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서울역, 언럭키 이벤트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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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발생 약 10분 전.
용산, 제3항마여단 본부, 여단장실.
“······뭐? 김 중령, 그게 지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제3항마여단 제1대대장 김강석은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에게 고함치고 있는 사람은 제3항마여단의 참모장 구진태 대령이었다.
“참모장님,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니, 이건 진지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 이 사람아!”
김강석은 방금, 여단장과 참모장 앞에서 근래에 벌어진 세 개의 사건을 보고했다.
영내 고블린 게이트 발생 사건, 이태원 2동 코볼트 게이트 사건, 남산 오크 게이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F등급 플레이어, 이현욱이 있음을 빼놓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반응이 참 좋았다.
병사들이 잘 훈련되어 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 끝에 이현욱을 장교로 키우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지금 병사를, 그것도 F등급을 장교로 임관시키겠다고 말하는데 누가 옳다구나 하겠어?”
“······.”
“하······ 너는 지금 이게 진짜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참모장의 질타 속에서, 김강석은 제3항마여단장 최정철 장군을 바라보았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다만, 구진태의 거친 발언을 말리지 않는 걸 보면 그도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강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참모장님, 저는 AMT 장교의 자질이 게임에 의해서 무작위로 주어지는 플레이에 능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오히려 이 시스템이라는 모든 걸 극복해낼 수 있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울 수 있는 의지······ 그 병사에게는 그 자질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야! 김강석이! 우리가 뭐 땅 파서 병력 뽑아서 싸우냐? 안 그래도 플레이어 훈련소 수료자들이 죄다 민간 길드로 들어가는데, F등급이 장교로 임관해버리면 대체 누가 AMT 장교 지원을 하겠냐고 이 사람아! 이러다가는 AMT 폐지론이 일어날 지경이라는 거 너도 알잖아?”
F등급이 장교가 되면 AMT의 명예가 실추된다, 구진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솔직히 일리 있는 말이다.’
김강석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제는 대 몬스터 전(戰)이라는 게, 인류를 구하겠다는 사명 같은 것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었다.
힘 있는 플레이어는 명성과 돈을 원한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게 AMT의 최대 과제 중 하나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장교 후보생에게 F등급 플레이어와 나란히 서라고 한다면······.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때, 최정철이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참모장, 잠깐 가만히 있어 봐.”
“여단장님, 이건 진짜로 안······.”
구진태가 항변하려고 했지만, 최정철의 미소를 보고는 말을 뚝 멈췄다.
분명 사람 좋은 미소였다만······ 이들에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참모장, 나도 좀 말하고 싶어서 그래.”
“아! 죄송합니다. 말씀하시죠, 여단장님.”
불같이 화를 내던 구진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AMT 제3항마여단장, 최정철 준장.
키가 작고 땅딸막한 체구와 벗어진 머리, 늙은 불도그를 연상케 하는 귀여운 외양, 특히나 곰과 같은 김강석 앞에 앉아 있으니 유난히 작아 보였다만, 아무리 잘난 플레이어일지라도 감히 그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대한민국 플레이어 랭킹 31위의 A등급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규모 광역 마법’을 혼자서 시전(示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술 병기’급의 전력으로, 특히나 ‘어인’이 정복한 남해안의 섬 하나를 불살라서, 수백 마리의 어인 무리를 통째로 구워버렸던 그의 모습을 아는 이라면······.
“흠, 재밌어. F등급을 두고 지휘관들이 이렇게 열을 내다니, 허허······.”
그의 이 푸근한 얼굴 속에 숨어 있는 공포를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오죽하면 김강석마저도 이 사람의 위엄을 느끼며,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뭐, 나는 대대장이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봐. 근데, 대대장은 이미 그 친구한테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그래도 몇 번 더 시험을 치렀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지?”
“예, 물론입니다.”
“좋아, 장교 임관이 뭐 강점기 왜놈 순사 칼 부리나 완장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달았다가 땔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나도 확신이 필요해. 내 생각 이해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그렇게 나름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음에도, 김강석의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여단장님의 시험이라면, 사실상 무리다.’
김강석이 군인으로서 마음가짐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최정철은 철저히 오로지 실력만을 중요시한다. 완벽한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의 마음에 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였다.
똑- 똑-
그때, 누군가 여단장실의 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여단장의 부속실장이었다.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여단장님, 다름이 아니라 1대대장을 찾는 전화입니다. 위급한 것 같습니다.”
위급한 전화라니······ 김강석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어서 받고 와, 대대장.”
“예!”
김강석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여단장실로 들어온 김강석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여단장님, 1대대의 위수 지역 내 게이트 발생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말을 멈추고, 마른 침을 삼켰다.
“······서울역입니다.”
“서울역? 그거 정말 좋지 않군그래.”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김강석은 어디선가 들고 온 태블릿 PC를 여단장에게 내밀었다.
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건 드론 캠을 통한 실시간 현장 화면이었는데, 정작 서울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역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었다.
“돔?”
그건, 검은 돔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검은 돔이 서울역을 뚜껑처럼 닫아버린 것이었다.
“맞습니다. 서울역 전체가 이렇게 검은 돔으로 휩싸였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최정철 역시 인상을 썼다.
“큰일이군. 이거 <언럭키 이벤트>다.”
“예,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제한이 있는 것 같은데······ 내부에 족히 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고립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언럭키 이벤트의 기본적인 특성일 일정 지역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씁- 이벤트 지역 내 출입 레벨 제한 조건이 달렸겠지? 그렇다면 역 경비대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것 같은데······.”
“정확한 정보는 확인해봐야겠으나, 분명 그런 조건이 동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하게 확인하게 보고드리겠습니다.”
최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러고 보니 F등급 그 친구, 15레벨이 안 될 텐데······ 이번에 구조대 임무 맡겨 보는 건 어때? 아까 말했던 그 시험으로 말이야.”
“그게······.”
최정철이 생각보다 이르게 시험을 제시했지만, 김강석은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여단장님, 그 친구는 이미······ 돔 안에 있습니다.”
“······응?”
“휴가 복귀 중, 여 부사관 한 명과 같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서울역에 언럭키 이벤트가 발생했습니다.”
최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그걸 어쩌나······ 뭐 어쨌든, 시험이 될 수는 있겠군그래, 그 안에서 맨몸으로 살아만 남아도 충분할 테니.”
“······.”
“대대장, 얼른 가 봐.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야.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될 텐데, 어떻게든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해.”
“예, 알겠습니다!”
아이러니하다.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테스트’를 하겠다고 말한 뒤, 누군가의 목숨을 지키라는 ‘사명’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게 바로, 생명을 희생하고 앗아가면서까지 다른 생명-국민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현실적인 마인드였다.
***
뻐-엉!
폭음과 함께 거미의 피부 조각이 터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처음에는 등 쪽, 두 번째는 꽁무니 쪽, 이어서 다리들이, 차례차례 터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부가 벗겨져 나간 거미는 마치 탈피를 마친 가재 같은 꼴이 되었다. 심지어 깨진 피부 조각이 연한 살점 안으로 파고들면서 녹색 진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끽! 끽! 끽! 끽!
제아무리 덩치 큰 놈일지라도 버틸 수 없는 고통이었고, 놈은 연약한 괴성을 토해내며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쿵-구-구-궁!
바닥을 연달아 울리는 진동,
이현욱의 측면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또 다른 거미가 8개의 발을 구르며 이현욱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꺅! 위험해요!”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현욱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웅-
이번에도 그저 왼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맹독갑옷거미, 아마도 여기가 첫 번째 등장이다.’
현시점 상 처음 등장하는 몬스터였다.
그러나 이현욱은 이미 저 끔찍한 생명체에 관해 샅샅이 알고 있었다.
‘금속 재질의 체내에는 맹독 가스를 품고 있다. 함부로 터트리면 큰일 난다.’
그는 뻗은 왼손 방향으로 금속 통제력을 집중했다.
굳이 손을 뻗지 않아도 금속을 느낄 수 있다만, 이건 일종의 안테나 역할을 한다.
즉, 더욱 정확한 지점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는 아주 육중한 금속 덩어리-놈의 딱딱한 피부를 감지했다.
“······넌 어쩔 수 없이, 내 손 안이다.”
이현욱은 조그맣게 읊조렸다.
금속 성분의 몬스터는 그 강함과 상관없이 이현욱의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것들의 몸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걸 넘어서 이렇게 분쇄하기까지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지배할 수 있다.’
이현욱은 놈의 피부를 마치 잡아 뜯는 것처럼 쥐고 흔들어댔다.
끽! 끽! 끽! 끽!
그 작은 손짓만으로도 놈이 고통을 호소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파쇄!’
- 마나 (131/159)
뻐-엉! 뻐-엉! 뻐-엉!
이번에도, 놈의 단단한 껍데기가 잘게 잘게 부서져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허, 헉! 뭐, 뭐야?”
서울역 경비팀장은 이현욱의 등 뒤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그렇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 미친······.”
그가 보기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AMT 소속의 플레이어, 그것도 겨우 일개 병사가 저 엄청난 몬스터를, 저렇게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니······.
‘그리고 저, 저건 분명······ S등급 플레이어의 능력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레벨 성장 특성인 E등급부터 A등급까지의 플레이어는 솔직히 압도적인 ‘신비’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물론 레벨이 오르면서 성장한다면 언젠가 ‘초인’ 같다는 느낌을 줄지언정······.
‘······권능!’
그게 인간을 초월한 어떤 ‘기적’ 혹은 ‘권능’ 같다는 감상을 줄 수 없었다.
다만, S등급은 달랐다.
그들이 발휘하는 능력은 스킬이라는 이름보다 ‘권능(權能)’이라고 불릴 법했다.
단순히 한 명의 뛰어난 전사로 활약하는 걸 넘어서 손짓 하나만으로 전장을 휩쓸 수 있는 능력······ 한 사람의 몸뚱이로 전술 병기, 전략 병기 취급을 받을 만한 힘······.
‘2년 전, 인페르노가 부산의 한 오염된 빌딩을 불사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물론 지금 저 남자가 보여주는 힘이 S등급 플레이인 인페르노의 권능과 같은 규모라고 할 수는 없었다. 면밀하게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상만은 확실하게 비슷했다.
초인을 초월한 어떤 신비함, 그런 게 엿보였다.
그때였다.
또 무엇을 행하려는 건지, 남자가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스-스-스-스-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미의 단단한 피부 조각, 그것들이 하나둘 꿈틀거리더니······
웅- 웅- 웅- 웅- 웅-
다음 순간, 자석에 이끌리듯 일제히 수직으로 비상했다.
“······헉!”
그 신비로운 광경에 입구 쪽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불균형한 금속 조각들이 천장- LED 조명의 불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와······.”
누군가 감탄했다.
그래, 얼핏 보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어떤 설치 미술 같은.
그러나 그가 들어 올렸던 양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순간,
장르가 뒤바뀌었다.
촤-좌-좌-좌-좌-!
그것들은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맹렬한 말벌 떼로 바뀌어, 거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끽! 끽! 끽! 끽! 끽! 끽!
수백 개의 금속 조각이 거미의 살점을 조금씩, 그리고 일제히, 거미의 두툼한 살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와······.”
“거기, 서울역 경비대 맞습니까?”
“······예?”
그 장면을 넋 놓고 보고 있던 경비팀장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현욱과 눈이 마주쳤다.
“아, 예! 맞습니다!”
경비팀장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시민들을 통제해서 3층으로 올라가세요. ‘언럭키 이벤트’ 때문에 지금은 밖으로 못 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2차 분출을 대비할 만한 장소로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아, 확실히 그래야겠군요!”
“아, 그리고 저 거미, 독을 분출할 수도 있습니다.”
“······독, 말입니까?”
“예, 껍질에서 뭔가 새어 나오는 걸 봤습니다. 가스 형태일 것 같습니다.”
“아, 예!”
가스, 그게 방독면을 준비하라는 뜻임을 경비대장은 알아차렸다.
그는 그 즉시 이현욱에게 들은 내용을 제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자!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시민들을 지켜야 해!”
7명의 역 경비대가 다시금 임무를 시작했다.
“여러분! 진정하고 저희 말을 들어주십시오!”
패닉에 빠진 수백 명의 인파를 통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게이트 사건을 일상처럼 겪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플레이어의 통제를 거부감 없이 따랐다.
“자, 우리는 지금 즉시 3층으로 이동할 겁니다! 천천히 질서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계단을 따라서 3층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이현욱은 맹독갑옷거미 두 마리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금속을 몰아치는 한편,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2차 분출, 3차 분출, 적어도 두 차례의 분출에서 살아남아야지만, 저 돔이 열릴 것이었다.’
그러나······.
‘게임에는 언제나 숨겨진 길이 있기 마련이지.’
이현욱은 이미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
언럭키 이벤트, 그 지옥 같은 규칙이 적용된 지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서울역이 엄청나게 넓다고 말해야 할 것이었다.
“보니까, 아마도 서울역 중에서도 2층, 3층 맞이방만 고립된 것 같습니다.”
3층 맞이방으로 피신하는 도중, 역 경비대원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추정은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고립된 시민만 해도 족히 800명이 넘을 듯싶었다.
그런데 그 구간을 경비하고 있던 역 경비대 병력은 고작 7명이었으니······ 아무리 봐도 사실상 꼼짝없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디선가 AMT 병사 한 명이 나타나 그들 모두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터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만······.
“진짜 좆 같네, 시발······.”
그곳에 고립된 시민 중 한 명, 양주섭은 이현욱의 등장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저 새끼는 대체 뭐야······ 저런 능력자가 왜 여기에 있어?’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맹독갑옷거미의 숨통을 끊어내고 있는 플레이어, 이현욱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시야 속, 허공에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 한 줄을 읽어내려갔다.
- (!) 메인 퀘스트 ‘1번’ 목표 달성에 실패하셨습니다.
그에게 부여된 어떤 퀘스트가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건 이현욱 때문이었다.
‘아오, 시발! 저 새끼는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지? 저 정도 능력이 있는 플레이어가 지하철이나 기차를 탈 리가 없는데, 왜 서울역에 서 있는 거야? 그것도 AMT라니······.’
그렇다.
양주섭, 그는 ‘빌런’이었다.
현 시점상 빌런의 존재는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탄생하는 건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건지 그 무엇도 공론화되어 있지 않은 시대······ 빌런들은 이렇게 어떤 ‘퀘스트’를 부여받으며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좀 먹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주섭은 아직 정식 빌런은 아니었다.
- 당신은 현재 ‘빌런 후보’입니다. 퀘스트를 수행하여 등급을 상승시키세요!
* 퀘스트를 수락한 이상,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시 ‘게임 오버’됩니다.
빌런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빌런 후보가 되는, 이 퀘스트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설령 퀘스트를 받는다고 해도 클리어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심지어 퀘스트 실패 시 패널티가 게임 오버, 즉, 죽음이었으니 말 다 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임무를 수차례 완수해야지만 정식 빌런이 되어 진정한 빌런들이 모인 어떤 ‘비밀 조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양주섭의 경우, 오늘 이곳에서 한 번만 더 퀘스트를 완수하면 정식 빌런으로 승급하는 것이었건만······.
“저 개 같은 새끼 때문에 다 망치게 생겼네, 기회 봐서 등 뒤에 칼 꽂아 버리면······ 응?”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현욱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그가 고개를 돌려 정확히 양주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그의 눈동자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 안에서 적의······ 아니, 살기가 느껴졌다.
꿀꺽-
양주섭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1년 전, E등급 시절, 처음으로 게이트 봉쇄 작전에 나가서 오크와 눈이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짙은, 이유 모를 불안감이 그를 짓눌렀다.
‘뭐, 뭐야 저거······ 날 노려보는 건가?’
저도 모르게 순간 기가 팍 죽고 말았지만, 그는 이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시발, 알 게 뭐야! 그냥 어쩌다가 꼬라본 거겠지, 설마 내가 뭔 줄 알고 봤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애초에, 세상은 아직 빌런의 존재를 모른다.
정신만 똑바로 차려서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양주섭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남몰래 무리에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