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154)
51. 새로운 국면 (4)
황제를 상징하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1. 황제의 관
2. 옥새
황제의 관이 황제의 현재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옥새는 미래를 상징하는 보물이었다.
황제의 관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나 파티 등에 일부러 쓰고 나가곤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옥새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담당하는 보물답게 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서에는 반드시 이 옥새로 된 직인이 찍혀야만 효력이 인정되었다.
물론 사람이 관리하다 보니 이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를 잃어버리거나 반란군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옥새를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하나만 잘 갖고 있어도, 현 황제의 정당성엔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그만큼 이 두 가지의 보물은 중요했고, 그 자체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 황태자가 그것들을 지켰다?
‘다음 대 황제……인가?’
귀족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고, 어떤 이는 떨어져 버린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떨어질 것이라며 통탄했다.
살아남은 중앙 귀족들 중에 관료로 짬밥 좀 먹은 이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머리는 멍청하며, 능력은 없고, 욕심만 많은 존재이다. 성격 역시 포악하기 이를 데 없으니 차기 황제로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이런 황태자라도 한 가지 잘하는 게 있다면 ‘연기’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것. 그것만큼은 제국 어느 누구라도 부럽지 않을 만큼 잘할 것이다.]
한 관료가 비밀리에 쓴 글.
누가 쓴 건지 끝내 밝혀지지 않은 글이었지만, 중진급 관료들은 저마다 한 번씩은 봤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궁 밖으로 황태자에 대한 인성과 능력에 대한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은 건 황제가 잘 틀어막은 것도 있겠지만 황태자 본인이 밖에선 ‘연기’라는 가면을 잘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자신을 포장하는 것밖에 모르는 황태자가 다음 대 황제가 유력하다.
이 사실에 중진급 귀족들의 표정은 구겨졌다.
반면에 현 제국의 실질적인 거두들인 마스터들은 침묵했다.
그들 역시 황태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별 반응이 없자 영광의 홀에 들어선 중진급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한 노쇠한 귀족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마스터들을 바라보았다.
현 마스터들은 전부 각 군을 책임지는 사령관과 제국을 지탱하는 가문의 거두다.
그런 그들이 이번 진실을 보고 더 이상 중앙을 믿을 수 있을까?
설사 전부터 황실과 중앙이 썩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명분이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전 국민이 수많은 비리들과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나 이를 명분으로 삼아 독립을 꾀할지도 모를 일이다.
제국이라는 틀 안에 남아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독립한다.
행정, 군부부터 법과 제도 같은 것까지 죄다 독립해 버린다면 중앙은 제국이라는 허울뿐인 틀 안에 스스로 고립될 것이다.
황제 역시 허울뿐인 권위에 기대어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이전의 권위를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실의 막강한 권위에 기대어 살아온 중앙 귀족들 입장에선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마…… 막아야 한다.’
노쇠한 귀족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선대 황제의 장례식은 엄숙한 풍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피의 폭풍으로 시신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지만 다행히 그가 갖고 있던 물품 몇 개를 발견해 관 속에 집어넣어 진행할 수 있었다.
사실상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까운 황태자가 주도적으로 움직이며 황제의 관과 함께 선대 황제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본래라면 명예롭게 진행되어야 할 선황의 장례식.
하지만 그들이 움직일 때 어떤 이들은 주저앉아 절규했고, 어떤 이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을 보며 황궁 기사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려 했다.
그런 기사의 팔을 직접 잡은 레오폴드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멈춰 선 행렬.
그들 모두가 황궁기사와 레오폴드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레오폴드의 말에 한 귀족이 나서며 말했다.
“그래도 선황 폐하의 장례식입니다!”
한 귀족의 말에 다른 귀족들 역시 동조했으나 그들의 기세는 곧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네.”
“모든 것을 잃은 제국민들에게 원망할 대상은 있어야 하겠지.”
마스터들 중 가장 나이 많은 크림슨과 명장으로 유명한 서부 사령관이 동조했다.
게다가 다른 마스터들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폴드의 의견에 따라 주었다.
그들 중엔 라이너와 테리언 시구르드까지 있었다.
“우린…… 죄를 지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황궁이 반파되었다. 그리고…… 추악한 진실과 죄를 알게 되었지. 이런 우리가 과연 저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나?”
레오폴드의 말에 선황의 장례를 보러 온 수많은 제국민들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가족을 잃은 자들.
동료를 잃은 자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잃고 좌정하는 자들.
이들 모두가 통곡했다.
어떤 이는 선황을 향해 절규하며 원망했다.
“내 자식 살려 내!”
“어머니…… 흑흑…… 어머니!”
“여보!”
저마다의 사정으로 우는 자들을 보면서 어떤 이도 그들을 탓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엄숙한 장례 행렬은 울음바다가 되었으며, 선황과 황실을 원망하는 현장으로 변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통곡을 들으며 결국 역대 황제들이 묻혀 있는 곳까지 도달한 이들은 절차에 따라 관을 묻고 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모든 제국민들과 귀족들이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살아남은 중앙 귀족들은 서로 눈짓을 했다.
그들 역시 영광의 홀에서 일어난 일과 방금 보인 마스터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두 가문의 가주는 몰라도, 사령관들이라면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선황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해 줄 것이라 느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상황이 달라졌다.’
역대 황제들 중 방탕한 삶을 누리지 않은 자들은 손에 꼽았다.
그들 중 제국을 말아먹을 뻔한 자들도 존재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제국답게 그러한 황제가 몇 번 있었음에도 그들의 마지막만큼은 예우를 다해 모셨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황실의 권위가 박살 났다!’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 중 머리 좀 돌아가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눈치챌 만큼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방 귀족들은 새로운 황제와 중앙 귀족들에게 줄을 대기보다 마스터와 가까운 이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중앙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공식적인 장례 절차가 끝나자마자 삼삼오오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위해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믿을 건 레오폴드 사령관뿐이었지만 그조차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쉽지 않았다.
본래도 쉽지 않았는데, 이젠 중앙에 대한 정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레오폴드 공을 설득하긴…… 어렵겠소.”
“후…… 미치겠군.”
“하긴, 중앙군을 버린 게 수도인데 정이 남아 있는 게 이상하겠지.”
“충성심에 기대야 하는데 이젠 그마저도 기댈 수가 없으니…….”
오랜 관록으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늙은 중앙 귀족들이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중앙은 제국에서 가장 쓸모없는 곳으로 버려질 것이다.
제국의 핵심이 가장 쓰레기 같은 곳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레오폴드가 한 가지 사실을 발표했다.
「새로운 중앙군 사령부는 부르트 지역으로!」
선황의 장례가 끝나고 다음 날.
조간지의 일면을 장식한 레오폴드의 발표가 수도를 강타했다.
부르트는 중앙과 서부, 남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곳인데,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서부와 남부를 돕기 위해 그리 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앞으로 중앙군은 수도방위군과는 완전히 별개로 움직일 계획이다.」
이는 사실상 수도방위군을 버리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망한 수도에 말뚝을 박아 나락으로 보내 버리는 발표였다.
거기다 더 이상 중앙 관료와는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레오폴드의 굳건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렇다 보니 중앙 귀족들은 더 이상 레오폴드를 설득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는 황제의 유언을 받들어 자신이 차기 황제가 될 것임을 선포했다.
제국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황제가 된다고 발표해 버리니 중앙 귀족들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다.
이대로라면 수도의 고립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위기의 순간.
한 늙은 귀족의 눈에 마스터들과 모여 있는 한 젊은 청년이 보였다.
이번 수도방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중앙 지역 탈환에도 엄청난 공을 세운 영웅이자 새로운 마스터.
“이자를 꼬셔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늙은 귀족의 말에 중앙 귀족들이 그가 가리키는 사진 속 인물을 바라보았다.
“아…….”
“이자라면…….”
모두가 희망 어린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한 귀족이 조용히 말했다.
“한데 이자도 중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래도 해야지요. 게다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늙은 귀족의 말에 다들 귀를 쫑긋했다.
“북부에서 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소장에 그쳤습니다. 6단계에 이르는 검술과 막강한 신수들의 힘은 능히 군단장이 되고도 남음이었습니다.”
“그렇지.”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군.”
늙은 귀족들이 그의 말에 ‘옳거니!’ 하고 추임새를 넣으면서 제국의 영웅을 꼬시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일단 중앙군이 빠져나갔으니 수도방위사령부를 신설해야 합니다.”
“좋군. 그럼 그 자리를 제안하며 대장으로 승진을…….”
“그것으론 부족하지 않겠소?”
한 귀족의 말에 다들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스터가 된 이상 대장의 자리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겨우 이것만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럼 작위와 영지인데……. 사자가문의 장자 아니오? 그에게 웬만한 작위는 의미도 없을 텐데?”
“그럼 백작?”
“그가 세운 공이 있는데 겨우 그걸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소?”
귀족들이 저마다 의견을 피력하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주기 위해 고성을 질러 댔다.
“최소 후작의 작위…… 그리고 그에 걸맞은 영지까진 주어져야 할 것이오. 또한 세제 혜택과 중요 권리도 주어져야겠지.”
“맞소. 어차피 이번에 죽은 귀족들이 많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오.”
그날 저녁.
늙은 귀족들이 이러한 결정을 하자 다른 중앙 귀족들의 파벌에도 이 결정이 귀에 들어갔다.
그나마 만만한 새로운 마스터를 꼬시기 위해 중앙 귀족들의 힘을 모으려고 주요 파벌들의 수장들이 모여서 열띤 회의를 이어 갔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라도 더 챙겨 주기 위해 열심히 회의를 하는 동안 아이언은 오랜만에 북동부 사람들과 모여서 저녁을 먹었다.
자신을 위해 휴가까지 써 가면서 수도로 찾아온 옛 동료들.
그들은 살아남은 고스트들이었다.
“출세했네.”
린텔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만큼 고생했잖아요.”
“그렇긴 해.”
린텔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칼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이제 북동부에서 벗어나는 건가?”
칼의 물음에 빌리와 린텔, 밀턴이 아이언을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