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171)
55. 사령부 방어전 (6)
생각보다 더 강력한 그들의 돌진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가장 높은 곳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아리엘은 냉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자신마저 평정심을 잃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정신 차려라! 사령관께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아리엘의 호통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사령관의 믿음.
그것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비록 위기 상황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사령관 없이 싸우는 대규모 전투였다.
자신들의 사령관에게 믿음을 심어 줄 수 있는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머저리처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포격을 멈추지 마라!”
“마도포 재장전 멀었어?”
포대를 닦달하는 도미닉 뒤로 마법 부대가 일렬로 섰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들이 힘을 합해 하나의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 마력을 모았다.
고위 마법사의 부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합동 마법을 익혔다.
개개인을 중시하는 마법사들의 자존심을 버리고 오로지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합동 마법을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런 그들이 익힌 건 대규모 폭발 마법도,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폭풍 마법도 아니었다.
“미끄러운 대지.”
알란 리쇼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대지를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그것을 대규모로 확대해서 발현했을 뿐이다.
마법 부대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야전군치고는 수도 많지 않을뿐더러 수준도 고위 마법사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합동 마법을 펼친다 한들 대규모 폭탄 세례와 포대의 공격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가면서 고민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물소들의 돌진에는 마찰력을 줄여 대지를 미끄럽게 하고, 개미들의 경우 대지 속을 용암으로 만든다.
공중 몬스터는 폭풍을 만들어 그들이 마음 놓고 비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렇게 직접적인 공격보다 도움 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부족한 마법 부대가 찾은 해답이었다.
정령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보다 숫자가 더 부족한 그들은 직접적인 전투 참가보다 지원 물자를 나르거나, 부상자를 치유하거나, 혹은 무너진 함정을 재빠르게 보수하는 등의 지원팀의 역할을 맡았다.
스스로가 부족한 것을 직시하고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 엘리트 코스를 밟은 피터와 알란 같은 경우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그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이언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보호만 받을 순 없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해. 이대론…… 보여 주기식 부대로 남는다!’
아이언에게 보호만 받으면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마법사라는 자존심보다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들에게 화가 난 그들이 스스로 도움이 되기 위해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자청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무…… 무우우!
다리가 꼬인 물소들이 무너졌다.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마법.
녀석들도 머리가 있다 보니 반복되는 패턴에는 적응할 수도 있기에 위험한 순간이 올 때까지 아껴 두었던 마법이었다.
그 덕인지 녀석들의 돌진이 무너지면서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앞열이 무너지니 자연스레 뒤에서 맹렬히 따라오던 녀석들도 무너졌다.
그렇게 서로가 뒤엉켜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다시금 포탄들이 떨어져 내리고, 재정전이 완료된 마도포의 빛줄기가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가까이까지 접근했던 녀석들은 총이 불을 뿜으면서 마탄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가죽은 그 모든 것을 견뎌 냈다.
“성역의 유무가 이 정도로 차이 나나?”
아리엘은 씁쓸한 표정으로 물소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성역은 없지만 신성력이 깃든 포탄과 폭탄, 마탄이라면 어느 정도 먹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만에 불과했다.
그나마 마도포가 먹히긴 했지만, 그것도 아이언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마나석을 사용했기에 이 정도 효과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단순이 파괴만을 이용한 마법이 아닌 정화 마법과 아이언의 신성력을 융합해 만든 특별한 마도포.
하지만 이제 막 시험작을 거쳐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라 양산된 것도 얼마 없었고, 급하게 가져온 것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모두 전투준비!”
아리엘의 외침에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창을 쥐었고, 성문 안에 있는 돌격대 역시 준비했다.
“후…….”
“왜 떨리냐?”
긴 숨을 내뱉은 로뎀을 보면서 루뎀이 놀리듯 말했다.
“형님 없이 싸우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갑다?”
“흠…… 확실히. 좀 쫄리긴 하네?”
쌍둥이 형제가 그렇게 말하면서 뒤를 돌아보자 다른 돌격대원들 역시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변이된 물소들의 돌격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지난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세리덴이 말했다.
“다들 우리가 어디 가문 소속인지 잊은 것 같네?”
세리덴의 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레온하르트 소속이었던 자들답게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뭐래도 세리덴은 레온하르트의 직계 혈족이다.
거기다 루뎀과 로뎀 조장들 역시 마찬가지.
“언제부터 사자들이 겁쟁이가 되었냐?”
그의 말에 돌격대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즐겨. 사자는 겁내지 않는다.”
“맞네.”
“그러게. 까짓거 못 막으면 뒈지면 되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들.
그들의 기세에 돌격대원들 전원의 기세 역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온다.”
돌격대가 사기를 회복하는 사이, 뒤엉켜 있던 물소들이 다시금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는 돌진과 함께 성벽 위에서 사격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성문 앞에 배치한 함정들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으로 지반을 무너뜨려 돌진을 저지하거나, 대지의 벽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돌진력을 감소시켜 보았지만, 그것에 막히는 물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의 강력한 다리로 뛰어넘고 뿔로 들이받아 벽 자체를 부수면서 끝내 강철로 된 성문에 도달했다.
쿠웅!
마법 처리된 두꺼운 강철 문을 한 방에 우그러트리는 돌진.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들의 돌진을 멈췄으니 성문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그들의 돌진이 멈춘 사이에 수많은 마법과 포격, 탄환이 날아들었다.
장거리가 아닌 근거리에서 맹렬히 공격하자 그들의 두꺼운 가죽으로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선봉대에 불과했다.
2진, 3진이 몰려오면서 우그러진 성문이 조금씩 벌어지더니 결국 뚫려 버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다들 즐겁게 놀아 보자고!”
세리덴의 명령에 맹수의 사나운 기세가 성문 주위로 퍼져 나갔다.
두려움을 모르는 물소들조차 흠칫거릴 정도로 강력한 사자의 기운으로 주변을 잠식하며, 돌격대원들은 벌어진 성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녀석들의 목을 베어 나갔다.
“성문이 뚫렸다! 기사단은 전원 성문으로 집결해라!”
아리엘의 명령과 동시에 성벽 위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성문으로 집결했다.
-무우우우!
성문이 완전히 열리고 수십 마리의 물소들이 일제히 몰려들자 소수의 돌격대만으로는 그들의 돌진을 방어하기 어려워졌다.
어느새 모여든 기사단도 막아 보았지만 몇 명이 진을 유지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면서 결국 뚫려 버렸다.
하지만 성문을 막는 건 돌격대와 기사단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레인저들이 물소들을 함정으로 유인하며 다수가 몰려들어 죽여 나갔다.
그러는 사이 병사들도 방진을 형성하여 돌진력이 죽은 물소들을 하나하나 포위했다.
뚫린 성문 사이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물소들을 저지하지 못한 돌격대와 기사단은, 무리해서 막기보다는 후퇴해서 병사들과 함께 건물들 사이로 이동하며 흩어지는 물소들을 죽여 나갔다.
“할 만해.”
아리엘이 성문 위에서 돌아가는 전황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비록 성문은 뚫렸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했다.
뚫려 버린 성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물소들은 건물들을 때려 부수며 돌진하다가도, 뭉쳐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성 내부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에 의해 하나씩 죽어 나갔다.
이대로라면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리엘이 입가에 미소를 그릴 때였다.
“단장님!”
아리엘이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부관을 바라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저 멀리 까맣게 물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숱한 전투를 치러 온 아리엘은 저것들이 뭔지 잘 알았다.
항상 빈틈을 노리는 영악한 녀석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변이체들.
“거대 개미 군단이다! 성벽 위의 군사들은 모두 전투준비!”
아리엘의 고함 소리에 정신없이 물소를 상대하던 병사들과 장교들은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면을 꽉 채운 검은 물결에 잠시 멍 때리던 장교들이 다급히 명령을 내렸다.
“비공선은 최대한 저들을 저지해! 그리고 비룡 부대는 수개미들로부터 비공선을 보호해라!”
카드로의 명령에 공중에서 지상에 공격을 쏟아붓던 비룡 부대와 비공선 부대가 저 멀리 몰려오는 거대 개미 군단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마법사들 역시 마력을 아끼며 멀리서 오는 개미들을 상대하기 위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함정들도 전부 소모되었고, 성문도 뚫려서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아직 변종 물소들도 전부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안에서 수많은 거대 물소들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거대 개미 군단을 막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개미 군단이 물소들 때문에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것을 이용해 소모된 탄약과 포탄을 재정비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반드시 막는다. 모두 전부 죽을 각오로 싸워라. 후퇴란 없다.”
“예!”
아리엘의 명령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모두가 목숨 걸고 사령부를 지키려 하고 있을 때, 아이언 역시 온 힘을 다해 거대 지렁이 군단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검은색 외피로 뒤덮인 그레이트 웜과 아직 진화가 덜 끝난 자이언트 웜들이 몰려오자 피닉스와 천둥새, 두 개의 달이 일제히 힘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전진을 저지했다.
그러자 땅속에서 숨어 이동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동부로 처음 왔을 때, 아이언을 곤혹스럽게 만든 거대 철갑지렁이가 살기를 가득 품은 채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다?”
아이언이 반갑게 인사했지만 녀석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안 본 사이에 더 강해졌지만, 녀석도 부하들에게 공허의 기운과 공허충들을 나눠 줬기 때문인지 큰 폭으로 성장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었다.
“후…….”
엄청난 규모의 그레이트 웜과 자이언트 웜들의 숫자에 세 신수 모두가 힘을 써야 하는 상황.
그러다 보니 아이언 홀로 거대 철갑지렁이를 막아야 했다.
녀석은 더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곧바로 거대한 몸을 이끌고 아이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이언의 몸에서 신성력이 폭사되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뱁새야, 부탁해.”
-짹!
성역의 힘을 증폭시켜 달라는 부탁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뱁새가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날아올랐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신성력에 잠시 멈칫하던 거대 철갑지렁이가 다시금 달려들기 시작했다.
단번에 집어삼키려는 녀석들의 돌진에 아이언은 맞서 싸우기보다 회피를 선택했다.
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자 철갑지렁이가 외피를 이용한 공격을 했다.
수백 수천 개의 강철 같은 외피 조각들이 일제히 아이언을 향해 몰려들었다.
카가가가가강!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
아이언이 외피 조각을 날리면서 오만하게 서 있는 철갑지렁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 공격이면 끝이라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을 보며 강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저 오만한 녀석에게 오늘 제대로 한 방 먹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친 듯이 몰아치는 강철 외피 조각들을 모조리 쳐 내면서 빠르게 녀석에게 접근했다.
쳐 낸 외피를 공중에서 밟아 가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오만하게 선 녀석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겪어 본 녀석답게 재빨리 고개를 숙이면서 아이언의 검격을 피해 냈다.
거대한 몸집답지 않은 날랜 몸놀림이었다.
“칫!”
예상보다 날랜 몸놀림에 아이언이 땅으로 착지함과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철갑지렁이 역시 처음과 달리 수천의 외피들로 아이언을 포위한 채 경계했다.
서로가 방금 보인 한 수로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유가 있는 건 철갑지렁이 쪽이었다.
보유한 오염된 마력도 우위에 있었고, 순수한 육체 능력 역시 아이언보다 월등했다.
칭호 효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아이언조차 비비기 힘든 육체 능력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버틸 수는 있었다.
“내가 또 버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지.”
그렇게 중얼거린 아이언이 철갑지렁이에게 말했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