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39)
76. 희생 그리고 승리
전사의 예우를 다해 전력으로 돌진해 오는 서리 거인 전사장.
그런 그를 막기 위해 크림슨은 남은 한 줌의 오러조차 끌어 올렸다.
내상입은 그의 몸으로 이런 짓을 했다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불태울 각오로 전사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쿠우우웅!
오러의 폭풍과 서리 폭풍이 부딪치면서 강렬한 파장을 만들어 냈다.
마스터급이 이뤄 내는 강력한 충돌은 서리 거인들조차 다가서기 힘들 정도고 막강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그런 충격파를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
-전사의 결투를 방해하지 마라!
아리엘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쳐 내면서 분노한 전사장.
하지만 아리엘은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이대로 싸우게 내버려 뒀다가는 크림슨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결국 또 다른 서리 전사에게 발목이 붙잡혔다.
다른 서리 거인들도 아리엘의 앞을 막아섰다.
전사장의 결투를 방해받게 할 수 없다는 듯한 그들의 행동에, 다시금 크림슨과 전사장만의 결투장이 완성되었다.
“사령관님!”
아리엘의 애타는 듯한 부름에도 크림슨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전사장을 바라보았다.
“오게.”
크림슨의 말에 전사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왔다.
죽음을 각오한 고결한 전사의 긍지를 지켜 주기 위해 전사장 역시 모든 힘을 끌어 올려 공격했다.
그러자 겨우겨우 버티던 크림슨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의 장기인 폭풍검이 찢어발겨지고, 그의 검에 균열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두 발로 서서 전사장의 공격을 받아 냈다.
-그 몸으로 이 일격을 버텨 냈나?
크림슨을 향해 감탄한 어조로 말한 전사장이 더욱더 투기를 끌어 올렸다.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전투를 겪어 오면서 보아 온 자들은 죽음 앞에서 저렇게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우는 자들은 의외로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 숭고한 결투가 더 중요했다.
쾅! 쾅! 쾅!
저돌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전사장의 공격을 폭풍검으로 간신히 막아 내는 크림슨.
한 번 막을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올 정도로 둘의 격돌은 막강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쿨럭!”
크림슨이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며 피를 토했다.
이미 오러는 바닥이고 몸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차라리 이대로 바닥에 누워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편할 만큼 육체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림슨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대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지.
만신창이로 검을 땅에 박아 넣고 간신히 일어선 크림슨.
그를 바라보면서 전사장이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크림슨이 부들거리는 팔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미 한 줌의 오러조차 모두 소모했기에 검을 들어 올리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크림슨은 검을 들어 올려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를 기억하겠다.
전사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 예우로 모든 힘을 주먹에 모았다.
그냥 주먹만 휘둘러도 죽을 크림슨을 전사의 예우를 다해 모든 힘을 끌어모은 것이다.
한계까지 힘을 끌어모은 전사장이 크림슨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우웅!
크림슨의 코앞에서 멈춘 전사장의 주먹.
거인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검이었지만 거대한 주먹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백색검을 들고 전사장의 주먹을 막아 낸 청년.
크림슨이 목숨을 걸고 지켜 냈던 아이언이 완벽하게 완성된 백색검을 들고 크림슨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 모습에 크림슨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아이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완성……했는가?”
“……예.”
크림슨의 물음에 답하는 힘겹게 답하는 아이언.
부들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서 있는 크림슨에게 전사장의 주먹을 막을 때부터 치유의 힘을 불어 넣고 있었지만 전혀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극심한 내상에 한계까지 쥐어짜 낸 힘에 육체가 가진 최소한의 치유력조차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러로 억제했던 육체의 노화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여 주게, 내가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예.”
크림슨의 말에 아이언이 울먹거리는 눈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슬픔 때문에 목이 막혀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아이언은 진중한 눈으로 전사장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내가 인정한 전사였다. 그의 마지막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전사장의 말에 아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평생을 제국을 위해 헌신해 온 크림슨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런 그가 목숨을 건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결국 막지 못한 건가?
전사장이 아이언의 백색검을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흐림르와 싸울 때처럼 거대하지도, 막대한 힘이 휘몰아치고 있지도 않았음에도 저 안에 담긴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인간들 중에 유일하게 흐림르에게 위협이 될 존재.
그런 존재의 각성을 방해해서라도 막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장이 모든 오욕을 감내하고서라도 막으려 했던 아이언의 각성은 결국 완벽하게 이뤄졌다.
쿠우웅!
백색검과 거대한 투기로 이루어진 푸른 주먹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컥!
고작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주먹을 베이고 내상을 입었다.
작은 백색검에 거인의 거대한 투기가 갈라지고, 사람보다 몇 배나 큰 주먹이 갈라지는 모습인 굉장히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드는 전사장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베어 내는 아이언.
고작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된 전사장이 목숨을 건 마지막 일격을 준비할 때였다.
굉음과 함께 흐림르를 막아서던 두 가주가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아리엘, 막을 수 있겠나?”
“반드시 막겠습니다.”
어느새 아이언의 곁으로 다가온 아리엘.
그녀의 온몸은 푸른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서리 거인들과 전서 하나가 목이 베인 채 쓰러져 있었다.
“믿고 가마.”
“예!”
아이언의 말에 아리엘이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전사장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을 거야.”
아리엘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전사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이언의 명령, 그리고 존경하는 사령관의 명예로운 마지막을 위해서 아리엘이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만신창이가 된 전사장이 말없이 투기를 끌어 올렸다.
그 역시 자신의 왕을 눈앞의 어린 천재를 꺾고자 했다.
‘더 놔두면 위험하다.’
전투를 하는 동안 계속 발전하는 미친 재능을 가진 여인을 보면서 여기서 꺾어야 함을 느꼈다.
-반드시…… 뚫어 주마.
전사장의 말에 아리엘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녀의 주위로 별빛이 가득 차면서 전사장의 주위를 압박했다.
그러자 전사장 역시 투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인을 만들며 그대로 돌진했다.
그렇게 아리엘과 서리 거인의 전사장이 본격적으로 격돌하기 시작할 때, 아이언 역시 서리 거인의 왕 흐림르의 앞에 섰다.
-의외로군. 정말 벽을 넘은 건가?
절망하지 않고 벽을 넘은 아이언을 바라보며 흐림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리 거인의 천재가 절망한 지점은 아이언이 이룩한 경지보다 윗줄에 있는 높은 곳이었지만 거대한 벽과 닿을 수 없는 빛을 향한 갈망은 똑같았다.
그렇기에 이 안타까운 천재 역시 절망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극복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리면서까지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잡설은 그만하지.”
아이언이 흐림르를 바라보면서 백색검을 들어 올렸다.
-급할 게 있나?
흐림르의 물음에 아이언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나의 영웅이 눈을 감기 전에 증명해야 한다. 헛된 노력이 아니었음을…….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음을……."
그의 말에 흐림르는 멀리 검을 땅에 박고 서 있는 한 늙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생명이 꺼져 가는 한 노인이 자신과 어린 천재를 바라보고 있음이 보였다.
마지막까지 아이언이 벽을 넘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건 전사.
오랜 세월 살아온 흐림르는 일생토록 보기 드물었던 명예로운 자를 위해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래. 그를 위해 어울려 보자꾸나.
흐림르가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푸른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아이언이 전력을 다한 만큼 그 역시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아이언 역시 백색검을 휘두르면서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끼와 검이 맞부딪치지 않았음에도 허공에서 굉음이 들려오면서 충격파가 퍼져 나왔다.
일반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도, 투기로 이루어진 도끼도 없이 허공에서 두 힘이 부딪쳐 나가는 모습은 괴이했다.
하지만 튕긴 두 가주는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간이 뒤틀렸다!'
아이언과 흐림르의 무기가 충돌하기 전, 이미 공간이 뒤틀리면서 두 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로가 휘두르는 경로 자체에 이미 힘의 충돌이 일어나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바로 그랜드 마스터의 영역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진정한 다음 경지인가?”
서로의 무기가 닿기 전 공간이 뒤틀리면서 두 힘이 충돌하는 현상.
주변의 마나마저 아이언과 흐림르의 편으로 갈라지면서 충돌하는 모습.
어째서 자신들이 흐림르와 비슷한 힘으로 공격했음에도 형편없이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힘은 비슷해도 이미 주변 마나 장악력과 효율에서 큰 차이를 보였기에 흐림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처음 흐림르한테 달려들었을 당시의 아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가주조차 감탄할 정도의 수준 높은 전투.
그건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이들이 흐림르와 아이언의 전투를 보면서 자신들 역시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뚫어라! 왕을 위하여!
“막아라! 제국을 위하여!”
서로가 생존과 승리를 위해 더욱 격렬하게 전쟁에 임했다.
승리를 위한 인간과 거인들 간의 전투 속에서 모든 힘을 잃은 한 노인이 거인의 왕과 인류 최고의 영웅이 싸우는 전투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틀리진 않았군.”
자신이 목숨을 건 선택.
그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아이언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쉽군.”
전설을 써 내려가는 어린 영웅과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함께한 영웅이 내딛는 발걸음에 자신도 옆에서 같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자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멈춰 서게끔 만들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크림슨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냉기가 휘몰아치고 온갖 마력이 들끓고 있음에도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포근해 보였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바람이 유난히 포근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크림슨의 눈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이미 한계 이상으로 싸워 온 그의 정신력은 이제 그가 쉬어야 할 때라고 말하듯, 그의 의식을 수면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런 그가 완전히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위대한 전설을 써 내려가는 어린 영웅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