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85)
27. 분열 (3)
자신을 4황자라고 밝힌 시점에서 이미 문 앞을 가로막은 기사에게 저항할 의지 따윈 상실되었다.
사실 동부의 기사 입장에선 황족을 거스르면서까지 막아설 이유가 없었다.
사령관이 특별히 명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웬만하면 외부와 접촉하지 않게끔 하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중에 질책받지 않을까 고민했으나 일개 평기사가 어찌 황족을 막을 수 있겠나?
결국 그는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옆으로 물러섰다.
“전하를 가로막아 송구합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내 잘못이네.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하게 되었군.”
4황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중에 질책받을지도 모르는 기사에게 짧게나마 위로를 해 준 것이다.
“그대에게 미안하니 내 짧게만 얘기 나누고 돌아가겠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4황자의 배려에 기사가 고개를 숙이면서 안에 있는 장교에게 4황자가 만나고자 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고위 장교가 황급히 달려와 4황자에게 인사했다.
“4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소.”
4황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고위 장교에게 악수를 청했다.
“동부 사령부 작전참모 홀러웨이 대령입니다.”
각 잡은 상대로 악수한 홀러웨이 대령이 짧게 목례했다.
그 모습을 본 4황자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찡그러졌다가 황급히 돌아왔다.
황제나 황태자도 아닌 이상에야 황족들을 보면 무조건 군례를 올려야 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 고위 장교일수록 이건 더욱 뚜렷해지는데, 자신이 존경할 만한 존재 혹은 그만한 공훈을 쌓은 자들이 아닌 이상 군인 신분이 아닌 자에게 무조건 군례를 올리진 않았다.
그렇기에 홀러웨이 대령 역시 짧은 목례를 올린 것이다.
‘황태자…….’
현재 4황자가 황태자에게 유일하게 밀리는 것이 바로 이 신분이었다.
세력, 능력, 머리 모든 부분에서 황태자를 앞질러 가고 있지만 오직 장자라는 이유로 황태자라는 고귀한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는 알렉사르였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아 내며 그는 작전참모에게 말했다.
“아이언 카터 중령을 만나러 왔는데…….”
“일단 사령관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홀러웨이 대령의 말에 4황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먼저 아이언 카터 중령을 보고 싶은데……. 아니 되겠소?”
“현재 아이언 카터 중령은 동부 사령관께서 불러 함께 있는 상황입니다.”
홀러웨이 대령의 대답에 4황자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 있던 아이언 중령을 갑자기 사령관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자신이 있음을 깨닫고는 4황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후…… 사령관실로 가면 되겠소?”
“아닙니다.”
홀러웨이 대령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4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현재 아이언 카터 중령은 지휘통제실에 있습니다.”
“북동부의 장교가 그곳에? 대체 어떤…….”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기밀 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홀러웨이 대령이 딱 선을 그으면서 말할 수 없다고 하자 4황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차원 균열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만 4황자의 감은 그것뿐만은 아닐 거라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공식적으로 동부 사령부의 핵심 장교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동부 사령관은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아이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걸 알아보고자 그가 아이언을 먼저 보려 한 것이었다.
젊으니까 살살 구슬리기만 한다면 뜻하지 않게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동부 사령관이 그것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결국 4황자는 작전참모를 따라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리처드 버튼이 가볍게 목례하면서 인사하자 4황자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4황자 역시 반갑게 악수하면서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호오, 그대가 북동부의 영웅인가? 반갑네. 이스칸드 솔 디 그랑시엘이네.”
“아이언 카터 중령입니다.”
아이언은 4황자와 악수하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목례로 끝나는 인사에 4황자의 눈가가 떨렸다.
북동부에서 황태자가 군인들에게 군례를 받은 것을, 수도 사람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도 은근 기대했지만 아이언은 그 기대를 무참히 박살 냈다.
“그보다 전하께오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언 카터 중령을 보려고 했습니다.”
“아이언 중령을요?”
리처드 버튼이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는 물었다.
“그렇소. 나이도 비슷하고, 형님이 북동부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말씀하시던 게 떠올라 그때 일을 듣고자 왔소.”
마치 별거 없는 것처럼 말하는 4황자를 보면서 리처드 버튼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북동부의 이야기라……. 확실히 그곳이 재밌긴 하지요.”
리처드 버튼이 그렇게 말하면서 4황자를 바라보았다.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부 사령관의 모습에 4황자가 긴장했다.
사령관의 묘하게 여유 있는 모습이 마치 이 장면을 기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동부가 궁금하시다면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줄 사람들을 불렀으니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더 자세히 말이오? 동부에 북동부를 지킨 영웅보다 자세하게 알려 줄 사람이 있소?”
4황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하게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언은 무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각 잡은 채로 앉아 있었다.
틈만 보이면 아이언과 얘기를 나눠 보려는 4황자의 시선에 리처드 버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여기로 북동부 사령관과 북부 사령관이 오고 있습니다.”
리처드 버튼의 말에, 은근히 아이언에게 눈길을 주고 있던 4황자가 삐걱거리면서 동부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 하셨소?”
“북부를 지킨 두 사령관이 동부로 오고 있다 말씀드렸습니다.”
“허…….”
“추가로 남부와 중앙의 두 마탑주도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쯤 이곳으로 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을 겁니다.”
리처드 버튼의 쐐기를 박는 말에 4황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동부에서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다 안다는 듯한 동부 사령관의 표정.
그런 그의 표정에 이스칸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그가 동부에 온 건 단순히 놀기 위해서가 것이 아니었다.
바로 황제가 밀어주는 황태자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미 중앙에서는 작업이 대충 끝나 가는 상황이라, 차원 균열이라는 핑계로 그가 직접 동부로 와서 귀족들과 상인들을 만나고 다녔었다.
겸사겸사 황태자가 끝끝내 얻을 수 없었던 아이언을 만나서 정보도 얻고 회유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동부 사령관은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침묵했는데, 그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런 한 방을…….’
동부 사령관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4황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곧 다들 도착할 것 같으니 저와 담소나 나누시지요.”
“하하! 그것 좋지요.”
4황자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면서 동부 사령관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각 잡고 바라보는 아이언.
그렇게 세 명이 불편하지만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묘한 분위기를 만들 때, 동부의 외진 구석에서는 동부 사령관의 골칫덩어리인 김정태가 낡은 펍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 오랜만이야?”
김정태가 반가운 표정으로 검은 로브를 쓴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확인해 봤나?”
“오자마자 일 이야기냐?”
김정태가 그렇게 말하면서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하면서 간단한 안줏거리까지 함께 주문했다.
“쯧! 똥폼 잡네. 너 현실에서도 그러냐?”
“개소리 말고 본론.”
김정태의 말에 검은 로브의 사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언 카터라면 모르겠다.”
“뭐?”
“모르겠다고.”
김정태의 대답에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은근슬쩍 살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김정태는 그럼 어쩔 거냐고 오만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검은 로브를 향해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해 주었다.
“신수는 봉인되었고 검술 실력만 보여 줬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아직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눈 상태에서 현실과 연관된 놈인지 무슨 수로 파악해?”
김정태의 말에 검은 로브의 사내가 눈을 찌푸리다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
“그래, 세 명의 신성들을 박살 낼 때에도 전력은 다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압도적이었다는 건가?”
검은 로브의 물음에 김정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동부 소속이라서 그런가 실전 경험도 풍부한 것 같고, 실력도 더 강하니 압도적으로 가지고 놀더라고.”
“너와 싸운다면?”
“검술만이라면 대충 해볼 만한 것 같은데 숨기고 있는 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네.”
김정태의 말에 검은 로브의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오만하긴 해도 자신의 실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자가 김정태였다.
그런 그가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라면 아이언 카터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건?”
“차원 균열?”
김정태의 물음에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드네. 다만 이쪽의 차원 균열도 북동부처럼 조금 독특한 것 같기는 해.”
“베타테스트 때와는 다르단 건가?”
“그래, 현실 세계의 예언자가 경고했던 것처럼 이번엔 정말 다른 놈들이 있긴 한 것 같다.”
직접 알아본 바를 토대로 김정태가 나름대로 분석한 정보들을 들려주기 시작하자 검은 로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도 북동부처럼 신수를 이용하는 배후 세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건가?”
“그래, 문제는 그 배후 세력이 우리 같은 놈들이면 골치 아프다는 거지.”
“그쪽도 세계를 걸고 싸우려는 건가?”
“모르지. 하지만 배후 세력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처럼 신에게 뭔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둬야겠지.”
김정태의 말에 검은 로브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할 얘기는 끝났고……. 너야말로 찾아야 할 놈은 찾은 거야?”
“아직이다.”
“하! 아직도 이정후의 행방을 못 찾았다고?”
김정태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하자 검은 로브가 침묵했다.
“내가 개같이 뛰어다니며 정보를 모으는 동안 뭐 했냐?”
“베타테스트 때와 다르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넘어오고 있다.”
“그럼 더 쉽지, 지 몸으로 처오는 건데!”
김정태가 분노한 표정으로 검은 로브를 바라보았다.
“그 새끼가 있어야 일이 쉬워진다.”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정도야. 그 새끼, 우리보다 더 살았어. 알지?”
“안다.”
김정태의 말에 검은 로브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정후야. 베타테스트 때를 생각해. 적이 되면 골치 아파진다.”
“알고 있다.”
“그래. 회유를 하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뭐든 그 녀석이 성장하기 전에 끝내야 돼.”
김정태는 그 말을 끝으로 주문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공격적으로 안주를 씹어 삼켰다.
“이미 쓸 만한 놈들은 죄다 세력을 만든 상황이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이정후뿐이고, 그 새끼가 최후 생존자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반드시 우리가 먼저 찾아야 돼.”
김정태가 살벌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검은 로브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김정태와 또 다른 동료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 동부의 또 다른 곳에서도 음습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