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썩은물은 요그 소토스를 소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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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에 반응한 소원의 돌은 형태가 바뀌어 있었다.
작은 별 모양의 목걸이는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곳에 자리한 건 성인의 손바닥을 덮을 정도의 책,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녹색 표지의 책이었다.
뚝!
네크로노미콘이라 불리는 책이 완전한 형체를 이룬 순간, 세계의 시간이 정지했다.
정면을 바라본다.
"..."
움직임은 없다.
완전한 강림을 이루어 절대적인 권능을 발휘하는 글라키의 시간마저도 빼앗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스스스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치 회색 물감을 부어버린 것처럼 세계가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세계는 회색으로 물들었고, 이 회색의 세계에서 움직이거나 사고할 수 있는 건 내가 유일했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을 품은 채 글라키에게 다가갔다.
멈춰진 시간에서라면 손쉽게 글라키를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녀석을 공격하겠다는 의지가 일지 않는다.
아마도 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었다.
웅웅웅!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황급히 그곳을 바라봤다.
소월의 돌, 아니 이제는 네크로노미콘이라는 명칭을 가진 책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녹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더 필요하다는 거지?”
신기하게도 무생물에 불과한 책에서 어떤 의지가 느껴진다.
피. 내 피가 더 필요하다며 녀석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오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이제는 이 신비한 책에 의존할 수밖에.
조금 전 바리사다로 그어버렸던 손에 네크로노미콘을 쥐었다.
화아악!
떨림과 광채가 더욱더 짙어져 일대를 녹광으로 물들였다.
[심연의 나락에 갇힌 전지전능한 존재가 불경한 언어를 내뱉습니다.]
「N!」
쿠웅!
그 순간 단단한 망치로 머리를 강타한 듯 엄청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주르륵.
이마와 등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땀이 흘러내린다.
그 느낌은 뭐랄까.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마 보통의 사람이 그 언어를 들었다면 바로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조금 전 들은 음성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불경한 언어에 반응한 기어다니는 혼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익숙한 존재의 등장을 알렸다.
“마, 맙소사!”
하지만 그건 예상했던 등장이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택받은 이여.」
기운으로만 느낄 수 있었던 무형의 존재.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어다니는 혼돈이라는 수수께끼의 존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전지전능한 분의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아니 왜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지?
모습을, 형체를 드러냈다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전체적인 형체는 보인다.
검은색 정장과 흰 와이셔츠를 입은, 흡사 일반 회사원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얼굴이 없다.
귀신처럼 얼굴이 없는 게 아니라 황금색 물음표로 가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웃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은 것에 의문을 느꼈던 것.
「비록 그분의 명이 있었다지만, 미약한 언령을 통해서 소환된 터라 아직 실체를 드러낼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제 진명을 밝힐 수도 없으니 선택받은 이께서 양해해 주시길.」
뭐, 실체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난 기어다니는 혼돈. 녀석에게 물을 말이 많다.
“아…"
하지만 입을 떼려고 해도 좀처럼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 내 의지를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 저 또한 선택 받은 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그분의 미약한 힘으로는 제한이 많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허락된 시간 또한 많지 않으니 지금은 그저 제 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어쩐지 너무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내 목적은 궁금증을 푸는 게 아니라 저기, 저 개새끼. 글라키를 처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내 마음을 읽은 그가 글라키를 응시했다.
「글라키라. 생긴 것도 흉측한 게 아주 볼품없는, 저급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죠.」
사아아.
글라키를 향한 그의 적의와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의외다. 같은 관람자, 동족이 아니었나?
「동족이라니요. 이 저급한 녀석과 저를 같은 선상에 놓는 것만으로도 무척 불쾌합니다. 저는 녀석을 혐오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혼돈의 시대에 태어난 모든 존재를 혐오하는 것이겠죠. 녀석들은 저급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니 말입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글라키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좋지는 않다.
녀석이 말하는 저급하고 불쾌한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빌려야 한다니.
그래도 인류의 수호신, 마지막 희망이라고 불리는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다.
「흠흠. 물론 저급한 녀석들이긴 하지만, 아직 선택받은 이께서는 상대하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오. 때가 되면 선택받은 이께서도 그들을 하찮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황급히 나를 위로한다.
물론 어르고 달래려는 녀석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턱이 없다.
「이런! 사족이 길어지고 말았군요. 처음으로 선택받은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말이죠.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글라키를 향해 악의적인 비난을 쏟아내던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글라키를 상대할 힘이 필요하십니까?」
굳이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할까?
아, 원하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녀석이 직접 나서서 녀석을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어다니는 혼돈의 힘이 글라키보다 약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놓고 녀석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은연중 느껴지는 그의 직위는 대단히 높은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불가합니다.」
하지만 기어다니는 혼돈은 단호했다.
「거절이 아닙니다. 송구스럽게도 지금 전 본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모두? 사실 그 말도 웃기는군요. 제대로 된 존재도 드러내지 못하는 판국에 무슨 힘을 낼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종의 이유로 힘의 제한을 받은 듯.
「하지만 실망하지 마십시오. 네크로노미콘, 전지전능한 그분의 성전이 있는 이상 부족한 저보다 더욱 도움이 되는 존재를 부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부를 수 있다고?
그럼 이 네크로노미콘이라는 게 관람자와 같은 존재를 소환하는 용도인가?
「하하. 소환하는 용도라. 뭐, 그런 권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분명 무어라 말을 하고 있으나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와 같아서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죄송합니다. 이제 더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군요.」
딱!
정작 중요한 부분은 암호로만 중얼거리던 녀석이 손가락을 튕겼고.
[네크로노미콘, 시작의 장의 봉인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태초의 비밀을 간직한 네크로노미콘을 열어보십시오. 질서의 시대에 살았던 강력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한 기운만 흘려내던 네크로노미콘의 기능이 일부 되살아났다.
「전지전능한 그분의 명으로 성전의 기능을 일부 복원했습니다. 아직은 하찮기 그지없는 능력이나 저급한 존재를 상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네크로노미콘을 사용하게 되면 글라키를 상대할 대단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간단합니다. 성전을 펼치는 순간 혼돈의 소용돌이에 잠들어 있던 존재를 깨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존재가 어떤 존재가 될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만...」
어?
기어다니는 혼돈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더는 존재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선택받은 이여. 부디 험난한 시련과 여정을 거쳐 그분의 유지를 이을 수 있기를...」
마지막 말을 전한 그의 존재가 자취를 감추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 기대하는 바가 컸으나 별달리 대단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던 아니다.
장식품에 불과했던 네크로노미콘, 이 수수께끼의 서적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망설일 것 없다.
지금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무기, 네크로노미콘을 펼쳤다.
휘오오오!
펼쳐진 책에서 보이는 건 칠흑에 물든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마치 나를 빨아당기는 듯한 소용돌이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을 무렵.
[심연의 깊은 곳,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그곳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혼돈의 소용돌이가 열렸습니다.]
[만물의 옥좌에 앉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네크로노미콘, 시작의 장에 깃든 소환의 권능이 발현됩니다.]
[혼돈의 소용돌이에 잠들어 있는 잊힌 존재를 깨웁니다.]
[당신의 인연을 통해 소환 대상을 선정합니다.]
[검색 중,..]
인연?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기어다니는 혼돈과의 인연을 탐지했습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 소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하!
뒤늦게야 그 인연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접촉한 관람자들과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리라.
긍정적인 영향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의 존재를 빼먹을 수 없다.
[르뤼에의 주인 크툴루와의 인연을 탐지했습니다.]
[르뤼에의 주인 크툴루가 소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가산 점수가 부여되어 긍정적인 존재의 소환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과정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네크로노미콘이라는 책은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
알림을 통해 파악한 건 내게 긍정적인 녀석이 소환될 수도 있지만, 적대적인 녀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이번 소환은 나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지는 않다.
다행한 일이다. 만약 내게 적대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면 글라키와 함께 아주 아작이 나버렸을 테니까.
쿠쿵, 쿠쿠쿠쿵!
펼쳐진 네크로노미콘 속, 혼돈의 소용돌이가 격하게 휘몰아치며 마침내 하나의 기운을 뱉어냈다.
파앙!
소환이 이루어진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세계여, 본좌의 사육장이 되어라!」
이번에는 녀석도 시간이 멈춘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환희에 젖은 녀석이 마구잡이로 기운을 발산해 세계를 자신의 기운으로 오염시킨다.
「크하하하... 으응?」
벅찬 기쁨에 물들어 있었던 녀석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행동을 멈춘다.
경악에 물든 눈동자가 향한 곳은 거대한 몸체의 바로 아래.
칠흑의 눈동자에 감정이라는 게 깃든다.
「다, 다, 다, 당신은...?」
당혹과 경악. 장담하건대 녀석은 지금 탄생한 이래로 가장 놀라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나다 이 새끼야.」
네크로노미콘에서 튀어나온 존재. 그것은 앙증맞기 그지없는 눈알 괴물이었다.
하지만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사나운 힘을 감지한다면 감히 귀엽다는 생각을 품을 수 없을 터.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경계에 잠복한 자 요그 소토스가 소환되었습니다.]
[요그 소토스는 당신에게 매우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뤼에의 주인 크툴루. 잊힌 왕이라 불린 그의 할아버지가 손수 마중을 나오셨다.