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86)
27. 분열 (4)
동부 항구에서 가장 많은 배가 모여드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버려진 항구의 부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부 마리카 항구에서 가장 많은 배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이미 새로 지어진 곳으로 옮겨 간 수많은 큰 선박들 때문에 반쯤 버려진 이 부두는 관리가 아예 되지 않거나, 되더라도 최소한의 이용료만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밀수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었고, 그만큼 범죄자들 역시 많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왔나?”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로브를 쓴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모습은? 네가 암살자냐?”
로브 밑으로도 입 가리개를 통해 완전히 가려 놨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안경까지 써서 완벽하게 자신의 모습을 가린 채로 남자는 푸른 머리칼의 사내에게 다가왔다.
“로브 좀 벗지? 이대로 얘기할 거야?”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까칠하긴.”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너한테 이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후…… 그래. 지금 네 입장에선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믿지 못하겠지. 용건부터 얘기하마.”
한숨을 쉬면서 말한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앞으로의 계획이다.”
사내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 든 남자는 말없이 침묵했다.
그럴 줄 알았다며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봤다시피 이미 유령섬 장악은 끝났다.”
“그럼…….”
“그래, 곧 차원 균열이 터질 거다.”
푸른 머리칼의 남자의 말에 로브를 쓴 남자가 침묵했다.
“이제부터 바빠질 거다. 동부 사령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실시간으로 보고해야 해.”
“알겠습니다.”
“잊지 마라. 이곳 마리카 항구 놈들은 네 아비의 원수다.”
“알고 있습니다.”
로브를 쓴 남자가 이를 악물면서 대답하자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만 하면 인어의 눈물을 줄 거다. 어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작전을 성공시켜라. 우리도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예.”
다시 한번 당부하는 푸른 머리칼의 사내를 보던 로브를 쓴 남자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래 얘기를 나누어 봤자 괜히 의심만 살 뿐, 최대한 용건만 간단히 하고 사라지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로브를 쓴 남자가 사라지자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를 이용하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군.”
아무리 한평생 복수를 위해서 살아온 삶이라지만, 친우의 자식마저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상황이 흘러갈수록 결국 애써 숨겨 왔던 친우의 자식을 알아낸 동지들이 푸른 머리칼의 사내를 압박해 왔다.
결국 인어의 눈물을 미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바다 왕국을 위하여…….”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는 어느새 사라진 남자를 위하여 병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푸른 머리칼의 사내가 있던 자리에는 바다 비린내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동부 마리카 항구 곳곳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음습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 동부 사령부의 사령관실에는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동부 사령관을 맡고 있는 리처드 버튼입니다.”
“반갑소이다. 중앙 마탑의 산토스라 합니다.”
“남부 마탑의 시에라 레오나르예요.”
두 마탑주가 동부 사령관과 악수하고는 앉아 있는 앳된 청년을 바라보았다.
“4황자님이십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황자님을 뵈어요.”
리처드 버튼의 소개에 두 마탑주가 차례로 인사했다.
그렇게 두 마탑주는 황자와 얘기를 나눈 후 일어서 있는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아이언 카터 중령입니다.”
아이언은 짧게 묵례하면서 인사하자 두 마탑주가 침묵했다.
자신들의 제자를 발라 버린 존재의 인사에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마탑주답게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는지 아이언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런 두 마탑주에게 리처드 버튼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리처드 버튼의 권유에 두 마탑주가 마지못해 앉았다.
“먼저 두 분께 사과드리는 게 맞는 듯싶습니다. 동부 사령관으로서 관리에 소홀한 점, 사죄드립니다.”
“사과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멍청한 제자 놈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미안합니다.”
“저 역시 사령관께 사과드려요.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제자 녀석이 철이 덜 든 것 같네요.”
두 마탑주가 그렇게 말하면서 동부 사령관한테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제자 놈에게 사정은 전부 들었습니다. 시비를 건 것도, 다 같이 싸워서 깨진 것도 이쪽이라지요.”
중앙 마탑주 산토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리처드 버튼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상황인데 왜 굳이 일을 크게 키워 우리까지 오게 만들었냐는 물음이 담긴 듯한 시선이었다.
남부 마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제자들에게 사정을 들어서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파악한 마탑주들은 지금 이곳에 모인 것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남부 마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언 카터 중령에게 남부 마탑을 대표해 사과드려요.”
“나 역시 중앙 마탑을 대표해서 그대에게 사죄를 청하오.”
두 마탑주가 아이언 카터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두 마탑주가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죄를 할 줄은 몰랐던 아이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황급히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리처드 버튼이 빙그레 웃으면서 아이언에게 말했다.
“나 역시 다시 한번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지. 부하 관리를 소홀히 한 점, 다시 한번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아이언이 마주 고개를 숙이자 이제 급한 일은 끝났다는 듯 두 마탑주가 리처드 버튼을 노려보았다.
해명을 요구하는 모습에 리처드 버튼이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현재 동부 사령부에 첩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게 사령관이 치부를 드러내자 두 마탑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차원 균열을 막으러 갈 때, 이곳에서 일을 벌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겁니까?”
산토스의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우리가 얻을 건 뭔가요?”
시에라의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북동부에서 물먹으셨다지요?”
리처드 버튼이 2개의 마나 코어 중 한 곳에도 접근조차 못 한 두 마탑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자 중앙 마탑주는 움찔거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나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차원 균열은 신수로 인한 균열로 추정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왜 괜히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리느냐는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나 코어 비슷한 게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슷?”
시에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후 세력으로 인어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인어족!”
“그들이 살아 있었던 건가요?”
멸족당했다 알려진 인어족이 언급되자 두 마탑주가 놀란 눈으로 리처드 버튼을 바라보았다.
“인어족에게는 바다의 보주가 있다지요. 어쩌면 신수와 그 바다의 보주라는 걸 함께 써서 균열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는 건…….”
“유령섬의 차원 균열은 북동부의 차원 균열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제 조심스러운 추측입니다.”
시에라의 말에 리처드 버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두 마탑주뿐만 아니라 4황자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만약 리처드 버튼의 추측대로 엄청난 규모의 차원 균열이 일어난다면 자신이 구상한 계획들이 모조리 쓸모없게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령관, 근거가 있소?”
“예, 다만…… 제가 모은 정보들은 조금 있다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황자의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두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바다의 보주가 정말 있다고 가정한다면…… 차원 균열을 막아 낼 시 북동부처럼 그걸 임대해 주는 방법을 고려중입니다.”
리처드 버튼의 말에 두 마탑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중 하나에게 말입니까?”
산토스의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매우 아쉽게도 두 곳이 더 있습니다. 아! 세 곳이군요.”
“무슨……. 다른 마탑들에 연락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리처드 버튼이 그렇게 말할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장교가 사령관에게 말했다.
“북동부 사령관 크림슨 헤일로 대장님과 북부 사령관 제든 윅스 대장께서 오셨습니다.”
“모시게.”
리처드 버튼의 말에 문이 열리고 두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두 마탑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알고 있던 4황자조차 안색이 굳어진 상황.
“이렇게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군부끼리 서로 돕는 거지요.”
“허허,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동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기쁘오.”
제든 윅스와 크림슨 헤일로는 같은 군부라는 걸 강조하면서 리처드 버튼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두 사령관께는 사전에 설명을 드렸고…… 두 마탑주분께도 지금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리처드 버튼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다의 보주가 발견될 시, 전 이번 균열 방어전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신 분께 장기 임대를 해 드릴 생각입니다.”
“아…….”
“이런…….”
두 마탑주가 탄식하며 리처드 버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들이라 하더라도 두 사령부가 연합한다면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안심하십쇼. 이번 일에 한해서라면 북부와 북동부는 나눠서 움직일 겁니다. 아! 물론 두 마탑주분께서도 추가로 지원을 요청하시려면 그러셔도 됩니다.”
“황실의 개입도 가능하오?”
4황자의 물음에 마탑주들과 사령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군부인 사령부들은 물론이고, 마탑이라 하더라도 황권에는 못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처드 버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 힘을 실어 주신다는데 당연히 받아야지요.”
리처드 버튼의 말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열려 있는 문으로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하오.”
“자…… 자네는!”
크림슨 헤일로가 놀란 표정으로,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자……가문?”
4황자도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멍하니 바라봤다.
두 마탑주 역시 멍한 표정으로 사자가주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절대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온 것이다.
“대체 왜…….”
시에라가 멍하니 사자가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동부 사령관이라지만 사자가주와 연줄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얘기가 된 것 같은데……. 나도 그 경쟁이란 것에 참여해도 되겠소?”
라이너의 물음에 리처드 버튼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동부 차원 균열 방어전에 참여하는 걸 환영합니다.”
마치 고객 응대라도 하는 것처럼 리처드 버튼이 두 팔 벌려 라이너의 참전을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