령을 성불시켜버리는······ 말은 쉽지만,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펼쳤다.
그렇게 헌티드 아머 5기를 순식간에, 깡통 찌그러뜨리듯 쓰러뜨려 버렸다.
이처럼 성기사의 주요 스킬은 갑옷과 무기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즉, 맨몸의 서은하와 완전무장 상태의 서은하는 천지 차이였다.
“뭐야······.”
캐롤은 나뭇가지에 앉은 채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말았다.
어느새 서은하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검 끝을 들어 올려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왜 유명한지 가르쳐줄 테니까, 좀 내려와 봐.”
캐롤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숨을 골랐다.
“아······ 그럴 줄 알고 두 번째 선물을 준비했죠.”
그녀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