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191)
61. 불안한 조짐
격렬했던 남동부의 소식들.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지면서 어디가 우세를 이어 갈지 알 수 없는 나날들도 끝나 가기 시작했다.
결론은 인간들의 승리.
[남동부에서 연이은 격전 끝에 기동 야전군의 승리로…….]
짤막한 소식과 함께 제국 전역에 남동부의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제국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서부는 조인족 때문에, 동부는 갑자기 폭주하는 아틀란티스 유적지 때문에, 남부는 대밀림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남동부가 결판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요동치는 대륙.
가장 큰 문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북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 된 북동부는 물론이고, 북부군 역시 북동부를 지원하는 일이 잦아졌다.
많은 부분이 개방된 북동부지만 여전히 폐쇄된 곳이었기에 소식이 가장 늦었다.
그런 북동부에서 최악의 소식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서리거인 군단? 그들이 깨어나는가?]
[최악의 위기. 과연 북동부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결국 그렇게 숨겨 왔던 진실이 드러났고, 북동부는 순식간에 안전지대에서 위험지역으로 내려앉았다.
북부까지 전부 위험에 처한 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중앙 지역이었다.
제국 전역이 위험 지역이 된 판국에 수도 인근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무너졌던 중앙 정부의 권력 역시 약간씩이지만 회복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황실, 그중에서도 황태자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매일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저것이 언제쯤 깨질 것 같소?”
황태자의 물음에 뒤에 있던 대신들이 말없이 침묵했다.
아직까진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곧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할 때가 다가올 것이다.
현재 대륙을 지켜 주는 결계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백색의 수정.
이것을 지키기 위해 황족들이 온갖 굴욕을 감내하면서 제국을 지켜 왔고, 수도가 함락되고, 황궁까지 점령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제국을 지켜 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조금씩이지만 균열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지, 큰 균열이 일어난 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부서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거대한 수정에 빼곡히 균열이 가 있는 상태였다.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상황.
“지금이라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뒤에 있던 대신의 말에 황태자가 말없이 신의 보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수정을 바라보았다.
무능하며, 오만했던 황태자.
하지만 그런 자도 위기를 겪으면 달라지는 것일까?
적어도 정쟁만 일삼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지금의 황태자는 진심으로 제국의 위기를 안타깝게 여기기는 했다.
역대 황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황태자의 태도가 조금이지만 달라졌다.
몰락한 중앙 정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무리한 명령을 내리지도, 황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세력을 모으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른 황자들과 몇몇 대신들이 다른 사령관들과 기동 야전군을 음해하면서 깎아내리려 할 뿐이었다.
그들이 그럴수록 중재하는 건 황태자였다.
달라진 그의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황태자는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내관이나 시녀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것이 거짓된 행동도 아니라고 했다.
정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확 바뀐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황태자의 옆에서 열심히 조언하는 대신들과 관료들.
그런 그들도 지금 상황에선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는 물러났다.
그렇게 모두가 물러나자 황태자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멸망이라…….”
최근 들어 잠에 들 때면 특별한 꿈을 꾸곤 했다.
대륙 전체가 멸망으로 이어지는 꿈.
인간들이 점령했던 오스리아는 온갖 신들이 모여드는 놀이터로 변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고대 존재들이 깨어나고, 본래 있었던 생명체들은 그들에게 짓밟히면서 장난감으로 변모해 갔다.
황태자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이것이 단순한 꿈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예지에 가까운 꿈이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멸망의 때가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수십 번을 죽었다.
수도가 불타고 인간은 멸망한다.
그리고 그 멸망의 때에서 마지막까지 싸운 것은 이세계인들과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최후까지 저항한 건 몇 번이나 제국을 지켜 낸 ‘영웅’이었다.
중앙에서 그토록 깎아내리려 하는 영웅.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십 번이나 멸망한 모든 꿈속의 제국에서 동일하게 마지막까지 저항한 자로 남았다.
‘제국은 멸망한다.’
황태자가 보기에 그건 필히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었다.
어떤 꿈속에서도 제국은 존속된 적이 없었다.
아마 자신이 황제가 된다 해도 얼마 안 있어 폐위될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황제란 자리가 멸망의 날이 다가올수록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대한 신과 고대 존재들이 오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버지…….”
자신의 아비이자 선황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선황이 자꾸만 생각났다.
제국의 멸망과 대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황실이 이제는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비록 모두가 황실을 욕하고 끔찍하다 말하지만, 적어도 자신만큼은 황실이 고귀한 희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황실이 앞으로의 시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고귀한 혈통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평민이라…….”
자신이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하던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것.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한 줌의 ‘명예’가 두려움을 이길 용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한 줌의 명예만이라도…….’
황태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최근이었다.
꿈속에서 수십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 이것이 예정된 미래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그 오만하고 무지하던 황태자가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 두려움을 걷어 내고 마지막을 준비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황태자의 이런 결심은 바로 다음 날 이루어졌다.
“정말 그런 결정을 내릴 것입니까?”
4황자의 물음에 황태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강력한 권한들을 각 부처에 나누어 주었다.
황실의 그림자들을 정보부에, 황궁기사단을 수도방위군 소속으로, 근위병들 치안대로 보냈다.
그 외에도 황실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이런 결정은 각 부처에 연줄을 대고 있는 중앙 귀족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리 멍청한 황태자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기에 다들 이런 결정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현재 차기 황제로 내정된 황태자가 황제의 권한을 내려놓는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말이 되지 않는 건 이런 결정을 한 황태자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군비 확장을 위해 귀족들의 지원이 필요하오.”
군비 확장.
제국민에게 걷을 수 있는 세금은 지금도 한계치가 넘어간 상황이다.
남은 건 그나마 부유한 귀족들뿐.
하지만 애매하게 귀족들의 세금을 늘려 봐야 하위 귀족들만 죽어 나갈 뿐이다.
가장 확실한 건 기부금이란 명목으로 상위 귀족들에게 지원을 받는 것.
“얼마나…… 원하시는 겁니까?”
한 고위 귀족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황실의 권한을 대부분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이기에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닐 것이다.
모두가 긴장된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3할. 가진 것의 3할 이상을 황실에 기부하시오.”
황태자의 이런 말에 모두가 표정을 구겼다.
처음엔 장난하는 것인 줄 알았다.
황실의 권한을 포기하는 것 역시 자신들을 놀리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식으로 인장을 찍고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확답까지 내린 황태자의 행보에 모두가 긴장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한 귀족의 물음에 황태자는 조용히 답했다.
“마지막 때가 다가왔소.”
그저 이 한 마디뿐이었다.
처음엔 황태자가 미친 줄 알았으나, 곧 몇몇 대신들만 알았던 사실이 공개되었다.
하얀 빛을 뿜던 신의 보석이 빽빽하게 균열로 가득 찬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정보부가 파악하기론 지금 대륙에 있는 혼란은 신의 보석이 한계에 다다른 여파 때문이라고 하오.”
황태자의 담담한 음성과 달리 그것을 듣고 있는 고위 귀족들과 대신들은 경악했다.
“이것을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한 대가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이오. 그러니…… 이젠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온 것이오.”
“그…… 그럼 예전처럼 수도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두텁게 하는 게…….”
“신의 보석이 깨지면 이곳의 가치는 의미가 없소. 그럴 바에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나을 테지.”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대신들과 고위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재산으로 사령관들에게 줄을 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소. 한 가지 확실한 건 마지막 때가 다가왔고, 이제는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이오.”
황태자의 말에 귀족들이 패닉에 빠졌다.
당연히 이 말 역시 대서특필되며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종말의 때가 다가왔다는 신문이 제국을 넘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제국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음유시인들은 종말론을 바탕으로 한 가사를 지어 노래했고, 비관론자들은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종말론을 퍼뜨리기 바빴다.
그렇게 제국의 분위기가 침체될 때, 남부와 서부는 달랐다.
고대 신과 계약한 자들이 많은 남부는 그들과 계약하며 강해진다면 살 수 있다고 믿었으며, 서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들을 믿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었다.
심지어 주신을 믿었던 성국 역시 그들의 신을 버리기 시작했다.
“주신은 더 이상 이 대륙을 지켜 주지 못한다.”
“우린 더 많은 신을 믿어야 한다.”
“주신이 우릴 버렸으니 우리 역시 그를 버리겠다!”
이런 주장과 함께 성국이 공식적으로 다른 신을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를 내리고 힘을 부여해 주는 신.
그 신들의 정체가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라고 해도 다가오는 종말 속에서 그들이 믿을 건 위험한 존재들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기존의 체제에서 벗어나 종말을 대비하기 시작할 때, 남동부는 조용히 힘을 기르며 세력을 넓혀 갔다.
수많은 전투 속에서 강해지고 능숙해지며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이언트 웜 군단과 몬스터들을 조금씩 밀어냈다.
어느새 남동부에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된 기동 야전군은 자이언트 웜들과 몬스터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전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이게 중앙에서 들어온 지원 물자라고?”
아이언이 사령관실에서 카를의 보고를 들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카를이 그렇게 대답하며 서신 하나를 아이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건?”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카를의 말에 아이언이 조용히 서신을 펼쳐서 읽었다.
그곳에는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제국을 잘 부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