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썩은물은 천궁으로 향합니다 >
내가 느꼈던 가장 강대한 기운이라고 한다면 얼마 전 흡수한 진혼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빛과 어둠의 신격이 최후로 남겨둔 기운. 그것은 고작해야 준신에 불과했던 날 대신격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느낀 가장 강력한 기운의 집합체는 진혼의 결정체가 아니라 네크로노미콘이다.
우웅, 웅웅웅!
지구를 완전히 덮어버린 녹광을 발산하는 네크로노미콘. 조금 전과는 달리 시작의 장이 아니라 최후의 장으로 변한 수수께끼의 책을 응시했다.
“그것은 태초의 역사, 전지전능한 나의 모든 것이 담긴 근원.”
맙소사!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게 아자토스의 근원이었다고?
“소원의 돌이라는 씨앗에서 시장의 장으로,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장이 열렸으니 너는 그 자격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지금 이 순간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콰콰콰콰!
아자토스의 말에 반응하듯 네크로노미콘이 발산하는 기운이 점차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로 아자토스의 존재감은 옅어진다.
조그 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행성 하나가 버티고 서 있던 것처럼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그의 무게가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혹시 이건...?
“나의 모든 것, 근원을 너에게 이식한다는 건 곧 내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째서?"
그 답변에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면서까지 나를 도우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유일한 대상이어서?
“너를 아끼는 마음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의 잘못된 선택과 과거를 이제라도 바로 잡기 위함이다.”
그제야 아자토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로 인해 잃어버린 감정을 찾은 그는 지난 과거를 후회했다.
혼돈과 파멸만으로 가득한 세계.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실체를 먹힌 그 날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스러져야만 했고, 아이들이 남긴 원념이 지금도 내게 속삭이고 있구나.”
만물을 창조한 그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현재 렐름을 지배하고 있는 그의 아이들이 만들고 있는 혼란한 세계를.
과거에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운명에 순응하고자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랑하는 이,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수많은 이들을 포함한다. 그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칼을 빼어 들었다.
“나와 아이들이 원하는 건 하나. 새로운 질서다.”
네크로노미콘에서 뿜어져 나온 녹광이 절정에 이르렀고.
팟!
그 순간 지구의 시간, 아니 렐름 전체의 시간이 정지했다.
녹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건 나와 아자토스밖에 없었다.
“이건...?”
눈앞에 있는 건 니알라토텝에게 강림한 그 모습이 아니었다.
「이것이 태초부터 존재했던 나의 실체다.」
그건 거대한 홀이었다.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마치 심연의 구덩이와 같은 홀 사이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자토스는 생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별이자 행성이었다.
「하지만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실체이지. 과거 나의 실체는 그 아이들에게 먹혀버렸으니.」
하지만 아직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근원이 괜히 근원이겠는가. 이 근원을 이용해 예전의 힘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근원은 남아 있으나 실체를 모두 먹혀버렸기에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을 힘을 회복할 수 없다.」
결국 그런 건가.
본래의 아자토스라면 손가락 하날 까닥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지배 세력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체를 먹혀버려 초라한 의지의 파편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거 조금 전의 일전으로 증명되었다.
몇 번 절대언령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것.
혹 근원을 이용해 실체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내 존재의 근원, 태초의 역사가 담긴 네크로노미콘이 남아 있으니.」
아까는 근원이 소용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왜?
자연스레 아자토스를 향한 시선을 돌려 허공에 떠 있는 네크로노미콘을 응시했다.
여전히 은은한 녹광을 발산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책에 내재된 기운은 가히 모든 것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설마 저 힘을 내게 주려는 건가?
「여전히 눈치가 빠르구나. 그렇다. 실체가 먹혀버린 나는 싹을 틔울 토양이 없는 상태. 그렇기에 너라는 새로운 토양이 필요한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네크로노미콘의 기운을 탐색한다.
새삼 엄청난 힘이, 그 기운이 느껴진다.
만약 저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나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존재에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완전한 것. 진혼의 결정체와는 달리 흡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태초의 역사서에 남긴 봉인의 인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는 영원이 봉인되었어야 할 최후의 족쇄. 하지만 오늘 나는 그 봉인을 해제할 것이다.」
지이잉!
아자토스의 의지에 반응하여 네크로노미콘이 공명했다.
지금에서야 느낄 수 있다. 그건 거부 반응이었다.
마치 주인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 충성스러운 개와 같이 아자토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애석해 마라. 나의 근원이여. 죽어버린 토양에 머무르다면 언젠가 너도 시들고 말 것이니. 이제 새로운 토양에서 더욱 무성한 가지를 뻗도록 해라.」
누가 보면 새로운 남친에게 여친을 보내는 구남친인 줄 알겠다.
이게 무슨 신파극도 아니고, 왜 이렇게 구구절절하냐?
「태초부터 함께했던 나의 근원이여. 너의 진정한 주인의 이름으로 명하니, 나의 사랑하는 아이 연우와 함께 새로운 질서의 시대를 구축하거라!」
파아아!
지금껏 그 누구도 열지 못했던 네크로노미콘이 활짝 펼쳐지며 그 속을 공개했다.
“흐읍!”
펼쳐진 네크로노미콘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빛무리가 내 안구에 흡수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머릿속에 주입되고 있었다.
네크로노미콘은 태초의 역사서.
태초부터 존재했던 아자토스의 모든 것이 담긴 그의 근원이었다.
당연이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불가해不可解로 남아 있었던 우주의 탄생을 비롯한 신비.
아자토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신비의 영역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아아아...”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황홀함의 극치였다.
감히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락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우주의 신비가 마침내 밝혀지는 그 순간 나는 조금 전의 나를, 아니 신격이라는 존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대신격을 넘어 초월의 격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은 시스템이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사용자 이연우 님만을 위한 레벨링 시스템, 초월의 길을 종료합니다.]
[부디 이연우 님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누구도 듣지 못하는, 오직 내게만 허락된 특별한 시스템이 소멸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었구나.
이 시스템이라는 것 또한 소원의 돌에서부터, 정확히는 아자토스가 내게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시스템 초월의 길.
아마도 그건 내가 무사히 초월의 격을 얻는 것을 목표로하는 시스템이었을 터.
“고맙다.”
[별 말씀을.]
소멸의 도중에 들려온 희미한 의지.
초월의 격을 얻지 않았다면 희미한 그 의지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스르르.
그리고 그 마지막 의지를 끝으로 시스템은 완전히 소멸했다.
그제야 느낄 수 있다.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시스템의 눈길, 그 관찰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사히 나의 근원이 발아하였구나...」
시스템의 소멸,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소멸을 지켜봐야만 한다.
“할아버지...”
억눌렀던 감정이 튀어나왔다.
아자토스의, 할아버지의 근원을 흡수한 그 순간 그 진심에 거짓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존재의 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 사랑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처럼 아낌 없는 베품이었다.
「할아버지라.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나...」
스윽!
할아버지의 실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행성은 볼품없고 초라한 노인으로 변했다.
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본 그날, 굽어진 등을 가진 초로의 노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지금도 선명히 그려지는구나. 처음으로 널 안아올린 날. 너는 힘찬 생명의 울음을 토하며 내게 쉬를 선물했지.”
기억의 금제가 사라졌기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그날 할아버지는 여린 생명을 안아올렸고, 낯선 이의 손길이 두려웠던 나는 할아버지의 가슴에 쉬를 싸고 말았다.
"너를 키웠던 그 순간은 지루하기만 했던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너로 인해 나는 존재할 수 있었으며, 너로 인해 기쁨을 깨달았단다..."
파직.
근원을 내게 이식한 할아버지의 육신이 붕괴되고 있다.
그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근원은 생명 에너지. 그것을 이식해버렸으니 생명수를 잃어버린 육신은, 의지의 파편을 붕괴될 수밖에 없다.
“과거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나의 세계가 혼돈에 빠졌다. 스스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체를 잃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구나.”
퍼석.
지탱하고 있던 한쪽 다리가 무너진다.
의지를 움직이자 어느새 내 육신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꽈악.
나약한 손길이 내 손을 감쌌다.
“더는 너를 볼 수 없구나...”
두 눈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무게감을 선사하던 아자토스, 전지전능한 창세의 신은 더는 없다.
내 앞에 있는 건 겨우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이제는 그 나약한 생명의 불꽃마저 꺼지고 있는 노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시야를 잃어도 여전히 너를 그릴 수 있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나의 아이였으니까.”
투투툭.
육신의 붕괴가 얼굴까지 진행되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소멸한다.
“네게 막중한 사명을 두고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지만, 너라면 충분히 그 무게감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덜덜덜.
힘 없이 올라간 할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부탁한다. 이 할아비의 과오를,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너의 손에서 끝내다오.”
“모든 건 할아버지가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거에요.”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절대언령. 지금 나는 나의 존재를 걸고 할아버지에게 맹세했다.
반드시 잘못된 과거를, 현재 렐름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을 정점의 자리에서 내리겠노라고.
“나의 사랑하는 아이 연우야. 너와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이 내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단다. 부디 네가 행복했으면..."
사라락.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할아버지의 육신이 빛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슬프지 않다. 아니 슬퍼할 시간이 없다.
할아버지는 내게 최후의 임무를 맡겼다.
렐름에 혼돈을 가져오는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열려라!”
콰아앙!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창공을 꿰뚫었다
쿠쿠쿠쿵!
차원을 꿰뚫는 그 힘은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영상처럼 펼쳐진 그 공간은 백색의 궁전.
“오늘 끝장을 보자.”
그곳은 모든 외부의 존재, 그 중에서도 선택된 이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지배자의 성 천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