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장남은 군대로 가출한다 (57)
18. 겨울산의 영웅 (4)
사자 가문의 수장을 향해 내기를 건 아이언은 라이너가 나간 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자신이 왜 그랬는지 한참을 후회했다.
괜히 도발해서 가주를 빡치게 한 탓인지 나가는 라이너의 표정에서 그를 반드시 가문으로 데려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라이너의 방문 이후 아이언은 몸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단 차원 균열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살이 썩어 들어가면 최대한 빨리 상처를 도려내야 하는 법이었다.
차원 균열이 열린 이상 일단 하루라도 빨리 폭주시켜서 오염된 기운으로 인해 강화되는 차원 게이트를 막아야만 했다.
게이트로 고정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매우 컸다.
차원 게이트가 통제되는 힘에 의해 통로를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단순한 차원 균열은 그저 오염된 공간과 연결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위험해지는 차원 균열에 대해 생각하며 아이언이 열심히 몸을 만들 때였다.
“오랜만이군.”
“충성.”
“퇴원하는 날이라 들었는데 몸은 좀 회복됐나?”
크림슨의 물음에 아이언이 몸을 잠시 풀어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움직이는 건 문제없습니다.”
“좋군. 그럼 바로 나오게. 만날 사람이 있네.”
크림슨의 명령에 곧장 환복했다.
딱히 챙길 짐은 없었기에 깨끗하게 세탁한 군복만 입고 나왔다.
“이쪽은 마탑 소속의 마일드 프리스턴일세. 여긴 그 방법을 제시한 아이언 카터 중위.”
“반갑소. 마일드 프리스턴이오. 부족하지만 북부 마탑의 장로직을 맡고 있소.”
“아이언 카터 중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언은 진심으로 영광이라는 표정으로 마일드 프리스턴이 내미는 손을 꼭 잡았다.
전생에 자신이 제안한 기초 이론을 만든 해당 인물이 직접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마일드 프리스턴 본인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북부 마탑의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마일드 프리스턴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차기 마탑주로 거론된다는 것은 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다들 그렇듯, 본인의 연구 혹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치는 자들이기 때문에 외부의 일에 신경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론이었네.”
“그렇습니까?”
“그러네. 자네가 말한 대로 찾아보니 정말로 차원 균열의 폭주가 오히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더군.”
이미 몇몇 사료들을 검토한 마일드 프리스턴은 아이언에게 차원 균열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궁금했던 부분을 묻자 아이언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일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뱁새를 팔아먹으면서 설명했지만 전문 지식이 없어서 그런지 구멍이 송송 뚫린 듯 어설픈 정보가 줄줄 튀어나왔다.
그래도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마일드 덕분에 문제는 없었다.
“어떨 것 같나?”
“아주 흥미롭네. 차원 균열…….”
“결론만 말하시게나!”
크림슨이 지겹다는 듯 짜증을 냈다. 그러자 마일드 프리스턴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
“쯧! 가능할 것 같네. 다만 몇 년간은 고생 좀 해야 할 듯싶네.”
“폭주로 인해 일시적으로 균열이 넓어지기 때문이지?”
“그러네. 차원 균열이 넓어지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게…….”
둘이 친구인 듯 크림슨의 말에 마일드 프리스턴이 열심히 이론을 설명해 주었지만 무인인 크림슨이 마법 이론을 들어 봤자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만하게. 알아먹지도 못할 설명을 왜 자꾸 설명하나?”
“쯧! 평소에 머리 좀 굴리고 살게. 나이를 먹어도 멍청한 건 변하질 않는구먼?”
“나 정도면 똑똑한 편일세!”
“그 머리로? 제발 평소에 내가 하는 말을 좀 귀담아듣게나. 매번 귀를 막고 듣지를 않으니 나이 먹어도 그 모양 아닌가.”
“뭐 인마? 해보자는 거야?”
“이런 무식한 놈.”
잡담을 나누다 싸울 뻔한 크림슨과 마일드 프리스턴은 일순 아이언의 존재를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난 먼저 가 보겠네.”
“그러게나.”
친우인 마일드 프리스턴을 먼저 보낸 크림슨이 천천히 아이언의 보폭에 맞춰 주면서 사령부 쪽으로 움직였다.
“레온하르트 가주와 만났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내기를 했다고 들었네만…… 괜찮은가?”
라이너에게 직접 들은 듯, 그가 걱정스레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 부디 그 내기란 걸 이겼으면 좋겠군. 그 건방진 얼굴을 보면 한 방 먹이고 싶거든.”
크림슨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얘기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언의 아비란 걸 깨닫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흠흠……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미친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아비를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아이언을 보면서 크림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기왕이면 내기에 확실히 이겨서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게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언의 대답에 크림슨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을 빌겠네.”
“감사합니다.”
아이언은 사령관의 배웅을 받으면서 비룡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환자 후송을 위해 만든 특별한 안장에 올라탄 아이언이 날아오르는 비룡을 타고 곧바로 자신의 부대로 향했다.
고스트로서 엄청난 임무를 수행했기에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 아이언이었지만 불행히도 현 상황은 그에게 굉장히 애매했다.
현재 아이언은 세 가지의 엄청난 공을 세웠다.
첫째, 차원 균열이 완전히 열리지 못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둘째, 배후 세력인 다크 엘프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
셋째, 차원 게이트를 붕괴시키고 차원 균열을 봉인한 것.
특히 이 중 세 번째 공적만으로도 아이언은 진급 혹은 훈장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는 고스트로서의 임무이니 진급하자면 고스트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야 했는데, 그러기엔 조금 과한 데다 이번 일로 인해 고스트들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거의 모든 고스트들이 소속된 부대들이 와해되어 아이언을 고스트 신분으로 파견할 곳이 없어져 버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로운 곳으로 발령 내는 것도 복잡해졌고, 무엇보다 차원 균열에 대한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결국 아이언은 한동안 소초장 신분으로 겨울산에서 좀 더 근무하고 보상은 차원 균열을 봉인한 뒤로 미루는 것으로 합의했다.
물론 여기에는 이 정도 공을 세운 인물에게 약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군부 입장에서 자존심 상한다든가, 자잘하지만 아이언이 소초장으로서 세운 전공도 치하해야 한다든가, 사자 가문의 가주가 아이언과 내기를 했다든가 하는 것들도 영향을 미쳤지만, 아이언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우리 중대가 좀 더 전진해서 만약을 대비하자는 거지?”
프랑코 중대장이 아이언에게 물으면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현재 차원 균열 주위에는 사령부, 선봉 군단, 산악 군단, 안개 군단의 엘리트 부대들이 몰려 있었고, 심지어 마탑과 레온하르트 가문에서도 정예 병력을 일부 보내온 상황이다.
북부 사령부에서도 정예 기사들을 보내온다고 하는 실정이니 사실상 겨울 매 부대에서는 할 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린 고작 중대일세. 그것도 병사 출신. 아무리 마나를 다룰 줄 안다고 하나 병사가 오염된 존재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나?”
프랑코 중대장의 말은 정론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공허충, 그걸 상대할 방법을 압니다.”
“자네가?”
“그렇습니다.”
아이언의 대답에 프랑코 중대장이 가만히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수색대장이 밀어주는 것과 사령관이 신경 쓰는 인물인 것을 보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던 프랑코였다.
게다가 수색대장이 작전 중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각 중대에 자율권을 주었다.
즉, 중대 병력 정도는 중대장이 특별한 보고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상황.
“차원 균열이 열렸는데 정말 우리가 도움이 되겠나?”
“그렇습니다.”
아이언의 확신에 찬 대답에 중대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떴다.
그도 이것이 기회임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흔히 오지 않는다는 것도.
리스크는 있지만 성공만 한다면 단번에 진급하면서 장교의 첫 번째 벽인 소령을 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프랑코 중대장의 눈에 소령이란 두 글자가 박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순간.
“후…… 그래서 뭘 원하나?”
중대장의 물음에 아이언이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공허충을 상대할 무기가 필요합니다.”
“무기?”
“그렇습니다. 무속성 마력이 가득 든 폭탄. 그것이 필요합니다.”
“무속성? 그게 공허충에 효과가 있나?”
“그렇습니다. 지하 공동에서 무속성 마력에 취약하다는 걸 직접 확인했습니다.”
대충 지어낸 아이언의 말에 중대장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르게 아이언은 차원 균열을 봤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우리가 그걸 직접 사용하나?”
“아닙니다. 포병을 이용해 폭탄을 날리거나 비공선을 호출해 대규모 폭탄 투하로 공허충이 있는 곳을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없지 않나?”
“이 작전에선 우리 부대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언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지 중대장이 표정을 찡그렸다.
“포병과 공군이 다하는데 우리가 중요하다고?”
“그렇습니다.”
아이언의 대답에 중대장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얼른 더 말해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폭격을 가할 병력에게 공허충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동굴 안에만 있는 놈들이 어디 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예. 곧 미친 듯이 나올 겁니다. 아마 겨울산 전체로 퍼져 나갈 겁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아이언의 말에 중대장은 한참을 침묵했다.
“기밀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밀이란 말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밑에 능력 좋은 후임 하나가 들어온 후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진급에 가까워진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번 작전에서 중대장이 한 일은 별로 없음에도 상관들에게 칭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소령이 예정된 파울로 대위는 열심히 까이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수색대장의 명에도 뭉그적거린 것을 걸렸기 때문이다.
하필 차원 균열이 연관된 작전에서 그랬으니 소령으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비리가 밝혀져 대위로 전역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차기 소령은 그가 가져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여러 생각에 잠긴 중대장이 겨우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령관님한테는 내가 직접 보고드리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색대장이 부상으로 공석인 현 상황에 직속상관은 북동부 사령관이었다.
수색대장을 만나러 가는 것만으로도 떨리는 일인데 사령관을 직접 보게 생긴 중대장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군복을 가다듬었다.
그런 중대장을 보면서 아이언은 쓴웃음을 짓고는 중대장실을 나왔다.
“후…… 증명이라…….”
가주이자 아비인 라이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아이언이 주먹을 쥐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할 작전이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프다고 구라 치면서 쉬고 싶지만 미친놈한테 벗어나려면 전공을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게 아이언의 지론.
“이참에 겨울산의 영웅이 되어 봐야겠네.”
이번 생에서 가장 먼저 차원 균열을 봉인시키는 영웅.
그 타이틀을 자신이 가져가기 위해 아이언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며칠 후, 크림슨이 정식으로 차원 게이트 폭파 작전에 대한 승인을 해 주었고 겨울산에 모인 모든 병력이 다크 엘프들이 만든 차원 게이트로 집결했다.
바로 그날, 폭주하는 차원 균열의 수많은 공허충들을 대량 학살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당연히 아이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