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203)
64. 멸망한 황가 (2)
모든 인간들의 각성.
그것이 가져다준 파급력은 엄청났다.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인간들이 제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남부와 서부의 사람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고대 신과 외부 신들에게 몸을 의탁한 자들.
그렇기에 그들의 가능성은 제한되어 버렸다.
오히려 멸망의 때가 다가왔음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 해 보려 했던 자들이 달콤한 과실을 얻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것뿐이었다면 인간들은 결코 멸망을 이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폐하…….”
시종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황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용인들을 전부 죽이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기둥이 사라지자 황제의 시신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대륙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각성이 끝나자마자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주변을 환하게 비추던 황제의 시신은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 되돌아간 것이다.
“폐하를 뫼셔라.”
레오폴드 사령관의 말에 근위 기사들이 조심스레 황제의 시신을 관에 담았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신의 보석을 마지막까지 지킨 황제.
그 덕분에 인류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 준 황제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이 어떠했든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모두 예를 갖춰라. 제국의 영웅이시다.”
레오폴드의 말에 남부 사령관을 비롯한 모든 장교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중앙 관료들 역시 묵례와 함께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나름의 예를 갖췄다.
황제의 시신을 담은 관이 중앙 광장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이들은 결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국을 위해 죽은 영웅들에게 취하는 예를 황제에게 한 것이다.
비록 그가 황태자 시절 보여 준 모습은 실망스럽게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황제로서 제국의 영광을 지킨 그의 용기와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얻은 희망은 영웅의 업적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도에 남아 있는 모든 제국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들어 고귀한 희생을 한 황제를 기렸다.
이 때문인지 귀족들도 눈치를 보면서 황제의 죽음을 기릴 수밖에 없었다.
“크흠!”
“험험…….”
눈치 없는 자들이 간혹 있었으나 그들 역시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초리에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반대 세력 혹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자들 역시 예외는 없었다.
그들이 과거 황제를 무시했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황제를 위하는 척 연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수도의 모든 이들이 황제의 죽음을 슬퍼할 때, 사방에서 조여들던 몬스터들의 파상 공세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 멸망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단번에 인간의 군대를 밀어 버리려던 몬스터들.
갑작스러운 인간들의 각성과 함께 힘의 일부가 제한되면서 순식간에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강해졌던 힘이 다시금 약해지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강해지기까지 하니 당황하는 것을 넘어 전쟁의 흐름 자체가 인간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그리 가셨나?”
크림슨이 부하의 보고를 들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족했던 황제가 제국의 영광을 추락시키지 않고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했다는 사실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고귀한 희생 덕에 전대 황제들 역시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대륙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재평가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황제의 희생은 컸다.
‘그의 희생은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학자들 중에는 이런 평가를 내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인류가 얻은 것이 컸다.
산맥 아래쪽까지 몰려왔던 서리 거인들이 다시금 물러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북동부군은 시스템 음성을 통해 수도의 일을 알게 되었고, 결국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위기를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그 때문인지 북동부군과 북부군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제를 기리기 위해 검은 깃발을 올리고 수도 쪽을 바라보며 정오가 될 때마다 군례를 올렸다.
중앙과 황족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북부군과 북동부군조차 이러할진대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가지. 폐하의 마지막 모습은 뵈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해야지요.”
크림슨의 말에 제든 윅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워프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두 사령관이 수도로 향하기 위해 워프 게이트에 몸을 싣는 순간, 서부 사령관 역시 워프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황제의 희생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 힘을 실어 주었고, 그건 서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전투가 순식간에 인간들의 승리로 끝나 버렸다.
인간들의 각성도 컸지만 조인족들을 죽이면서 급격하게 강해지는 병사들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각성을 했더라도 초기에는 약할 수밖에 없는 법.
그렇다면 조인족이 단번에 쓸어버렸으면 될 일이지만 황제의 희생으로 인해 온전히 외부 신의 힘을 받을 수가 없게 되면서 전투가 질질 끌리게 되었고, 덕분에 인간들이 각성한 힘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다녀오겠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예!”
서부 사령관이 워프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이동하자 그곳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황제에 의해 중앙 사령부로 피난했던 사람들.
도망갔던 귀족들과 상인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지원 병력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전쟁이 끝난 수도에 모여 있었다.
“왔는가?”
크림슨이 서부 사령관을 보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사령관께서도 방금 오신 겁니까?”
“……그렇네.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크림슨의 말에 서부 사령관 역시 자신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제국 전역이 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신의 보석을 지키는 황궁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비록 크림슨은 신검이나 사자검주처럼 그랜드 마스터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살면서 얻은 경험으로 인해 얻은 눈이 있었다.
그런 크림슨이 보기에 이번 전쟁에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있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황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 죽음을 거스르지 않았다.
“후…… 일단 가세.”
크림슨의 말에 북부 사령관과 서부 사령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광장에 있던 황제의 시신은 보존 마법 처리를 한 후, 황궁으로 다시 옮겨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 싸웠던 곳.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렇기에 세 명의 사령관은 천천히 광장을 지나 황궁으로 향했다.
“복구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쯧.”
크림슨이 다시금 박살 난 황궁의 모습에 혀를 찼다.
드래곤에 의해 다시금 부서진 황궁은 아직 핏자국도 제대로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핏자국과 부서진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습에 세 명의 사령관은 침음성을 삼켰다.
“마지막까지 싸운 것 같군.”
신의 보석이 있었던 궁.
그 앞에는 근위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마지막까지 드래곤과 싸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크림슨의 말에 제든 윅스가 작게 대답했다.
신의 보석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싸운 자들에 대해 짧게 묵념한 사령관들이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부서진 궁 안의 신의 보석이 있던 자리에는 황제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제국의 대신들과 사령관들만이 자리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중앙 사령관 레오폴드가 대표로 크림슨과 사령관들에게 인사했다.
대신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크림슨은 곧바로 황제의 시신이 있는 관으로 향했다.
반쯤 열린 관에는 황제가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림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되기 얼마 전에 보았던 황태자의 모습은 나름 인상 깊을 정도로 괜찮았다.
사람이 갑작스레 변한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철이 들었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앞두었기에 변한 것이라니…….’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던 경우가 바로 황제였다.
크림슨을 비롯한 사령관 전원이 침묵 속에서 황제의 관을 바라볼 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봤다.
“자네도 왔는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부 사령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하고는 곧바로 황제의 관으로 걸어가 예를 취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아네. 우리도 오지 못했으니…….”
동부 사령관의 말에 크림슨이 자책하지 말라는 듯 위로했다.
그러자 남부 사령관과 중앙 사령관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들이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황제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후…… 이제 시작하시죠.”
대신 중 하나가 내관을 총괄하는 내관장에게 말하자 그가 시종장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 분이 오시지 않았소.”
내관장의 말에 다들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사령들을 비롯한 대신들의 시선에 시종장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음? 자네…….”
크림슨이 놀란 표정으로 마지막에 들어오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 자네, 몸은 괜찮나?”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남자의 말에 크림슨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남동부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아이언이 등장하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습니다.”
크림슨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아이언은 사령관들에게 짧게 인사한 뒤 곧바로 황제에게 향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황제를 보며, 아이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피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전생엔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가, 이제는 자신과 인류에게 희망을 주고 떠나는 모습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주요 인사가 모두 오셨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관장의 말에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황제가 생전에 남긴 유언장.
그것을 읽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보통 가족들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황족들이 도망갈 것을 알았던 것일까?
황제는 용인 군단이 오기 전, 황족들을 제외한 자리에서 유언장을 읽어 달라 시종장에게 부탁했었다.
그런 그의 명령조차 영상구에 남겨 증거로 만들었기에 황족들을 제외할 수 있었다.
황태자 시절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을 만큼의 주도면밀함에 다들 속으로 감탄하며 차분하게 내관장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관장이 천천히 황태자의 유언장이 담긴 종이를 봉투에서 꺼냈다.
“음…….”
유언장을 펼친 내관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오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자식도 없는 황태자이기에 형제에게 양위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
자신들이 알기로 내관장은 딱히 어떤 파벌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서, 누가 돼도 저렇게 침음성을 흘릴 양반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들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는 것이오?”
한 대신의 물음에 곤란해하는 내관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폐하의 유언장을 읊겠소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목소리를 다시 한번 가다듬은 내관장은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예지안을 가졌다.”
황제의 유언장은 자신의 능력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이언이 익히 들은 내용들.
꿈속에서 본 멸망의 날과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 그리고 인류의 위기에 관한 내용이 쭉 적혀 있었다.
“예지를 통해 본 인류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난 선택을 해야 했다. 하나는 나의 죽음이요…… 또 한 가지는 나를 마지막으로 신이 내린 황가의 무거운 책무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내관장의 말에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지금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제국은 짐을 마지막으로 그 끝을 고하노라. 멸망의 시대는 과거의 잔재가 아닌 새로운 대지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바. 부디 과거의 부정한 것들은 임무를 마친 황가와 함께 불사르고 새 시대를 열어 가기를 희망하노라.”
황제의 유언장을 읊던 시종장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관장은 자신이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말없이 대신들과 사령관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제국의 끝’.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황제의 유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에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