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썩은물은 대신격을 이룹니다 >
=============================
뭐, 브류나크야 언급할 필요가 없겠고, 다아다의 가마솥과 클라우 솔라스는 발로르를 처치해 얻은 ‘일부 아이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판테온의 지고왕을 상징하는 네 개 보물 중 세 개가 수중에 있는 상황. 물론 아무런 단서도 없는 나머지 하나의 보물을 찾는 것도 상당히 험난한 과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내 역경(?)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단서 하나 없이 네 개의 보물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 특별히 그대에게 루 라바다님이 남긴 마지막 보물을 전한다.」
우웅!
희미하던 환웅의 존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청색 돌이었다.
물론 그 돌의 용도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고왕의 네 번째 보물 대관석 리아 팔을 획득했습니다.]
운명, 그리고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서 하나 없는 네 개의 보물이 이토록 빨리 내 손에 들어올 턱이 없지 않겠는가.
웅웅웅!
희희낙락한 채로 리아 팔을 손에 쥔 순간, 강렬한 진동이 전해졌다.
[리아 팔이 지고왕의 보물을 찾은 듯 강한 신호를 보냅니다.]
[확실한 신호입니다. 서둘러 근방을 찾아보십시오. 분명 인근에 지고왕의 보물이 잠들어 있습니다.]
"풉!"
터지고 말았다.
아마도 리아 팔이라는 돌은 지고왕의 보물을 찾는 레이더와 같은 역할의 아이템이었던 것 같다.
다른 보물을 찾았다고 신호를 보내다니.
신호를 보내긴 뭘 보내. 이미 내 수중에 보물 네 개가 떡하니 모였는데.
웃겨서 정말.
[지고왕을 상징하는 네 개의 보물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지고왕의 네 개 보물이 공명하며 강렬한 에너지의 파장을 생성합니다.]
그 즐거움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파직, 파지직!
지고왕의 보물이 공명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시간이 지날수록 공명은 강해졌고, 발산하는 에너지의 파장 또한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렇게 네 개의 보물에서 나온 에너지 파장이 절정에 이른 그 순간.
찌익!
공간이 찢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적인 힘에 의해 개방되지 않았던 비밀의 공간의 열렸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거대한 구체였다.
신격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면 눈앞에 나타난 구체의 실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있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저 구체가 신격의 응집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힘이라니?!"
그래도 이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대신격과도 마주했던 나다. 그런데 저기, 눈앞에 있는 응집체에서 느껴지는 건 대신격보다 더욱더 아득한 힘이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우주 전체가 작은 구체 안에 응축되어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려나?
[판테온이 외부의 존재에 의해 궤멸되기 직전에 감춰 둔 진혼眞魂 결정체입니다.]
[진혼의 결정체에 담긴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지고왕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지고왕을 상징하는 네 개의 보물을 착용해 진혼의 의식을 거행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저 에너지 덩어리의 목적이 궁금했던 참이었다.
결과는 희소식이었다.
대신격의 존재감을 넘어서는 저 에너지 덩어리를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더는 그들의 공작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 분명했다.
스윽.
공명을 멈춘 광명의 창 브류나크를 오른쪽 허리에 빗겨 메고, 왼쪽에는 태양과 같은 열기를 발산하는 검 클라우 솔라스를, 오른손과 왼손에는 다아다의 가마솥과 대관석 리아 팔을 쥐었다.
[지고왕을 상징하는 네 개 보물이 각각에 깃든 파편을 깨웁니다.]
[빛과 어둠을 다스렸던 유일한 존재, 지고왕 마나난 막 리르의 의식이 깨어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마나난 막 리르? 환웅이 전해준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인데.
「그대가 지고왕에 오르려는 자인가?」
귓가에 파고드는 나직한 의지.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의지의 형상을 말이다.
“마나난 막 리르?”
분명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다.
신격을 이룬 자가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형상, 그것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기이한 형체였다.
아마 그건 네 개의 보물 속에 담긴 과거의 의지가 형상화된 것일 터.
“으음...”
그 형상을 보며 낮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과거의 망령. 하지만 그 형상이 나타난 순간 전해주는 무게감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물론 안개 녀석이나 다른 대신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건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대신격 셋은 실체를 드러낸 상태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고작해야 네 개의 보물에 깃든 과거의 의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희미한 의지만으로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실체는 어떻겠는가.
아마 그가 실체를 보인 것만으로도 웬만한 행성 하나는 가볍게 작살나고 말 것이다.
「기이한 일이로군. 그대는 그분에 의해 태어난 빛과 어둠의 자식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고왕의 보물을 가지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판테온이란 집단 자체가 빛과 어둠의 신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다음 지고왕 또한 당연히 이들 중에서 선별될 것으로 봤겠지.
“애석하게도 빛과 어둠의 신격은 아닙니다만, 제가 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어서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존대가 나왔다.
아무래도 사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도 한몫 했지만, 그,가 전대 지고왕, 그러니까 빛과 어둠의 신격을 다스렸던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하긴 누가 지고왕에 오른다해도 그 자격만 증명한다면 상관이 없겠지. 그렇다면 어디 그대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겠다.」
흡!
갑작스레 파고드는 예리한 느낌에 흠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격적인 행위가 있는 건 아니다. 사방에서 나를 노려보는 것과 같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랍군!」
“그렇죠? 제가 또 잠재력 하나는...”
「아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한참 수준 미달이어서 놀랐다는 말이다.」
“에?”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나를 거쳐갔던 모든 존재가 내 잠재력을 찬양했는데?
「어떻게 이 정도의 수준 미달의 존재에게 지고왕의 보물이 넘어갈 수 있지. 도대체 다른 빛과 어둠의 자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 정도면 개탄하는 수준이다.
거의 뭐 나를 듣보잡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이건 볼 필요도 없군. 안타깝게도 그대는 지고왕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이. 내가 남긴 보물의 사용을 불허한다.」
마나난 막 리르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지고왕을 상징하는 네 개 보물이 당신을 새로운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고왕의 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진혼의 결정체를 흡수할 수 없습니다.]
[더욱 성장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회는 개뿔.
내게 다음 기회를 노릴 시간과 기회는 없다.
[더 미스트 네임리스가 천궁회의를 발의했습니다.]
[회의의 안건은 ‘무법지대 지구의 완전 소멸’입니다.]
[안건이 통과되면 지구는 ‘소멸의 각인’을 통해 모든 외부의 존재가 제약없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더 미스트 네임리스 휘하의 그레이트 올드 원이 찬성을 표했습니다.]
[크삭스클루트 및 휘하의 엘더 갓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다크니스 및 휘하의 아우터 갓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했습니다.]
[더 미스트 네임리스가 모호한 답변이 아닌, 확실한 답변을 원합니다.]
그건 조금 전부터 나를 초조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계속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 알림.
빌어먹을 안개 녀석의 행동은 빨랐다.
지구에서 내게 창피를 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녀석은 고대의 맹약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나의 안건을 발의했다.
아주 끝장을 내기 위한 지구의 완전 소멸. 그리고 지금 이 안건에 대한 투표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실 안건이 통과되는 건 시간 문제다.
이 안건을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크삭스클루트와 다크니스. 녀석들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의 대화를 통해 니알라토텝에게 진 빚을 모두 청산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라이벌 관계라 해도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는 법.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고작해야 작은 행성 하나다. 그 행성을 파괴하는데 굳이 반대 입장을 고수할 이유는 없었다.
괜한 경쟁 심리 때문에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곧 안건이 통과될 테고 지구는 녀석들에게 먹히고 말 것이다.
그 비극적인 결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판테온의 마지막 정수, 진혼의 결정체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더욱더 정진하여 지고왕의 위에 어울리는 자격을 손에 넣어라. 지금은 그때가 아니니. 나는 이만 물러나도록...」
“잠깐!”
전대 지고왕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사정한다 해도 그대는 지고왕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물론 그렇겠지.
대신격. 특히 빛과 어둠을 모두 다스렸던 전대 지고왕이라면 내 능력을 형편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제가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죠. 제 능력이 안 된다면 다른 능력이라도 빌릴 수밖에요.”
내 능력이 모자르다면 다른 능력을 끌어오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게 무슨...?」
“이런 뜻입니다.”
스윽!
날카로운 브류나크의 날을 이용해 손아귀를 베었다.
아무리 내 육신이 단단해졌다고 하지만 브류나크의 예리함을 감당할 수 없는 법.
뚝뚝.
손아귀를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물론 내 핏방울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왼손으로 받쳐든 녹색 표지의 책, 네크로노미콘 위였다.
[주인의 상태를 감지한 네크로노미콘, 시작의 장이 절정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네크로노미콘, 시작의 장에 깃든 전지전능한 존재가 불경한 언어를 중얼거립니다.]
[RA!]
의미를 알 수 없는 언령이 울려퍼진 그 순간.
“우왓?!”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육신을, 아니 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당신에게 전지전능한 존재의 위업이 새겨집니다.]
[일시적으로 전지전능의 위를 계승했습니다.]
[‘일시적인 위업 : 전지전능’을 획득했습니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는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전지전능의 위업을 이뤘다.
「맙소사!」
그와 함께 마나난 막 리르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업은 무엇인가? 이건 아무리 보도 그분의...」
당황하는 전대 지고왕.
하지만 그의 당황은 거짓말처럼 금방 사라졌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의지라면 기꺼이...」
마치 뭔가를 깨달은 듯한 중얼거림. 하지만 내가 숨겨진 그이 의도를 파악하는 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정하겠다. 그대야말로 나의 뒤를 이을 지고왕. 판테온을 다스리는 두 번째 지고왕이니라!」
번쩍!
마나난 막 리르의 인정을 얻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모든 판테온의 구성원이 소멸한 상태. 판테온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해봐야 득 될 게 없는 게 사실이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말이야.”
단 한 가지. 지고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라면 외부의 존재에 의해 궤멸된 판테온의 마지막 정수, 진혼의 결정체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즈아!”
망설일 것 없었다.
네 개의 보물에 깃든 지고왕의 권능을 발현했고.
휘이이잉!
아무런 반응도 없던 진혼의 결정체가 내게 응답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으읍!”
진혼의 결정체가 내게 힘을 전해준다.
그건 판테온에 소속되어 있었던 모든 신격이 남긴 거대한 힘. 순식간에 내 안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진행된 진혼의 결정체 흡수율은 5%입니다.]
[주의하십시오. 당신의 그릇으로는 진혼의 결정체를 모두 흡수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흡수를 포기하게 되면 남아 있는 진혼은 흩어지게 됩니다.]
미친! 이렇게 중요한 사안은 진즉 말해줬어야지.
방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선택해야만 하다.
이대로 무리하게 흡수를 진행해 폭사하느냐.
아니면 약간의 전력 상승에 위안하며 멈추느냐.
사실상 선택의 기회는 없다. 죽기 싫으면 지금 당장 의식을 멈춰야만 했다.
“씨발, 전지전능한 양반아. 뭐하고 있어. 이럴 때 좀 도와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지면에 놓인 네크로노미콘을 향해 처절하게 외쳤다.
[GAGAGA!]
[네크로노미콘, 시작의 장에 깃든 전지전능한 존재가 큰 소리로 웃습니다.]
효과는 굉장했다!
부우웅!
내 그릇이 커지는 것을,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이 무엇이냐?
[현재 진행된 진혼의 결정체 흡수율은 10%입니다.]
[당신은 진혼의 결정체를 100% 흡수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느낄 수 있다.
무한한 힘을 흡수해 내 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더 미스트 네임리스가 발의한 안건, 무법지대 지구의 완전 소멸이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지구에 소멸의 각인이 새겨집니다.]
[소멸 작업을 위한 천궁의 화살이 발사됩니다.]
예상했던 결과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그 안건의 통과에 별반 감흥이 없다.
“소멸은 개뿔!”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지구의 소멸은 없을 것이다.
콰콰콰콰!
나는 내 안에 잠든, 조금 전 흡수한 진혼의 힘을 최대한 방출했다.
[축하합니다. 승리의 신 이연우가 대신격을 이루었습니다.]
[지구가 대신격의 의지에 따라 강력한 요새로 변화합니다.]
펑!
천궁의 화살인가 뭔가가 지구와 충돌했다.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건 작은 폭발음 뿐. 녀석들이 원했던 지구의 소멸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