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05)
64. 멸망한 황가 (4)
아이언의 주장에 모든 사령관들이 고민했다.
‘과연 이게 맞는 것일까?’
하지만 명분도 이쪽에 있었고, 마음 역시 점점 황제의 유지를 받드는 것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동안 황족과 중앙 귀족들에게 당했던 세월이 얼마던가?
북부와 북동부만 봐도 치가 떨릴 정도로 당해 왔다.
그렇다고 다른 곳은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지원이 잘 나온 서부도 매번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고, 중앙 사령부는 수도방위군의 졸개 노릇을 해 왔었다.
다들 중앙에 대한 불만은 알게 모르게 쌓여 있었다.
남부와 동부마저도 중앙에 불만이 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다들 고심할수록 중앙에 대한 안 좋은 감정만 증폭되었다.
다들 표정이 썩어 들어갈 때 마침내 입을 여는 사람이 나왔다.
“난 동의하겠소.”
크림슨의 말에 제든 윅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 역시.”
크림슨과 제든 윅스가 동의하자 그것을 시작으로 사령관들이 하나둘 동의했고, 마침내 두 가주만이 남게 되었다.
“난 반대할 이유가 없소.”
“나 역시…….”
사자가주와 신검가주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두 가주마저 동의한 순간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황제의 유지를 받드는 것에 동의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상 황족들에게 종말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황족 대우를 해 주지 않는다는 것.
이 종말의 시대에 그건 황족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똑같았다.
귀족들은 황족들을 버릴 것이고, 더 이상 과거처럼 권력을 쥘 수 없는 황족들은 평민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
종말의 시대에 그들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는 널리고 널렸다.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결정을 내린 그들은 빠르게 대신들에게 이와 같은 결정을 알리고 곧바로 다음 날 군부의 의견을 발표했다.
“……해서 우리 군부는 황제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습니다.”
크림슨이 대표로 발표하자 뒤이어 신검가주와 사자가주도 나섰다.
“북부는 황제 폐하의 유지를 받을 것이오.”
“남부 역시 폐하의 유지를 받들겠소.”
두 가주마저 이런 결정을 내리자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귀족들이 사라지면 가주들의 가문 역시 문제가 있을 터.”
“정말 이리 결정할 것이오?”
귀족들의 말에 두 가주는 피식 웃었다.
강함을 숭상하는 사자가문은 물론이고, 신검가문 역시 검에 미친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귀족이란 허울 좋은 신분이 사라지든 말든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럼 사령관들은?
그들 역시 대부분 상관없었다.
중앙 사령관이나 서부 사령관이 명문가였으나, 그들 역시 스스로 마스터에 오른 인물답게 스스로 강해져서 능력을 증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군부와 제국 최고의 가문들이 이런 결정을 내리니 당연히 다른 이들 역시 이 결정에 따라갔다.
먼저 군부대신이 움직였다.
군부의 핵심 인사들인 사령관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일을, 군부대신이 혼자 반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군부대신이 동의해 버리자 다른 대신들도 눈치 보더니 하나둘 동의해 버렸다.
귀족들이 뒤에서 뇌물 공세를 하고, 협박해 본들 대신들 역시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부! 황제의 유지를 받는다!]
[중앙 정부! 결국 황제의 유지를 받드는 쪽으로……]
[제국 황가! 이젠 역사 속으로……]
군부의 발표가 있은 후 하루가 가기 전에 연속으로 대신들까지 입장을 표명하자 그날 저녁 이례적으로 신문사들이 일제히 신문을 찍어 냈다.
다음 날 아침.
“제국은 승하하신 황제 폐하의 유언을 받들어 새 시대를 열기로 천명합니다!”
임시 재상이자 재무대신을 겸임한 중년의 남자가 정식으로 발표하자 광장에 모인 수많은 제국민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말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 귀족들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뒤엎을 수는 없었다.
혁명 세력조차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바꿔 나갈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그렇기에 평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신분, 인맥, 혈연, 학연 등에 치여 올라가지 못했던 학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사령관들은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제 가 봐야겠군.”
“너무 오래 비워 뒀습니다.”
크림슨의 말에 제든 윅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에 안개를 헤치고 워프 게이트로 움직이는 두 사령관.
언제 다시 서리 거인들이 공격해 올지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러자 뒤에서 라이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만 빼놓고 가시오?”
사자가주의 말에 두 사령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서리 거인의 위협은 북부 전체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사자가주 역시 비밀리에 북동부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다.
세 명의 마스터가 새벽을 틈타 워프 게이트로 이동하자 그곳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다들 바쁘시군요.”
동부 사령관이 그렇게 말하면서 크림슨 쪽으로 걸어왔다.
“동부 사령관도 벌써 돌아갑니까?”
제든 윅스의 물음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틀란티스 쪽이 아직 문제가 많습니다.”
“후…… 멀쩡한 곳이 없군요.”
동부 사령관의 말에 제든 윅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국 전역이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도 병사들이 각성한 덕분에 한결 여유가 생긴 건 분명했다.
문제는 그들이 사령관이라는 점이다.
한두 명이 각성한 것도 아니고, 병사 전원이 각성하다 보니 그들을 비슷한 각성자들끼리 묶고,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 행정 업무도 바빴다.
차라리 서리 거인들과 한바탕 뒹구는 게 마음 편할 정도였다.
“이런…….”
크림슨이 워프 게이트 쪽을 바라보자 남부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사령관이 모여 있었다.
다들 각자의 사령부가 불안해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자 새벽부터 움직인 것이다.
중앙 지역을 제외한 제국의 모든 지역이 전쟁 중이었다.
그나마 남동부가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기에 정리가 필요했다.
“자네도 가나?”
제든 윅스가 한쪽에 숨어 있는 아이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야지요.”
“자넨 여기서 좀 더 머물지 그러나?”
제든 윅스의 말에 다른 사령관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사령관들이 죄다 빠지면 누군가는 남아 있어 줘야 했다.
다들 내심 아이언이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랐다.
수도 상황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기동 야전군이 그나마 제일 상황이 나았기 때문이다.
두 가주들 역시 은근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이언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병력 일부를 데리고 수도에 올 생각입니다.”
“오!”
아이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령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의외군.”
크림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걸려서요.”
아이언의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동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황제 폐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아이언은 황제와 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그때 어느 정도 눈치를 채기는 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아이언의 말에 크림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당시 남동부 상황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험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결과 아이언도 사선을 넘나들 정도로 중한 부상을 입었고, 아직도 다 낫지 않았다.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1차 목표는 달성했는데……. 제가 큰 부상을 입고 말았군요.”
아이언의 말에 다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라 생각하게. 폐하께선…… 이미 각오를 다지신 상황이었네.”
크림슨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른 이들도 아이언을 위로하고는 워프 게이트에 올랐다.
“우릴 대신해서 잘 좀 부탁하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크림슨의 말에 아이언이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하고는 북동부로 사라지는 세 명의 마스터를 바라보다 워프 게이트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언마저 수도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사령관들이 각자의 지역으로 흩어지자, 수도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마스터들 때문에 힘으로 압박하는 짓을 하지 못했던 귀족들이 혁명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로워진 황가의 힘을 온 세상에 뻗쳐야 한다!”
귀족들이 이런 슬로건으로 혁명 세력을 압박하면서 돈으로 매수하거나,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예전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각성한 현 시점에서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혁명 세력은 더 이상 숨지 않았다.
대신 맞서 싸우면서 본인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다.
“군부가 우리 편이다!”
“더 이상 그들은 황족이 아니다!”
혁명 세력과 제국민들이 들고일어나며 귀족들에게 저항했다.
상황은 백중세로 수도가 의회 설립과, 기존 신분제의 완화가 양립할 때였다.
귀족 세력 측에서 황족들을 불러 모았다.
도망쳤던 황자들의 복귀에 제국민들은 분노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젊은 귀족들은 분개했고, 제국민들은 당장이라도 귀족들과 전쟁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정치는 명분 싸움.
저들은 황족들을 내세워 의회 설립을 주장했다.
황족 셋, 귀족 셋, 평민 셋으로 이루어진 대의회.
그리고 그 밑으로 똑같은 비율로 백여 명의 소의회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귀족 세력 입장에선 한 발자국 물러선 것이기도 했고 혁명 세력이 원하는 의회 설립도 만들어 준 것이니 명분상 이쪽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뱀 같은 놈들!”
“이건 아니야! 우리가 원하는 건…….”
혁명 세력에선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딴 반쪽짜리로 날려 버릴 순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길게 보자는 유화파가 등장했다.
일단 의회를 설립하고 차근차근 개혁해 나가자는 파벌이 등장한 것이다.
함께 뭉쳐서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둘로 갈라지게 생겼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대로 가면 개혁은 고사하고 다시금 귀족들에게 놀아나게 생겼다.
그 사실에 모두가 절망할 때였다.
“추…… 충성!”
남동부에서 대규모 비공선 부대가 수도에 진입했다.
기동 야전군의 주력군 중 하나인 22군단과 함께 등장한 아이언이 군부를 대표해서 황궁에 들어섰다.
곧장 대전으로 이동한 아이언이 한창 회의 중인 상황에서 난입했다.
“나…… 남동부 사령관이 여긴 왜…….”
4황자가 당황하면서 묻자, 아이언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군부를 대표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언이 황자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고성이 오갔던 것이 무색하게 대전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황족 앞까지 걸어간 아이언이 나직이 말했다.
“우리 군부는 황제 폐하의 유지를 받들기로 정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황족들의 권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논의 중인 황족이 포함된 의회 설립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무슨……. 폐하의 유언장은 논의할 여지가 많을 텐데?”
4황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자 아이언이 미소를 지었다.
“상관없습니다. 모든 사령관들과 두 가주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기로 했으며 제국과 황가의 종언은 인정했습니다.”
“감히 협박하는 것인가!”
아이언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2황자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언이 피식 웃었다.
“예.”
아이언의 대답에 대전 안의 공기가 무겁게 변했다.
“수도를 버리고 튈 땐 언제고 다시 기어들어 오시지?”
“큭!”
아이언이 2황자를 기세로 짓누르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3황자가 말했다.
“자네 혼자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나?”
“모든 사령관들께서 제게 권한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신검가와 사자가문에서도 위임해 주시더군요.”
“그런…….”
3황자가 아이언의 대답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의 유언은 명확하거늘…… 이게 지금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요. 폐하께선 제국과 황가의 종언을 명하셨고, 스스로 신의 보석과 함께 신이 내린 임무를 끝내셨습니다. 그러니…… 새 시대를 열어야 할 터.”
아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황족들에게 줄을 댄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군부는 과거의 잔재를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시간 끌 필요 없이 새 시대를 열 준비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