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04)
64. 멸망한 황가 (3)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황제의 유언은 제국의 끝을 고하는 일이었고, 이건 아무리 제국의 핵심 인사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들만의 결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크림슨이 입을 열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겠소.”
크림슨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모든 사령관들과 대신들이 일제히 궁 밖으로 나오자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유언을 가장 먼저 들은 건 대신들과 사령관들뿐이지만, 결국 제국민들에게 발표를 해야 했다.
문제는 황제의 유언이 제국의 종말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들과 사령관들은 기나긴 상의 끝에 결국 대전에서 모두에게 발표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제국에 가져올 혼란이 걱정되었지만, 황제의 마지막 유언을 숨길 수는 없었다.
“기자들을 부르시오.”
레오폴드의 말에 중앙 관료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황제의 마지막 유언이 대전에서 정식으로 공개되기로 정해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황궁으로 향했다.
이례적으로 일반 제국민들에게까지 황궁이 개방되었고, 대전의 거대한 문은 활짝 열렸다.
황궁에서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거대한 영상구를 광장에 설치했다.
신문사의 기자들이 제국 각 지역에서 몰려들었고, 제국의 부유한 귀족들은 전부 워프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향했다.
황제가 죽었으니 무조건 권력은 이동하게 되어 있다.
상인 입장에선 누구에게로 권력이 이동하는지가 매우 중요했다.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다음 황제를 누구로 지목했느냐에 따라 황제가 되는데 탈락한 황자들의 파벌은 갈려 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폐하의 유언장을 낭독하겠습니다.”
내관장의 말에 한 귀족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 전에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
한 귀족의 말에 모든 이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체베라라는 젊은 귀족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작위를 쟁취한 인물이었다.
비록 남작의 가장 낮은 계급에 불과했지만 젊은 나이에 귀족 작위를 쟁취했다는 것에서 상당한 능력자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런 젊은 귀족들이 요즘 혁명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기존의 귀족 파벌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은 힘이 부족해 크게 소리 내지 못했던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과 상계, 학계에서 크게 활약하며 목소리를 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제국의 모든 이들이 각성한 이상 그동안의 계급 체계에 불만이 있는 자들이 나왔고, 그 대표 격으로 지금의 젊은 귀족이 대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 그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내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폐하께는 어떤 감정도 없으며 고귀한 희생에 존경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체베라 남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현 황제의 고귀한 희생과 그로 인해 제국이 얻은 이득은 과거의 행적을 모두 지우고도 남음이었기 때문이다.
체베라 남작이 먼저 현 황제를 존경한다 표현하자 날카로웠던 사람들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러자 체베라 남작이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위기의 순간에 수도를 버리고 간 황족들에 대해선 어떤 권리도 인정해선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폐하 홀로 황족의 의무를 다하실 때, 목숨이 아까워 의무를 저버린 자들이니 더 이상 황족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체베라 남작의 말에 고위 귀족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현 직계 황족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황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각 황자들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체베라 남작을 줄일 듯이 노려보았다.
대전 안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노려보고 있음에도 체베라 남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는 폐하를 버리고 귀족의 의무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처벌입니다. 이 역시 폐하를 저버리고 자기 안위를 챙기는 데에만 급급한 자들이니 더 이상 제국의 귀족이라 볼 수 없습니다.”
체베라 남작의 말에 대전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대신들과 사령관들은 침묵했고, 중앙 관료들 역시 대부분 입을 다물고 체베라 남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도망쳤다 몰래 들어온 귀족들의 경우에는 대놓고 그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폐하의 유언은 지켜져야 하겠지만 그것이 중범죄자를 사하는 형태가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순간에 도망친 직계 황족들과 고위 귀족들을 중범죄자로 만든 체베라 남작을 보며, 내관장이 조용히 물었다.
“체베라 남작, 건의는 끝났습니까?”
“……예.”
체베라 남작의 대답에 내관장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체베라 남작의 주장은 굉장히 위험했다.
혁명가라고 불리는 체베라 남작답게 위험한 발언을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과 사령관들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대신들은 그동안 지금의 체제를 뒤엎으려는 혁명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령관들 역시 혁명가들이라 불리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표정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체베라 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렇게 나서면서 자신의 목을 내놓을 각오도 했다.
그만큼 위험한 발언이라는 건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주장을 해야 했다.
신의 보석이 부서지고 황궁이 유린당할 때, 도망친 놈들이 다시 돌아와서 권력을 잡는 것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제국민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고, 그들을 몰아내 주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이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이다.
적어도 발악이라도 해 보기 위해서.
이런 사람도 있음을 제국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럼 폐하의 유언장을 낭독하겠습니다.”
내관장이 그렇게 말한 다음 담담하게 황제의 유언장을 낭독했다.
그리고 대전 안에 있는 자들은 처음 사령관들과 대신들이 반응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황제가 예지안을 가졌다는 것부터 멸망의 날에 대한 것을 보고 나름의 준비를 한 것까지 모든 내용이 놀라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마지막이었다.
“지금 우리가 뭘 들은 것이오?”
한 귀족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체베라 남작을 비롯한 혁명 세력이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
그것을 황제가 유언장에 남긴 것이다.
제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늘 중심에 섰던 황가의 종언.
그것을 공식적으로 유언장에 남긴 것이다.
“이…… 이럴 리 없소. 대신들과 사령관들이 짜고 폐하의 유언장을…….”
한 귀족이 삿대질을 하면서 사령관들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질하는 순간 모든 사령관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 시선이었지만 사령관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삿대질하던 귀족이 숨넘어갈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다.
“다들 들었다시피 폐하께선 황가의 의무가 끝났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제국 역시 새롭게 다시 태어나길 바라셨습니다.”
내관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대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유언은 이것으로 끝이며, 남은 건 서로 간의 상의하에 이뤄 내라 하셨습니다.”
내관장의 말에 고위 귀족이 희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렇다는 건 제국이 존속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 아니오?”
한 귀족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말한 새 시대를 어떤 식으로 이룰지는 앞으로 정해야 하는 일.
그것이 꼭 황가를 없애고, 제국을 끝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망과는 다르게 사령관들과 대신들은 더 이상 제국이 존속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아이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황족들의 치부가 드러나면서 중앙이 약화된 상태에서, 각 사령부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쭉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제국은 오래지 않아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공식적으로 제국의 종언을 선고했으니,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폐하의 유언장 낭독식은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내관장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을 나섰고, 곧이어 대전 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귀족들끼리 고성을 내질렀고, 혁명 세력은 그들에 맞섰다.
황제가 제국의 종언을 고한 지금, 명분은 혁명 세력에게 있었다.
하지만 고위 귀족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핵심 인사들.
그러다 보니 억지를 써 가면서 황제의 유언을 재해석하려 들었다.
그들의 이런 싸움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사령관들은 밖으로 나갔다.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 중에 수도에서 마지막까지 싸운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귀족들은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가기 바빴고, 혁명 세력에는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황궁에 남아 있었던 대신들과 중앙 관료들 입장에서 저들의 싸움은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한심했다.
그렇게 대전에서 개싸움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수도 역시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역사는 끝났다!”
“이제는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어느샌가 나타난 혁명 세력이 제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귀족들은 제국의 유구한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말한 새 시대란 제국의 멸망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유언장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니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긴 했다.
학자들은 귀족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왜 무능한 것들의 말을 들어야 해?’
‘이젠 우리도 강한데?’
제국민들의 이런 생각은 곧바로 반발로 이어졌다.
귀족들의 힘의 근원은 오랜 세월 축적된 인맥, 혈연, 각 가문의 무술 혹은 마법 등이었다.
그것을 미끼로 평민들을 꼬여 내고, 막대한 재력으로 인재들을 영입해 자신들의 이권을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하지만 모두가 각성한 지금 그 메리트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거기다 지금은 멸망의 때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혁명 세력이 능력 우선주위를 천명했으니 제국민들은 거기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황제의 유언장 낭독식이 있은 후, 수도는 2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치안대와 군대에 의해 직접적인 다툼은 없었지만 매일같이 서로의 세력들이 시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겹다는 듯 바라보는 아이언.
“이제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크림슨도 지겹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령관들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모든 사령관들이 모인 자리에는 특별한 두 사람도 끼어 있었다.
바로 신검가주와 사자가주였다.
제국의 모든 마스터들이 모인 자리.
그곳에서 크림슨이 물었다.
“다들 제국을 어찌하는 게 좋겠소?”
크림슨의 물음에 다들 침묵했다.
마음대로 살아온 신검가주조차 함부로 대답하지 못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일 때, 아이언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이상 황족들에게 이 제국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겁니다.”
아이언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선황께선 분명히 말했습니다, 황가의 짐을 끝내겠다고……. 그건 사실상 신의 보석이 깨질 순간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의무가 사라진 황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음…….”
아이언의 말에 모두가 침음성을 터뜨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아이언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친 자들을 대우해 줄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이언의 말에 사령관들이 눈을 빛냈다.
도망친 직계 황족들을 말하는 것임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두 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예? 충성? 신뢰? 그런 건 뒤로 제쳐 두더라도, 의무조차 저버린 자들을 자신들이 왜 대우해 줘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황족에 대한 어떤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