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썩은물은 더 미스트 네임리스와 마주합니다 >
“갑자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급전개다.
물론 녀석들의 등장이 미칠 파장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그건 전력을 모두 노출했을 때의 이야기다.
솔직히 연막을 칠 줄 알았다.
진정한 지도자가 어떻느니, 현재 지배 세력보다 강하느니, 아무리 그래도 적당한 위장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그런데 녀석들이 벌인 행동을 봐라.
다짜고짜 전쟁 선포?
아무리 봐도 충동적인, 조금은 막무가내 선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내가 녀석들의 급전개에 놀랐다면 지면에 내리꽂힌 울타르와 사도 넷은 요그 소토스와 반란군들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는 곧 녀석들의 실체를 가리고 있던 안개를 없앴다. 그제야 녀석과 휘하 사도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음. 그 모습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빛의 가루가 뭉쳐진 무언가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딱히 어떤 형상을 갖추진 않았다.
마치 수증기와 같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감시하는 눈 울타르 : 더 미스트 네임리스 휘하의 사신장 중 하나.
요그 소토스와 전능한 존재의 근위병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더 미스트 네임리스부터 막강한 권세와 권능을 받았다.
사신장 중 대외적인 활동이 가장 많은 존재이며,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는 항상 광구光球의 사도들과 함께 행동한다.』
울타르 녀석과 함께 떨어진 저 빛의 덩어리가 그 광구의 사도라는 녀석들이겠지.
그 외형만 보자면 별로 강해보이진 않는다.
사실 강해 보이는 걸로 따지면 과거 만났던 외부의 존재들, 괴물의 형상을 한 녀석들이 훨씬 강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나는 느낄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억눌려 있으나 녀석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저 어마어마한 기운을.
차원 하나는 가볍게 소멸해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노덴스였다.
골뱅이 사이로 드러난 녀석의 눈이 노여움을 품고 있다.
뭐, 별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팔짱을 낀 녀석은 그저 사납게 녀석들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물론 겉으로만 그럴뿐 실상은 전혀 다르다.
웅웅웅!
가만히 집중하고 주위의 기세를 느껴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노덴스는 지금 일정 반경의 중력을 지배해 녀석들의 행동을 옭아매고 있었다.
솔직히 이 권능은 사기다.
중력을 멋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건 대상의 모든 행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과도 진배없으니 말이다.
“오랜만이로구나 울타르. 실제로 보는 건 지배의 전쟁 이후 처음인가?”
느낌표 사이로 나타난 요그 소토스의 눈이, 그 사나운 소용돌이가 울타르를 직시했다.
“아, 아버...”
당황한 울타르가 본심을 꺼내던 찰나.
“감히!"
“건방진 녀석. 그 단어를 입에 담지 마라!”
뻔한 그 단어가 완성되는 것을 막았다.
요그 소토스 당사자가 아니다. 그 주위에 있던 노덴스와 크툴루. 이 두 존재가 불길과도 같은 분노를 표출했다.
“전쟁 당시 수많은 배신자가 있었지만, 설마 네 녀석이, 형님이 가장 아끼던 네가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의 그 어리석은 탐욕만 아니었어도 그리 쉽게 지배권을 넘겨주진 않았을 것이다.”
쩌적.
활화산 같던 분노가 식는다. 단순히 식는 게 아니라 혹한의 겨울과도 같이 차갑게 변했다.
이건 단지 느낌만이 아니다.
두 존재의 감정 변화는 주변의 날씨를 변화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하나의 현상만으로도 반란군 간부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그럴 리가? 당신들은 분명 봉인의 서에 갇혀 영면에 들었건만...”
봉인의 서?
처음 듣는 단어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과거 렐름을 지배했던,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이들과 현재 렐름의 지배자인 세력간의 대화다.
아무래도 이들의 대화에서 얻을 것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은 단지 느낌만이 아닐 것이다.
“흐으.”
울타르의 의문에 답은 음침한 웃음이었다.
그 당사자는 요그 소토스도, 노덴스도, 크툴루도 아니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소리의 근워지로 향했고, 그곳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물음표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처, 천궁의 메신저...?”
뒤늦게야 니알라토텝을 발견한 울타르가 침음성을 흘렸다.
통수를 거하게 때렸던 아버지 및 그들의 형제, 심지어 전능하신 그분의 메신저로 활동했던 니알라토텝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 정도로 화려한 인물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간 렐름을 마음껏 주무르더니 정보에는 영 소홀한가 봅니다?”
물음표에 그려지는 입. 그 입이 담은 감정은 냉소였다.
그 웃음 하나로 가면 뒤에 숨겨진 녀석의 본성을 알 수 있었다.
냉철하며 음흉하다.
처음에는 무척 정중하고 바른 녀석이줄 알았더니 의외의 성향을 보인다. 아마 내가 알고 있던 건 녀석의 단편적인 부분에 불과했나보다.
“그 말은 서, 설마...?”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듯 격앙된 감정을 보인다.
“봉인의 서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
니알라토텝의 말에 울타르는 말을 잇질 못했다.
와, 궁금해 죽겠네. 그러니까 그 봉인의 서라는 게 뭔데?
이것들이 나만 모르는 내용을 지껄이네?
“그렇군. 그랬었어. 어쩐지 갑작스레 대신격이 탄상했다 했더니...”
내 상념을 깬 건 울타르의 음성이었다.
녀석을 응시했다. 빛의 형체 너머로 날 바라보는 울타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
“설마 네 녀석이 씨앗...”
“거기까지!”
뭔가 중요한 단서를 내뱉으려던 순간 훼방꾼이 등장하고 말았다.
나와 울타르 사이를 가로막은 건 요그 소토스였다.
잠깐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던 그가 울타르를 사납게 노려봤다.
“어리석구나 울타르. 네 녀석은 지금 금기를 범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
화들짝 놀란 울타르가 입을 닫았다.
씁. 금기를 범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였으면 그냥 하게 내버려두지.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어차피 소멸할 녀석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없다.”
사아아-
요그 소토스의 육신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많은 존재를 겪었지만, 이토록 이상한 기운, 아니뭐랄까, 기세 같은 건 처음이다.
그 기운을 느끼고 있으면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내 권역이 맞는지, 땅인지, 물인지, 하늘인지. 뭔가 공간의 구분이 가지 않는 이상한 현상.
그리고 나는 그 정체를 알고 있다.
노덴스가 중력을 지배하는 존재라면 요그 소토스는 공간을 지배하는 자.
“꺼져라!"
마치 파리를 쫓는 것과 같은 요그 소토스의 손짓은 놀라운 광경을 만들었다.
찌익!
공간이 찢어졌다.
아니. 공간이 찢어진 것만이 아니라 그 영역에 있던 존재 또한 찢기고 말았다.
“으아악!”
그 영역 내에 있던 사도 중 하나가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미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놀라지 않겠는가.
대신격에 근접한, 어떻게 보면 이미 대신격의 경지를 이뤘다고 부를 만한 신격이 손짓 하나에 소멸한 것이다.
주르륵.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이유는 하나다.
과연 저 공격을 내게 펼쳤을 때 나는 피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아이템이든 권능이든,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한두 번 정도는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게다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변형이나 연속해서 펼치는 경우가 생긴다면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요그 소토스의 전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네 녀석도, 그리고 네 녀석도.”
찍, 찌익!
노덴스의 중력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구속 당한 녀석들에게는 요그 소토스의 공간 간섭이 들어오고 있었다.
“크으윽!"
울타르. 녀석이 사력을 다해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노덴스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금제를 당했어도 네깟 녀석 하나 못 당하내겠냐. 이 새끼, 오래 안 봤다고 날 아주 우습게 본다 그지?”
“크흡!"
녀석에게 가해지는 중력의 강도를 더욱더 높였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중력의 무게로 존재를 짓누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녀석에게 벌을 줄 이는 노덴스나 크툴루가 아니라 요그 소토스였기 때문이다.
“이 날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한층 차갑게 변한 눈을 울타르를 바라보던 요그 소토스.
휘오오오!
그의 손에 공간의 힘이 깃들었다.
“그간 호의호식했을 터이니 이제 합당한 죗값을 받거라.”
오랜 시간 멈춰 있었던 죄악의 날, 울타르를 향한 요그 소토스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찌지직!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광구의 사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공간이 찢어지다 못해 무너져 내린다. 아니,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콰직, 콰지직!
공간을 파괴하는 힘에 의해 울타르와 그 주위 공간에 생겨난 건 화이트 싱크홀이었다.
거대한 백색 싱크홀은 울타르와 주위 공간을 모두 먹어치운 것으로도 모자라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스윽!
하지만 요그 소토스의 손짓과 함께 무한한 확장은 멈췄다.
아마 저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지구를, 내 권역 전부를 먹어치웠을 것이다.
"..."
울타르와 사도의 등장으로 떠들썩하던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근데 이거 진짜 실화냐?
대신격에 버금가는, 그 이상의 존재 다섯이 멋들어지게 등장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면 조금은 신뢰가 간다. 어쩌면 조금 전 니알라토텝이 말했던 지배 세력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
“역시!”
“더러운 수작을 부려놨군.”
“하긴, 그가 쉽게 넘어갈 자는 아니지요.”
반란군에 대한 호감이 상승할 무렵 터져 나온 분노.
"음?"
혼자 상황 파악 못하던 중 느낀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쿠쿠쿠쿵!
근원지는 울타르와 사도가 소멸한 자리였다.
존재의 소멸 증거로 남은 빛의 가루가 휘몰아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지구 전체를 뒤엎는 가공할만한 존재감은 일전에도 느낀 적 있는 것.
“더 미스트 네임리스...”
소용돌이가 흩어지며 주위에 안개 지대를 형성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존재는 현재 그레이트 올드 원을 다스리는 수장인 더 미스트 네임리스였다.
「주제도 모르는 패주들이여. 내 처음부터 너희의 간악한 계획을 꿰고 있었노라!」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의지에 깃든 힘이 보통이 아니다.
이건 보통이 아니다. 일전에도 느꼈던 실체의 힘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망할. 이렇게 빨리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이거 제대로 통수 맞은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안개 녀석의 등장으로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그래, 이 씨발 새끼야. 너 잘 만났다. 오늘 계급장 떼고 여기서 한 판 붙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욕설.
니알라토텝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