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을 먹는 플레이어-28화 (28/221)

28. 청담동, 레드 게이트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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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하차.”

이현욱을 비롯한 특별공략소대가 수송 트럭에서 내렸다.

그 순간, 웬 붉은빛이 그들의 얼굴에 끼얹어졌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허······.”

압도당하고 말았다.

""

시뻘건 균열이 마치 악마의 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게······ 레드 게이트······.”

이들은 출발 전에 서은하 중위와 천명호 준위로부터 저 ‘레드 게이트’에 관한 정보, 그리고 던전 안에서 필요한 ‘레이드 전술’ 중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를 속성 교육받았다.

물론, 이현욱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였으며, 몇 가지는 더 자세히 알고 있기까지 했다.

“후······ 놀 던전이라고 하더니, 벌써 어디선가 짐승 누린내가 진동하네요.”

안민태의 말대로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분출 때 나왔던 놀들을 화염 마법으로 태워 죽인 모양이었다.

이렇듯 이번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놀(Gnoll)’이다.

놀은 오크보다는 덩치가 작지만, 인간보다는 큰, 개과의 수인 몬스터였다.

그런 만큼 굉장히 탄력적인 신체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숫자가 상당히 많다.’

그게 가장 골칫거리였다.

흔히 말하는 ‘개떼’처럼 정말이지 바글바글 기어 나온다.

뒤이어 도착한 군용 승용차에서 중대장 곽용준 대위와 1소대장 이택함 중위가 내렸다.

“어, 얘들아, 다 내렸지?”

“예, 준비됐습니다.”

“그래, 이동하자.”

사실상 이 둘은 이번 작전에는 관여할 게 없었다만, 일종의 인솔자인 셈이었다.

그래도 외부 조직과 접촉하는데 장교급이 전면에 나서는 게 구색이 맞았기 때문이다.

“거기, AMT 공략소대죠?”

빌딩 공사장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청화 길드 직원인 듯했다.

“예, 맞습니다.”

“네, 저쪽으로 가세요.”

합동 공략이지만, 이곳은 청화 길드가 관리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제를 따라야만 했다.

공사장 부지 입구 쪽, 컨테이너 몇 채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앉을 곳 하나 없었기에 이들은 무기를 들고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초장부터 찬밥 신세였다.

“흠, 얘들아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우리는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곽용준과 이택함, 두 간부마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민태와 최태용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음, 중대장님, 또 수상한 행동 하시는 것 같진 않습니까?”

“뭐, 중대장님이 청화에 줄 대고 있다는 건······ 이미 유명하잖아?”

“그런데 1소대장님까지 저기 끼실 줄은······ 이번에 다른 대대 공략소대장으로 가느니 마느니 하던데 벌써 전역 각 잡으시는 걸까요? 그래도 다들 대위는 달고 나가던데······.”

일종의 고위직 공무원이 퇴직 후 관련 업종의 임원으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AMT 장교들 역시 소령 진급 전에 민간 길드로 빠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현욱이 기억하기에도 곽용준은 4차 웨이브 이후 청화 길드에 들어간다.

지금부터 줄을 대고 있는 것 좀 그랬다만······ 솔직히 어쩔 수 없는 판단이기도 했다.

‘4차 웨이브 이후, 1대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부대가 되었으니······.’

그렇게 고독한 대기가 이어지는데, 근처에서 웬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 저기 쟤들 좀 봐.”

“응? 허허······ AMT잖아? 진짜로 왔네?”

청화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이었다.

“······근데 쟤들이 뭘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거냐? 부사관도 아니고 병사가 공략을 뛰어?”

“들어 보니까 이번에 서울역 그, 돔 사태 때 시민들 지켰던 애들이라던데요?”

그 말에 누군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 그거 진짜 요즘 TV랑 인터넷에서 존나게 빨아주던데, 솔직히 그냥 운이 좋았겠지 상식적으로 우리도 못 하는 걸 쟤들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참나······.”

아마도 게이트에 같이 들어가게 될 청화 길드 공략 팀인 듯했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뒷이야기를 하다니······.

따뜻한 환영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AMT 대원들은 괜스레 기가 죽어서 불안한 눈동자를 굴려댔다.

그리고 그때······.

“어, 뭐야? 야! 너 안민태 아니냐?”

그 뒷이야기를 하던 길드원 중 한 명이 그렇게 소리쳤고,

안민태는 당황을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야, 대박이다! 어떻게 여기서 널 만나냐?”

젊은 남자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다가왔다.

그런데 그 차림새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 그리고 손목부터 손가락까지 죄다 명품이었다.

거기다가 귀를 잔뜩 뒤덮고 있는 피어싱까지······.

공략 작전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은 차림새였다만, 사실 아주 흔한 경우였다.

잘 나가는 플레이어는 스타 취급을 받는 만큼, 과시욕을 주체 못 하는 이들도 꽤 있었는데, 저런 부류의 SNS를 들어가 보면 게이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수두룩하곤 했다.

“크, 야 너희 유니폼 멋있다?”

“······아, 태섭아. 오랜만이다.”

대답하는 안민태, 평소처럼 쾌활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별로 달가운 사이는 아닌 듯했다.

그런데······.

“야, 이현욱!”

1소대장 이택함이었다.

그가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작전 회의 시작한다. 너도 들어가야 하잖아.”

“예, 맞습니다.”

조금 틀렸다. ‘너도’가 아니라, 사실상 이현욱만 들어가도 무방한 자리였다.

“안민태, 나는 회의 간다. 애들하고 대기하고 있어.”

“아, 예······ 알겠습니다.”

“이야 깍듯하네? 민태야, 저 사람이 너희 대장이야?”

안민태의 지인이 그렇게 물었지만, 이현욱은 신경 쓰지 않고 회의장으로 갔다.

두 동의 컨테이너 사이, 공간에 스크린과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하하하, 물론 그건 청화 측에서 알아서 해주실 영역이지요.”

중대장 곽용준 대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청화 길드 측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 상대는······.

‘······유해나.’

그녀의 직책이 서울공략부장인 만큼 이런 일마다 한 자리 차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곽용준 대위가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고 있는 건 유해나의 명함이었다.

‘쯧, 곽용준 대위도 거미줄에 걸렸군.’

저 미끼를 함부로 물었다간 언젠가 피눈물을 쏟게 될 것이었다.

그때, 유해나가 이현욱을 발견하고 싱긋 웃어 보였고, 곽용준이 고개를 돌렸다.

“아! 유 부장님, 이 친구가 바로 이번 특별공략소대 지휘를 맡은 병사입니다. 얼마 전 서울역 언럭키 이벤트 때 활약도 했고요, F등급이지만 업적으로 능력 상승을 얻었고 뭐, 여러모로 요즘 뭐든 잘 해내고 있는 친구입니다. 하하하-”

“아, 업적? 왠지······.”

곽용준의 소개에 그녀는 이현욱이 F등급답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업적 시스템’은 누구나 쉽게 넘어갈 법한 확실한 핑곗거리였다.

이내 회의가 시작되었다.

‘······죄다 쓸모없는 내용이다.’

작전 개요, 작전 주도권, 이익 배분 따위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이현욱으로서는 딱히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약 20분 뒤, 회의가 끝났다.

“자, 그럼 1시간 뒤에 게이트 진입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저희야 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죠. 청화 측이 준비되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곽용준 대위는 빌빌 기면서 웬 실장이라는 대머리 남자와 악수를 했다.

직후, 이현욱이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거기, 상병님? 잠깐만요.”

유해나가 따로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말에 곽용준도 순간 멈칫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유해나가 달갑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현욱과 유해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상병님······ 아니, 이제는 뭐 특별공략소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녀는 턱을 괸 자세로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상관없습니다.”

“역시 딱딱하시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또 만나다니, 우리 인연이긴 한가 봐요.”

아무렴, 있고말고. 아주 더럽게 엉킨 인연이었다.

‘네가 서은하를 죽이고, 내가 널 죽인다.’

이현욱은 그런 말을 삼키며, 용건이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쪽들, 어차피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군인이 작전 투입하는데 자기 의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군인 정신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대충 그렇게 대답했다.

“뭐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당신이랑 당신 부하들은 그냥······ 한쪽에 빠져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요.”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테이블에 올린 채, 검지로 테이블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톡- 톡-

저 자세와 습관- 여유와 거만함의 의도적인 표출, 상대 앞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을 때 나오는 유해나의 버릇이었다.

“······뭐, 우리가 비록 3번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무리 없이 성공할 정도로 준비를 했거든요. 그쪽은 갑자기 별 세 개 짜리 골방 노인네 등쌀에 못 이겨서 나온 거죠? 다 알아요.”

별 세 개짜리 골방 노인네, 그건 AMT서울작전사령관 정상식을 뜻했다.

AMT의 내부 사정마저 알고 있다고, 자신의 힘을 은근히 내비친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훈련도 제대로 안 받았을 테고, 위험하잖아요? 내가 편의를 봐줄게요. 던전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나와도 당신 윗선은 절대로 모를 거예요.”

이번에는, 이현욱이 싱긋 웃었다.

“저, 유 부장님?”

“캐서린이라고 불러요.”

“캐서린, 그래서······ 대체 뭘 걱정하시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걱정이요? 우리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현욱은 하하, 은근한 비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 모습에 유해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 청화 길드가 아니라, 우리가 보스 몬스터를 잡을까 봐 그러는 겁니까?”

이현욱은 역으로 도발했다.

유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권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자리에서, 이현욱을 무시하고 도발했거늘, 전혀 먹히지 않는 듯 이현욱은 여유롭기만 했다. 심지어 역으로 거만한 자세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면면이 유해나의 심경을 날카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이현욱은 옅은 미소를 띠고 그녀의 표정에 알게 모르게 번지는 균열을 확인했다.

‘역시, 쉽다.’

전생에도 이 여자의 심기를, 숱하게 건드리며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다.

훗날 ‘빌런’이 되어서 상당히 잔혹하게 변하는 유해나였지만, 아직은 그저 힘세고 돈도 많은 하지만 성격이 조금 이상한 플레이어일 뿐, 인정사정 안 가리는 악인은 아니었다.

“풋, 지금 당신이······ 보스 몬스터를 잡겠다고요?”

“당연하죠. 애초에 그걸 목표로 공략 작전을 하는 거 아닙니까?”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것, 그건 던전 공략 그 자체를 의미했기에 만약 AMT가 보스 몬스터를 먼저 잡는다면, 그건 3차례나 실패한 청화 길드의 얼굴에 먹이 끼얹어지는 셈이었다.

골방 노인네, 정상식 장군이 까무러치게 기뻐할 일이기도 하고······.

“에이,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이현욱이 유해나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제가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캐서린?”

“······.”

“그렇게 된다면, 던전 안에서 얻는 보상 중, 제가 원하는 걸 주실 수 있으세요?”

또 한 번의 도발이었다.

유해나의 눈에 냉기가 서렸다.

“뭐야 지금, 나랑 내기하자는 거예요?”

“아, 이게 그렇게 되나······ 음, 방금 너무 무시 받은 것 같아서 뭔가 오기가 생긴 것 같네요. 하기 싫으시다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내기, 물질이 아니라 자존심을 걸고 하는 내기를 유해나가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미안한데요, 당신은 배짱도 있고 F등급치고는 실력도 있는 것 같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 세상 보는 눈이 많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유해나가 검지를 들어 올려 등 뒤를 가리켰다.

“우리 쪽 공략 팀 명단은 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내기를 거시는 거죠, 지금?”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에 레드 게이트에 공략에 투입될 청화 길드의 공략팀이었다.

“어때요, 아는 얼굴이 꽤 많지 않아요?”

이현욱이 그쪽을 슬쩍 바라보자 그녀는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플레이어즈 선정, 올해의 유망주 TOP100 중 3명이 바로 저기에 있어요.”

3차례 실패 이후 유망주를 대거 투입하는 등, 꽤 공을 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한 명도 모르겠네.’

미래를 살다 온 이현욱이건만, 저들 중 단 한 명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게 당연했다.

오늘, 레드 게이트에 들어감으로써 저들의 명성이 종결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유해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 혹시 당황했어요?”

이번에도 이현욱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듯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이 좀 바뀐 것 같나요?”

“······.”

“좋아요, 내기하려면 해요. 대신 당신이 지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현욱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전역 후에 내 밑으로 들어와야 해요.”

“······.”

“내가 좋게 봤다고 말했잖아요? 음, 대신, 어떤 자리라도 상관없이, 불만 없이, 괜찮죠?”

“······.”

“생각해보면 그 어떤 자리라도 당신한테는 행운이겠어요. AMT 병사보단 날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더니,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아무래도 더 자주 보게 생겼네요, 우리~”

이현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네가 나한테 행운이긴 하겠어.’

유해나에게 어떤 아이템을 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

“안민태,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작전 회의에 갔다 온 뒤, 안민태를 비롯한 특별공략소대원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물론, 그 전부터 긴장에 절어 있긴 했었다만, 지금은 어딘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저 뒤에서 킥킥거리는 청화 길드의 공략 팀들······.

‘아까 그 녀석이 와서 분위기를 망쳐 놓고 갔군.’

이현욱이 없을 때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안민태를 몇 번 추궁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되었다.

역시나 아까 태섭인가 뭔가, 그 녀석이 문제였다.

“······그냥, 말 그대로 자기들 잘 났다고 은근슬쩍 자존심 긁고 간 겁니다.”

저기 저 명품과 값비싼 아이템으로 온몸을 도배한 궁수 플레이어 김태섭,

그는 안민태와 플레이어 훈련소 동기이며 심지어 같은 분대 출신이었다고 한다.

“······저 자식이 청화 길드의 선택을 받은 날, 당연하게도 저는 아무런 선택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거고······ 그래서 이런 꼴인 저를 보니까 신이 난 모양입니다.”

플레이어 훈련소 수료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껄끄러운 관계로 마주하게 되자, 김태섭이 아주 신이 나서 한바탕 활개 치고 간 것이었다.

“하, 새삼스럽지만, 진짜 열 받습니다. 이렇게 무시 받는 것도······.”

“야, 진정하고 던전 공략이나 생각해, 죽으면 자존심이고 뭐고 안 남아.”

“······예,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안민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넘겼다.

이렇듯 한쪽은 전투복을 입고 있거늘 한쪽은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두 팀이 이내 게이트를 마주 보고 나란히 늘어섰다.

“자, 청화 길드가 먼저 진입할 예정이니까, 준비해주세요.”

청화 길드 소속 직원들이 현 상황을 통제했다.

그때, 깁태섭이 안민태의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왔다.

“충성! 안민태 상병님! 하하하!”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안민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민태야, 훈련소 때처럼 내 앞에서 딱, 잘 지켜줘야 하는 거 알지?”

“그래······.”

“군인이면 목숨을 걸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거잖아?”

“······.”

“솔직히 이번에 나 조금이라도 다치면 세금으로 월급 받을 자격 없는 거다? 인정?”

“알았다고······.”

도를 지나치는 깐족거림에, 안민태는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악!”

김태섭이 별안간 비명을 토해내며 제 왼팔을 움켜쥐었다.

“응? 얘가 갑자기 왜 그래?”

그의 동료들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악! 뭐, 뭐야? 시, 시계가 이상해!”

“응? 시계가 왜? 고장 났어? 그거 삼천만 원짜리 시계잖아!”

“······아, 아니! 갑자기 시계가 막 팔을 조여!”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순간 모두가 벙쪘다.

“와, 요즘 명품 시계에는 혹시 지압 기능도 있습니까?”

이현욱이 천연덕스럽게 묻자 여기저기 피식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청화 길드 공략 팀원들도 낄낄거렸다.

“뭐? 당신 지금 뭐라고······.”

“야, 야, 김태섭, 됐으니까 당장 이리로 와.”

김태섭이 이현욱을 노려봤지만, 청화 측 공략 팀장이 나서면서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았다.

“야, 너 이 새끼 이거, 시계가 뭐 어째? 갑자기 게이트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아, 형!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김태섭은 시계를 풀더니 뻘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저들은 아직 이현욱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현욱은 안민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그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게이트 진입이 시작되었다.

“자, 우리가 먼저 가서 터 닦아 놓을 테니까, 설렁설렁 오셔도 됩니다.”

방패를 든 청화 길드원이 말했다.

이미 3차례나 실패했거늘, 여유가 넘쳤다.

그만큼 이번 공략 작전에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예, 그래도 항상 머리 위 조심하세요. 갑자기 뭐가 날아들지 모르잖아요?”

이현욱이 그렇게 조언했다.

하지만 청화 측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예? 허, 참나, 누가 누구한테 조심하라는 거지? 댁들이나 목숨 간수 잘하세요.”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조언이, 아주 핵심적인 공략 방법이라는 것을······.

이내 청화 길드 공략 팀, 14명이 붉은 게이트 안으로 줄지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현욱 일행은 한 차례 더 대기해야만 했다.

“자, 지금부터 180초 대기합니다.”

첫 진입 이후 180초, 3분이 지나고 진입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시스템에 의한 건 아니었고, 입구 부근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룹별로 격차를 두는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현욱은 진입 전에 일행을 돌아보았다.

“자, 곧 우리도 진입할 텐데, 머리 조심한다. 당연하지만 탱커들이 앞에 서서 한 명은 정면을, 한 명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진입한다.”

“······예? 머리 위로 말입니까?”

메인 탱커인 안민태가 되물었다.

머리 위로 방패를 들라니, 절대 정상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그래, 들어가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철저하게 대비한다.”

“예, 알겠습니다.”

미심쩍지만, 이현욱의 말이라면 이제는 군말 없이 따랐다.

“자, 이제 AMT 진입합니다!”

그 말에 모두가 이현욱을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긴장은 해도 당황은 하지 마.”

이현욱의 고갯짓에 선두부터 붉은 지옥 안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현욱은 가장 뒤에서 가장 마지막 순서로 진입했다.

- 주의! 해당 지역은 <위험 지역>입니다.

* 한 번 입장하면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한 퇴장할 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를 뚫고, 붉은 균열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순간······.

훙-

세상이 바뀌었다.

시간, 온도, 냄새······.

밝고, 뜨겁고, 역했다.

여기는 웬 황무지의 한 가운데였다.

그리고······.

“-으아아아!”

“컥! 사, 살려줘!”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먼저 들어간 선발대, 청화 길드 공략 팀의 목소리였다.

무엇의 공격을 받았는지, 그들은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었다.

“방패 들어!”

이현욱의 외침에, 탱커들이 방패를 치켜세웠다.

텅! 텅! 텅! 텅!

그 위로 무언가 쏟아지며 방패들 두들겨댔다.

방패를 미리 들고 있던 덕분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젠장! 화살, 화살이 끝도 없이 쏟아집니다!”

그건 화살 세례였다.

건조한 황무지 위로 수천 개의 화살이, 마치 잡초처럼 꽂혀 있었다.

일행들은 방패 뒤에서 자세를 낮췄다.

‘언덕, 숫자는 약 삼백 마리쯤······.’

이현욱은 방패 너머로 적들을 식별했다.

정면의 모래 언덕 위로 털 달린 두발짐승이 잔뜩 모여 있었다.

“윽! 뭐해! 우리 좀 도와줘!”

이미 화살 비를 한 차례 뒤집어쓴 청화 길드원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은 듯했다.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하나 같이 위태로이 화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이현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머리 위 조심하라고······.”

이현욱은 간접적으로나마 경고했다.

직접 알려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 그렇게라도 했다만, 역시나······.

‘이 던전이 그렇게나 깨기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초반부터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그냥 화살도 아니라 독이 묻은 화살이며, 이걸 막아내면 이내 화염 공격이 쏟아진다.

‘놀은 영악하다. 특히나 올드 알파 메일이라는 보스 몬스터가 있는 집단이라면······.’

올드 알파 메일(Old Alpha Male),

놀 종족의 다양한 보스 몬스터 중 상위 개체였다.

말 그대로 나이든 수컷 우두머리로서 지도력이 남다르며 상당히 지혜롭다.

놈은 첫 번째 공략 팀을 잡아먹은 뒤, 그것들이 저 구멍으로 주기적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항시 구멍을 포위한 채 화살 세례를 날릴 준비를 해두었다.

이렇게 초장부터 큰 타격을 입고 시작하니 공략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해질 수밖에······.

‘하지만 여기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감당할만하다.’

이현욱은 안민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거운 방패를 머리 위로 들고 있는 게 꽤 벅찬 듯했다.

“안민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아, 예!”

이현욱은 그 말을 끝으로 방패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 이, 이현욱 상병님!”

쉭- 쉭- 쉭- 쉭- 쉭-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를 향해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언뜻 보면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현욱이 왼손을 하늘로 뻗는 순간-

우-웅-

그 자욱한 화살 대형이 허공에 우뚝, 멈춰섰다.

다만, 이현욱이 통제할 수 있는 건 쇠로 만들어진 ‘촉’ 부분만이었기에, 수백 개에 이르는 살대와 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쇄.”

쩌-저-저-저-정-

수백 개의 화살촉이 일제히 터지며 수천 개의 쇳조각으로 분열되었다.

살대와 깃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쇳조각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웅-

다시 허공에 멈춰섰다.

이제는 완벽하게 이현욱의 통제 범위 안에 들어왔다.

“와······.”

모두가, 특히나 청화 길드의 공략 팀이 그 기적과도 같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 위를 조심해야 하는 건······.”

이어서, 하늘을 향하던 그의 왼손이 땅으로 천천히 기울어지자······

“······너희도 마찬가지야.”

언덕의 놀 병력의 머리 위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쇳조각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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