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파도를 맞이할 준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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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다.’
보스 몬스터 올드 알파 메일을 마주하는 순간, 이현욱은 그렇게 느꼈다.
놈이 들고 있는 금속 무기들은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기에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놈 역시 이현욱을 까다롭다고 느끼고 있을 터였다.
놈은 모든 신경을 오직 이현욱에게만 집중했다.
그리하여 이현욱이 조종하는 금속 무기 공세를 2개의 쿠크리를 휘둘러 모조리 쳐냈다.
챙! 채-앵! 챙! 챙! 챙!
실로 엄청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이었다.
어쩌다가 하나 정도가 놈의 사각으로 파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텅-
‘마법 보호막······.’
놈의 몸에 그려진 문신이 빛을 발하며 ‘마법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물론 저 마법 보호막도 내구력이 있기에 언젠가 깨지겠지만······.
‘그 전에 내 마나가 먼저 바닥난다.’
다행히도 이현욱에게는 저 마법 보호막을 뚫어낼 무기가 있었다.
‘페일노트는 통한다.’
왼쪽 손목에 ‘비밀 각인’되어 있는 비장의 한 수,
트리스탄 경의 ‘페일노트’는 ‘마법 무효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꺼낼 수는 없다.’
만약, 놈이 페일노트마저 감지하여 쳐낸다면, 그다음은 없었다.
말 그대로 비장의 무기다.
한 번 실패하는 순간 ‘비장’은 사라지고 만다.
‘단 한 방이다. 확실한 타이밍에 완벽하게 허를 찔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놈의 ‘신경’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악!”
이렇게, 어디선가 비명과 함께 강력한 화살이 날아오면 된다.
쉬-익!
놈이 귀를 쫑긋하며 몸을 움찔했다.
예상 밖의 공격이었으니 당연했다.
이현욱은 멀찍이 빗나가는 화살을 건드려, 놈에게 가도록 유도했고,
놈은 잽싸게 몸을 돌리며 그 화살을 쳐냈다.
채-앵!
‘하지만 이제부터, 나보다 저 저격수를 더 경계하게 될 거다.’
지금까지 드러낸 이현욱의 모든 공격은 놈의 ‘마법 보호막’에 막혔다.
하지만 저 멀리 모래 언덕에서부터 날아오는 저격은 아니다.
그 묵직한 한 방은 마법 보호막 따위로는 막아낼 수 없다는 걸, 놈은 직감했다.
그렇기에 저격수 쪽을 더욱 신경 쓰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이현욱에 대한 경계가 흐트러진다.
즉,
‘바로 지금이다.’
이현욱은 땅을 박차고 전진하며 모든 무기를 쏘아 보내는 동시에, 왼손을 뻗었다.
쉬-쉬-쉬-쉬-쉬-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쇳조각들이 일제히 치솟으며 놈의 신경을 교란했다.
놈의 눈은 이현욱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감각들은 저 멀리, 저격수를 경계했다.
그건 빈틈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끝이다.’
이현욱의 왼쪽 손목에서 검은 연기가 순간 흩뿌려졌고,
그 안에서부터 은빛 섬광 한 줄이 번뜩였다.
퓩-
그 섬광은 올드 알파 메일의 복부로 이어졌다.
“······.”
놈은 무슨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페일노트-
마법 저항력을 무시하는 영웅 등급의 화살이, 놈의 명치에 박혀 있었다.
커-헝!
놈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또한, 놈의 몸뚱이에 그려져 있던 ‘문신’이 일그러지며 ‘마법 보호막’도 사라졌다.
‘이제, 무방비다.’
이현욱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단검, 장검, 쇠 구슬, 화살촉, 가릴 것 없이, 일대의 모든 금속이 떠올랐다.
이어서, 양손이 슬며시 뻗자-
쉬-쉬-쉬-쉬-쉬-쉬-!
마치 기관총 세례처럼, 그 모든 것들이 일제히 뿜어져-
푹! 푹! 푹! 푹! 푹! 푹!
목, 어깨, 가슴, 복부, 허벅지, 무릎-온몸에 날카로운 금속이 무자비하게 처박혔다.
5개, 6개, 12개, 41개 51개······.
푹! 푹! 푹! 푹! 푹! 푹!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에 놈의 몸이 들썩거리며 핏빛으로 물들었다.
케에에······.
그렇게, 수십 개의 금속에 꿰뚫린 채로, 올드 알파 메일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름의 검을 쏘아 보내 놈의 심장을 꿰뚫어버렸다.
푹!
- 구름의 검에 알 수 없는 기운이 차오릅니다. (49%)
이 모든 게 불과 수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축하합니다! 보스 몬스터 ‘놀 올드 알파 메일’ 처치하였습니다!
모두의 눈앞에, 던전 공략의 끝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렇게 우두머리가 죽자, 얼마 남지 않은 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은 놀조차 고작해야 열댓 마리였다.
수차례의 전투로 이 던전 안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깡그리 쓸어버린 것이었다.
“이현욱 상병님! 놈들이 도주합니다! 쫓습니까?”
“아니, 그냥 내버려 둬.”
구태여 쫓을 필요가 없었다.
‘월드 스톤만 챙기면 공략은 성공이다.’
이현욱 올드 알파 메일의 입속에서부터 굴러떨어진 붉은 돌을 집어 들었다.
- ‘월드 스톤(레드 게이트)’을 획득했습니다.
* 분석가 계열의 플레이어만이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걸 밖으로 가져가서 파괴하면 이 게이트가 닫히게 된다.
그게 바로 유일무이한 게이트 폐쇄 방법이었다.
이현욱은 월드 스톤을 확보하고 고개를 돌렸다.
모래 언덕의 죽은 나무 뒤, 김태섭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는 이현욱과 눈이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며 몸을 숨겼다.
이현욱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악!”
손목시계를 다시금 풀어둔 상태였으나, 이번에는 금반지를 잡아당겨 손가락을 꺾어버렸다.
“악! 윽! 이, 이게······ 악!”
그는 금반지를 어떻게든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빠지지 않았고, 그렇게 허우적거리더니 기어코 모래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와 엎어졌다.
“······일어나.”
이현욱이 금속 통제력을 풀자, 김태섭이 재빨리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치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기요! 아, 아니! 나도 공략 도운 거지, 솔직히, 안 그래요?”
“······.”
이현욱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눈을 피하면서도 계속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뱉었다.
“아니, 저, 저격수가 그럼 저격하지 뭘 해요? 참나······ 내가 뭘 잘못했······.”
이현욱은 왼손의 검지를 들어 올려, 천천히 구부렸다.
“악! 악!”
이번에는 왼쪽 귀의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제, 제발! 그만 좀······.”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 하면 진짜로 잡아 뜯는다.”
“······힉!”
김태섭은 제 귀를 움켜쥐고 울먹거렸다.
이현욱은 김태섭이 둘러매고 있던 철태궁을 빼앗아 안민태에게 던졌다.
신뢰를 잃은 저격수를 등 뒤에 둘 수는 없었다.
“안민태, 이 자식이 또 헛소리하면, 한 대 패서 입 다물게 해.”
“아······ 예, 알겠습니다.”
안민태가 김태섭에게 다가갔다.
“야, 미, 민태야······.”
하지만 안민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야, 입 다물어라, 헛소리하면 아가리에 개머리판 날아간다.”
“······.”
이현욱은 아이템 수색을 위하여 박준모를 데리고 가장 큰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와, 뭐가 되게 많습니다.”
이곳은 올드 알파 메일의 거처로 보였는데, 거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온갖 무기들이 사방팔방에 널려 있었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탁자 위에 있는 금속 덩어리였다
‘아다만트, 역시 있다.’
10g당 130만 원까지 나가는 초고가 마법 금속, 이 정도면 230g 정도는 될 듯했다.
당연하게도, 그건 이현욱의 입으로 직행이었다.
꿀꺽-
그것 외에도 미스릴을 비롯한 각종 질 좋은 마법 금속이 널려 있었다.
이현욱은 그것들은 은근슬쩍 집어삼켰다.
과다 섭취로 흡수 패널티가 떴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이어서 바닥에 깔린 낡은 러그를 걷어내자 지하실 입구가 드러났다.
“이현욱 상병님? 여기가 진짜 보물창고인 것 같습니다.”
이현욱과 박준모가 힘을 합쳐 그 문을 들어 올렸다.
철컥!
“오······ 여기도 뭐가······ 엄청 많습니다.”
안에는 온갖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전대 공략 팀들의 유산인 듯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단 하나의 아이템······.
“박준모, 밖에 나가서 이것들 담을 자루 같은 것 좀 찾아봐.”
“아, 예!”
그렇게 박준모를 잠깐 내보낸 뒤, 검은 창대를 하나 꺼내었다.
먼지가 잔뜩 쌓였지만, 언뜻 봐도 고고함이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음에도 그 가치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건 바로······.
- ‘아킬레우스의 창(영웅)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던전에 들어온 이유 그 자체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아킬레우스의 창 (영웅)
- 효과 : 이 창에 의해 발생한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간단명료한 효과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효과였다.
웬만한 힐러가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도 이 상처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각인.’
이현욱은 그 아이템을 즉시 ‘비밀 각인’해버렸다.
시이이이-
그 긴 창이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더니 왼쪽 손목에 창 모양의 문신이 새겨졌다.
비밀 각인은 1개밖에 할 수 없기에, 페일노트는 허리춤에 걸었다.
‘이렇게 하면 들키지 않고 가지고 나갈 수 있다.’
그냥 들고 나간다면 당연히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AMT가 확보했다가 청화 길드가 비용을 치러서 구광 그룹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현욱 상병님, 이게 놀이 쓰던 자루 같은데, 멀쩡한 게 한 개밖에 없습니다.”
“일단 몇 가지만 들고 나가고, 나머지는 ‘던전해체반’이 알아서 할 거야.”
던전 공략 이후, 던전 내의 모든 자원을 긁어나가는 ‘던전해체반’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들은 몬스터 잔당처리, 던전 생물 채집, 던전 광물 채광 등 돈 될만한 건 싹 긁어나간다.
그리고 바로 그때, 회수하지 못한 아이템도 챙겨나갈 것이었다.
이현욱과 박준모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김태섭이 전전긍긍하며 다가왔다.
“저······ 혹시 그······.”
“······.”
“그, 아이템 중에서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 없었나요?”
이현욱은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그······ 창 같은 건데······.”
김태섭은 아킬레우스의 창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AMT는 그 아이템의 실체를 모를 테니 돌려 말한 것이었다.
물론 기여도 0%라서 ‘시드권’을 발휘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 아이템 실체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최악이지만, 만약 그게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 이상의 문제일 테니······.
“저기, 이현욱 씨, 혹시 한 번만 더 안에 호, 확인하면 좋지 않을까요?”
“남은 아이템은 던전해체반이 수거해갈 거다. 신경 안 써도 돼.”
“아······ 아니, 그, 우리 길드 입장에서 진짜 중요한 물건이라서, 딱 한 번······.”
김태섭의 혀가 다시금 길어지기 시작할 때,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뻑!
“악!”
“······야,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
안민태가 개머리판을 치켜세우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김태섭, 그냥 닥치고 있어. 기여도도 없는데 무슨 너희 길드 물건이야?”
“······.”
이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깟 등급이 아니라, 지금 이 결과가 진짜 실력이었다.
***
서은하는 청담동 레드 게이트 현장에 서 있었다.
물론 입장 레벨 제한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같은 부대의 병사들이 작전 투입되었으니 공략소대장으로서 현장을 지키는 게 옳았다.
‘······’
그녀는 불 구덩이처럼 일렁이는 레드 게이트를 바라보며 이현욱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대체 왜······.’
김강석에게 듣기로는 이현욱은 싫은 내색 없이 하겠다고, 사실상 지원했다고 했다.
아무리 사령관이 눈치를 줬다고 한들, 이건 그렇게 눈 질끔 감고 나설 게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고는 지원한 걸까?’
이현욱이 근래 들어 갑자기 믿기지 않는 활약상을 펼치고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드 게이트 공략은 차원이 달랐다.
그곳은 미지(未知)였다.
말 그대로 무슨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곳으로써, 공략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이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서은하는 생각했다.
‘몇 번 공 좀 세웠다고 자신감에 차 있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한둘도 아니고······.’
목숨을 내걸고 이름값을 높이는 플레이어의 세계에서 그런 반짝스타는 왕왕 있었다.
서은하도 이제는 이현욱의 실력을 믿었다만, 이현욱도 그렇게 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오늘이 될 수도······.
“······안녕, 서은하 양?”
그녀의 상념을 깬 건 웬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유해나가 선글라스를 낀 채 레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는 손바닥만 한 거미 두 마리가 사이좋게 엉겨 붙어 있었는데, 8개의 눈으로 서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
서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해나, 지금은 자신을 캐서린 유라고 소개하던가······.
어렸을 때부터 봤지만, 정말이지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유해나의 눈동자가 슬쩍 서은하에게 향했다.
“뭐야······ 이제는 인사도 안 받아주는 거야?”
“······솔직히, 인사할 사이 아니잖아요.”
“나는 그래도 아직 어릴 때의 정이 남아 있는데, 좀 너무하네······.”
유해나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과장하며 말했다.
서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있잖아, 저번에 만났던 그 이현욱 상병, 되게 재밌는 사람 같은데, 잘 아는 사이야?”
갑자기 왜 이현욱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서은하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하~ 보스 몬스터를 누가 잡을지, 나한테 내기를 제의했다니까?”
“······.”
“그래서 뭐, 받아줬어. 내가 이기면, 그 남자······ 우리 길드에 가입할 거야.”
서은하는 주저리주저리 떠는 유해나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현욱이 청화 길드에 들어간다고?’
솔직히 오크 게이트 사태 때, 유해나가 이현욱에게 명함을 건넸을 때부터 신경 쓰였다.
대대장을 비롯한 AMT의 각개가 이현욱이라는 신예를 주목하고 있고, 키우려고 한다.
솔직히, 서은하도 여러모로 그 일에 대해서 의식하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이현욱, 그가 차기 공략소대장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저 재수 없는 여자의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니······.
‘왜 하필이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AMT의 장교로서 정말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청화 길드와 경쟁 관계인 제3항마여단 소속으로선, 더더욱······.
“아, 은주는 잘 있지?”
서은주, 서은하의 언니를 말하는 것이었다.
서은하는 그 대목에서 참지 못하고 유해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언니 이름······ 그딴 입에 올리지 말아요.”
“······.”
웃고 있던 유해나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우웅- 우웅- 우웅-
게이트가 3번 진동했다.
그러자 청화 길드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퇴장 신호입니다!”
그건 희소식이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드디어, 드디어 공략 성공입니다!”
청담동 레드 게이트 4번의 공략 시도 만에 성공한 것이었다.
“······아, 마침 나오네?”
유해나가 싱긋 웃으며 레드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고, 퇴장하는 이들을 살폈다.
“플레이어들이 나옵니다!”
선두로 나온 건 AMT 특별공략소대였다.
진입 때와 같은 9명,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 보였다.
“하, 뭐야······ 진짜로 구석에만 박혀 있던 거야?”
땀과 모래에 절어 있긴 했다만, 다친 곳 전혀 없어 보였다.
난이도 있는 던전에 들어간 것 치고는 의심이 될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즉,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반면 청화 길드의 공략 팀은······.
“젠장! 빨리 부상자 옮겨!”
“중독 증상이다! 중급 해독 물약 가져와!”
아주,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대기하고 있던 힐러 팀들이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렇게 심하게 다칠 정도로 싸웠는데, 쟤들은 가만히 있었던 거야?’
유해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현욱을 쳐다보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캐서린, 아무래도 당신한테 달라고 할 게 없을 것 같네요.”
내기의 요구 사항이었거늘, 달라고 할 게 없다는 건······.
‘의외로 쉽게 승복하잖아?’
유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설마 제 첫 제안을 받아들인 거예요? 들어가자마자 내기할 마음이 싹 사라질 정도로 무서웠던 건가······ 그래도 우리 팀이 저렇게 될 정도인데, 너무한데 좀······.”
유해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현욱의 반응이, 이번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
왠지 모를 비웃음을 담아 웃기 시작한 것이다.
“아뇨, 당신 길드가 저 던전에서 얻을 게 없을 테니, 내가 받아갈 게 없는 겁니다.”
“······네?”
유해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서 두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이현욱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등 돌려 사라졌다.
“······무슨 말이야?”
잠시 후, 청화 길드 소속의 분석가 계열 플레이어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게임의 각종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이렇게 공략 완료 후 던전 안에서 들고 온 ‘월드 스톤’을 움켜쥐면 당연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의 던전 공략 ‘기여도’ 역시 그 정보 중 하나였다.
모두가 기여도 발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분석팀장이 앞으로 나와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우선 처, 청화 길드······ 기, 기여도······ 0%입니다.”
그 한 마디에 청화 길드 측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달리 말하면, AMT가, 이현욱과 그의 소대원들이 모든 걸 해냈다는 뜻이었다.
뒤이은 AMT의 기여도 발표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유해나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증언들이,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걸 뒷받침했다.
청화 길드의 공략 팀 역시 자신들은 진입과 동시에 아웃 되었다는 걸 시인했다.
“말도······ 안 돼······.”
순간 이현욱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뇨, 당신 길드가 저 던전에서 얻을 게 없을 테니, 내가 받아갈 게 없는 겁니다.’
내기에서 진 것보다, 이현욱이 그런 식으로 무시하듯 말했다는 게 더 열 받았다.
그녀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현욱을 찾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지금 서은하와 마주 서서 이야기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AMT 병사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죄다 골골대며 실려 간 청화 길드 공략팀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유해나는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신!”
유해나가 그렇게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하!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뭘 원해요?”
“······예?”
“내기는 내기잖아요! 내가 줄 게 없을 거라고요? 설마요! 뭘 주면 돼요? 말해 봐요!”
이현욱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흔히 말하는 급발진을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자 헛기침을 하며 다시 도도한 표정을 복구했다.
‘이거야 원······ 알아서 박 씨를 물어다 주네, 아주.’
이현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듯, 허영심을 자극하자 알아서 더 큰 미끼를 물었다.
“음, 아무거나 다 줄 수 있어요?”
“어디 한번 말해 봐요. 뭘 가지고 싶은데요?”
“당신이 지금 차고 있는 그 목걸이라도 주실 건가요?”
그건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유해나는 자신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자, 장난해요?”
“당연히 장난이죠.”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중대장, 곽준용 대위였다.
그는 핸드폰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쥐고 있었는데, 이현욱을 바라보며 소곤소곤 말했다.
“······이, 이현욱, 사령관님 전화다.”
아무래도, 유해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두 번째가 될 듯싶었다.
이현욱은 곽용준 대위로부터 전화를 넘겨받았다.
“충성! 상병 이현욱입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야! 허,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놈은 진짜로 처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