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38)
75. 북부에 드리우는 암운 (5)
두 가주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흐림르의 진격을 멈춘 존재가 하늘에서 백색검을 휘둘렀다.
쿠우웅!
흐림르가 투기로 거대한 도끼까지 구현하면서 막아야 할 정도로 강맹한 일격.
백색 검과 도끼가 충돌하자 사방에 충격파가 퍼지면서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신의 사도?
흐림르가 단번에 누군지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몸 상태로 그나마 붙어 볼 만한 상대가 나타나자 갑자기 온몸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쿠웅!
다시 한번 부딪치는 백색 검과 푸른 도끼.
-완성되진 않은 건가? 아쉽군.
단 두 번은 부딪침으로 아이언의 상태를 파악한 흐림르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괴물인가?’
아이언이 흐림르를 상대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서리 거인의 왕답게 무식하게 강했다.
본래 힘에 한참 못 미치는 힘으로도 두 가주를 장난감 다루듯 몰아붙이고 자신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빛이 보인다.’
아리엘을 가르치면서 작아졌던 빛이 다시금 환하게 길을 비추기 시작했다.
흐림르와 일격을 교환하면서 강해진 빛은 전투를 치르면서 점차 환해져 이제는 길 전체를 완전히 비추고 있었다.
이대로 걸어만 간다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틴다.’
아이언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때까지 버틴다는 신념으로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그런 아이언을 보면서 흐림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싸우면서 성장 중인가? 재밌는 놈이군.
자신과 일격을 나눌 때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아이언을 보면서 흐림르가 재밌다는 듯 더욱더 몰아붙였다.
두 가주와 싸울 때는 장난이었다는 듯, 매섭게 공격하는 흐림르.
일격에 서리 폭풍이 만들어지고, 일격에 산 일부가 깎여 나가는 괴물 같은 공격.
하지만 아이언은 그것을 버텨 냈다.
흘려 내고, 피하고, 막아 내면서 기어코 버텨 낸 아이언의 검술은 조금씩 변해 갔다.
“흐흐흐…….”
아이언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정해진 길을 걷는 것.
싸우면서 목적지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전투를 하면서 숙련도를 채우는 것.
-재밌는가?
“재밌네.”
흐림르의 물음에 아이언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해지는 게 눈으로 보인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럼 곧 절망하겠군.
흐림르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도끼를 휘둘렀다.
정해진 길을 걷는 것.
조금씩 차오르는 숙련도를 보는 즐거움으로 전투를 지속하는 아이언이었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뭐지?’
분명 흐림르와 전투를 하면 할수록 검술 수준은 진화했다.
본래라면 흉내낼 수 없는 수준의 검술이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몸에 빙의해서 이끌어 주는 것 같은 느낌.
막대한 기운이 절로 움직여서 몸을 주도해 나갔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신성력과, 사방에서 몰려드는 자연의 기운이 아이언의 몸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어?”
마치 뭔가에 막힌 것 같은 기분.
길 중간에 바리케이드라도 쳐 놓은 것처럼 전진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목적지에서는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길은 갈라짐 없이 한 길로 쭉 뻗어 있었다.
-길이 막혔나?
“…….”
흐림르의 물음에 아이언이 침묵한 채 가만히 검을 들어 올렸다.
-재밌군. 그래 봤자 그 앞은 절망뿐이거늘…….
아직 절망하지 않은 인간을 보면서 흐림르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과거에 거인 중에 저런 놈이 있었다.
오래전 전사장을 노렸던 어린 거인.
자신의 재능만 믿고 찬란한 빛만 따라갔던 천재.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것은 파멸뿐이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쌓아 올렸다면 자신 이상 가는 존재가 되었을 그 천재는 찬란한 빛을 쫓으며 걷다가 자멸했다.
흐림르가 이 천재를 기억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현재 서리 거인이 사용하는 모든 냉기의 사용법을 만들어 낸 천재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인간 역시 그 천재가 자멸했던 길을 그대로 걷고 있었다.
“빛이 보여요. 근데 그 빛을 따라가는 게 너무 재밌어요.”
“제가 강해지는 게 눈으로 보여요. 그게 너무 행복해요!”
“강해지는 게 재밌어요!”
과거 왕이었던 자신을 찾아와 재잘거리던 어린 거인.
그 역시 언젠가 어린 천재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 줄 생각에 흐뭇했었다.
“이 길이…… 이 길이 아니었어!”
“아…… 아아…… 이 앞은 파멸이었어요!”
피눈물을 흘리면서 절망하는 어린 거인.
어린 천재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흐림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의 사도여…… 내가 베풀 수 있는 자비는 죽음뿐일 것 같구나.
흐림르가 서서히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아이언을 보면서 온 힘을 꺼내 들었다.
비기, 결전기, 오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무인의 결정적인 한 수.
흐림르가 그것을 꺼내 든 것이다.
인간이 더 큰 절망을 맛보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 주는 것.
이것은 눈앞의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과거에 어린 천재를 지켜 주지 못했던 것.
잘못된 길을 바로잡지 못해 천재를 잃었던 것으로 인한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
아이언이 멍하니 푸른 거인을 바라보았다.
흐림르의 투기가 보다 완연해지면서 흐릿한 푸른 거인이 완전한 모습을 이뤄 냈다.
여전히 니플헤임을 지배했던 때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힘.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 얼음으로 만들어진 왕관을 쓴 흐림르가 그 강대한 힘으로 천천히 아이언을 행해 도끼를 내리쳤다.
그 순간 멍해 있던 아이언의 눈동자라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힘에 취해 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아이언의 백색으로 타올랐던 거대한 검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후…….”
거대한 도끼가 내려오고 있음에도 융합된 검을 버린 아이언이 긴 숨을 토해 냈다.
폐까지 밀려 들어오는 냉기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 아이언은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자연의 기운이 뭉쳐진 자신의 검이 시도 때도 없이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너의 길은 잘못됐어!’
자신의 검이 알려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한 빛에 취해서, 좀 더 편한 길을 가고자 그것을 무시했었다.
“……미안해.”
아이언이 자신의 검에게 사과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오러를 끌어 올렸다.
여전히 자신을 환하게 비추는 빛은 더 많은 힘을 융합시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막대한 힘을 융합시키고, 그 막대한 힘으로 더 완벽한 검술, 더 정교한 검술, 더 위력적인 검술을 만든다.
그야말로 정석.
아이언이 쌓아 올린 검술의 근본인 기초와 같은 정석과도 같은 길.
분명 틀린 길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재련하듯, 천천히 힘의 크기를 늘리고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면 언젠가 빛에 닿을 수 있는 길.
만약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다면 이 길이 가지는 의미 역시 명확히 알았을 터.
하지만 아이언은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다.
게다가 천천히 정교하게 쌓아 올릴 인내심도,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길이 가지는 의미를 모른 채 그저 걸어갈 뿐.
거기에 바로 함정이 있었다.
멸망의 시대에 돌입한 지금, 아이언은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지려 했고, 무리하며 걸어가야 할 길을 뛰어가려 했다.
그렇기에 놓치는 것들을 막대한 힘으로 찍어 눌렀다.
콰아아앙!
“쿨럭!”
아이언이 피를 한 움큼 내뱉으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척 보기에도 심각한 내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은 파리했고, 몸은 덜덜 떨렸다.
하지만 버텨 냈다.
-으음…….
흐림르가 자신의 일격을 버텨 낸 아이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길을 찾으려는 건가? 이제 와서? 그래 봤자 절망만 길어질 뿐이거늘…….
흐림르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면서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금 도끼를 들어 올렸다.
결전기 따윈 필요 없었다.
투기도 필요 없었다.
그저 도끼를 내리찍는 행위만으로도 아이언은 막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때, 흐림르를 향해 한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캉!
아까 날려 버렸던 테리언이 다시금 일어나 흐림르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어느새 정면에서는 라이너가 사자를 만들어 내면서 아이언의 앞에 있는 흐림르를 뒤로 밀어 버렸다.
“괜찮느냐?”
“……예.”
라이너의 물음에 아이언이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아이언의 몸에는 초록빛 치유의 빛이 감돌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방금 흐림르의 일격을 막았을 때…… 뭔가를 얻은 것 같은데, 맞느냐?”
라이너가 아이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가만히 검을 바라보던 아이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리겠느냐?”
“잠깐이면 충분합니다.”
아이언의 대답에 라이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하거라.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 주마.”
라이너가 그렇게 말하면서 전력으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어느새 그의 몸이 작게 진동하면서 파동의 힘이 오러에 깃들기 시작했다.
-크와아앙!
라이너의 사자가 울음을 토하는 순간 강력한 오러의 파동이 주변에 퍼져 나갔고, 그것은 흐림르의 냉기의 폭풍까지 흩뜨려 놓았다.
-발악인가?
흐림르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금 투기를 끌어 올렸다.
두 가주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런 둘의 공격에 흐림르가 지루한 표정을 지우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막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버틸 생각으로 힘을 아끼던 두 가주였지만 이젠 아이언이 있었다.
그에게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한다는 임무만을 생각하면서 가진 것을 모두 꺼내 들었다.
그렇기에 더 정교하고 더 강맹한 일격들이 흐림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하하하! 재밌구나!
흐림르가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다시금 왕관을 쓴 거인을 만들어 냈다.
테리언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들어 내 하늘을 덮은 별빛들.
라이너이 일격에 모든 걸 건 거대한 사자.
두 가주의 결전기에 흐림르도 자신의 결전기를 사용해 예의를 다한 것이다.
그렇게 다시금 두 가주와 흐림르가 전력으로 서로를 맞부딪칠 때, 아이언은 자신의 길을 새로 재정립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마.”
아이언이 검을 들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자신은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었다.
환한 빛이 비춰 주는 길을 따라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조금 불완전하더라도, 조금 위험하더라도 새로운 길로 향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를 인정했기에 할 수 있는 것.
‘일단 자연의 기운은 버린다.’
자신의 컨트롤로 자연의 기운까지 융합할 수는 없었다.
자연의 힘을 융합하는 게 자연스러울 수는 있지만 힘의 한계가 명확했다.
신수들이 잠든 이상 컨트롤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욕심만 부렸기에 더 이상 길을 걷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의 기운은 미뤄 두었다.
대신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택했다.
처음 오러 블레이드에 융합됐던 익숙한 기운만을 한데 모았다.
‘보다 완벽한 오러 블레이드…….’
강철의 기운을 이용해 어떤 검보다 단단한 검을 만들 생각으로 집중했다.
그 위에 신성력을 깃들게 할 생각이었다.
전설의 야장이라도 된 것처럼 검 하나에 모든 것을 집중한 아이언.
지금 당장 누가 옆에서 무기를 휘두른다면 위험할 수도 있음에도, 아이언은 검에만 집중했다.
쿠우웅!
“크윽!”
-귀찮게 구는구나!
전사장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아리엘을 바라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은 위험하다.’
자신들의 왕의 전력을 다한 일격을 막아 낸 인간.
저놈을 위해 제법 강한 인간 둘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시간을 벌고 있었다.
만약 저 인간이 더 강해진다면?
그때는 아무리 왕이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왕에게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신의 사도라 불리는 인간을 죽이려고 했다.
-너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벽을 넘었다지만 아직 미숙한 아리엘이 전사장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한때 드높았던 격을 가진 전사장이 전력을 다하자 사방에 뿌려져 있던 별들이 죄다 부서져 나갔다.
전력으로 투기를 뿜어낸 전사장이 냉기의 폭풍을 휘감고 아이언을 향해 돌진하자 아리엘이 목숨 걸고 막았으나 결국 막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안 돼!”
아리엘이 피를 토하면서 고함을 치는 순간.
쿠웅!
-늙은 인간…… 그 몸으로 날 막겠다는 건가?
“흘흘…… 이미 살기 글렀으니 마지막까지 발목이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겠나?”
크림슨이 그렇게 말하면서 전사장을 바라보았다.
죽음을 각오한 눈.
그 눈을 본 순간 전사장은 눈앞의 늙은 인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하찮은 이라도 죽음을 각오한 용맹한 자는 존중받아야 하는 법.
서리 전사에게 용맹한 자를 존중하는 법이란 최선을 다해 상대를 죽여 주는 것.
-전사의 예우를 다해 주마.
“……고맙네.”
크림슨이 전사장의 말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