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서울역, F등급과 S등급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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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보십시오! 돔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울역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군인, 플레이어, 기자 모두가 탄식을 내뱉었다.
권왕 한태성이 진입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거짓말처럼 돔이 씻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타호, 게으른 호랑이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면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근처에서 현장을 중계하고 있던 방송사 리포터들이 다급히 현장 상황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당연히 ‘권왕’ 한태산이었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중요한 건 서울역 안에 고립되어 있던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지가 중요한 만큼,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벅참이 있었다만, 아직 희소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중요한 건 돔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고립된 사람들의 안위였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서울역 광장,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은 환희에 찰 수밖에 없었다.
“어! 사,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돔이 완전히 사라진 직후, 서울역 1번 출구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AMT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걸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지옥이 끝났다.
그 장면을,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 장면을 고스란히 담았다.
“저길 보십죠! 천만다행으로 생존자가 매우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다소 이상하게도 그들 모두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피투성이 지옥도를 예상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구급대원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 진짭니까?”
리포터는 이어 마이크 너머의 누군가에게 그렇게 되묻더니,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딱딱하게 굳은 한편······ 어딘가 희열이 담겨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믿기시지 않겠지만······.”
그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원, 전원 생존이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쉽사리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서울역 언 럭키 이벤트 지역 내에 고립되어 있던 민간인 전원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AMT의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AMT가 훌륭한 일을 해낸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적어도 수백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런데 돔이라는 베일이 벗겨지자, 반전 중에서도 최고의 반전이 드러났다.
“정말이지, 기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 기적에 가까웠다.
이는 세계 각지에 전파되어 ‘서울역 기적’ 같은 제목으로 뉴스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현욱은 서울역에서 빠져나오는 시민 행렬의 가장 앞줄에 있었다.
AMT가 시민들의 전방과 후방을 호위하며 나가는 그림이 꽤 좋기도 했다만, 혹시나 한태산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 게 뻔하니, 일찌감치 앞장서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안녕, 우리 또 보네요?”
역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한쪽에 기대어 서 있던 여자가 말했다.
백색 정장을 입은 여자, 유해나였다.
그녀가 보라색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이 지역의 담당 길드 <청화>의 서울공략부장인 만큼, 현장에 대기 중인 듯했다.
“······그러게요.”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어쩔 수 없이 자주 마주치게 될 거라고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운이 좋으셨네요. 저기 안에 고립되었는데 살아남았다니, 듣기로는 당신······ F등급이라면서요?”
“······.”
“하, 뭐야······.”
히죽, 입꼬리가 올라간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
“어떻게 알았냐고요? 당신이 그때 하라는 대로 이 전화 좀 썼죠. 그런데 F등급이라니, 좀 실망이 커요. 난 그래도 한 C등급인 줄 알고 명함까지 건네준 거였는데······.”
“예, 오늘도, 그리고 그때 오크 때도 그냥 전적으로 운이 좋았던 겁니다.”
이현욱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내 명함, 잘 가지고 있겠죠? 혹시나 버리진······ 당연히 않았겠지만, 내 명함이 당신한테 행운을 가져다주는 걸지도 몰라요. 또 앞으로도 어떤 행운이 될지도 모르고요.”
모욕을 주면서도 은근슬쩍 연락하라는 뜻을 내비친다.
그로써 자신이 위에 있다는 걸, 스스로 상기한다.
그러나 만약 이현욱이 정말로 연락한다면, 그녀는 아주 잠깐의 만족감을 느끼고 조금 가지고 놀다가 이내 처참하게 내칠 것이었다.
자신과의 압도적인 격차를 절실히 깨닫도록······.
그게 저 거미 같은 여자의 악취미라는 걸, 이현욱은 알고 있었다.
“뭐, F등급이라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싸움 하나는 잘하던데,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유해나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남몰래 히죽 웃었다.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이현욱이 명함을 거절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너무나 괘씸했다.
그래서 더욱이 제대로 굴복시키고 싶었다.
‘심지어 F등급 따위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 명함을 거절한 거지?’
그렇기에 방금 우연히 그를 발견했을 때, 다시금 가슴 속 이름 모를 불이 타올랐고 구태여 명함을 언급하며 전화를 걸도록, 미끼를 물도록 유도했다.
‘청화라는 유혹을 못 이기는 순간, 내 위치와 네 위치가 어떻게 다른지 깨닫게 해줄 테니, 어서 미끼를 물어라······.’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그녀의 명함에 새겨진 두 글자 청화(靑火)였다.
그 이름은 오늘날 ‘힘’과 ‘명예’ 그리고 ‘돈’을 뜻했다.
청화는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하는 세계이며 동시에 그녀의 성이기도 했기에, 청화에 발을 딛는 순간, 그게 누구일지라도 그녀의 발아래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즉, 유해나는 거의 모든 플레이어의 욕망을 움켜쥐고 흔들만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법칙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건 아니었다.
“야! 유해나!”
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유해나의 골을 울렸다.
‘한태산······.’
다만, 청화라는 성에서도 예외가 되는 존재였다.
S등급 플레이어······.
그들은 모든 규칙을 초월한 존재였다.
“약속대로 바로 달려와서 한탕 뛰었다! 오늘 저녁 같이 먹는 거지?”
“······안 돼.”
“응? 왜! 설마 또 약속 안 지키려는 거야?”
그녀는 잠시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나중에 먹으면 되잖아······ 지금은 이 사건 보고 받고 보고 올려야 해.”
평소의 우아하고 여유 넘치던 음색과 달리, 아주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눈매에는 경계심이 묻어났다.
이는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응? 무슨 길드 딸내미가 제 손으로 보고서를 올리고 있어? 야, 그래도 내가 네 부탁 받고 이렇게 먼 길 달려왔는데, 밥 한 끼는 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언럭키 이벤트 보상 소유 문제 안 묻기로 했잖아. 일단 그걸로 만족하지?”
언럭키 이벤트 정도라면 영웅 등급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컸고, 그 아이템이 한태산에게 돌아갔을 것이란 건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될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 그거?”
한태산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야, 내가 1위가 아니다?”
그 말에 유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보스 몬스터, 네가 잡지 않았어?”
“그건 맞지, 분명 맞는데······ 뭔가 이해가 안 가네······ 그러니까, 내가 보스 몬스터를 두들겨 패서 반죽으로 만들긴 했는데, 씁, 그 전에 웬 놈이 칼침을 놓긴 했거든?”
“······.”
“다 끝나고 나니까, 내가 2위더라고······.”
“······.”
다시 말해서,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 다른 플레이어에게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한태산을 제치고 그걸 얻을 수 있단 말인가?
‘AMT 구조대, 15레벨 이하의 플레이어 중에 그럴 만한 인재가 있어?’
유해나는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무튼, 알았어. 나중에 봐.”
“야, 진짜로 밥 안 사줄 거야?”
“오늘은 진짜로 바쁘니까, 다음에 연락해.”
“알았어! 그럼 다음에 꼭 사줘야 한다!”
유해나는 한태산으로부터 멀어지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자식, 2위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알려지면 되게 우스워질 텐데······.’
멋들어지게 출동한 청화 길등의 S등급이 서울역의 시민을 구해냈다,
그 이미지가 산으로 갈 판이었다.
그리고 약 30분 뒤······.
“······방금, 뭐라고요?”
유해나는 이번 사건에 대한 중간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예? 어떤 부분을 다시 말씀드릴까요?”
유해나의 반응이 평소 같지 않자 조사팀장이 긴장하며 물었다.
“방금 그······ AMT 병사가······ 이번 사건에서 최대 활약을 했다고요?”
“예, 아직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고립되었던 시민들이 입을 모아 말한 내용입니다.”
“후속 투입된 구조대원인가요?”
“그게, 아직 확실치는 않은데, 현장에 있었던 역 경비대원에 따르면 처음부터 서울역에 있었던 병사라고 합니다.”
“설마······.”
정확하지 않았지만, 유해나는 왠지 그 병사가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구조대 병력으로 투입된 게 아닌 ‘고립’되어 있던 병사······.
이현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운이······ 좋았다고?’
되짚어보니, 그때 그 묘한 여유조차 거슬렸다.
그녀가 알기로는 그건 F등급이 가질 수 없는 표정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 사람이라면······.’
그때 그 묘한 여유를 얼핏 내비치던 표정은 정말이지, 그녀를 짜증 나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심경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
한편, 이현욱은 대대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김강석은 굳은 표정으로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자네한테 듣고 싶은 게 많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지······.”
전 세계 모든 전문가가 입을 모아 말하길,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솔직히, 김강석도 그 의견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단 절반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아주 작은 희망일지라도 놓지 않기 위해 다분히 노력했다.
작전 지휘관인 그가 희망을 놓으면 작전의 방향성이 흐트러질 테니······.
‘그런데······.’
······모든 면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아니, 이변을 넘어서 기적이었다.
모두가 살아남았고, 이현욱의 펼친 활약은 단순한 기지 정도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기대를 넘어서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현욱, 얘는 대체 정체가 뭐지?’
김강석은 이현욱을 믿었다.
그의 남다른 면모를······.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것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의심’은 ‘경이’의 첫 번째 단계라는 걸······ 김강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 감정, 처음은 아니다.’
그는 최초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세계는 오래되었다고 해서 최고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뒤늦게 각성한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뛰어넘는 걸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한태산, 기백준, 서은하, 그리고 아마도 최영준도 앞으로는······.’
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세상이 내보인 첫인상은 단연 ‘의심’이었다.
그러나 증명이 거듭되며 세상의 시선은 ‘믿음’과 ‘동경’으로 바뀌었다.
이현욱도 어쩌면 그런 과정 중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능력 있는 장교가 되는 게 아니라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
‘하지만 F등급인데······.’
앞서 언급된 이들은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러나 이현욱은 한계가 분명하다.
결국, 운명에 부딪혀서 꺾이고 말 것이었다.
김강석은 씁쓸함을 억누르고 이현욱을 바라보았다.
“이현욱 상병,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그보다 먼저······ 자네가 만나야 할 분이 있다.”
김강석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서울역 광장이었다.
“모두 이 지역에서 비키세요! 텔레포트가 열릴 겁니다!”
한 장교가 그렇게 외치며, 넓은 공간을 비우고 있었고, 그 옆, 헤드셋을 끼고 있던 마법사 계열의 준위 한 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준비 완료! 삼! 둘! 하나! 개방합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시퍼런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쩌-어-어-엉-
그건 대규모 텔레포트이었다.
서울역 광장의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 빛 사이에서 한 무리의 AMT 군인들이 걸어 나왔다.
그 중심에는 제3항마여단장, 최정철 장군이 서 있었다.
김강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이현욱을 돌아보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단장님께서 널 만나고 싶어 한다.”
김강석의 목소리에는 자못 긴장이 어려있었다.
그러나 이현욱의 머릿속에는 영 다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 하나짜리 포상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