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157)
52. 아이언을 꼬셔라 (2)
아리엘의 살벌한 눈빛에 아이언 역시 자신도 모르게 움츠렸다.
“흠흠…… 일단…… 내 딸이랑 얘기를 먼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신검가주답지 않게 당황하는 표정.
은근슬쩍 물러나려는 테리언 시구르드를 향해 매서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아리엘은 살벌한 눈빛을 유지하며 말했다.
“가세요.”
“그…… 그러마.”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기에 찔끔하며 물러나는 테리언 시구르드.
검에만 미쳐 사는 남자답지 않게 아리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저런 양반이었나?’
마치 딸에게 잡혀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알던 검성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모습에 당황했지만 아리엘이 다가오자 그는 잡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러니까…… 네가 검성의 딸?”
“……맞아.”
아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미안할 것까지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레온하르트 가문의 장자인데 뭐.”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제야 아리엘이 살짝 밝아진 얼굴로 아이언을 봤다.
사자가문의 장자와 검성의 딸.
제국의 가장 위대한 가문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웃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시구르드에는 가출한 사람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에서 장자가 가출했다는 소문은 쫙 퍼졌지만 신검세가에는 그런 게 없었다.
테리언의 자식들은 전부 남부에서 아카데미를 다니거나 열심히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사생아야.”
“응?”
“사생아라고.”
그녀의 말에 아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어…… 음…… 미안.”
“괜찮아.”
일단 사과부터 한 아이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침묵하다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시구르드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어.”
“……언제?”
“훈련소 시절에. 본격적으로 검술을 선택하기 전부터 은하유성검을 사용하길래 혹시나 했지.”
“아…….”
훈련소 초창기 때 아이언과의 대련에서 자신이 사용한 검술을 기억해 낸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머님은……?”
“돌아가셨어.”
“아…… 그렇군. 미안…….”
애써 전환시킨 분위기가 다시금 급속도록 가라앉자 아이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싸우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려던 두 사령관도 흠칫할 정도로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슬쩍 물러났다.
아이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술병을 들어 그녀와 자신의 잔에 쪼르륵 따랐다.
그리고 그것을 홀짝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북동부에 온 이유가 시구르드 때문이야?”
“응. 저 빌어먹을 망나니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
아이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비밀을 밝힌 아리엘은 술을 홀짝이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살짝 취했는지 처음의 머뭇거림은 사라지고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말했다.
시구르드 가문에서 아리엘의 포지션은 엄밀히 말하면 정실의 장녀였다.
테리언이 처음 결혼하려고 했던 여인은 아리엘의 어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테리언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고, 아이를 배고 있던 아리엘의 어미는 배신감에 테리언의 아이가 있다는 걸 감추고 혼자 키운 것이다.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아이를 가졌기에 가문에서 나와 홀로 아리엘을 키워야 했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살았지만, 아리엘에겐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리엘이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테리언이 뒤늦게 시구르드 가문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리엘의 어미는 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테리언을 극도로 증오하며 북동부로 온 것이다.
“그냥…… 흔한 사생아 이야기지.”
사생아의 기구한 이야기는 제국에 널리고 널렸다.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아리엘의 과거였지만 아이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막장 드라마라면 흔한 이야기에 불과할 테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을 것이다.
“후…… 사실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
“우리 가문 알지?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미친 곳이거든. 그래서 내 동생들도 대부분 어머니가 없어.”
서로 어머니가 없는 처지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지만 아리엘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아이언은 식은땀을 흘렸다.
‘위로는 소질이 없는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기에 일단 어깨를 토닥여 주면서 아리엘을 위로하던 아이언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테리언 가주께 네가 찾아간 거야?”
“……아니. 알아봤어.”
“알아봤다고?”
아이언이 놀란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봤다.
“어떻게?”
“……마력. 빛의 마력을 느낀 것 같아. 내가 어머니 얼굴을 닮기도 했고.”
“아…….”
각 가문만의 고유한 마력 파장.
특히 아리엘의 경우는 더욱 도드라졌는데, 거기다 얼굴까지 비슷하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테리언 시구르드쯤 되면 마력 파장을 읽는 건 쉬웠을 테니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어쨌든 미안해. 괜히 저 망나니 부탁을 들어주려다 이렇게 됐네.”
“동기끼리 이 정도야…….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고마워.”
아리엘이 애써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언은 잔을 들어 올리면서 그녀와 함께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드로와 카를이 있는 곳으로 가자 말싸움하고 있던 그들이 반기면서 오랜만에 동기끼리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아리엘 역시 한결 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면서 카드로와 카를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러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서 2차를 달리는데 카드로가 조심스레 자신을 불렀다.
“뭔 일이야?”
“그게…… 부탁할 게 있어.”
“부탁?”
카드로의 말에 아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앙사령관님 좀 같이 뵈러 가자.”
카드로의 부탁에 아이언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디선가 겪어 본 것 같은 이 기분.
찝찝함을 느낀 아이언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설마 사령관님의 사생아나 그런 거 아니지?”
“야! 아니야.”
“그래? 다행이다.”
아이언이 카드로의 말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셋째야.”
가슴을 쭉 펴면서 말하는 카드로의 말에 아이언의 표정이 그대로 구겨졌다.
“그러니까…… 중앙사령관님의 아들이……라고?”
“어. 레오폴드 가문의 삼남 카드로 레오폴드. 그게 원래 내 이름이야.”
카드로의 말에 아이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내 동기들은 왜 다…… 이러냐?”
“음…… 충분히 그럴 만하지 않냐?”
“……왜?”
“혈통발이 크지. 솔직히 너도 레온하르트 가문이고, 아리엘도 시구르드 가문이고……. 애초에 내가 달린 건 다 이유가 있었어!”
그렇게 말한 카드로는 절대 자신의 실력이 달려서 그런 게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이게 다 혈통발이라면서 레오폴드 가문의 부족한 혈통을 탓했다.
취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 날아다니는 카드로를 간신히 진정시킨 아이언은 중앙사령관을 만나러 갔다.
“이…… 무슨 추태냐.”
카드로가 왜 혈통을 이따위로 줬냐고 칭얼거리자 중앙사령관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면서 말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가 다 죄송스럽습니다.”
동기이지만 휘하 장교이기도 한 카드로의 추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아이언은 뱁새를 불러 녀석의 취기를 좀 날려 주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녀석은 방금의 추태를 기억해 냈는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아리엘과 카를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보아하니 이미 여러 곳에서 제안받은 모양이군.”
“하하…….”
중앙사령관은 머쓱한 표정을 짓는 아이언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말게, 난 무리한 제안은 안 할 것이니.”
“그럼……?”
“내가 할 부탁은 기간제일세.”
중앙사령관의 말에 아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간제라면……?”
“북동부로 바로 떠나지 말고 한동안만 중앙에 머물러서 우리 군 좀 도와주게.”
“……예?”
아이언의 물음에 중앙사령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네만 허락한다면 중앙군의 훈련 전체를 자네에게 맡겨 보고 싶군.”
“어…… 죄송하지만 북동부 사령관의 허락이…….”
“그 부분은 허락 맡았네. 크림슨 사령관께서 자네만 동의하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다는군.”
중앙군 사령관의 말에 아이언은 어버버거렸다.
“솔직히 자네를 노리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중앙군이 다른 군처럼 매력 있는 곳도 아니고, 중앙처럼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머리 좀 썼네.”
“하…… 하하…….”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중앙군이 개판이지 않나? 그래서 거의 처음부터 재건해야 하는 수준인데…… 기초를 다져 줄 훌륭한 교관이 필요하네. 마침 보니까 자네 휘하 병력이 참 잘하더군.”
중앙군 사령관의 말에 아이언은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키웠죠.”
“그러니 좀 빌려주게나.”
“후…… 그러죠. 올라가면 바빠질 텐데……. 중앙군에서 좀 쉰다 생각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자네도 움직여 주면 고맙겠는데…….”
레오폴드 사령관의 말에 아이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봐서요.”
“하하! 그래. 내 자네 마음에 들도록 열심히 준비해 놔야겠군.”
“기대하겠습니다.
레오폴드 사령관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언도 웃으면서 맞장구쳐 주고는 다시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한쪽은 시구르드 가문의 딸, 한쪽은 레오폴드 가문의 아들.
둘이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술내기라도 했는지 정신없이 마시는 그들을 보면서 카를이 질린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이 녀석들 왜 이러냐?”
“몰라. 갑자기 지들 가문을 밝히더니 욕하면서 저런다.”
카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자 아이언은 한숨을 쉬다가 카를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뭐 없지?”
“응? 뭐가?”
“쟤네처럼 가문 싫다고 뛰쳐나온 거 아니냐고.”
아이언의 물음에 카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그렇긴 한데…… 어쨌든.”
“우리 집, 상인 가문이야. 인마.”
“뭐 제국 10대 상단 이런 거냐?”
아이언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카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평범해.”
카를의 대답에 아이언은 그제야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술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근데 나도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안 돼.”
“아, 왜! 쟤들은 되고 난 안 되냐?”
카를이 차별한다면서 찡찡거리기 시작하자 아이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뭔데?”
“난 서부 사령관님 좀 만나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지.”
“뭐? 야!”
카를이 아이언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이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이냐?”
“아니? 진짜야.”
“하…… 넌 또 뭔데? 뭐 서부 사령관님 가문의 방계라도 되냐?”
“아니. 팔촌의 사돈이 그쪽 가문 방계 언저리쯤 될걸.”
카를의 말에 아이언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촌에 사돈이면…… 그냥 남 아니냐?”
“그렇지?”
“근데 왜……?”
“서부 사령관님만 인맥 없으면 서운하시지 않겠냐? 들어 보니 남부 사령관도 아리엘을 불러다 만나려 했다며. 그래서 그냥 없는 인맥이라도 만들어서 한번 만나게 해 드리려고.”
카를의 말에 아이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거면 중앙이 낫지 않겠냐?”
“야, 그건 아니지.”
“왜?”
“여긴 쓰레기잖아.”
카를의 말에 아이언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
아이언과 카를은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리다가 중앙을 씹어 댔다.
그동안 중앙 지역과 수도에서 고생한 것과 연구소에서 찾아낸 것들을 토대로 한참을 씹어 대면서 자정을 넘어서까지 술을 마셔 댔다.
그리고 다음 날, 남부 사령관을 만나서 그의 제안을 듣고는 곧장 서부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제안을 듣고는 카를의 추천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팔촌의…… 사돈?”
“예.”
“그 정도면 남…… 아닌가?”
서부 사령관이 카를과 자신의 인연을 생각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죠. 사실 그냥 사령관님이 불쌍하다고 해서 왔습니다.”
“하…… 하하하……. 이거참, 내 꼴이 말이 아니구만.”
서부 사령관의 말에 아이언은 빙그레 웃었다.
“뭐…… 이쪽으로 온다고 확답은 못 하더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아무쪼록 제일 급한 우리부터 생각해 주시게나.”
서부 사령관의 부탁에 아이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얄밉다는 듯 바라본 사령관이 편하게 식사나 같이 하자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그 편안했어야 할 식사가 남부 사령관과 동부 사령관, 북부 사령관까지 들이닥치며 살 떨리는 견제의 장으로 변모해 버린 건 군부의 사소한 비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