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청담동, 예상 밖의 사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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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가능했나?”
이현욱의 보고가 끝나자 최정철 장군이 나지막이 물었다.
“음, 자네의 프로필을 보니까 300g을 조종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데 방금 자네가 보고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몇 배를 움직인 것 같거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푸근한 인상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곤조곤 말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현욱은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뒤 대한민국의 수호자 중 하나로 불리게 될 테니 말이다.
‘오죽하면 네크로맨서가 가장 경계해서 일찌감치 암살을 시도했을 정도의 인물이다.’
6년 뒤, 북쪽부터 내려오는 네크로맨서 군단의 첫 번째 침공을 최정철이 막아낸다.
1만 마리에 이르는 언데드 병력, 그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나는 불사의 군단을 똑같이- 끈질기게 타오르는 불길로 휩쓸어버림으로써, 재생할 수 없는 잿더미로 전락시켜 버린다.
‘인페르노가 무한정 쏘아댈 수 있는 로켓포라면, 최정철은 딱 한방의 전술 핵폭탄이다.’
마법사 계열 중에서도 최고의 특성인 ‘아크메이지(Archmage)’로서, 다른 모든 마법을 배제해버리고 오로지 범위와 파괴력에 치중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형적이지만, 확실한 군용 전력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서울의 불과 부산의 불,
두 불꽃이 모두 꺼지며 한반도는 어둠에 잠기고 말았다.
······짧은 생각을 마친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정철의 물음에 대답했다.
“얼마 전, 업적을 깼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능력이 향상됐습니다. 여단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300g이 아니라, 15kg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고 몇 가지 스킬도 얻었습니다.”
15kg, 적당한 선에서 능력 상승을 오픈했다.
“음, 업적이라······.”
이 게임에서 ‘업적 시스템’은 ‘퀘스트’만큼이나 흔치 않은 사례였다.
“정확히는 엘리트 몬스터를 3마리째 잡았을 때 <둔재의 반란>이라는 이름의 업적을 얻었는데, 아마도 능력 상승이 불가능한 특성이 얻을 수 있는 업적이 아닐까 합니다.”
미리 준비해둔 그럴듯한 디테일까지 첨가했다.
최정철은 다소 고민하는 듯했으나 이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아직은 ‘F등급’도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시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업적,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이 될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런 업적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긴 해.”
최정철은 김강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대장, 그렇다면 이 친구는 이제 사실상 F등급이라고 볼 수가 없겠군그래?”
“여단장님, 제가 볼 때는 군인으로서 자질은 이미 그 한계를 한참 뛰어넘었습니다.”
“하하하, 그래, 인정하지. 대대장이 칭찬할만한 이유가 있는 친구였어.”
성장할 수 없다는 공식에 따르자면 F등급이겠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C등급 이상이다.
이로써 장교 임관의 가장 큰 걸림돌마저 치워졌다고······ 김강석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현욱 상병,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훌륭한 일을 해냈어. 단순히 AMT 대원으로서 작전을 잘 수행한 게 아니라, 수많은 목숨······ 그래, 사회의 일면을 지켜냈다고 해야 할까······.”
최정철은 짧은 팔을 뻗어 이현욱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다면 응당 포상이 있어야겠지?”
역시, 당연했다.
“혹시, 원하는 아이템이 있나? 뭐, 마법 갑옷이라든지 뭐든 한번 말해 봐.”
안타깝게도 여단 무기고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갑옷은 금속 흡수가 끝나면 엇비슷한 게 생길 테니까 필요 없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콕 짚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고······.
‘곧 필요해질 무기를······ 그래, 그걸 달라고 해야겠다.’
이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필요한 아이템······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편하게 말해 봐. 내가 지시해둘게.”
“신성력이 담긴 무기를 갖고 싶습니다. 한 손 검 두 자루 정도면 좋겠습니다.”
신성력(神聖力), 말 그대로 성스러운 힘이다.
프리스트나 성기사의 근간이 되는 힘이며 어둠의 힘의 반대급부였다.
즉, 언데드나 고스트 계열을 상대할 때 아주 유효하다.
‘신성력은 미래를 위해서 꾸준히 늘려 놓아야 한다.’
이번에도 떠오르는 어떤 이름 때문이었다.
한편, 최정철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음, 자네의 능력은 신성력과 관련이 없을 텐데?”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양한 속성의 무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왜지?”
“이번 언 럭키 이벤트에서 등장한 그 거미 형태의 몬스터는 물리 데미지가 사실상 무시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렇듯 어떤 특성과 속성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하게 될지 모르는 게 AMT 작전일 텐데······ 특히나 언데드 계열같이 생명력이 질긴 몬스터를 마주할 땐 정말 곤란해질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신성력이 담긴 무기를 갖춰야겠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럴싸하게 둘러대자 최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철두철미한 친구군그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자세도 되어 있고 아주 좋아!”
“감사합니다.”
“그래, 군수 쪽에 말해서 괜찮은 놈으로 몇 자루 뽑아줄 테니까, 몇 개든 챙겨도 돼.”
최정철은 군인 자세 같은 걸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기에 이런 대사가 큰 점수가 되진 않겠지만, 김강석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조리 만족스러워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가슴에 작대기 하나 더 얹어 줘야 하지 않겠나, 대대장?”
“예, 그렇지 않아도 제가 그걸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처리하겠습니다.”
상병에서 작대기 하나 더, 병장을 뜻했다.
즉, 특별 진급이다.
정상 진급은 약 2달 뒤였다.
‘이거······ 장교로 만들려고 사전 빌딩을 하는 것 같은데······.’
이현욱은 이 두 사람의 무슨 의도로 특별 진급을 내리는 건지 눈치챘다.
미안하지만, 절대 그 계획에 당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며칠 뒤부터 이현욱 병장이 되겠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흠, 안 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면 큰일 난다, 자네!”
“······예?”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드레이크 정도는 잡아야 할 테니까! 하하하!”
최정철이 농담을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
이현욱은 여단장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여단장님, 이번 사건으로 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유리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건 AMT 입장에서도 환영할만한 결정이었다.
자신들이 키워 보려는 병사를 민간 길드들이 눈독을 들이면 피곤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다루는 뉴스에도 이현욱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 ······서울역 언 럭키 이벤트 사태 당시 AMT 병사의 활약상이 속속히 제보되고 있습니다. 권왕 한태산이 입장하기 전에 단 한 명의 병사가 몬스터로부터 팔백여 명의 시민을 구해냈다는 건데요, 그러나 해당 병사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 ······서울역에 고립되었던 시민들은 권왕 한태산보다 그 AMT 병사가 자신들을 구해낸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영웅이 주목받아야 마땅하다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하게 취재하려고 하는 움직임도 당연히 존재했다.
현재로서는 세간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이니 당연했다만······.
‘어차피 4일 뒤면 그 모든 걸 묻어버릴 빅이슈가 터진다.’
서울역 언럭키 이벤트는 말 그대로 전조였다.
곧 시작될 4차 웨이브의 본격적인 발생······.
지금까지의 모든 가십거리는,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현욱 역시 지금부터 그때를 대비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 금속 흡수까지 (16:19:59) 남았습니다.
“한나절이라······.”
‘마나난 막 리르의 비밀 갑주’는 소화가 쉽지 않은 물건이었다.
체내 용광로를 150%의 효율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굴리고 있었음에도 앞으로 16시간이 필요했다.
“후······ 역시 영웅 등급 아이템은 아직 흡수하기 벅차군.”
물론 그사이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다.
우선 여단장이 내려준 ‘포상 포인트’를 현금화할 생각이었다.
‘이번 포상으로 얻은 게 8,000포인트······.’
현금으로 따지면 약 1,200만 원이다.
그리고 어제 월급이 들어와서 230만 원이 더 생겼다.
이현욱은 PX 아이템 상점에 현금화할 만한 아이템들을 대거 샀다.
그리고 박철수를 호출했고 바로 그날 저녁, 박철수가 면회를 왔다.
신길에서 남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가능했다.
이현욱은 면회실에서 박철수와 마주 앉았다.
“형,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해. 내가 움직일 수가 없는 처지다 보니까······.”
“괜찮아, 왜 무슨 일인데?”
이현욱은 먼저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최고급 분유 4통이었다.
“일단 이거 받아. 제일 좋은 거라던데, 애가 뭘 먹는진 모르겠지만 한 번 골라봤어.”
“아, 뭘 이런 걸 다······ 고맙다.”
이어서 오브를 넘겨서, 전부 현금화하여 주식 투자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 그리고 형, 내가 부탁할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대장장이 골목에 좀 가줬으면 해.”
“대장장이 골목? 거기는 왜?”
강정두 장인의 명함에다가, 그에게 주문할 물건을 적어서 내밀었다.
“신성력이 담긴······ 쇠 구슬? 어, 알았어. 그런 게 왜 필요한데?”
“다 쓸모가 있어서 그래. 강 장인한테 내 이름을 말하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성수 제조업 투자도 그렇고, 곧 신성력이 깃든 아이템 가격도 오르니까······ 아, 설마 사재기하는 거야?”
이현욱이 투자하라고 한 종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다니, 역시 눈치가 빠르다.
다만,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질 않았으니 제대로 맥을 짚을 리가 없었다.
“아니, 사재기를 고작 300만 원어치로 가능하겠어?”
“음, 아무튼 알았어. 근데 그 주식들······ 오르는 거 정말이야? 관련 뉴스도 없던데?”
“형, 조금만 기다려 봐. 그리고 형도 꼭 투자해.”
“······.”
“형, 내 말 믿어.”
“그래, 알았다.”
곧 대재앙이 시작되면서 그 옛날의 비트코인처럼 펑펑 오를 테니까······.
이현욱은 그 말을 삼켰다.
***
“뭐야, 왜 한 명도 없어?”
이현욱이 면회실에서 돌아왔을 때 생활관은 텅 비어 있었다.
전부 데리고 훈련을 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다 어디 PX라도 간 건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물병을 챙기고 병영 밖으로 나갔다.
체내 용광로가 가동 중이었지만, 그래도 운동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훈련장을 이용하려면 전투복을 입어야 했기에, 이현욱은 전투복으로 환복했다.
그리고 훈련장으로 가는 길목에······.
“······어! 오셨습니까?”
철봉 근처에 안민태를 비롯한 분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분대 병사들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이현욱의 등장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마다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아 이현욱 상병님! 수고하십니다!”
“수, 수고 많으십니다, 헤헤······.”
이거, 아무리 봐도······.
‘이 땀내 풀풀 나는 남자애들한테 주목받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현욱은 이상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러하니 철봉 4개에 열댓 명이 붙어 있는 꼴이었다.
포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 명도 없었는데······.
“······음, 뭐야, 웬일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아! 이 철봉 쓰시겠습니까?”
4분대 일병 한 명이 철봉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아니야, 너 써. 난 훈련장이나 가야겠다.”
“어? 그럼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녀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이현욱에게 따라붙었다.
평소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던 사이였거늘, 아주 노골적으로 친한 척을 한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한 명이 아니라 서너 명이었다.
대놓고 따라오는 게 그 정도였고 멀찍이 떨어져서 은근슬쩍 따라오는 애들도 있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지?’
안민태가 히죽 웃으며 제일 가까이 붙었다.
“이야, 무슨 엿장수 따라다니는 애들 같습니다. 엿 한 조각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저 표정들을 보십시오.”
“그 비유 뭐야, 안민태······ 네가 엿장수 따라다니던 세대야?”
“뭐, 그냥 저런 모습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이현욱은 웃긴 이야기를 하나 듣게 됐다.
“······준모 걔가 결투 훈련을 했어?”
“예, 맞습니다. 그래서 방금 의무실 갔습니다.”
신병 한 무리가 전입해 올 때면, 선임들의 악취미가 하나 발동한다.
신병들끼리 결투 훈련을 붙여보는 것이었다.
박준모도 일병 달기 전까지는 그런 놀잇감이었는데, 그의 전적은······ 전패였다.
정말이지 지지리도 소질이 없었다.
“하, 의무실? 또 깨진 거야?”
“하하,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응?”
“상대 코를 깨버린 다음에 감전시켜서 대자로 눕혔습니다.”
······오, 웬일이지?
이현욱은 그런 표정을 짓자 안민태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박준모 그 자식, 이현욱 상병님 본받겠다고 아주 요즘 난리였습니다. 턱걸이도 이제 7~8개씩 5세트하고 능력 다루는 훈련도 꼬박꼬박하고 대견할 지경입니다.”
생각해보니, 서울역에서도 전기를 다루는 재주가 꽤 늘어난 것 같았다.
“아, 그래서 설마······.”
이현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현욱을 쫄래쫄래 따라온 이 녀석들, 이현욱이 완전히 달라진 것에 이어서 박준모까지 좀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니까, 이현욱한테 뭔가 대단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뭐랄까, 무슨 대치동 1타 강사가 된 기분인데······.’
이현욱은 모르고 있었지만, 중대 내에서 우스갯소리로 “이현욱 코인 타면 떡상한다.”라는 농담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 한 명이 더 다가왔다.
“저······.”
덩치 큰 일병, 이원석이었다.
그는 한쪽 어깨에 훈련용 대검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현욱 상병님?”
녀석의 두꺼운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리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치고받았던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현욱 역시 이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시비를 걸려는 건가 싶었다.
“······.”
그런데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병풍처럼 데리고 다니던 패거리, 제 동기들도 저 멀리 떨어져서 쭈뼛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저, 저랑 결투 한 번 더 하시겠습니까?”
그 발언에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지난 패배 이후 칼을 갈다가 ‘리벤지 매치’를 신청하겠다는 건가?
“······.”
잠깐의 고요······.
그러자 이원석은 순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 그, 그러니까······ 제가 막 또 시비 걸거나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
“저, 그······ 제 문제점이 뭔지 한 수 배우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원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 제가 부사관 지원을 하고 싶은데, 영 부족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이것도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오상국과 곽진철, 그 녀석들과 어울리며 양아치 짓을 일삼던 녀석이 자신을 두들겨 팼던 이현욱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한 수 가르쳐달라니······,
이현욱은 피식 웃었다.
“잘됐다.”
“예?”
“나도 살아서 움직이는 훈련 상대가 있었으면 했는데, 올라와.”
이현욱은 전투 박스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 그······ 허······.”
이원석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난번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싫어?”
“아, 아닙니다! 가르쳐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두들기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현욱 상병님? 저, 모, 목은 좀 조르지 않아 주셨으면······.”
이현욱은 눈을 흘겼다.
“오크 중 상위 개체는 그래플링과 그라운드 기술을 쓰기도 하는데, 탱커인 네가 그런 놈들 만나면 도망갈 생각이야?”
“아······.”
그러자 녀석은 제 볼을 툭툭 두들기더니 전투 박스로 냅다 뛰어 올라왔다.
“예! 그럼 기절할 준비도 하겠습니다!”
이런 현상, 중대원들의 관심과 부탁들, 솔직히 영 귀찮은 일이었다.
다만······.
‘아주 쓸모 있다.’
이현욱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4차 웨이브······.
곧 시작될 그 길고 긴 지옥을 주파하기 위해서는 대대 병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4차 웨이브 이후 이곳 1대대 1중대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날 포함하여 단 7명뿐이었다.’
그래, 사실상 전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이현욱은 열심히 훈련 중인 중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들이 내 말을 잘 따라준다면,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는 손목을 풀며 이원석과 마주 섰다.
‘······4차 웨이브를 통째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
1개의 게이트를 통제하고 공략하는 게 바다낚시라면, 4차 웨이브는 거대한 고래를 사냥하고 해체하는 작업과 같았다.
즉, 절대로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양을 헤쳐나가는 포경선을 운영하듯 다수의 선원이 힘을 합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포부를 지지하듯,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 금속 흡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마나난 막 미르의 비밀 갑주)
* 조종 가능한 금속 무게가 상승했습니다. : 2,961g
‘영웅 등급의 갑주, 드디어 흡수했군.’
- 현재 조종 가능한 ‘금속’ 무게 : 21,358g
단숨에 2.9kg이 증가, 금속 통제력이 20kg을 돌파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했다.
- 축하합니다!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여 ‘강체화’ 스킬이 대폭 강화됩니다!
삼킨 금속이 ‘갑옷’ 아이템인 만큼 그와 유사한 ‘강체화’와 저절로 융합되었다.
영웅 등급의 갑주에 붙어 있던 온갖 옵션이, 그것 중 일부가 ‘스킬화’되었을 것이었다.
이현욱이 그 상세 내용을 확인하려는 찰나······.
- 훅- 아, 행정반에서 전파합니다······
예상 밖의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 ······상병 이현욱, 상병 이현욱, 지금 즉시 대대장실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대대장님 호출입니다. 이상 전파 끝.
토요일 오전에 대대장의 호출이라니, 대체 무슨 일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현욱은 즉시 대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대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거길 보내면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김강석의 고함과 같은 목소리,
이현욱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지르는 김강석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흑호 부대 레이드 전술 교육관, 천명호 준위였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현욱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나저나 다 죽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