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40)
76. 희생 그리고 승리 (2)
크림슨이 마지막으로 아이언이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을 때, 아이언은 한계를 넘기 위해 모든 것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한계를 뛰어넘었다.
거대한 도끼와 백색검이 충돌하고 주변의 기운 역시 두 패로 나뉘어 격렬하게 충돌했음에도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다.
-재밌군. 계속 성장하는가?
흐림르가 아이언을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흘렸다.
벽을 뛰어넘고 마치 막힌 게 뚫린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언이었지만 그만큼 흐림르 역시 강해졌다.
어째서 이런 것인지는 흐림르도 알 수 없었지만 제약되었던 힘이 빠른 속도로 풀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동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큭!”
아이언이 더 강력해진 흐림르의 일격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듯 두 발로 버티고 서서 흐림르의 일격을 받아 냈다.
쿠웅!
-제법.
이제 막 벽을 넘어선 것치고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여 주는 아이언을 보면서 흐림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체…….”
아이언이 흐림르의 미소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림르와 싸울수록 의문이 차올랐다.
처음보다 확실히 강한 일격이었다.
두 가주와 싸울 때보다도 더 강력해진 힘.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처음에 이런 힘을 사용하지 않았나?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것인가?
아직도 여유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흐림르와 싸울수록 그런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치명상을 각오하고 노는 타입은 아닌데…….’
아이언은 흐림르의 옆구리에 생긴 치명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 전투에 미친 자들은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그 자체를 즐기는 타입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본 흐림르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점점 강해지는 흐림르를 보면서 아이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흐림르 역시 지금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힘이 점점 풀린다라…….’
자신을 제약한 힘이 점점 풀리는 것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답게 지금의 현상이 왜 이러나는지는 눈치챈 것이다.
‘아포칼립스라는 이 게임의 당사자가 되었기에 서서히 제약이 풀리고 있다.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시점에선 알 수 없군.’
흐림르가 이런 추측을 하면서 자신의 힘을 제약한 거대한 힘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더 상위의 존재 혹은 ‘우주의 의지’ 같은 존재들이 먼저 깨어난 만큼 제약을 주는 대신 서서히 제약이 풀리게끔 설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흐림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재미……를 위해서인가?
흐림르의 중얼거림에 아이언이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았다.
-알고 싶은가?
“…….”
-스스로 추측해 보거라.
그의 말에 아이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아이언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검을 꽉 쥐었다.
분명 전생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인간은 멸망을 이겨 내기 위해 전생보다 훨씬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은 버거웠다.
마치 인간이 성장하는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정해 놓고 서로 싸우게 하는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이 아포칼립스라는 것이 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것이 지금 시점에서 보일 수 있는 너의 한계인가?
흐림르의 물음에 아이언은 대답 대신 신성력은 한계까지 끌어냈다.
오러 블레이드에 융합시키지 못한 모든 신성력을 끌어 올려 육체를 강화시키자 남은 신성력이 등에 집중되면서 거대한 빛의 날개를 만들어 냈다.
처음 아이언이 흐림르에게 나타났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힘의 크기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자 흐림르 역시 ‘지금 시점’에서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사용했다.
좀 더 명확하게 만들어지는 얼음 왕관.
그리고 더 선명해진 푸른 도끼.
마지막으로 거대한 몸을 뒤덮은 얼음 갑옷.
과거 신화시대 때 보여 주었던 위대한 모습으로 도끼를 내려치는 흐림르와 그것을 막아 내는 인간 영웅.
쿠우웅!
검과 거대한 도끼가 부딪치는 순간 산맥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무승부인가?
“…….”
흐림르의 말에 아이언이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더 할 수 있다는 듯, 투지를 드러냈지만 흐림르는 고갯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전사의 명예를 지켜 주거라. 싸움은 다음에 또 하면 되는 것이니…….
흐림르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서자 아이언이 그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 인간의 명예를 지켜 주려는 것이지?”
아이언의 물음에 흐림르가 뒤돌아 선 채로 답했다.
-과거에 너와 같은 이가 있었다. 빛을 갈망하며 따라가다 결국 절망했고, 망가졌다. 짐은 너 역시 그러할 줄 알았으나…….
흐림르가 그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극복해 냈지. 절망을 극복한 자에 대한 짐의 상이다. 또한 그 기적을 만들어 낸 위대한 자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 해 두지.
그렇게 말하면서 거인의 왕이 걸어가기 시작하자 서리 거인들 역시 하나둘 후퇴하기 시작했다.
믿었던 서리 거인들이 후퇴를 결정해서 그런 것일까?
몬스터들 역시 싸우던 것을 멈추고 하나둘 본래 있던 자리로 후퇴했다.
“……살아남은 것인가?”
라이너가 멍하니 물러나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각오했던 두 가주였고,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리 거인들이 물러나면서 다시금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긴 셈.
모두가 힘들었던 전투를 복기하며 다음 전투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영웅’은 목숨으로 자신을 지켜 준 은인에게 향했다.
“…….”
아이언은 미소를 그리며 눈을 감은 크림슨을 바라보았다.
땅에 박아 넣은 검에 두 손을 올려놓고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한 크림슨의 모습은 굉장히 편안한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사령관님.”
저 멀리서 달려온 북동부의 지휘관들이 크림슨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철벽 사단장 발리오스 가드, 레인저 사단장 데이븐 아처, 기사단장 카심, 산악 군단장 오스 테리보, 안개 군단장 포그 코즈웨이까지 크림슨의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착한 선봉 군단장 카이든은 눈물 대신 크림슨을 원망했다.
“늙으셨으면 몸을 사릴 것이지…… 왜 앞으로 나선 겁니까!”
카이든 월의 원망에 찬 목소리에 북동부의 기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북동부의 숱한 위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텨 주었던 사령관의 죽음에 북동부의 모든 이들이 슬퍼했다.
그리고 그것 기동 야전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이들이 북동부 출신인 만큼 곧게 선 크림슨의 주위에 모여 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아이언이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저를 지키려다…….”
아이언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그러자 아리엘 역시 죄를 청했다.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리 전사과 다수의 서리 거인을 베어 버리고 전사장을 막아섰음에도 결국 크림슨의 죽음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누구도 둘을 탓하지 못했다.
자신들 역시 크림슨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언과 아리엘의 모습을 보면 탓하려다가도 그런 말이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아리엘의 모습은 그녀가 전사장을 막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처야 회복되었다지만 넝마가 된 옷을 보면 그 역시 사력을 다해 크림슨이 후회하지 않도록 싸웠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 영웅을 이리 둘 것이오?”
라이너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사자가주가 직접 나서는 모습이 의외였지만 그런 그가 나설 정도로 이번 전투에서 크림슨이 보인 활약과 용맹은 대단한 것이었다.
“영웅께서 이제 쉬셔야 하지 않겠소?”
라이너가 그렇게 말하면서 크림슨을 바라보자 다들 그를 따라 크림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깨는 반쯤 갈라지고, 온몸에 치명상이 가득한 채 피가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아이언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의 몸을 보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내가…… 내가 모시겠소.”
크림슨과 가장 친했던 제든 윅스가 눈물을 참아 내면서 곧게 선 크림슨을 눕혔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게 만든 당사자인 아이언이 나서서 제든 윅스를 도왔다.
고운 천을 깔고 그 위에 크림슨을 뉘인 아이언과 제든 윅스.
생전에 가장 친했던 이와 마지막을 명예롭게 장식하게 만들어 준 아이언이 그의 시신을 정돈하고 그의 검을 양손에 쥐여 주었다.
“영웅을 모셔라!”
라이너가 검을 들어 올리면서 말하자 기사들이 일제히 도열하며 성까지 길을 만들었다.
북부군, 남부군, 동부군 가릴 것 없이 모든 기사들이 모여들어 길을 만들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임시로 만든 관에 크림슨을 뉘이고 들어 올렸다.
제든 윅스와 아이언, 그리고 새로이 마스터가 된 아리엘과 선봉 군단장인 카이든이 관을 들어 올려 도열한 기사들이 만든 검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양옆을 사령관들과 두 가주가 호위했다.
전쟁의 영웅이 가는 명예로운 길을 빛내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크림슨의 시신이 검의 길을 따라 성에 도착하자 서리 거인과의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들 역시 하나둘 성안으로 들여왔다.
모든 시신들이 성으로 들어오자 미리 준비되어 있던 관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를이 힘겹게 말문을 열자 다들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영웅과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르고 싶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약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전쟁에 임해야 했다.
후에 승리하고 다시금 거창하게 장례를 치르더라도 지금은 그래야 했다.
그 의미를 알기에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크림슨의 시신이 담긴 관을 바라볼 때였다.
“사령관께서…… 제가 남겨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차기 마스터 후보인 스카이 랭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사령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전부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북동부의 옛 관습에 따라주길 희망하셨습니다.”
스카이 랭스의 말에 몇몇 사령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북동부 출신들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정녕…… 그걸 원하셨나?”
카이든 월의 물음에 스카이 랭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친네의 괜한 설레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어쩌면 이번 전투가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며 사망 시에는 북동부의 관습대로 해 주실 것을 명하셨습니다.”
북동부의 옛 관습.
그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신이 담긴 관을 전장에 남겨 두는 것이다.
죽어서까지 남아서 이 전장이 승리로 이어지길 바라는 자들.
살아남은 자들은 명예롭게 죽은 자들의 시신이 욕되지 않게 더욱 전의를 불태울 것이고, 죽은 자들은 죽고 나서라도 승리를 만끽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생겨난 관습.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힘든 전투를 해 왔던 북동부가 절대 뚫리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의지가 담긴 관습이었다.
“……그리하시죠.”
제든 윅스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께 이 전쟁의 승리를 안겨 드리고 싶습니다.”
북부 사령관의 말에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무식하다고 할 수 있는 관습.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효과가 있었다.
모두의 눈에 절대 뚫릴 수 없다는 의지가 불타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